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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자치통감장편

고려의 내공(來貢) 역사에 관한 증공(曾鞏)의 상주(上奏)

  • 날짜
    1082년 2월 (음)(元豐 5年(1082) 2月 丁卯)
  • 출전
    卷323 元豐 5年(1082) 2月 丁卯
사관수찬(史館修撰) 증공(曾鞏)주 001
각주 001)
曾鞏 : 1019~1083. 북송의 관인. 북송 建昌軍 南豊(현재 江西省에 속한 지역) 사람으로 字는 子固이다. 嘉祐 2年(1057)에 진사가 되어 集賢校理 등을 역임했다. 신종이 즉위한 이후 齊州, 洪州 등의 知州를 역임했다. 元豐 3年(1080)에 直龍圖閣, 勾當三班院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는 史館修撰이 되어 五朝國史 편수를 주관했다. 문장 능력이 뛰어나 당송팔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지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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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했다. “삼가 이전 역사를 살펴보니 고구려는 주몽 시기부터 흘승골성(紇升骨城)을 얻어 거주하며 국호를 고구려라 했고 이로 인해 고씨를 성으로 삼았습니다. 한을 지나 당 고종 시대에 이르자 그 왕 고장(高藏)이 나라를 잃고 국내로 이주했습니다. 성력(聖曆)주 002
각주 002)
聖曆 : 武周 측천황제의 10번째 연호로 698~700년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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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에 고장의 아들 덕무(德武)가 안동도독이 되었고, 그 후에 점차 스스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원화(元和)주 003
각주 003)
元和 : 당 헌종 황제 시기의 연호로 806~820년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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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에 일찍이 악공(樂工)을 바쳤지만, 이때부터 다시 중국을 알현하지 않았습니다. 오대(五代) 동광(同光)주 004
각주 004)
同光 : 후당 장종 황제 시기의 연호로 923~926년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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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성(天成)주 005
각주 005)
天成 : 후당 명종 황제 시기의 연호로 926~930년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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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사이에 고려의 군주 고씨가 다시 내공했는데, 그 이름은 알지 못합니다. 장흥(長興)주 006
각주 006)
長興 : 후당 명종 황제 시기의 연호로 930~933년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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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932)에는 권지국사(權知國事)라 칭한 왕건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받드니 이에 왕건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왕건의 아들 왕무, 왕무의 아들 왕소, 왕소의 아들 왕주, 왕주의 동생 왕치, 왕치의 동생 왕송, 왕송의 동생 왕순이 서로 잇달아 즉위했습니다. 대략 주몽으로부터 고장에 이르기까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1성(姓) 900년이고, 21명의 군주가 이어지다가 나라를 잃었습니다. 그 후에 다시 스스로 국가를 세웠지만 이름 및 세차(世次)가 흥하고 없어진 본말(本末)과 무릇 왕건의 시작은 모두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왕씨는 왕건으로부터 왕주에 이르기까지 4명의 왕이 모두 아들에게 이어졌고 왕치부터 왕순에 이르기까지 3명의 왕은 모두 동생에게 이어졌습니다. 왕순이 천성(天聖) 8年(1030)에 내공한 이후로 희녕(熙寧) 3年(1070)에 현재 왕인 왕휘가 내공하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알현하지 않은 것이 대략 43년입니다. 지금 폐하의 어진 덕, 밝은 지혜, 문무(文武) 및 성교(聲敎)의 성대함이 동쪽으로 바다 밖에 퍼지면서 왕휘가 보낸 사신이 이제 궐 아래로 모였습니다. 대개 고구려는 문자를 아는 나라이니 그 사신은 마땅히 그 국가의 임금이 흥하고 무너지게 된 본말과 이름 및 세차를 알 것이므로 전객(典客)의 신료에게 조서로 타일러서 (다음과 같이) 물어보시기를 청하고자 합니다. ‘덕무로부터 동쪽에 있었는데, 그 이후 어떻게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었는가? 왜 다시 나라를 잃었는가? 일찍이 몇 명의 군주가 이어졌는가? 그 이름과 세차는 헤아릴 수 있지 않은가? 왕건이 흥하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 흥한 것이 왕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왕건의 선대에 이미 흥한 사람이 있는가? 천성에서 희녕까지 43년의 간격이 있고, 왕휘가 다시 중국을 알현하였는데 왕순을 계승하여 즉위한 것인가? 그 중간에 또 왕순을 계승한 자가 있는가? 왕휘는 왕순과 어떤 관계인가?’ 이 말과 같이 한다면 순서를 논할 수 있고, 이전 역사의 누락을 보완하기에 충분합니다. 폐하의 밝은 덕이 만리에 이르러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이전 세대에는 이르지 못했던 자들이 의를 사모하여 조정에 오고 있기 때문에 능히 사이(四夷)의 일을 탐구하여 알게 되면 성교를 입은 자들이 멀어서 여기에 오지 못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조서를 필중연(畢仲衍)주 007
각주 007)
畢仲衍 : 1040~1082. 북송의 관인. 북송 鄭州 管城(현재 河南省 鄭州) 사람으로 字는 夷仲이다. 元豐 3年(1080)에 『中書備對』를 편찬하면서 북송의 각종 典章 제도와 통계 자료들을 수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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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내렸다.
필중연(畢仲衍)은 사신 최사제(崔思齊), 이자위(李子威)와 나눈 말을 와서 상주했는데, 증공(曾鞏)의 논저에서 상세하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기(紀)로 남길 수 있는 것은 신라와 백제에 내란이 일어나 왕건이 마침내 삼한을 통합했고, 고씨의 성을 바꾸었다는 점과 왕송은 왕치의 먼 친족이고 왕휘는 왕순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또 말했다. “고씨의 성력(聖曆), 원화(元和) 연간의 일은 모두 기(紀)에 적혀 있고 삼한 스스로도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화 연간에 두 부류의 악(樂)을 바쳤는데 아마 당악(唐樂)과 향악(鄕樂)일 것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만이(蠻夷)가 중국에 귀부하는 것은 진실로 적지 않은데, 만일 고려처럼 풍속이 문을 숭상하고 국가의 군주가 자못 예의를 알고 있어 비록 멀리 바다 밖에 있더라도 중조(中朝)를 받들고 섬김에 있어 일찍이 조금도 게으르지 않다면 조정은 예우를 내려 모두 제국(諸國)의 위에 놓을 것이다. 최근에 악인(樂人) 10여 명을 바쳤는데, 또 오랑캐의 음악에는 취할만한 것이 없다고 해서 단지 국사를 풍부하게 하고자 할 뿐이다.” 안도 등이 그 국가에 사신으로 나갔을 때, 접대 관원은 상절(上節)과 함께 조정에서부터 서로 허리를 굽혔는데 대개 그 국가의 군주와 안도가 대등한 예를 행했기 때문이었다.

