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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호우총

壺杅塚
  • 저필자
    표영관
  • 시대
    삼국시대/신라
  • 위치
  • 원소장처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 104
  • 시대
    고구려
  • 유형
    무덤
입지
경주 노서동에 위치한다.
유적개관
적석목곽분으로, 은령총과 맞붙어 있는 표형분으로, 140호분으로도 불린다. 적석목곽분으로,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杅十)이라는 명문이 있는 청동호우가 출토되었다. 415년 장수왕 3년인 을묘년에 광개토왕비의 건립과 함께 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고구려에서 주조한 것이다.
해설
광복 직후 일본인들이 떠나게 되자, 고고발굴의 전문지식 공백을 우려했던 한국인 학자들이 아리미츠 교이치[有光敎一]를 고문으로 경주에서 시험적 발굴을 시행하기로 결정한다. 논의 끝에 그 대상을 경주 노서동 140호 고분으로 정하고 1946년 발굴을 시행하였다.
발굴당시 두 개의 고분을 하나로 조성한 쌍분(雙墳)으로 추정하였으나 조사결과 연접한 각기 다른 두 개의 고분이 일부 겹친 것으로 확인되었다. 두 고분 모두, 목곽을 만들고 돌을 쌓아올린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경주에 분포하는 전형적인 신라 무덤이었는데, 출토 유물을 토대로 은방울이 나온 고분은 은령총(銀鈴塚)으로, 청동 호우(壺衧)가 나온 고분을 호우총으로 명명하였다.
1963년 ‘경주노서리고분군’에 속해 사적 39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경주시내 5개 고분군을 ‘경주대릉원 일원’으로 통합하게 되면서 사적 512호로 재지정되었다.
무덤의 규모는 여타의 신라 적석목곽분 중에서 중소형에 속한다.
무덤 안에서는 금동관(金銅冠)과 관(冠) 장식, 금 귀걸이, 비취 곡옥이 달린 유리구슬 목걸이, 금팔찌 1쌍, 금반지와 은반지가 각각 5쌍, 은으로 만든 허리띠와 장식패 등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또 금동으로 장식한 환두대도(環頭大刀)가 나무널 안에서 출토되었다.
이 환두대도는 손잡이 머리 원형 고리 안에 용 한 마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신라고분에서는 출토된 사례가 거의 없는 것이다.
이 외에도 봉황문양이 조각된 안장을 비롯한 마구(馬具)들과 금동신발, 철제 무기와 공구, 청동 그릇들도 함께 발견되었다.
무엇보다도 호우총에서 발견된 주목할 만한 발견은 청동 호우 1점이었다.
청동 호우의 밑 바닥면에는 “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 호태왕 호우 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명문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국강상광개토지 호태왕은 주지하듯 고구려의 광개토왕을 말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호우에 새겨진 서체가 중국 집안(集安)에 위치한 광개토왕비의 서체와 동일한 점이었다.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은 광개토왕의 사후 시호(諡號)이기 때문에 명문에 기록된 을묘년은 아마도 광개토왕 사후 3년 뒤인 장수왕(長壽王) 3년, 415년을 의미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광개토왕비가 그의 사후 2년 뒤인 414년 건립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아들인 장수왕이 아버지의 묘역을 단장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일련의 행위로 호우를 만들어 중요인물, 단체에 전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문의 말미에 ‘호우 십’이라는 표현이 바로 열 번째 만들어진 기념품임을 의미한다고 보여진다.
다만 당시 적대국이었던 신라 왕경의 준 왕릉급 고분에서 이러한 유물이 출토된 것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존재한다. 혹자는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신라 나물왕의 아들 복호(卜好)나, 유사한 인물의 무덤으로 추정하지만, 다른 유물과 특히 부장 토기를 통해 호우총은 6세기 초반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것이 공통된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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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우총 자료번호 : isea.d_0002_0030_0030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