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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이(西南夷)의 군장(君長)을 종족과 생활양식, 풍속, 크기에 따라 분류하여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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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남이(西南夷)
서남이(西南夷)주 001
각주 001)
司馬遷은 「自序」에서 “唐蒙이 使者로 가서 夜郞을 경략하여 交通하고, 邛·筰의 君이 內臣이 되어 吏를 받아들이기를 請한 까닭에, 「西南夷列傳」을 지었다.”라고 하여 「서남이열전」을 지은 경위를 밝히고 있다. 瀧川資言(1865 ~ 1946)의 『史記會注考證』(이하 『考證』)에서는 丁謙(1843 ~ 1919)과 凌雉隆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정겸은 말하기를 “漢의 西南夷는 지금의 四川 남쪽, 貴州의 西南 및 雲南 全省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凌雉隆은 “이 열전은 夜郞·滇 두 國을 머리로 하여 대개 漢에서 封建한 곳이다.”라고 말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89 ~ 4690). 丁謙은 청말부터 민국시기까지 활동한 지리학자이며, 凌雉隆은 明代의 관료이자 학자로 1540년에 進士에 급제하였으며 『漢書評林』·『史記評林』 등의 저서가 있다.
唐代 張守節의 『史記正義』(이하 『正義』)에서는 “[西南夷는] 蜀의 남쪽에 있다(在蜀之南).”라고 하였다. 『사기』에는 ‘西南夷’라고 되어 있어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 『漢書』 「西南夷列傳」에서는 ‘(西)[南]夷’라 표기하였다. 전체 기사의 구조로 보건대, 『漢書』의 표기가 옳다고 생각된다. ‘서남이’로 보면, “서남이의 군장이 열 몇 있는데, 그 중 夜郞이 가장 크다.”라고 해석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서남이’의 범주가 문제가 된다. 『史記』 「西南夷列傳」의 말미에 “西南夷 君長이 백을 헤아리는데……”라 기술한 부분과도 모순일 뿐더러, 滇·邛都·徙·筰都·冉駹·白馬 등의 大君長 및 昆明·雟 등의 종족집단을 제외한 ‘西南夷’로 불리는 집단이나 공간이 따로 존재했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南夷’는 蜀郡 남쪽의 모든 蠻夷에 대한 다소 추상적 통칭이라기보다는 犍爲郡과 牂牁郡에 ‘屬’했던 蠻夷들만을 구체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唐代 司馬貞의 『史記索隱』(이하 『索隱』)에서도 ‘南夷’를 ‘犍爲(郡)와 牂柯(郡)’ 내지 ‘牂柯(郡)와 夜郞(國)’을 가리키는 것이라 풀고 있다(『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3047;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3052). 이는 漢武帝 시기 서남이 개척이 唐蒙의 ‘夜郞道’, ‘南夷道’ 개척으로부터 시작된 것과 관련이 있다. 이에 비하여 司馬相如가 회유하여 ‘約爲置吏’한 ‘邛·筰’은 ‘西夷’라 칭하였다. 따라서, 『漢書』의 기술을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史記』 기사의 ‘西南夷’는 ‘南夷’의 誤寫로 보아야 할 것이다. 『考證』은 “西字는 衍字인 듯싶다. 『漢書』에는 없다.”라고 한 中井積德의 말을 소개하고 있다(『瀧川資言, 1935 : 4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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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군장(君長)이 열을 헤아리는데,주 002
각주 002)
『索隱』 : 劉氏는 [數의] 音을 所와 具의 半切이라고 하였고, 鄒氏는 音을 所와 主의 半切이라고 하였다(劉氏音所具反. 鄒氏音所主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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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 야랑(夜郞) 주 003
각주 003)
사마천이 말하는 야랑(夜郞)은 ‘國’名이다. 남이의 10여 군장국 중 하나로 야랑후 혹은 야랑왕의 邑과 야랑에 복속한 주변 小邑들로 구성된 ‘國’이었겠지만, 『後漢書』에 이르면 『史記』나 『漢書』에서 말하는 남이 10여 군장의 권역을 모두 아우르는 ‘國’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索隱』에서 司馬貞은 『後漢書』를 인용하여 “夜郞은 東으로 交阯에 接하고, 그 땅은 胡南에 있으며, 그 君長은 본디 竹에서 나와, 竹을 姓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按 : 後漢書云 「夜郞東接交阯, 其地在胡南, 其君長本出於竹, 以竹爲姓也」). 『사기』와 『후한서』의 이러한 인식의 차이, 즉 ‘야랑’이라는 정치공동체가 이미 소멸한 상태에서 ‘야랑’의 권역을 더욱 크게 묘사하는 『후한서』의 인식의 배경을 추적해 볼 만하지만, 아직 이에 대한 구체적 연구는 없다. 대부분의 정치공동체의 이름, 특히 오래 존속한 정치공동체의 이름은 그 정치공동체가 소멸하더라도 그 인간 집단과 그 인간 집단이 채운 공간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살아남는다. ‘야랑’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安帝 永初 元年(107), 九真郡 徼外의 夜郎 蠻夷가 ‘舉土內屬’하였다는 『後漢書』 「孝安帝紀」(207쪽)와 「南蠻西南夷列傳」(2837쪽)의 기록은 ‘야랑국’이 교지와 접했다는 기록이 전혀 근거 없는 인식이 아님을 보여 준다.
