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몽(唐蒙)이 파촉(巴蜀)과 함께 야량(夜郞)을 개통하고 군현을 설치함
건원(建元) 6년(전135)에 대행(大行)주 001
왕회(王恢)
주 002가 동월(東粤)을 공격하자, 동월은 그 왕 영(郢)을 죽여 [항복의 의사를] 알렸다. 왕회는 군사적 위세를 바탕으로 파양령(番陽令) 당몽(唐蒙)을 보내 남월(南粤)을 넌지시 일러 깨우치게 하였다.주 003
남월이 당몽에게 촉에서 나는주 004
각주 004)
구장(枸醬)을 대접하였다. 당몽이 들여온 곳을 물으니, 말하기를, “서북쪽 장가강(牂柯江)을 통하여 오는데,주 005강은 너비가 수 리(里)이며, 번우성(番禺城)
주 006아래로 나옵니다”라고 하였다. 당몽이 돌아와 장안(長安)에 이르러 촉(蜀)에서 온 상인에게 [그 사정을] 물으니, 오직 촉 지방에서만 구장이 나는데, 대부분 몰래 가지고 나가서 야랑(夜郞)에 판다고 하였다. 야랑은 장가강 가에 있는데, 그 강의 너비가 100여 보(步)로 족히 배를 띄울 만하다고 하였다. (또) 남월은 재물을 가지고 야랑을 역속(役屬)하여 [그 영향력이] 서쪽으로 동사(桐師)에 이르지만, 신하로 부리지는 못 한다고 하였다. 당몽이 이를 바탕으로 상서(上書)하여 처자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남월왕은 황옥좌독(黃屋左纛)의 제도를 시행하고,주 007[다스리는] 땅은 동서 만여 리(里)라 하니, 이름은 외신(外臣)주 008이로되, 실은 한 주(州)주 009의 주인(主人)입니다. 지금 장사(長沙)
주 010와 예장(豫章)
주 011을 통해 가면, 물길이 끊기는 경우가 많아 가기 어렵습니다. 제가 듣건대, 야랑이 보유한 정예 군사가 10여만은 족히 된다고 하니, 장가강에 배를 띄워 불시에 [군대를] 내보내는 것이 월(越)을 제압할 수 있는 하나의 기책(奇策)입니다. 진실로 한(漢)의 강성함과 파촉(巴蜀)의 넉넉함이라면, 야랑(夜郞)에 이르는 길을 개통하여 [군현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는 것(置吏)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라고 하니, 천자가 그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당몽을 낭중장(郞中將)에 제수(除授)하여 천 인의 군사와 보급부대주 012만여 인을 이끌고 파(巴)의 작관(筰關)[符關]주 013으로부터 들어가게 하니, 마침내 야랑후(夜郞侯) 다동(多同)
주 014을 만났다. 당몽이 하사품을 넉넉하게 내리고, 군사적 위협과 외교적 이득으로써 타이르고 훈계하니 [군현을 설치하여] 관리를 두기로 약(約)을 맺고, 야랑후의 아들을 현령(縣令)으로 삼도록 하였다.주 015
야랑 주변의 작은 읍(邑)들이 모두 한(漢)나라의 증백(繒帛)을 탐하였는데, 한(漢)나라에 이르는 길이 험하여 끝내 얻을 수 없으리라 여기고, 결국 오래지 않아 곧 당몽의 약(約)을 받아들였다. 귀환하여 보고하니, 곧 건위군(犍爲郡)
주 016으로 삼았다. 파와 촉의 군사들을 징발하여 길을 닦았는데, 북도(僰道)주 017에서 장가강으로 향하였다. 촉 출신인 사마상여(司馬相如)
주 018枸醬 : 晉代 사람으로 『漢書音義』를 지은 晉灼이 말하기를, “枸의 音은 矩이다”라고 하였다(晉灼曰, “枸音矩,”). 劉德이 말하기를, “枸樹는 뽕나무 같이 생겼는데, 그 오디의 길이가 2,3촌쯤 되며, 맛이 시다. 그 열매를 취하여 醬을 담그면 맛이 있는데, 蜀 지역 사람들이 珍味로 여긴다”라고 하였다(劉德曰, “枸樹如桑, 其椹長二三寸, 味酢. 取其實以爲醬, 美, 蜀人以爲珍味.”). 師古가 말하기를, “劉德이 說은 그르다. 열매의 모양이 뽕나무의 오디처럼 생겼을 뿐이다. 木에서 나므로, 樹가 아니다. 열매 또한 길이가 2,3촌까지 되지 않으며, 맛은 또 맵지 시지는 않다. 오늘날의 宕渠에 가면 얻을 수 있다. 食은 飤로 읽어야 한다”라고 하였다(師古曰, “劉說非也. 子形如(赤)[桑]椹耳. 緣木而生, 非樹也. 子又不長二三寸, 味尤辛, 不酢. 今宕渠則有之. 食讀曰飤.”).
