흉노가 마읍(馬邑)에서 전투를 벌인 뒤 한나라와의 화친을 끊고 자주 공격하였으나 관시를 통해 교류를 지속함
한나라가 마읍(馬邑)
주 001사람인 섭옹일(聶翁壹)
주 002을 시켜 [금령을 어기고] 몰래 국경을 넘어 물자를 내어주 003흉노와 교역을 하게 했는데, [섭옹일이] 마읍성을 파는 것처럼 해서 선우를 유인하도록 했다.주 004
각주 004)
선우가 [이를] 믿고 마읍의 재물을 탐내 10만의 기병을 이끌고 무주[현](武州縣)
주 005의 요새로 들어왔다. 한나라에서는 30여만의 [병력을] 마읍 근방에 숨겨두고 어사대부주 006馬邑의 聶壹이 벌인 匈奴 유인 술책에 대한 내용은 「韓安國列傳」에 소개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雁門郡 馬邑의 호족 攝壹이 大行王 恢를 통해 皇帝께 아뢰었다. “우리 변방 사람들이 匈奴와 잘 화친하고 있는데다 그들도 우리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익을 미끼로 그들을 유인할 수 있겠는데……” 그들의 속마음을 떠볼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기에 좋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聶翁壹을 간첩으로 삼아 匈奴로 도망해 들어가게 했다. 攝壹은 單于를 만나서 말했다. “제가 馬邑의 縣令과 縣丞과 관리들을 벤 뒤 城邑을 가진 채로 투항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곳의 재물을 몽땅 차지할 수 있을 텐데 어떻습니까?” 單于는 攝壹이 마음에 들었고 또한 그를 믿었으므로 곧 허락을 내렸다. 그래서 攝壹은 다시 馬邑으로 돌아와 사형수의 머리 몇 개를 베어 馬邑 성벽에다 내걸었다. 그리고 선우의 사자에게 귀띔했다. “보다시피 馬邑의 長吏들을 모조리 베어 죽였으니 바삐 달려가 내침해 오도록 일러 주시오.”(『漢書』 권52 「竇田灌韓列傳」 : 2403~4).
雁門郡 馬邑의 호족 攝壹이 大行王 恢를 통해 皇帝께 아뢰었다. “우리 변방 사람들이 匈奴와 잘 화친하고 있는데다 그들도 우리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익을 미끼로 그들을 유인할 수 있겠는데……” 그들의 속마음을 떠볼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기에 좋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聶翁壹을 간첩으로 삼아 匈奴로 도망해 들어가게 했다. 攝壹은 單于를 만나서 말했다. “제가 馬邑의 縣令과 縣丞과 관리들을 벤 뒤 城邑을 가진 채로 투항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곳의 재물을 몽땅 차지할 수 있을 텐데 어떻습니까?” 單于는 攝壹이 마음에 들었고 또한 그를 믿었으므로 곧 허락을 내렸다. 그래서 攝壹은 다시 馬邑으로 돌아와 사형수의 머리 몇 개를 베어 馬邑 성벽에다 내걸었다. 그리고 선우의 사자에게 귀띔했다. “보다시피 馬邑의 長吏들을 모조리 베어 죽였으니 바삐 달려가 내침해 오도록 일러 주시오.”(『漢書』 권52 「竇田灌韓列傳」 : 2403~4).
각주 006)
한안국(韓安國)
주 007御史大夫 : 관직 명칭으로 秦나라 시기에는 御史였다. 이후에 명칭이 바뀌어 중앙의 관직이 되었다. 漢代에는 이를 그대로 계승하였는데, 丞相의 다음 지위에 해당했다. 秩이 中二千石이었다. 제도적으로 丞相은 金印紫綬를, 御史大夫는 銀印青綬를 갖고 있었다. 관위가 丞相에 비해 낮지만 御史大夫는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국가의 모든 정무가 丞相府와 御史府에 귀속되어 있었고, 당시 두 개의 府가 병칭되었기 때문이다. 御史大夫는 내적으로 本朝의 風化를 잇고, 밖으로는 丞相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을 돕는 등 그가 맡은 임무가 막중하였다.