夜郞은 또한 郡縣의 이름이기도 하였다. 『索隱』에서 韋昭의 말을 들어 “漢代에 縣을 설치하여 牂柯郡에 속하게 하였다(韋昭云 : 「漢爲縣, 屬牂柯」).”라고 하였듯이, 야랑은 漢代에 牂柯郡에 속한 현이었다. 그리고 晉代와 南朝시기에는 郡의 이름이었다. 그 위치와 강역에 대하여는 설이 다양하다. 『索隱』에서는 “犍爲屬國이다.”라고 한 荀悅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荀悅云 : 「犍爲屬國也」), 『正義』 또한 대체로 이에 동의하고 있다. 『正義』는 “지금 瀘州 남쪽 큰 강 南岸의 協州와 曲州는 본디 夜郞國이었다(今瀘州南大江南岸協州·曲州, 本夜郞國).”라고 했는데, 이는 대체로 후한대의 건위속국의 위치 및 강역에 부합한다. 한편, 『考證』은 姚范(1702 ~ 1771)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는 “夜郞은 지금의 遵義府 桐梓縣이고, 瀘州의 남쪽 曲靖州, 貴州의 普安州, 石阡府 興隆, 思南과 廣西 諸州 대부분이 夜郞의 땅이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0). 요범은 현재의 귀주성 桐梓縣을 그 중심지로, 운남성의 동부, 귀주성의 상당부분과 廣西省의 서부 일부를 야랑국의 강역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학자들 또한 설이 분분하다. 朱俊明에 따르면, 우선 야랑국의 강역에 관하여는 크게 漢代 牂柯郡의 강역에 해당한다는 說(一郡說)과 장가군을 넘어서 여러 군이 경지에 해당한다는 설(數郡說)이 있고, 일군설과 수군설에 대체로 각기 3종씩의 구체적 설이 있다고 한다. 대체로 작게는 현재 귀주의 서남과 서북, 운남의 동북과 동남 그리고 광서의 북쪽 일부를 포함하는 영역을 설정한다. 그리고 크게는 북쪽과 서북쪽으로 귀주성 전역과 사천 남부와 운남 동북을 포괄하고, 남쪽으로는 현 광서성의 田林과 南丹까지, 동쪽으로는 湖南省의 新晃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서쪽으로 운남의 곡정과 육량에 달하는 지역을 설정하기도 하였다(夜郞史探 朱俊明, 1988 : 10). 2000년에 貴州의 夜郞 연구 50년을 평가하는 글을 내어놓은 熊宗仁은 여전히 주준명의 정리를 되풀이하고 있다(熊宗仁, 2000 : 5).
또, 주준명에 따르면, 夜郞國의 핵심세력을 且蘭部로 보는 설과 夜郞部로 보는 설이 나뉘는데, 차란부의 위치는 현재의 貴州省 麻江·福泉·黃平 일대로 보는 데 별 이의가 없다. 이에 비하여 야랑부의 경우는 그 설이 네 가지로 나뉘는데, ① 현재의 귀주성 서남부의 黔西 南州 및 六盤水市 일대로 보는 설, ② 현재의 운남성 동북쪽의 宣威·霑益 일대로 보는 설, ③ 현재의 귀주의 서남지구, 즉 望謨(蔣徹,1994)과 貞豊 일대로 보는 설, ④ 현재의 귀주성 서북부와 운남 동북부 일대로 보는 설이 그것이다(夜郞史探 朱俊明, 1988 : 10 ~ 11). 웅정인의 정리 또한 이와 비슷한데, 다만 야랑부 중심설의 중심에 대하여 두 가지 설을 추가하였다. 즉, 赫章縣 可樂鄕(劉義, 2004)설과 귀주성 중부의 安順·六枝 일대 설이다(熊宗仁, 2000 : 5). 그리고 花溪의 燕樓村이나 桐梓縣의 夜郞鎭, 興義縣과 銅仁 일대(朱路, 2000 : 44) 등을 야랑왕의 古都로 지적하는 연구들 또한 이들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최근에는 〈金氏族譜〉 일부와 대량의 古墓群과 古城池 유지 등이 발견된 長順縣 廣順鎭 일대가 유력한 후보지로 주목되고 있다(朱路, 2000 : 44 ~ 45;沙先貴, 2005 : 11 ~ 13).
