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 국가를 발전시키다
2-1단원 2차시
지역 국가의 발전
통치 체제 정비
경쟁의 격화
지역 국가의 발전
지역 국가의 발전
1. 통치 체제 정비
- 유이민.토착민의 정치적 갈등 발생
- 통치 체제 정비
- 북위:호한융합 정책, 균전제 → 수.당 발전의 기틀
- 삼국:중앙집권화, 외교전 전개
- 일본열도:선진문화 수용,왕권강화 노력
외교전 전개
- 멸망:가혹한 법치(수탈.강제 동원) → 농민 저항 → 멸망
호한체제와 수당제국
북방 유이민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한족의 체제를 수용하였다. 화북을 평정하기 위하여 몽골에서 데려온 여러 유목 부족을 해산시켜 군과 현에 편입시켰다. 훈공이 있는 부족 중에 유력자에게는 관작을 수여하고 한족의 명문과 똑같이 고급관리로 채용하여 귀족제의 기초를 이루었다. 이러한 제도는 다시 천하를 통일한 수.당으로 계승되었고, 비로서 호족과 한족의 구별을 극복하고 국제성이 풍부한 국가를 이룩하였다. 호족과 한족은 타협에서 공존으로 역사를 만들어 냈으며, 그것이 바로 모든 민족을 포괄할 수 있는 수.당이라는 세계 제국이 형성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균전제는 485년에 시행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법이 실효를 거두게 된 것은 486년 촌락제도와 조세제도가 개혁된 이후이다. 이러한 촌락제도를 삼장제라고 한다. 다섯집을 하나의 린(隣)으로 하고, 5린을 리(里)로 하고, 5리를 당(黨)으로 삼았다. 이를 기준으로 호적을 만들어 토지에 대해 조세를 부여하였다. 이제 개개의 집들을 중심으로 하는 소가족을 국가가 직접 조직하고 장악하여, 소농민사회를 지배하고자 하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더 생각해 보기 - 오가작통법
토지를 매개로 하여 백성을 구속하는 법은 후대까지 적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존재하였던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은 1485년(성종 16)에 한명회의 주장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5개의 가구를 하나의 통으로 묶어, 호구를 밝히고 범죄자 색출, 조세 징수, 부역 동원 등에 이용하였다. 다섯 가구가 연대 책임을 진 제도로, 호패제와 더불어 호적의 보조수단이 되었다. 농민의 유망을 막고 통제를 강화하는데 이용되었다. 1839년 조선 헌종 조 기해사옥 때에는 천주교 적발방법으로 오가작통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1958년부터 북한 전역에 오호담당제가 실시되었다. 이는 각 지역의 유급간부 한사람이 다섯 호를 책임져, 사상·교양·경제사업등 모든 생활을 지도하게 한 제도였다. 담당 간부는 학교 교사 혹은 당원 중에서 선발하였다.
외교전의 전개와 한강의 중요성
5~6세기 한반도의 삼국이 중원 왕조, 왜와 다양한 외교 관계를 전개했던 한 예이다.
429. 백제 송에 사신을 파견.
435. 고구려 북위에 사신 파견.
463. 송. 고구려 왕을 책봉.
502. 양의 무제. 왜왕 武를 정동대장군에 봉함.
564. 고구려, 신라, 백제 각자 북제에 사신을 보냄.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동아시아 세계가 성립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각국에서는 자국의 이익과 연계하여 다양한 외교전을 구사하였다. 5세기에는 고구려. 백제, 가야. 왜가 중국과 직접 교류하였다. 외교전은 6세기 중엽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까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중원 왕조와 교섭하였던 신라는 독자적으로 중원 왕조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나당연합군 결성에 기초를 닦았다. 일본 열도는 송대 이후 중국과 직접 통교하지 않지만 백제를 통하여 불교나 오경박사 같은 중국의 문물을 수용하게 된다.
한반도에서 삼국이 치열하게 경쟁하였을 때 중요한 곳으로 대두되었던 곳이 한강이다.