각주 007)
을 호군장군(護軍將軍)주 008으로 삼아 네 명의 장군주 009을 통솔하여 [복병을 두어] 선우를 숨어서 기다렸다. 선우가 이미 국경에 돌입해 마읍으로부터 백여 리 떨어져 있는 곳에 왔다가 들판에 가축들이 가득 널려 있으나 목자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바로 정장(亭障)주 010을 공격했다. 이때 안문위사(雁門尉史)주 011가 장성을 순시하다가 [선우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 정(亭)을 지키게 되었는데, 선우가 [그를] 잡아 베고자 했다. 위사가 한나라 군대의 계획을 알고 있다가 죽이려고 하자주 012선우에게 [한나라 군대가 있는 곳을] 모두 고했다.주 013선우가 크게 놀라 “나는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바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국경을] 벗어나면서 말하였다. “내가 위사를 잡은 것은 하늘[天]의 뜻이다.”주 014[그래서] 위사를 ‘천왕(天王)’이라 했다. [한편] 한나라 군대는 선우가 마읍에 들어오면 군사를 내어 [선우를] 치려고 약속했으나 선우가 오지 않자 한나라 군사들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한나라의 장군 왕회(王恢)
주 015의 부대는 대[군]에서 나와 흉노의 치중(輜重)부대주 016를 치기로 되어 있었는데 선우가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의 숫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나가 [공격하지] 못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왕]회가 원래 이번의 계략을 세웠는데 나아가 공격하지 못하자 [왕]회를 참했다.주 017그 이후로주 018흉노는 화친을 끊고 [연결] 도로에 있는 요새를 공격했고, 왕왕 한나라의 변경으로 들어와 도둑질하는 것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흉노는 탐욕스럽게 여전히 관시를 좋아해 한나라의 재물을 밝히니주 019한나라에서도 또한 관시를 열고 끊지 않음으로써 [흉노의 비위를] 맞추었다.주 020
韓安國 : 字는 長孺로 梁나라 成安(지금의 河南省 동부) 사람이다. 韓非子와 雜家의 학설을 騶 땅의 田先生에게서 사사받은 다음에 梁孝王의 中大夫가 되었다. 吳楚七國의 반란 시기에 梁나라의 將이 되어 반란 진압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 이후에 죄를 지어 죄인이 되었다가 梁王의 2,000석의 봉록을 받는 內史가 되었다. 梁의 孝王이 죽고 共王이 즉위한 이후에 은퇴했다가 武帝時期에 田蚡이 太衛가 되었을 때 北地郡의 都尉가 되었다가 大司農이 되었다. 田蚡이 丞相일 때에 安國이 御史大夫가 되어 匈奴와의 화친을 주장하였다. 이후 馬邑에서 匈奴를 치려는 계획에 참가하여 護軍將軍으로 작전을 지휘했다. 御史大夫가 된 지 4년 후에 丞相 田蚡이 죽자 丞相 대행을 하던 중 皇帝가 行幸할 때 先導 수레를 지휘하다가 그만 떨어져 다리를 다쳤다. 그를 丞相으로 임명하려고 했으나 다리를 몹시 절어 皇帝는 할 수 없이 平棘侯 薛澤을 丞相으로 삼았다. 결국 丞相이 못되고 사직했다가 다시 中尉로 복직되어 衛尉로 승진했다. 衛靑이 雁門에서 匈奴를 치려고 할 때 材官將軍으로 漁陽에 주둔했다. 하지만 匈奴의 공격을 받아 패전하였다가 문책당해 右北平(河北省 東北部와 熱河省 南部)에 주둔하는 등 좌천하고 울분을 참지 못하다가 元朔 2년(전127)에 죽었다(『漢書』 권52 「竇田灌韓列傳」 : 2394).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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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馬邑의 聶壹이 벌인 匈奴 유인 술책에 대한 내용은 「韓安國列傳」에 소개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雁門郡 馬邑의 호족 攝壹이 大行王 恢를 통해 皇帝께 아뢰었다. “우리 변방 사람들이 匈奴와 잘 화친하고 있는데다 그들도 우리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익을 미끼로 그들을 유인할 수 있겠는데……” 그들의 속마음을 떠볼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기에 좋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聶翁壹을 간첩으로 삼아 匈奴로 도망해 들어가게 했다. 攝壹은 單于를 만나서 말했다. “제가 馬邑의 縣令과 縣丞과 관리들을 벤 뒤 城邑을 가진 채로 투항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곳의 재물을 몽땅 차지할 수 있을 텐데 어떻습니까?” 單于는 攝壹이 마음에 들었고 또한 그를 믿었으므로 곧 허락을 내렸다. 그래서 攝壹은 다시 馬邑으로 돌아와 사형수의 머리 몇 개를 베어 馬邑 성벽에다 내걸었다. 그리고 선우의 사자에게 귀띔했다. “보다시피 馬邑의 長吏들을 모조리 베어 죽였으니 바삐 달려가 내침해 오도록 일러 주시오.”(『漢書』 권52 「竇田灌韓列傳」 : 2403~4).