夜郞의 族屬은 ‘百越系統’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설명이다. 운남을 비롯한 서남지역 고대 소수민족의 족속은 크게 세 개의 갈래로 정리된다. 氐羌系統, 百越系統, 百濮(孟高棉)系統이 그것이다(尤中, 1994 : 19 ~ 35;馬曜, 1983 : 1 ~ 24;王文光, 1997;240 ~ 253). 百越系統에 속하는 고대의 족명으로는 ‘濮’과 ‘僚’ 등이 있고, 越·西甌·雒越·夜郞·句町·漏臥·滇越 등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백월 계통이 분포한 지역은 南越(지금의 廣東·廣西), 交趾(현재의 월남 북부), 夜郞, 同師(현재의 雲南省 保山) 등의 이남지대이다(尤中, 1994 : 30). 현재 소수민족과의 관계에 관하여는 설이 분분한데, 현재의 仡佬族이 바로 야랑의 후예라는 설도 있고, 현재 귀주 일대에 거주하는 彝族이라는 설도 있다. 아울러, 고대의 야랑인이 점차 변하여 현재의 仡佬族과 布依族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현재의 仡佬, 布依, 侗, 水, 壯 여러 족이 고대의 야랑과 어느 정도씩 관련을 갖는다고 하는 설도 있다(夜郞史探 朱俊明, 1988 : 9). 다만, 貴州에 거주하며 ‘竹崇拜’의 풍속을 가진 仡佬族과 夜郞과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연구가 많다. 熊宗仁은 夜郞의 족속 및 주체민족에 관한 연구를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① 周代 徐淮夷 중의 謝人이 천사하여 왔다는 謝人說, ② 현재 옛 夜郞國의 강역 내에 거주하는 布依·水·苗·彝·仡佬 중 흘료가 야랑왕족의 후손이며 토착민족이라는 가정 위에 흘료의 선민인 僚人과 濮人이 야랑의 주체민족이었다는 仡佬族先民濮人說, ③ 백월 계통의 료인과 남만계의 복인, 현 이족의 선민인 강족이 모두 주체민족이었다는 越·濮·羌공동주체민족설, ④ 야랑은 羌 계통의 夷·僰과 百越 계통의 僚人 3개 민족이 연합하여 만든 것이며, 현 彝族의 선민인 夷가 수령의 지위를 가졌다는 彝族先民說, ⑤ 百越說이 그것이다(熊宗仁, 2000 : 6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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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장 크다. 그 서쪽에 미막(靡莫)주 004
각주 004)
靡莫 : 『索隱』은 靡莫을 夷邑의 이름이며 ‘滇’과 同姓이라고 하였는데(夷邑名, 滇與同姓), 미막은 읍명보다는 族名으로 인식되는 측면이 강하다. 『正義』에서 미막에 대하여 蜀 南쪽 아래로 서쪽에 이르기까지 존재한다고 하고, 唐代에 姚州 北쪽에 존재하였던 靡非라는 족속을 곧 靡莫의 夷라고 한 것(在蜀南以下及西也. 靡非在姚州北, 去京西南四千九百三十五里, 卽靡莫之夷) 또한 읍명보다는 족명으로 인식한 사례이다. 方國瑜는 『中國西南歷史地理考釋』(上)에서 羌族語를 조사한 周汝成이 제기한 미막이 옛 羌人部族이라는 설을 소개하기도 하였다(方國瑜, 1987 : 13). 滇과 靡莫 그리고 僰을 모두 氐·羌系로 보는 시각은 그 유래가 깊다(馬曜, 1983 : 8 ~ 10;馬曜, 1987 : 54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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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족속이 열을 헤아리는데, 전(滇) 주 005
각주 005)
‘滇’은 國名이자 邑名이며 部落名이다. 현재는 운남성을 지칭하는 별칭으로 쓰이기도 하며, 운남성을 지칭하는 별칭으로 사용된 것은 명청대 이후의 일이다. 『考證』에서 인용한 丁謙((1843 ~ 1919)은 ‘滇國’이 ‘滇池’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雲南의 昆明이라고 했지만(『考證』 : 4690), 이는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우선 莊蹻의 ‘入滇’ 전설을 어디까지 신빙해야 할 지 알 수 없지만, 장교의 立國이 해당 지역 최초의 立國이라 하더라도, ‘전’이라는 명칭이 어디에서 기원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方國瑜는 滇國의 도읍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漢代 滇池縣의 위치를 운남성 晉寧縣의 晉城區 및 呈貢縣 지역으로 비정하였고(方國瑜, 1987 : 61), 張增祺는 문헌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지하여 전국 도성의 위치를 晉寧縣 晉城鎭으로 비정하였다(張增祺, 1997 : 3 ~ 10).
滇國의 강역, 즉 滇을 비롯한 ‘靡莫之屬’ 10여 君長의 강역은 대체로 後漢代의 益州郡, 즉 前漢代 益州郡에서 西部都尉 관할지역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滇池 주변의 平壩地區로부터 曲靖의 평패지구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한다. 張增祺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 즉 滇文化 유물의 분포 범위를 기초로 하여 전국의 강역을 비정하였는데, 서쪽 경계는 安寧縣 太極山 古墓群(晉寧 石寨山 유지로부터 70km 거리), 동쪽 경계는 지금의 路南에서 瀘西에 이르는 선, 남쪽 경계를 新平·元江에서 个舊에 이르는 선, 북쪽 경계는 曲靖·東川 이북의 會澤·昭通 일대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전국의 영역을 현재의 昆明市와 東川市 전부, 曲靖과 玉溪지구 대부분, 紅河州·楚雄州와 文山州의 일부분을 포괄하는 지역으로 비정하였다(張增祺, 1997 : 10 ~ 12). 물론 滇文化 표지 유물의 분포지역이 바로 滇國이라는 정치공동체의 강역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滇國의 주민에 관하여는 앞서 설명한 바 있듯이 靡莫과 僰을 동일한 계통으로 보고, 그 주체 민족을 氐羌系로 인정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尤中, 1994 : 37 ~ 39;馬曜, 1983 : 8 ~ 10). 또, ‘僰’으로 보지만, 氐羌系가 아니라 토착의 濮系로 보는 시각도 있다(童恩正, 1998 : 98). 이에 비하여 최근에 이르러 ‘滇’과 ‘僰’을 분리하여 滇人을 백월 계통에 속하는 민족군체로 정리하거나(王文光, 1997 : 249 ~ 251;王文光·龍曉燕·陳斌, 2005 : 95 ~ 105), 滇國의 주체 민족을 ‘越人’으로 보는 시각도(張增祺, 1997 : 32 ~ 52) 늘어나고 있다. 장증기의 경우 滇國에는 주체민족인 ‘월인’ 이외에도 ‘濮人’, ‘昆明人’, ‘羌人’, ‘叟人’, ‘漢人’ 등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음을 논증하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張增祺가 여기에서 언급한 ‘叟人’은 塞人, 즉 사카족(Saka)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란계로, 본디 발하시 호수(Balkhash Lake)와 이직쿨 호수(Issyk-kul Lake) 일대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기원전 3세기 ~ 2세기 흉노의 冒頓이 大月氏를 압박하자, 대월지가 伊犁河 유역으로 이동하게 되고, 이의 압박을 받은 사카족이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그 한 갈래가 靑藏高原을 건너 운남 서부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張增祺, 1997 : 46). 2005년에 출간된 『中國西南民族關係史』는 叟族에 관한 張增祺의 설을 지지하였다(王文光·龍曉燕·陳斌, 2005 : 105 ~ 107).