각주 018)
또한 말하기를, 서이(西夷)의 공(邛)과 작(筰)은 군(郡)을 설치할 만하다고 하였다. 사마상여를 낭중장(郞中將)주 019司馬相如(전179? ~ 전117) : 字는 長卿이며, 현재의 四川省 南充 蓬安 출신이다. 辭와 賦로 유명하며, 景帝時에 재물을 바쳐 郞이 되었고 武騎常侍를 맡았으나, 景帝가 사부를 좋아하지 않는데다, 마침 입조한 사부를 좋아하는 양왕을 수종한 枚乘․鄒陽 등과 어울리게 되자 사직하고 양으로 갔다. 枚乘․鄒陽 등과 어울리면서 「子虛賦」를 지었다. 이후 귀향하여 임공에서 거부 卓王孫의 딸과 결혼하여 부자가 되었다. 漢武帝가 卽位 후에 「子虛賦」를 보고 크게 기뻐하자, 狗監 楊得意의 推薦으로 다시 입궐하게 된다. 司馬相如는 漢武帝를 위하여 「上林賦」를 지었다. 이후 본문에 보이는 바와 같이 郎中將(中郞將)으로서 西夷道 개통에 종사하게 된다.
각주 019)
으로 삼아 가서 깨우치게 하니, 모두 남이(南夷)처럼 하였다. 도위(都尉)주 020하나와 10여 현(縣)을 설치하여 촉군(蜀郡)에 속(屬)하게 하였다.郞中將 : 『漢書』 「百官公卿表」에 따르면, “郞은 [궁 안에서는] 門戶를 지키고 [황제의] 외출시에는 車騎를 지키는 일을 맡는다. [그 종류에는] 議郞․中郞․侍郞․郞中이 있고, 모두 定員이 없으며, 많으면 千명에 이른다. 議郞․中郞은 秩이 比六百石이고, 侍郞은 比四百石이며, 郞中은 比三百石이다(『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 第7上, 727쪽).” 『考證』에 따르면, 「司馬相如傳」에서는 郞中將을 中郞將이라 적었다(瀧川資言, 1935 : 4696)고 했는데, 낭중장은 ‘郎中의 將’으로, 중랑장은 ‘中郞의 將’으로 푸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듯하다. 『漢書』 「百官公卿表」에 따르면, 平帝 元始 元年(후 1년) 謁者의 명칭을 虎賁郞으로 바꾸고, 中郞將을 두었으며, 秩이 比二千石이라 하였는데(『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 第7上, 727쪽), 이 중랑장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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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枸醬 : 晉代 사람으로 『漢書音義』를 지은 晉灼이 말하기를, “枸의 音은 矩이다”라고 하였다(晉灼曰, “枸音矩,”). 劉德이 말하기를, “枸樹는 뽕나무 같이 생겼는데, 그 오디의 길이가 2,3촌쯤 되며, 맛이 시다. 그 열매를 취하여 醬을 담그면 맛이 있는데, 蜀 지역 사람들이 珍味로 여긴다”라고 하였다(劉德曰, “枸樹如桑, 其椹長二三寸, 味酢. 取其實以爲醬, 美, 蜀人以爲珍味.”). 師古가 말하기를, “劉德이 說은 그르다. 열매의 모양이 뽕나무의 오디처럼 생겼을 뿐이다. 木에서 나므로, 樹가 아니다. 열매 또한 길이가 2,3촌까지 되지 않으며, 맛은 또 맵지 시지는 않다. 오늘날의 宕渠에 가면 얻을 수 있다. 食은 飤로 읽어야 한다”라고 하였다(師古曰, “劉說非也. 子形如(赤)[桑]椹耳. 緣木而生, 非樹也. 