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결
2) 소결
안학궁 1호분은 대성산 소문봉 남록의 잔구 일대에 안학궁이 조성되기 전에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그간 안학궁의 초축 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주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로 다루어져 왔다. 이러한 정황은 이번 조사에서도 다시금 확인되었다. 문제는 일부 연구자가 제시하였듯이 안학궁 1호분 등을 기원후 6세기 전반의 것으로주 089못 박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안학궁 1호분이 설사 단칸 구조의 석실분이 성행하던 기원후 6세기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안학궁 내의 건물이 초축 당시 일시에 건축되지 않은 것이 분명한 이상, 이것만으로 안학궁의 초축 시기를 기원후 7세기와 그 이후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안학궁 1호분 등이 벽석 첫째 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괴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무덤 구조만을 놓고 시간성을 살피고자 할 때 고려할 수 있는 여러 속성, 무덤과 구 지표와의 관계, 벽체의 축조 상태, 천장의 구조 등을 파악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구조 면에서는 연도의 배치를 포함한 전체 무덤의 평면만이 유일한 분석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장방형 무덤칸에 동편재 연도가 딸린 소형 석실분은 사실 고구려에 중국계 횡혈식 석실분이 도입되던 초기부터 고구려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축조되었으므로주 090구조 면에서 아주 넓은 시간 폭을 갖는다.
이에 비해 호형 토기와 병형 토기 등이 출토된 안학궁 2, 3호분은 두 개의 무덤 칸이 병열되어 있거나(2호분) 또는 방형 무덤칸에 중앙 연도가 딸려 있다는 점에서(3호분), 안학궁 1호분 보다는 상대적으로 늦은 시간성을 보인다. 그러나 방형 무덤칸에 중앙 연도가 딸린 구조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좌우 편재 연도의 장방형 무덤칸의 횡혈식 석실분이 기원후 6세기 변모하여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 좌우 편재 연도의 것과 병행하던 평면 구조이다.주 091따라서 이러한 구조의 것이 6세기로부터 성행하여 이후 고구려 석실분의 전형을 이루었다고 해서 이를 기원후 6세기의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결국 안학궁 석실분의 연대는 유물 문제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데, 편년과 관련하여 검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호형 토기와 병형 토기이다. 이중 호형 토기는 어깨로부터 구연단까지가 급하게 반전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어깨가 발달하고 입이 납작하게 해바라진 형태를 하고 있는데, 기형면에서 우산하 3299호 및 고산동 11호와 유사하다. 그런데 안학궁 3호분과 유사한 형태의 호형 토기가 출토된 우산하 3299호와 고산동 11호는 기원후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반으로 편년되고 있다.주 092따라서 이와 대비되는 토기가 출토된 안학궁 3호분 또한 이와 유사한 연대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안학궁 3호분의 병형 토기는 어깨에 귀가 없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황남대총 북분의 흑갈유 병형 토기와 기형이 흡사하다. 황남대총 북분의 흑갈유 병형 토기는 절강성 항주의 ‘晋興寧二年(기원후 364년)’銘무덤 출토의 것과주 093혹사한데, 기원후 4세기 중후반 중국에서 제작된 것이 모종의 과정을 거쳐 신라에 수입된 것으로 여겨진다.주 094이러한 점과 함께 황남대총 북분은 청동정이 황남대총 남분 및 칠성산 96호분 등과 유사함과 동시에 전체적인 유물 조합이 남분에 비해 한 시기 가량 늦은 특징을 보이고 있고 이러한 점이 감안되어 기원후 4세기 말~5세기 초로 편년되고 있다.주 095
한편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위의 유물 외에 소형 추형 드림장식이 달려 있는 고구려 양식의 태환이식 수 쌍이 출토되었는데, 이 가운데 하나는 안학궁에서 출토된 것과 제작 수법과 형태가 동일하다. 이에 대해서는 황남대총을 伊藤秋男주 096과 穴澤和光주 097등이 기원후 5세기 중반으로 편년한 것에 기초하여 황남대총 북분의 것을 5세기 중반 전후로, 그보다 약간 후행하는 형식에 속하는 안학궁의 것을 기원후 5세기 후반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으나,주 098황남대총 북분의 연대를 올려보는 입장에서는 기원후 5세기 초반을 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주 099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안학궁 3호분은 황남대총 북분의 편년을 안학궁 3호분의 연대로 환원한다고 하더라도, 다소 넓게 잡아 기원후 4세기 말~5세기 중반 안에 포괄된다. 이러한 점과 함께 안학궁에서 출토된 태환이식이 늦은 편년안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기원후 5세기 중반~후반이라는 점, 안학궁성과 궁성 내 건물지가 초축 당시 일시에 영조된 것이 아니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기왕에 일부 연구자들이 제시한 바와 같이 안학궁 1~3호분이 기원후 6세기 등으로 내려가지 않을 뿐만 더러 그 윗 층의 안학궁이 기원후 7세기나 그 이후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강원)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안학궁 1호분 등이 벽석 첫째 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괴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무덤 구조만을 놓고 시간성을 살피고자 할 때 고려할 수 있는 여러 속성, 무덤과 구 지표와의 관계, 벽체의 축조 상태, 천장의 구조 등을 파악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구조 면에서는 연도의 배치를 포함한 전체 무덤의 평면만이 유일한 분석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장방형 무덤칸에 동편재 연도가 딸린 소형 석실분은 사실 고구려에 중국계 횡혈식 석실분이 도입되던 초기부터 고구려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축조되었으므로주 090구조 면에서 아주 넓은 시간 폭을 갖는다.