劉宋代 裴駰의 『史記集解』(이하 『集解』)에서는 如淳의 말을 인용하여, “滇의 音은 ‘顚’이다. 顚馬가 나는 그 國이다.”라고 하였고(如淳曰 : 「滇音顚. 顚馬出其國也.」), 『索隱』에서는 崔浩의 말을 인용하여, “나중에 縣이 되었으며, 越嶲太守에 의해 다스려졌다.”라고 하였다(崔浩云 : 「後爲縣, 越嶲太守所理也.」). 『索隱』이 소개한 崔浩의 말은 근거를 찾기 어렵지만, 越嶲郡의 설치와 益州郡의 설치에는 2년의 시차가 있으므로, 漢과 滇王 사이에 唐蒙과 夜郞侯 多同 사이에 맺어진 ‘約’과 같은 수준의 ‘約’이 존재하였다면,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 『正義』는 “昆州·郞州 等은 본디 滇國으로, 京師와의 거리가 5,370里이다(昆州·郞州等本滇國, 去京西五千三百七十里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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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장 크다. 의 이북에도 군장이 열을 헤아리는데, 공도(邛都)주 006
각주 006)
『考證』에서 인용한 丁謙은 “邛都는 지금 四川의 寧遠府이다.”라고 했는데(瀧川資言, 1935 : 4690), 영원부는 오늘날의 四川省 남부의 西昌에 치소를 두었다. 方國瑜는 邛都가 漢代에 越嶲郡에 있었고, 오늘날의 西昌 및 涼山地區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부족의 거민은 옛 羌人이라고 하였다(方國瑜, 1987 : 13 ~ 14). 이에 비하여 童恩正은 1979년에 저술한 『古代的巴蜀』에서 ‘僰’과 ‘濮’을 사실상 동일시하고, 邛都를 滇·夜郞과 함께 濮系의 僰族으로 규정하였다(童恩正, 1998 : 94 ~ 99). 한편, 『中國西南民族關係史』는 邛都를 滇·夜郞과 함께 百越 계통에 속하는 족군으로 분류하였다(王文光·龍曉燕·陳斌, 2005 : 102 ~ 105).
『集解』는 漢文帝 6년(전158) 모반한 淮南王 長을 蜀의 ‘嚴道·邛都’로 유배하는 내용의 「文帝紀」 기사에 주를 달면서 東晉末 劉宋初 사람인 徐廣의 말을 인용하였다. 徐廣이 말하기를, “『漢書』의 어떤 판본에는 (‘都’字를) ‘郵’字로 적었으며, 어떤 판본에는 바로잡는다며 이르기를 ‘邛僰’이라 하였다. 邛都는 본디 西南夷이며, 이때(문제 6년)에는 아직 嚴道와 교통하지 않았고, 邛僰山이 있다.”라고 하였다(『史記』 卷10 「孝文本紀」 第10, 426쪽). 현행 中華書局 표점본 『漢書』의 같은 기사에는 ‘邛都’가 생략되어 있다. 文帝 당시 (漢朝의 입장에서) 嚴道와 邛都 사이에 아직 교통이 없었다는 서광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正義』 또한 앞 「文帝紀」의 기사에 주를 달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邛은 其(기)와 恭(공)의 半切(공)이다.『括地志』에서 이르기를, “嚴道는 지금 縣이 되었으니, 곧 邛州에서 관할하는 縣이다. 縣에 蠻夷가 있으면 일러 道라 하는 까닭에 嚴道라 말하는 것이다.邛都縣은 본디 邛都國인데, 漢이 縣으로 만들었으며, 지금의 嶲州이다. 「西南夷傳」에 이르기를 ‘滇池 以北으로 君長이 열을 헤아리는데, 邛都가 가장 크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다.” 생각컨대, 羣臣이 請하여 淮南王 長을 蜀의 嚴道에 두자고 한 것은 여기가 아니라, 더 멀리 邛都 서편에 있는 邛僰山이었을 것이다. 邛僰山은 雅州의 榮經縣 경계에 있다. 榮經은 武德 年閒에 설치하였는데, 본디 秦의 嚴道 땅이다. 『華陽國志』에서 이르기를, “邛筰山은 옛 邛人과 筰人의 경계이다. 山과 巖石이 가파르고 높은데다, 굽이굽이 아홉 번은 꺾어져야 이를 수 있으며, 아래위로 얼음이 얼어있다. 생각컨대, 바로 (漢代의) 王尊이 올랐던 산이다. 지금 九折阪으로부터 서남쪽으로 가서 嶲州에 이르는 길은 산에 비가 많이 내리고 개인날이 적어 속칭 ‘漏天’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史記』 卷10 「孝文本紀」 第10, 426쪽). 여기서 말하는 邛僰山은 현재 四川省 서부에 있는 邛崃山(Qiong lai Shan)이며, 嚴道는 현재 四川省 雅安의 榮經縣에 해당한다. 그리고 王尊은 漢元帝時 益州刺史가 되어 部內를 순시하던 중 邛崍山에 오른 적이 있는 사람이다(『漢書』 卷76 「王尊傳」 第46, 3229쪽). 참고로 「司馬相如列傳」에 따르면, “邛都를 비롯한 筰都, 冉駹의 西夷 지역에도 秦代에 郡縣이 설치된 바 있다(『史記』,3046쪽).”고 하는데,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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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가장 크다. 이들은 모두 추계(魋結)하고주 007