한강은 왜 이렇게 치열한 경쟁의 장소이어야 했을까. 먼저 한강 유역이 가지고 있는 경제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근대 이전 한강 남쪽의 정식 명칭은 너른 고을 이라는 의미인 廣州였다. 그 너른 고을의 풍부한 생산력이 주목받았다. 한강 유역의 암사동에서 신석기 유적이 발견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과의 교류이다. 한강 하류에서 서해를 건너면 바로 중국과 직접적인 교류가 가능하였다. 실제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중원 왕조와 외교관계를 맺던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독자적으로 중국과 교류할 수 있었다. 이후 나당연합군을 결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면서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북방 유이민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한족의 체제를 수용하였다. 화북을 평정하기 위하여 몽골에서 데려온 여러 유목 부족을 해산시켜 군과 현에 편입시켰다. 훈공이 있는 부족 중에 유력자에게는 관작을 수여하고 한족의 명문과 똑같이 고급관리로 채용하여 귀족제의 기초를 이루었다. 이러한 제도는 다시 천하를 통일한 수.당으로 계승되었고, 비로서 호족과 한족의 구별을 극복하고 국제성이 풍부한 국가를 이룩하였다. 호족과 한족은 타협에서 공존으로 역사를 만들어 냈으며, 그것이 바로 모든 민족을 포괄할 수 있는 수.당이라는 세계 제국이 형성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균전제는 485년에 시행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법이 실효를 거두게 된 것은 486년 촌락제도와 조세제도가 개혁된 이후이다. 이러한 촌락제도를 삼장제라고 한다. 다섯집을 하나의 린(隣)으로 하고, 5린을 리(里)로 하고, 5리를 당(黨)으로 삼았다. 이를 기준으로 호적을 만들어 토지에 대해 조세를 부여하였다. 이제 개개의 집들을 중심으로 하는 소가족을 국가가 직접 조직하고 장악하여, 소농민사회를 지배하고자 하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더 생각해 보기 - 오가작통법
토지를 매개로 하여 백성을 구속하는 법은 후대까지 적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존재하였던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은 1485년(성종 16)에 한명회의 주장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5개의 가구를 하나의 통으로 묶어, 호구를 밝히고 범죄자 색출, 조세 징수, 부역 동원 등에 이용하였다. 다섯 가구가 연대 책임을 진 제도로, 호패제와 더불어 호적의 보조수단이 되었다. 농민의 유망을 막고 통제를 강화하는데 이용되었다. 1839년 조선 헌종 조 기해사옥 때에는 천주교 적발방법으로 오가작통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1958년부터 북한 전역에 오호담당제가 실시되었다. 이는 각 지역의 유급간부 한사람이 다섯 호를 책임져, 사상·교양·경제사업등 모든 생활을 지도하게 한 제도였다. 담당 간부는 학교 교사 혹은 당원 중에서 선발하였다.
외교전의 전개와 한강의 중요성
5~6세기 한반도의 삼국이 중원 왕조, 왜와 다양한 외교 관계를 전개했던 한 예이다.
429. 백제 송에 사신을 파견.
435. 고구려 북위에 사신 파견.
463. 송. 고구려 왕을 책봉.
502. 양의 무제. 왜왕 武를 정동대장군에 봉함.
564. 고구려, 신라, 백제 각자 북제에 사신을 보냄.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동아시아 세계가 성립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각국에서는 자국의 이익과 연계하여 다양한 외교전을 구사하였다. 5세기에는 고구려. 백제, 가야. 왜가 중국과 직접 교류하였다. 외교전은 6세기 중엽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까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중원 왕조와 교섭하였던 신라는 독자적으로 중원 왕조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나당연합군 결성에 기초를 닦았다. 일본 열도는 송대 이후 중국과 직접 통교하지 않지만 백제를 통하여 불교나 오경박사 같은 중국의 문물을 수용하게 된다.
한반도에서 삼국이 치열하게 경쟁하였을 때 중요한 곳으로 대두되었던 곳이 한강이다.
