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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동이전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함

[정시] 6년(245)에 [관구]검이 다시 그(고구려)를 토벌하였다. 위궁은 재빨리 제가를 거느리고 옥저로 도망쳤다. [관구]검이 장군 왕기를 보내 그(위궁)를 추격하였다. [왕기는] 옥저 천여 리를 지나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렀고, 돌에 새겨 [승전의] 공을 기록하였다. 다시 환도산주 001
번역주 001)
『三國志』 권28, 魏書28 毌丘儉와 『北史』 권94, 列傳82 高麗에는 “刊丸都之山”과 “刊丸都山”으로 나온다. 이와 관련하여 1906년 현재의 길림성 集安市 서쪽 板岔嶺에서 〈毋丘儉紀功碑〉편이 발견되었다. 板岔嶺은 환도산으로 언급되고 있는 환도산성의 배후에 위치한 곳이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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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착해서 불내성이라고 새기고 귀환하였다.주 002
번역주 002)
不耐城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 겨울 10월의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㓛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 〈括地志云 不耐城即國内城也 城累石爲之 此即丸都山與國内城相接 … 〉”와 『한원』 권30, 번이부 고려의 “王頎逐北 銘勳不耐之城〈高麗記曰 不耐城 今名國內城 在國東北六百七十里 本漢不而縣也 漢書地理志 不而縣屬樂浪郡 東部都尉治處 後漢省〉이 참고된다. 이에 대한 사료 해석의 문제는 安鼎福(『東史綱目』 부록 하권 「國內尉那巖城考」), 韓鎭書(『해동역사』 속집 권6, 지리고6 고구려 疆域總論), 三品彰英, 1951이 참조되는데, 끊어 읽기에 따라서 환도산과 불내성의 관계, 기공비의 수 및 위치가 달리 이해된다. 즉 Ⓐ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으로 읽기도 하였고, Ⓑ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과 같이 끊어 읽기도 하였다. 기공비의 건립 위치는 ㉮ 숙신씨 남쪽, ㉯ 환도산, ㉰ 불내성 3곳이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3곳 모두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일부에 해당하는지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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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다시 중국과 통하였다.

  • 번역주 001)
    『三國志』 권28, 魏書28 毌丘儉와 『北史』 권94, 列傳82 高麗에는 “刊丸都之山”과 “刊丸都山”으로 나온다. 이와 관련하여 1906년 현재의 길림성 集安市 서쪽 板岔嶺에서 〈毋丘儉紀功碑〉편이 발견되었다. 板岔嶺은 환도산으로 언급되고 있는 환도산성의 배후에 위치한 곳이다(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바로가기
  • 번역주 002)
    不耐城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 겨울 10월의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㓛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 〈括地志云 不耐城即國内城也 城累石爲之 此即丸都山與國内城相接 … 〉”와 『한원』 권30, 번이부 고려의 “王頎逐北 銘勳不耐之城〈高麗記曰 不耐城 今名國內城 在國東北六百七十里 本漢不而縣也 漢書地理志 不而縣屬樂浪郡 東部都尉治處 後漢省〉이 참고된다. 이에 대한 사료 해석의 문제는 安鼎福(『東史綱目』 부록 하권 「國內尉那巖城考」), 韓鎭書(『해동역사』 속집 권6, 지리고6 고구려 疆域總論), 三品彰英, 1951이 참조되는데, 끊어 읽기에 따라서 환도산과 불내성의 관계, 기공비의 수 및 위치가 달리 이해된다. 즉 Ⓐ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으로 읽기도 하였고, Ⓑ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과 같이 끊어 읽기도 하였다. 기공비의 건립 위치는 ㉮ 숙신씨 남쪽, ㉯ 환도산, ㉰ 불내성 3곳이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3곳 모두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일부에 해당하는지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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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함 자료번호 : jd.k_0008_0054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