각주 007)
『索隱』;魋는 『漢書』에서 ‘椎’라 적었는데, 音은 直과 追의 半切이다. 結은 音이 ‘計’이다(魋, 漢書作 「椎」, 音直追反. 結音計). 여기에서는 『索隱』을 좇아 ‘魋結’의 ‘結’은 ‘계’로 읽었다. 『考證』에서는 『漢書』의 師古注를 인용하였는데, “結은 髻라고 읽는데, 상투를 만들되 몽치[椎]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0). 張增祺는 이 ‘추계’의 습속을 ‘滇人’을 ‘越人’으로 판단하는 근거의 하나로 제시한 바 있다(張增祺, 1997 : 34). 물론 ‘추계’가 월인 만의 습속은 아니었다. 「朝鮮列傳」에도 ‘추계’가 보인다(『史記』 : 2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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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을 갈며, 읍취(邑聚)주 008
각주 008)
邑과 聚 모두 집주의 주거형태를 지칭하며, 취는 보통 읍보다 규모가 작은 취락을 지칭한다. 여기에서는 구체적 취락의 형태를 지칭하기보다는, 이들이 정착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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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주거지를 이루고 산다. 그 바깥 서쪽의 동사(同師) 주 009
각주 009)
同師 : 『集解』와 『索隱』에서도 三國時代 吳나라 사람인 韋昭의 말을 인용하여 지적하였듯이, 同師는 邑의 이름이다. 『색은』은 또 『漢書』에서는 ‘桐師’로 적고 있음을 지적하였다([集解]韋昭曰 : 「邑名也.」; [索隱]韋昭云邑名. 漢書作 「桐師」.). 『考證』에서는 丁謙의 말을 인용하여 “桐師는 滇國의 西南 邊界이다. 『讀史兵略』에서 이르기를 곧 龍陵縣이라고 했는데, 사실에 가깝다.”라고 했다(瀧川資言, 1935 : 4690). 龍陵은 오늘날의 雲南省 保山地區의 龍陵이다. 方國瑜는 同師가 嶲唐의 지역에 있었다고 하고, 嶲唐의 지역을 지금의 保山이라고 하여 결과적으로 동사의 소재를 현재 雲南의 保山으로 비정하였다(方國瑜, 1987 : 15, 20). 尤中 또한 保山으로 비정하였다(尤中, 1994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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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以東) 그리고 북으로 엽유(楪楡)주 100
각주 100)
楪楡 : 『集解』와 『索隱』에서는 韋昭를 인용하여 “楪의 音은 葉”이라고 했는데([集解] 韋昭曰 : 「在益州. 楪音葉.」 [索隱] 韋昭曰 : 「益州縣. 楪音葉), 여기에서도 이를 따라 楪楡를 ‘엽유’라고 읽었다. 『正義』 또한 음을 ‘葉’이라 하였다(上音葉). 『正義』에서는 또 “楪澤은 靡의 北쪽 100餘 里에 있다. 漢의 楪楡縣은 澤의 西쪽 益都에 있다. 靡非는 본디 葉楡王의 屬國이다(楪澤在靡北百餘里. 漢楪楡縣在澤西益都. 靡非, 本葉楡王屬國也).”라고 했는데, 『正義』의 지적은 이른바 ‘白子國’에 관한 여러 설화들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하다. 백자국에 관하여는 藤澤義美(1969 : 15 ~ 44)와 林超民(1991) 참조.
『考證』에서는 丁謙의 말을 인용하여, “葉楡는 漢의 縣이고 益州郡에 屬하며, 나중에는 永昌郡에 예속되는데, 葉楡水로 인하여 이름을 얻었다. 葉楡水는 곧 元江의 上游이며 그 발원지는 현재의 雲南縣 北梁王山에 있으니, 縣이 운남 땅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1). 엽유는 일반적으로 현재의 雲南省 大理로 비정된다(尤中, 1994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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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는 지역에 수(嶲)와 곤명(昆明)이라는 이름을 가진 족속이 있다.주 011
각주 011)
『集解』;徐廣이 말하기를 “永昌(郡)에는 嶲唐縣이 있다.”라고 하였다(徐廣曰 : 「永昌有嶲唐縣」).