子又不長二三寸, 味尤辛, 不酢. 今宕渠則有之. 食讀曰飤.”).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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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相如(전179? ~ 전117) : 字는 長卿이며, 현재의 四川省 南充 蓬安 출신이다. 辭와 賦로 유명하며, 景帝時에 재물을 바쳐 郞이 되었고 武騎常侍를 맡았으나, 景帝가 사부를 좋아하지 않는데다, 마침 입조한 사부를 좋아하는 양왕을 수종한 枚乘․鄒陽 등과 어울리게 되자 사직하고 양으로 갔다. 枚乘․鄒陽 등과 어울리면서 「子虛賦」를 지었다. 이후 귀향하여 임공에서 거부 卓王孫의 딸과 결혼하여 부자가 되었다. 漢武帝가 卽位 후에 「子虛賦」를 보고 크게 기뻐하자, 狗監 楊得意의 推薦으로 다시 입궐하게 된다. 司馬相如는 漢武帝를 위하여 「上林賦」를 지었다. 이후 본문에 보이는 바와 같이 郎中將(中郞將)으로서 西夷道 개통에 종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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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9)
郞中將 : 『漢書』 「百官公卿表」에 따르면, “郞은 [궁 안에서는] 門戶를 지키고 [황제의] 외출시에는 車騎를 지키는 일을 맡는다. [그 종류에는] 議郞․中郞․侍郞․郞中이 있고, 모두 定員이 없으며, 많으면 千명에 이른다. 議郞․中郞은 秩이 比六百石이고, 侍郞은 比四百石이며, 郞中은 比三百石이다(『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 第7上, 727쪽).” 『考證』에 따르면, 「司馬相如傳」에서는 郞中將을 中郞將이라 적었다(瀧川資言, 1935 : 4696)고 했는데, 낭중장은 ‘郎中의 將’으로, 중랑장은 ‘中郞의 將’으로 푸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듯하다. 『漢書』 「百官公卿表」에 따르면, 平帝 元始 元年(후 1년) 謁者의 명칭을 虎賁郞으로 바꾸고, 中郞將을 두었으며, 秩이 比二千石이라 하였는데(『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 第7上, 727쪽), 이 중랑장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 각주 020)
색인어
- 이름
- 왕회(王恢), 영(郢), 왕회, 당몽(唐蒙), 당몽, 당몽, 당몽, 당몽, 당몽, 다동(多同), 당몽, 당몽, 사마상여(司馬相如), 사마상여
- 지명
- 남월(南粤), 남월, 촉, 장가강(牂柯江), 번우성(番禺城), 장안(長安), 촉(蜀), 촉, 야랑(夜郞), 야랑, 장가강, 남월, 야랑, 동사(桐師), 장사(長沙), 예장(豫章), 야랑, 장가강, 한(漢), 파촉(巴蜀), 야랑(夜郞), 파(巴), 야랑, 한(漢)나라, 한(漢)나라, 건위군(犍爲郡), 파, 촉, 장가강, 촉, 촉군(蜀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