이에 비해 호형 토기와 병형 토기 등이 출토된 안학궁 2, 3호분은 두 개의 무덤 칸이 병열되어 있거나(2호분) 또는 방형 무덤칸에 중앙 연도가 딸려 있다는 점에서(3호분), 안학궁 1호분 보다는 상대적으로 늦은 시간성을 보인다. 그러나 방형 무덤칸에 중앙 연도가 딸린 구조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좌우 편재 연도의 장방형 무덤칸의 횡혈식 석실분이 기원후 6세기 변모하여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 좌우 편재 연도의 것과 병행하던 평면 구조이다.주 091따라서 이러한 구조의 것이 6세기로부터 성행하여 이후 고구려 석실분의 전형을 이루었다고 해서 이를 기원후 6세기의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결국 안학궁 석실분의 연대는 유물 문제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데, 편년과 관련하여 검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호형 토기와 병형 토기이다. 이중 호형 토기는 어깨로부터 구연단까지가 급하게 반전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어깨가 발달하고 입이 납작하게 해바라진 형태를 하고 있는데, 기형면에서 우산하 3299호 및 고산동 11호와 유사하다. 그런데 안학궁 3호분과 유사한 형태의 호형 토기가 출토된 우산하 3299호와 고산동 11호는 기원후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반으로 편년되고 있다.주 092따라서 이와 대비되는 토기가 출토된 안학궁 3호분 또한 이와 유사한 연대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안학궁 3호분의 병형 토기는 어깨에 귀가 없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황남대총 북분의 흑갈유 병형 토기와 기형이 흡사하다. 황남대총 북분의 흑갈유 병형 토기는 절강성 항주의 ‘晋興寧二年(기원후 364년)’銘무덤 출토의 것과주 093혹사한데, 기원후 4세기 중후반 중국에서 제작된 것이 모종의 과정을 거쳐 신라에 수입된 것으로 여겨진다.주 094이러한 점과 함께 황남대총 북분은 청동정이 황남대총 남분 및 칠성산 96호분 등과 유사함과 동시에 전체적인 유물 조합이 남분에 비해 한 시기 가량 늦은 특징을 보이고 있고 이러한 점이 감안되어 기원후 4세기 말~5세기 초로 편년되고 있다.주 095
한편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위의 유물 외에 소형 추형 드림장식이 달려 있는 고구려 양식의 태환이식 수 쌍이 출토되었는데, 이 가운데 하나는 안학궁에서 출토된 것과 제작 수법과 형태가 동일하다. 이에 대해서는 황남대총을 伊藤秋男주 096과 穴澤和光주 097등이 기원후 5세기 중반으로 편년한 것에 기초하여 황남대총 북분의 것을 5세기 중반 전후로, 그보다 약간 후행하는 형식에 속하는 안학궁의 것을 기원후 5세기 후반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으나,주 098황남대총 북분의 연대를 올려보는 입장에서는 기원후 5세기 초반을 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주 099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안학궁 3호분은 황남대총 북분의 편년을 안학궁 3호분의 연대로 환원한다고 하더라도, 다소 넓게 잡아 기원후 4세기 말~5세기 중반 안에 포괄된다. 이러한 점과 함께 안학궁에서 출토된 태환이식이 늦은 편년안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기원후 5세기 중반~후반이라는 점, 안학궁성과 궁성 내 건물지가 초축 당시 일시에 영조된 것이 아니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기왕에 일부 연구자들이 제시한 바와 같이 안학궁 1~3호분이 기원후 6세기 등으로 내려가지 않을 뿐만 더러 그 윗 층의 안학궁이 기원후 7세기나 그 이후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강원)
- 각주 089)
- 각주 090)
- 각주 091)
- 각주 092)
- 각주 093)
- 각주 094)
- 각주 095)
- 각주 096)
- 각주 097)
- 각주 098)
- 각주 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