『索隱』;崔浩가 이르기를, “(嶲와 昆明은) 두 國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韋昭가 이르기를, “嶲는 益州(郡)의 縣이다.”라고 하였다(崔浩云 : 「二國名.」 韋昭云 : 「嶲, 益州縣」).
『正義』;嶲의 音은 髓이다. 지금의 嶲州이다. 昆明은 嶲州의 縣이며, 대개 남쪽으로 昆明의 땅에 접해 있는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嶲音髓. 今嶲州也. 昆明, 嶲州縣, 蓋南接昆明之地, 因名也).
『考證』은 丁謙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雟와 昆明은 葉楡와 桐師의 사이에 있으니, 마땅히 지금의 永昌·騰越·順寧 등의 지역이 된다. 師古의 注에 이르기를, 雟는 곧 雟州이고, 昆明은 그 동남쪽에 있으니, 곧 南寧州라고 했는데, 틀렸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1). 方國瑜는 嶲를 嶲唐으로 보아, 종족적으로 昆明과 분리하였다. 嶲唐은 지금의 雲南 保山지역에 해당하며, 현 雲南省 騰衝지역에 해당하는 滇越과 함께 哀牢夷의 거주지역이라고 비정하였다. 따라서, 수는 애뢰이의 일종이며, 그 주체민족은 옛 ‘濮人’, 즉 오늘날의 蒲曼族, 崩龍族, 佤族의 공통 선민이라고 비정하였다(方國瑜, 1987 : 19 ~ 22). 그리고 昆明에 대하여는 공도(월수군 지역), 전(익주군 동부 전지지역)과 함께 오래 전에 雲南지역으로 천사하여 온 羌族의 후예로 보았다. 그리고 그 거주지역을 익주군의 서부(楚雄지역 이서로부터 현재의 洱海地區에 이르는 지역)로 비정하였다(方國瑜, 1987 : 15 ~ 17).
尤中은 嶲를 삼국시대 이후 주로 등장하는 叟와 동일시하였는데, 이 嶲(叟)족은 漢代의 越嶲郡 지역을 최대 거주지로 하는 氐·羌族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지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위 『史記』 기사에 등장하는 嶲는 곤명과 함께 현재의 운남성 保山 일대로부터 大理州 일대에 걸쳐 잡거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滇越과는 구분하였다(尤中, 1994 : 35 ~ 43). 王文光 또한 叟(嶲)族과 昆明族 모두 氐羌系統으로 분류하였으며, 『華陽國志』 「南中志」의 “夷人大種曰昆, 小種曰叟”라는 기사를 들어 昆明과 叟가 秦漢시기 중국 西南지구 인구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였음을 지적하였다(王文光, 1997 : 243 ~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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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변발(編髮)하였고 가축을 따라 옮겨 다니며,주 012
각주 012)
『正義』;編(변)은 步(보)와 典(전)의 半切(변)이며, 畜(축)은 許(허)와 又(우)의 半切이다. 모두 嶲와 昆明의 풍속이다(編, 步典反. 畜, 許又反. 皆嶲·昆明之俗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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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거처가 없고주 013
각주 013)
사마천의 이와 같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발굴자료에 의거하여 당시 大理 洱海지역의 주민, 즉 昆明族이 상당한 정도의 定住農耕社會를 형성하였음이 지적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藤澤義美, 1969 : 3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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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장도 없다. 땅이 사방 수천 리(里)이다. 수(嶲)로부터 동북쪽으로 군장이 열을 헤아리는데, 사(徙)와 작도(筰都)가주 014
각주 014)
徙와 筰都 : 『集解』에서는 徐廣이 말하기를, “徙는 漢嘉(郡)에 있다. 筰은 音이 昨(작)이며, 越嶲(郡)에 있다.”라고 하였다(徐廣曰 : 「徙在漢嘉. 筰音昨, 在越嶲.」). 『索隱』은 후한 말 사람인 服虔을 인용하여, “(徙·筰都는) 두 國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韋昭의 말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徙縣은 蜀(郡)에 屬한다. 筰縣은 越嶲(郡)에 있다.”라고 하였다. 또, 『集解』와 마찬가지로 徐廣을 인용하여, “筰의 音은 昨이다.”라고 하였다(服虔云 : 「二國名.」 韋昭云 : 「徙縣屬蜀. 筰縣在越嶲.」 徐廣云 : 「筰音昨.」). 『正義』는 徙의 音은 斯라 하고, 『括地志』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筰州는 본디 西蜀의 徼外에 있었고, 貓羌嶲라 불렀다. 「地理志」에 이르기를 徙縣이라 하였다. 『華陽國志』에 따르면, 雅州의 邛郲山은 본디 이름이 邛筰山이었는데, 邛人과 筰人의 境界에 있었던 까닭이다.”라고 하였다(徙音斯. 括地志云 : 「筰州本西蜀徼外, 曰貓羌嶲. 地理志云徙縣也. 華陽國志雅州邛郲山本名邛筰山, 故邛人·筰人界.」).
