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령자성자산고성
石嶺子城子山古城
입지
성자산(城子山) 남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의 3면은 모두 길게 이어진 기복이 있는 산봉우리와 이어져 있고, 유일하게 동쪽만이 좁고 긴 하곡지(河谷地)를 향해있다. 하곡에는 마르지 않는 작은 개울이 흘러간다. 하곡지(河谷地)에서 동쪽으로 후이가둔(后李家屯), 전이가둔(前李家屯)을 지나면 곧장 사(평)요(원)(四(平)遼(源))도로에 이를 수 있다.
유적개관
고성은 자연적으로 기복이 있는 산비탈에 축조하였으며, 그 북쪽과 서쪽은 현재 도로에 의해 파괴되었으므로 전체적인 성지의 범위를 조사할 방법이 없다. 성벽 잔존부분은 불규칙한 원으로 길이는 약 500m에 이른다. 현재 잔존 성벽의 남반부에는 문지가 있고, 바깥쪽에는 방형의 옹성(瓮城)이 둘러싸고 있다. 남아있는 성벽 동반부에도 역시 동일한 형태의 문지와 옹성(瓮城)이 있다.
유물개관
夾砂陶器, 灰胎白釉瓷, 紅胎蟹靑釉瓷 등 도자기물 잔편 등이 있다.
참고문헌
문물지
해설
길림성(吉林省) 사평시(四平市) 철동구(鐵東區) 석령자진(石嶺子鎭) 강가와자촌(姜家洼子村) 후리가둔(後李家屯)에서 북쪽으로 500m 떨어진 산 구릉 위에 있다. 성자산(城子山) 남쪽·서쪽·북쪽의 3면은 모두 길게 이어진 기복이 있는 산봉우리와 이어져 있고, 유일하게 동쪽만이 좁고 긴 골짜기를 향해 있다. 골짜기에는 마르지 않는 작은 개울이 흘러가는데, 골짜기에서 동쪽으로 후리가둔, 전리가둔(前李家屯)을 지나면 곧 사평(四平)∼요원(遼源) 간 도로에 이를 수 있다.
고성은 자연적으로 기복이 있는 산비탈에 축조하였으며, 그 북쪽과 서쪽은 현재 도로에 의해 파괴되었으므로 전체적인 성의 범위를 조사할 방법이 없다. 성벽이 남아 있는 부분은 불규칙한 원으로 길이는 약 500m에 이른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남반부에는 문지가 있고, 바깥쪽에는 방형의 옹성(甕城)이 둘러싸고 있다. 남아있는 성벽 동반부에도 역시 동일한 형태의 문지와 옹성이 있다. 발견된 유물 중 모래 섞인 토기 이외에는 발해문화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역사상 발해 부여부(扶餘府)의 관할이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성의 구조와 지리적인 위치를 보면, 꽤나 발해 산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석령자(石嶺子) 성자산(城子山) 고성은 발해의 성으로 인정할 수 있다. 성 안에서 출토된 모래 섞인 토기 등의 청동기문화 유물로 보면, 이 일대는 일찍이 인류가 활동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고성이 파괴가 심각하기 때문에 지면에서 모래 섞인 토기, 회색 태토에 흰색 유약을 바른 자기, 홍색 태토에 해청유(蟹靑釉)를 바른 자기 등의 도자기조각 등이 약간 발견되었다.
고성은 자연적으로 기복이 있는 산비탈에 축조하였으며, 그 북쪽과 서쪽은 현재 도로에 의해 파괴되었으므로 전체적인 성의 범위를 조사할 방법이 없다. 성벽이 남아 있는 부분은 불규칙한 원으로 길이는 약 500m에 이른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남반부에는 문지가 있고, 바깥쪽에는 방형의 옹성(甕城)이 둘러싸고 있다. 남아있는 성벽 동반부에도 역시 동일한 형태의 문지와 옹성이 있다. 발견된 유물 중 모래 섞인 토기 이외에는 발해문화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역사상 발해 부여부(扶餘府)의 관할이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성의 구조와 지리적인 위치를 보면, 꽤나 발해 산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석령자(石嶺子) 성자산(城子山) 고성은 발해의 성으로 인정할 수 있다. 성 안에서 출토된 모래 섞인 토기 등의 청동기문화 유물로 보면, 이 일대는 일찍이 인류가 활동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고성이 파괴가 심각하기 때문에 지면에서 모래 섞인 토기, 회색 태토에 흰색 유약을 바른 자기, 홍색 태토에 해청유(蟹靑釉)를 바른 자기 등의 도자기조각 등이 약간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