한강은 왜 이렇게 치열한 경쟁의 장소이어야 했을까. 먼저 한강 유역이 가지고 있는 경제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근대 이전 한강 남쪽의 정식 명칭은 너른 고을 이라는 의미인 廣州였다. 그 너른 고을의 풍부한 생산력이 주목받았다. 한강 유역의 암사동에서 신석기 유적이 발견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과의 교류이다. 한강 하류에서 서해를 건너면 바로 중국과 직접적인 교류가 가능하였다. 실제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중원 왕조와 외교관계를 맺던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독자적으로 중국과 교류할 수 있었다. 이후 나당연합군을 결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면서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각주 050)
외교전 전개
643년 겨울 11월 왕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 그 목적은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아 그들이 당나라로 조공하러 가는 길을 막는 것이었다. 왕은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신라 왕 덕만 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왕이 이 사실을 듣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648년 신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에 침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의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의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의 나라의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 신라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삼국사기” 신라본기“삼국사기” 신라본기
“삼국사기” 백제본기
648년 신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에 침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의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의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의 나라의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 신라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삼국사기” 신라본기“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역 국가의 발전
2. 경쟁의 격화
- 수.당과 고구려의 갈등:수차례의 전쟁 발생.
- 한반도 삼국의 항쟁과 삼국통일전쟁.
- 삼국의 항쟁-한강 유역을 둘러싼 경쟁
- 나.당연합군 결성과 백제.고구려 멸망
- 삼국통일의 과정:나.당연합군 결성 → 백제.고구려 멸망 → 나.당 전쟁 → 당 축출(통일달성),발해 건국.
- 삼국통일 이후의 동아시아
- 중국 대륙:경쟁국 고구려의 멸망으로 당 융성.
- 만주.한반도:대동강.원산만 이북 상실과 발해 건국.
→남북국 시대 전개
- 일본:다이카 개신으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정비.
- 베트남:당에 저항 → 10세기에 독립
동아시아 관점에서 본 삼국 통일 전쟁
삼국통일 전 당은 돌궐.고구려와 동아시아 패권을 가지고 다투고 있었으며 한반도 남부에서는 신라와 백제가 경쟁하고 있었다. 당은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범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신라는 백제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결국 삼국 통일 전쟁은 돌궐.고구려.백제.왜의 연합으로 고립된 신라가 고구려를 복속시키고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고자 했던 당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는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660년 백제 사비성이 함락되자 왜는 백제 구원군을 파견하였으나 백강 전투에서 패배하며 실패하였다. 668년 나당연합군이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하고 당은 애초의 약속을 저버리고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 백제 유민과 연합하여 당에 대항하였다. 때마침 티베트 인이 세운 토번이 당의 지원을 받던 토욕혼을 멸망시키고 비단길 지역을 장악하였다. 이에 당군은 토번과의 전쟁을 위해 한반도에서 물러났다. 이처럼 삼국통일 전쟁은 한반도에서만의 전쟁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얽혀 일어난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일본의 대외인식과 국호 ‘일본’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쇼토쿠 태자가 죽은 후 소가 씨 일족이 실권을 장악한 것에 불만을 가진 나카노오에(中大兄)와 후지와라노 가마타리(藤原鎌足) 등이 정변을 일으켜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고 개혁에 착수하였다. 연호를 다이카(大化)로 하고, 도읍을 나니와(難波, 지금의 오사카)로 옮기는 등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였다. 646년 1월 ‘개신의 칙령’을 발표하여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씨성제도를 부정하고 왕권을 중심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정비하고, 정치개혁에 착수하였다. 호족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백성을 천황에게 귀속시키고(公地公民制) 지방 행정 조직과 국방. 교통 제도를 정비하였다.