『考證』은 丁謙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徙國은 武帝時에 徙縣이 되었으며, 나중에 屬國都尉에 예속되었다. 『會典』에서는 곧 雅州 西쪽의 天全州라고 말하였다. 筰都는 漢이 蜀郡 嚴道縣으로 삼았으며, 지금은 淸溪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1). 『考證』에서 筰都를 漢代에 嚴道縣으로 삼았다고 했는데, 이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西南夷列傳」에서 司馬遷은 기원전 111년에 비로소 筰都를 沈黎郡으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嚴道縣은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 전국시대 秦나라는 기원전 329年에 蜀나라를 합병하고, 臨邛(현재의 邛崃市 臨邛鎭)로부터 지금의 榮經에 이르는 길을 닦고, 그 길의 이름을 엄도라 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316年에 秦은 이곳에 嚴道縣을 설치하여, 蜀國守에 예속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285年(秦昭襄王 22年)에 蜀國守를 폐하고 蜀郡을 설치한 뒤 엄도현을 촉군에 예속시켰다. ‘鄧氏錢’으로 유명한 漢文帝의 寵臣 鄧通은 바로 이 嚴道縣의 銅鑛을 사여받아 鑄錢하였다(於是賜鄧通蜀嚴道銅山, 得自鑄錢, 「鄧氏錢」 布天下. 其富如此. : 『史記』 卷125 「佞幸列傳」 第65, 3192쪽).
方國瑜는 筰都를 邛都와 묶어 설명하면서, 그 부족의 거민이 모두 옛 羌人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위치는 三國時代의 漢嘉郡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었으며, 지금의 四川省 남부 雅安地區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남과 북으로 邛과 莋이 거처가 나뉘어져 있었으나, 잦은 천사로 잡처하게 되었다고 한다(方國瑜, 1987 : 13 ~ 14). 한편, 童恩正은 邛都와 筰都를 종족적으로 구분하였다. 邛都는 ‘濮系의 僰族’으로 분류한 반면 筰都(ts'a)는 徙(si)와 함꼐 氐·羌系로 구분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徙’와 ‘斯’가 고대에 音이 같았다는 점, 그리고 ‘徙’를 『史記』 「司馬相如列傳」에 ‘斯楡’로, 『華陽國志』에서는 ‘斯叟’로 칭했다는 점을 들어 ‘徙’와 ‘叟(so)’를 연결시켰다. 그리고 ‘叟’를 중국 西南지역 氐羌 계통 소수민족의 범칭으로 규정하였다. 아울러 徙(斯)는 氐族에 속하며 土着의 유형에 속한다고 추정하였다. 이에 비하여 筰都는 ‘移徙’ 유형의 羌族에 속한다고 논증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거주지 또한 둘 다 오늘날의 雅安지구에서 활동하였다고 하면서도, 徙는 오늘날의 사천성 天全縣 지역으로 筰都는 오늘날의 漢源 근처로 세분하여 비정하였다(童恩正, 1998 : 99 ~ 104).
藍勇은 橫斷山脈 六江文化를 네 지역으로 구분하면서, 四川省 雅安地區 북부의 天全·寶興·蘆山·石綿 등지의 청동기 문화를 川西徙文化로 규정하고, 그 문화적 특징으로 土坑墓와 石棺葬의 병행과 三叉格 銅劍을 들었다. 여기서 6강이란 大渡河, 岷江 상류, 雅礱江, 金沙江 상류, 怒江 상류, 灡滄江 상류를 지칭한다(藍勇, 1997 : 17 ~ 18). 이와 관련하여 김병준은 寶興縣에서 발굴된 여러 좌의 石棺葬墓에서 발견된 자루가 굽어 있는 馬鞍形 銅劍과 三叉格(‘山’字形) 동검은 大渡河 이서의 石棺葬, 혹은 四川省 西南部의 邛都, 雲南省 서부의 昆明문화와 일치하는 것들이라고 하였다(김병준, 1997 :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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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크다. 작(筰)으로부터 동북쪽에도 군장이 열을 헤아리는데, 염(冉)과 방(駹)주 015
각주 015)
冉駹 : 중화서국본에서 염과 방에 따로 옆줄을 그어 표시한 까닭에 염과 방의 한자 표기를 따로 나누어 달았다. 『索隱』은 後漢代의 학자인 應劭(約153 ~ 196)의 말을 인용하여, “汶江郡은 본디 冄駹(ranmang)이다. 音은 亡(망)과 江(강)의 반절이다.”라고 하였다(案 : 應劭云 「汶江郡本冄駹. 音亡江反」). 『正義』는 『括地志』를 인용하여, “(冄駹은) 蜀의 西쪽 徼外의 羌으로, 茂州·冄州는 본디 冄駹國의 땅이다. 『後漢書』에서 이르기를, 冄駹 그 山에는 6夷, 7羌, 9氐가 있는데, 각기 部落을 가졌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括地志云 : 「蜀西徼外羌, 茂州·冄州本冄駹國地也. 後漢書云冄駹其山有六夷·七羌·九氐, 各有部落也.」). 『考證』은 丁謙의 말을 인용하여, “冉駹은 漢이 汶山縣으로 삼았고, 지금은 茂州를 말한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1).