  • 각주 001)
    曾鞏 : 1019~1083. 북송의 관인. 북송 建昌軍 南豊(현재 江西省에 속한 지역) 사람으로 字는 子固이다. 嘉祐 2年(1057)에 진사가 되어 集賢校理 등을 역임했다. 신종이 즉위한 이후 齊州, 洪州 등의 知州를 역임했다. 元豐 3年(1080)에 直龍圖閣, 勾當三班院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는 史館修撰이 되어 五朝國史 편수를 주관했다. 문장 능력이 뛰어나 당송팔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지칭된다. 바로가기
  • 각주 002)
    聖曆 : 武周 측천황제의 10번째 연호로 698~700년에 사용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元和 : 당 헌종 황제 시기의 연호로 806~820년에 사용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同光 : 후당 장종 황제 시기의 연호로 923~926년에 사용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天成 : 후당 명종 황제 시기의 연호로 926~930년에 사용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長興 : 후당 명종 황제 시기의 연호로 930~933년에 사용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畢仲衍 : 1040~1082. 북송의 관인. 북송 鄭州 管城(현재 河南省 鄭州) 사람으로 字는 夷仲이다. 元豐 3年(1080)에 『中書備對』를 편찬하면서 북송의 각종 典章 제도와 통계 자료들을 수집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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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내공(來貢) 역사에 관한 증공(曾鞏)의 상주(上奏) 자료번호 : jt.k_0005_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