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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자치통감장편

고려 사신 입공에 대한 등주(登州)의 보고

  • 날짜
    1014년 10월 (음)(大中祥符 7年(1014) 10月 丁巳)
  • 출전
    卷83 大中祥符 7年(1014) 10月 丁巳
이전에 등주(登州)에서 고려가 사신을 보내 입공했는데 감히 맞이하지 못하고 조정의 명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황제가 재상에게 말하기를,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말했다. 왕단(王旦)이 말하기를, “고려는 오랫동안 조공을 바쳤는데 거란(요)으로 인해 두절되었습니다. 지금 모름지기 그들이 궁에 이르도록 허락해도 거란(요)은 반드시 감히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사신이 고려를 떠나도 거란(요)은 반드시 이미 그것을 알 것이니 만약 묻는 바가 있다면 즉시 마땅히 성실하게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흠약(王欽若)주 001
각주 001)
王欽若 : 962∼1025. 북송의 관인. 臨江軍 新喩(치소는 현재 중국 江西省 新餘) 사람으로 字는 定國이다. 淳化 3年(992)에 진사가 되어 이후 判大理寺, 知制誥, 翰林學士 등의 직을 역임했다. 咸平 4年(1001)에는 左諫議大夫 겸 參知政事로 발탁되었다. 景德 2年(1005)에는 여러 차례 寇準의 견제를 받으면서 스스로 파직을 청했고, 資政殿學士로 강등되었다. 이후에 구준과의 갈등으로 인해 결국 재상의 직에서 파면되었다. 그러나 진종의 뜻에 영합하며 天書를 거짓으로 만들고 泰山에 봉선을 올리는 등의 행동으로 진종의 신뢰를 받기 시작했다. 景德 3年(1006)에 知樞密院事로 발탁되었다. 天禧 元年(1017)에 재상에 배수되었지만, 이번에는 丁謂와의 불화로 인해 天禧 3年(1019)에 파직되고 判杭州로 폄출되었다. 인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재상이 되었고, 임기 중에 사망했다. 시호는 文穆이다. 『冊府元龜』의 편찬에 참여했고, 저서로는 『聖祖事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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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하기를, “이 사신이 궐에 이르면 분명히 거란(요)의 사신과 동시에 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단이 말하기를, “사방에서 입공하여 중국을 존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이니 그들이 스스로 적대시해도 조정이 어찌 사랑하거나 미워하겠습니까.”라고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경의 말이 깊이 일리가 있다.”라고 하고, 즉시 사신을 보내 그들을 접대했다.

  • 각주 001)
    王欽若 : 962∼1025. 북송의 관인. 臨江軍 新喩(치소는 현재 중국 江西省 新餘) 사람으로 字는 定國이다. 淳化 3年(992)에 진사가 되어 이후 判大理寺, 知制誥, 翰林學士 등의 직을 역임했다. 咸平 4年(1001)에는 左諫議大夫 겸 參知政事로 발탁되었다. 景德 2年(1005)에는 여러 차례 寇準의 견제를 받으면서 스스로 파직을 청했고, 資政殿學士로 강등되었다. 이후에 구준과의 갈등으로 인해 결국 재상의 직에서 파면되었다. 그러나 진종의 뜻에 영합하며 天書를 거짓으로 만들고 泰山에 봉선을 올리는 등의 행동으로 진종의 신뢰를 받기 시작했다. 景德 3年(1006)에 知樞密院事로 발탁되었다. 天禧 元年(1017)에 재상에 배수되었지만, 이번에는 丁謂와의 불화로 인해 天禧 3年(1019)에 파직되고 判杭州로 폄출되었다. 인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재상이 되었고, 임기 중에 사망했다. 시호는 文穆이다. 『冊府元龜』의 편찬에 참여했고, 저서로는 『聖祖事迹』 등이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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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신 입공에 대한 등주(登州)의 보고 자료번호 : jt.k_0003_0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