日本이라고 하는 의미는 ‘해가 뜨는 곳의 나라’라는 의미가 있다는 설이 있다. 일본 열도에 대한 명칭으로 중원왕조나 삼국의 기록에서는 ‘왜’였다. 일본이라는 국호는 언제부터 쓰였을까. 중국 사서에서 왜인전으로서의 마지막 기록은 648년 기록이고, 일본전의 최초의 기록은 703년이었다. 다만, 607년 수에 보낸 국서에 ‘日出處天子’라는 기록이 있어, 그러한 의식의 단초는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수 양제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수가 인정하지 않은 것은 ‘천자’라는 단어였다. 701년 다이호 율령에서 신라에 대한 외교문서에 ‘천하를 다스리는 일본 천황의 말씀(御字日本天皇詔旨)’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702년 당에 보낸 사신들은 이 양식으로 외교문서를 제출하였고, 당에서는 이를 받아주었다. 단지 당시 당 측천무후의 인식은 ‘왜국이 해가 뜨는 쪽에 있기 때문에 일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삼국통일 전 당은 돌궐.고구려와 동아시아 패권을 가지고 다투고 있었으며 한반도 남부에서는 신라와 백제가 경쟁하고 있었다. 당은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범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신라는 백제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결국 삼국 통일 전쟁은 돌궐.고구려.백제.왜의 연합으로 고립된 신라가 고구려를 복속시키고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고자 했던 당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는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660년 백제 사비성이 함락되자 왜는 백제 구원군을 파견하였으나 백강 전투에서 패배하며 실패하였다. 668년 나당연합군이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하고 당은 애초의 약속을 저버리고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 백제 유민과 연합하여 당에 대항하였다. 때마침 티베트 인이 세운 토번이 당의 지원을 받던 토욕혼을 멸망시키고 비단길 지역을 장악하였다. 이에 당군은 토번과의 전쟁을 위해 한반도에서 물러났다. 이처럼 삼국통일 전쟁은 한반도에서만의 전쟁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얽혀 일어난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일본의 대외인식과 국호 ‘일본’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쇼토쿠 태자가 죽은 후 소가 씨 일족이 실권을 장악한 것에 불만을 가진 나카노오에(中大兄)와 후지와라노 가마타리(藤原鎌足) 등이 정변을 일으켜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고 개혁에 착수하였다. 연호를 다이카(大化)로 하고, 도읍을 나니와(難波, 지금의 오사카)로 옮기는 등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였다. 646년 1월 ‘개신의 칙령’을 발표하여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씨성제도를 부정하고 왕권을 중심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정비하고, 정치개혁에 착수하였다. 호족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백성을 천황에게 귀속시키고(公地公民制) 지방 행정 조직과 국방. 교통 제도를 정비하였다.
日本이라고 하는 의미는 ‘해가 뜨는 곳의 나라’라는 의미가 있다는 설이 있다. 일본 열도에 대한 명칭으로 중원왕조나 삼국의 기록에서는 ‘왜’였다. 일본이라는 국호는 언제부터 쓰였을까. 중국 사서에서 왜인전으로서의 마지막 기록은 648년 기록이고, 일본전의 최초의 기록은 703년이었다. 다만, 607년 수에 보낸 국서에 ‘日出處天子’라는 기록이 있어, 그러한 의식의 단초는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수 양제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수가 인정하지 않은 것은 ‘천자’라는 단어였다. 701년 다이호 율령에서 신라에 대한 외교문서에 ‘천하를 다스리는 일본 천황의 말씀(御字日本天皇詔旨)’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702년 당에 보낸 사신들은 이 양식으로 외교문서를 제출하였고, 당에서는 이를 받아주었다. 단지 당시 당 측천무후의 인식은 ‘왜국이 해가 뜨는 쪽에 있기 때문에 일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각주 051)
백제.고구려 멸망
주 052
주 053문무왕 14년(674)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에 살면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자, 당 나라 고종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로 왕의 관작을 깎아 없앴다. 왕의 동생인 우효위원외대장군 임해군공 김인문이 당나라의 서울에 있었는데, (그를) 신라의 왕으로 세우고 귀국하게 하였다.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 유인궤 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우령군대장군 이근행이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와서 쳤다.