-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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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御史大夫 : 관직 명칭으로 秦나라 시기에는 御史였다. 이후에 명칭이 바뀌어 중앙의 관직이 되었다. 漢代에는 이를 그대로 계승하였는데, 丞相의 다음 지위에 해당했다. 秩이 中二千石이었다. 제도적으로 丞相은 金印紫綬를, 御史大夫는 銀印青綬를 갖고 있었다. 관위가 丞相에 비해 낮지만 御史大夫는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국가의 모든 정무가 丞相府와 御史府에 귀속되어 있었고, 당시 두 개의 府가 병칭되었기 때문이다. 御史大夫는 내적으로 本朝의 風化를 잇고, 밖으로는 丞相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을 돕는 등 그가 맡은 임무가 막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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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韓安國 : 字는 長孺로 梁나라 成安(지금의 河南省 동부) 사람이다. 韓非子와 雜家의 학설을 騶 땅의 田先生에게서 사사받은 다음에 梁孝王의 中大夫가 되었다. 吳楚七國의 반란 시기에 梁나라의 將이 되어 반란 진압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 이후에 죄를 지어 죄인이 되었다가 梁王의 2,000석의 봉록을 받는 內史가 되었다. 梁의 孝王이 죽고 共王이 즉위한 이후에 은퇴했다가 武帝時期에 田蚡이 太衛가 되었을 때 北地郡의 都尉가 되었다가 大司農이 되었다. 田蚡이 丞相일 때에 安國이 御史大夫가 되어 匈奴와의 화친을 주장하였다. 이후 馬邑에서 匈奴를 치려는 계획에 참가하여 護軍將軍으로 작전을 지휘했다. 御史大夫가 된 지 4년 후에 丞相 田蚡이 죽자 丞相 대행을 하던 중 皇帝가 行幸할 때 先導 수레를 지휘하다가 그만 떨어져 다리를 다쳤다. 그를 丞相으로 임명하려고 했으나 다리를 몹시 절어 皇帝는 할 수 없이 平棘侯 薛澤을 丞相으로 삼았다. 결국 丞相이 못되고 사직했다가 다시 中尉로 복직되어 衛尉로 승진했다. 衛靑이 雁門에서 匈奴를 치려고 할 때 材官將軍으로 漁陽에 주둔했다. 하지만 匈奴의 공격을 받아 패전하였다가 문책당해 右北平(河北省 東北部와 熱河省 南部)에 주둔하는 등 좌천하고 울분을 참지 못하다가 元朔 2년(전127)에 죽었다(『漢書』 권52 「竇田灌韓列傳」 : 2394).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 각주 018)
- 각주 019)
- 각주 020)
색인어
- 이름
- 섭옹일(聶翁壹), 섭옹일, 한안국(韓安國), 왕회(王恢), 왕]회, [왕]회
- 지명
- 한나라, 마읍(馬邑), 마읍, 무주[현](武州縣), 한나라, 마읍, 마읍,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마읍, 한나라, 한나라, 대[군],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