문무왕 15년(675)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웠는데 연이어 패배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번의 싸움을 벌여 이기고서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삼국사기” 문무왕조
“삼국사기” 문무왕조문무왕 14년문무왕 14년문무왕 15년문무왕 15년
문무왕 15년(675)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웠는데 연이어 패배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번의 싸움을 벌여 이기고서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삼국사기” 문무왕조
“삼국사기” 문무왕조문무왕 14년문무왕 14년문무왕 15년문무왕 15년
각주 053)
발해 건국
주 054
측천무후가 토벌할 수 없게 됨에 조영은 드디어 그 무리를 이끌고 동쪽 계루의 옛 땅으로 들어가 동모산을 거점으로 하여 성을 쌓고 거주하였다. 조영은 용맹하고 용병하기를 잘하였으므로 말갈의 무리와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점차 구에게 귀복하였다. 성력중에 스스로 진국왕이 되어 사신을 보내 돌궐과 통하였다.
“구당서”
“구당서”“구당서”“구당서”
“구당서”
“구당서”“구당서”“구당서”
지역 국가의 발전
3. 지역 국가의 발전
- 대외 전쟁의 종식
- 당이 동아시아 강국으로 등장
- 각 국의 지역 통합 노력,왕권강화
- 자국 문화 발전
- 교역의 활성화
- 당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국가 간 교류 활성화.
각주 056)
자국 문화 발전
현생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창건하고…석불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하나를 감실의 뚜껑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돌이 갑자기 셋으로 깨졌다. 불국사의 사다리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새긴 업적은 경주의 여러 사찰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삼국유사”
“삼국유사”“삼국유사”“삼국유사”
“삼국유사”
“삼국유사”“삼국유사”“삼국유사”
지역 국가의 발전
지역통치강화
삼국통일 전쟁
지역 국가 발전
- 중원왕조:
남북조 왕조 전개 → 호한융합정책,균전제
- 삼국:
상호경쟁과 외교전
- 일본열도:
대륙문화 수용. 권력강화,외교사절
- 신라의 삼국통일
- 삼국 통일 이후의 동아시아
- 당융성
- 남북국 시대 전개
- 일본은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 정비
- 경쟁의 마무리
- 당.신라.발해.일본등이 지역 국가로 성장
- 당을 중심으로 지역 국가간 교류 활발
- 각주 047)
- 각주 048)
- 각주 049)
-
각주 050)
외교전 전개643년 겨울 11월 왕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 그 목적은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아 그들이 당나라로 조공하러 가는 길을 막는 것이었다. 왕은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신라 왕 덕만 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왕이 이 사실을 듣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648년 신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에 침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의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의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의 나라의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 신라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삼국사기” 신라본기“삼국사기” 신라본기 -
각주 051)
백제.고구려 멸망문무왕 14년(674)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에 살면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자, 당 나라 고종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로 왕의 관작을 깎아 없앴다. 왕의 동생인 우효위원외대장군 임해군공 김인문이 당나라의 서울에 있었는데, (그를) 신라의 왕으로 세우고 귀국하게 하였다.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 유인궤 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우령군대장군 이근행이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와서 쳤다.
문무왕 15년(675)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웠는데 연이어 패배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번의 싸움을 벌여 이기고서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삼국사기” 문무왕조
“삼국사기” 문무왕조문무왕 14년문무왕 14년문무왕 15년문무왕 15년 - 각주 052)
-
각주 053)
발해 건국측천무후가 토벌할 수 없게 됨에 조영은 드디어 그 무리를 이끌고 동쪽 계루의 옛 땅으로 들어가 동모산을 거점으로 하여 성을 쌓고 거주하였다. 조영은 용맹하고 용병하기를 잘하였으므로 말갈의 무리와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점차 구에게 귀복하였다. 성력중에 스스로 진국왕이 되어 사신을 보내 돌궐과 통하였다.
“구당서”
“구당서”“구당서”“구당서” - 각주 054)
- 각주 055)
-
각주 056)
자국 문화 발전현생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창건하고…석불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하나를 감실의 뚜껑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돌이 갑자기 셋으로 깨졌다. 불국사의 사다리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새긴 업적은 경주의 여러 사찰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삼국유사”
“삼국유사”“삼국유사”“삼국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