童恩正은 冉駹은 冉과 駹 두 족속이며, 지금의 사천 서부 阿壩藏族自治州 경내가 그 활동 범위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氐人의 일종이라고 하였다(童恩正, 1998 : 105 ~ 109). 馬長壽는 冉駹이 隋唐시기의 嘉良이며, 近代의 嘉戎이라고 하면서, 氐도 아니고 羌도 아니라 하였다. 嘉戎, 즉 冉駹은 遠古시기 西藏의 琼部로부터 東遷하여 온 一族이라고 하였다(馬長壽, 1984 : 25 ~ 26). 藍勇은 현재의 阿壩羌族藏族自治州 경내를 고대 冉駹민족의 취거지구로 규정하고,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를 ‘川西北冉駹文化’로 명명하였다. 이 문화의 전형적 유지는 岷江 상류 유역의 理縣, 汶川, 茂汶(茂縣과 汶川)의 沿河 兩岸이라고 지적하였으며, 그 대표적 문화적 특징으로 石棺葬과 石碉樓를 꼽았다. 석관장이란 토갱을 만들고 주변에 열석을 쌓은 후 그 위에 板岩이나 片麻巖을 깨뜨려 만든 장방형의 석판을 계단 모양으로 덮어 만든 석관으로 장례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석조루란 고대 염방 민족의 주거 건축으로 돌을 쌓아 집을 만든 것이며, “邛籠”이라 부른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羌族의 중요 주거 형태이다(藍勇, 1997 : 17). 이 茂汶지역의 문화와 관련하여 김병준은 이 지역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石棺葬·雙耳罐의 형식을 띠고 있으면서도, 은주시기 이래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川西평원 蜀文化로부터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다고 하면서, 『華陽國志』에서 ‘以汶山爲畜牧’이라고 하여 촉국의 범위를 茂汶지구까지로 기록한 것과 고고자료의 결과가 일치한다고 지적하였다(김병준, 1997 :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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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장 크다. 그 풍속은 어떤 이들은 정착하여 살고, 어떤 부류는 옮겨 다니며, 촉(蜀)의 서편에 있다. 염과 방으로부터 동북쪽으로도 군장이 열을 헤아리는데, 백마(白馬)주 016
각주 016)
白馬 : 『索隱』;“살피건대, 夷邑의 이름이고, 곧 白馬氐이다(案 : 夷邑名, 卽白馬氐).” 『正義』;“『括地志』에 이르기를, ‘隴右의 成州와 武州는 모두 白馬氐이며, 그 豪族 楊氏는 成州의 仇池山 위에 居한다.’라고 하였다(括地志云 : 「隴右成州·武州皆白馬氐, 其豪族楊氏居成州仇池山上」).”
『考證』에서는 丁謙의 말을 인용하여, “白馬는 漢이 陰平道로 삼았으며, 지금은 階州 成縣 서남쪽의 白馬關 지역이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2). 司馬遷은 白馬를 ‘氐類’라고 하였고, 馬長壽도 이를 좇아 백마를 氐族의 전형으로 보았다(馬長壽, 1984 : 10). 王文光은 ‘白馬羌’이라 하여 羌의 일종으로 보았으며, 그 주요 분포지역을 後漢시기의 蜀郡 北部都尉·廣漢屬國 경내, 즉 오늘날의 四川省 綿陽지구 북부와 甘肅省 武都지구 남부의 감숙성과 사천성의 경계지역으로 비정하였다. 따라서, ‘廣漢羌’이라 칭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또, 백마강의 일부분은 나중에 발전하여 오늘날 四川省 平武 등지의 白馬藏人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王文光, 1997 : 241 ~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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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가장 크며, 모두 저(氐)주 017
각주 017)
氐 : 中國 西北지역의 古代民族으로 陝西省 甘肅省과 四川省의 변계지구에 거주하였다. ‘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同源異派’說과 ‘不同’說이 있다. 馬長壽는 氐와 羌은 기원전 16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존재하였던, 상대에 이미 그 기록이 존재하는 역사가 유구한 민족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다른 민족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로 원시 분포 중심지의 거리 차이, 자칭 및 타칭의 차이, 복식과 건축형태 등 문화와 생활 습속의 차이 등을 들었다. 馬長壽가 말한 氐의 원시 분포 중심지는 甘肅省 동남부의 西漢水·白龍江 유역이고, 羌의 원시 분포 중심지는 靑海省 동부의 河曲지역 및 그 以西 以北 등의 지역이다. 氐의 自稱은 ‘蓋稚’이고, 강의 자칭은 ‘羋’, ‘綿’ 혹은 ‘瑪’이다. 그리고 氐와 羌은 漢人들이 붙여 준 이름이다(馬長壽, 1984 : 1 ~ 22). 王文光은 氐와 羌이 매우 깊은 친연관계에 있으며, 현대의 언어학적 관점에서 보면 모두 漢藏語系 藏緬語族에 해당하는 까닭에 항상 氐羌이 연칭된다고 하였다(王文光, 1997 :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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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부류이다. 이들은 모두 파촉(巴蜀)의 서남 바깥에 있는 만이(蠻夷)이다.

  • 각주 001)
    司馬遷은 「自序」에서 “唐蒙이 使者로 가서 夜郞을 경략하여 交通하고, 邛·筰의 君이 內臣이 되어 吏를 받아들이기를 請한 까닭에, 「西南夷列傳」을 지었다.”라고 하여 「서남이열전」을 지은 경위를 밝히고 있다. 瀧川資言(1865 ~ 1946)의 『史記會注考證』(이하 『考證』)에서는 丁謙(1843 ~ 1919)과 凌雉隆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정겸은 말하기를 “漢의 西南夷는 지금의 四川 남쪽, 貴州의 西南 및 雲南 全省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凌雉隆은 “이 열전은 夜郞·滇 두 國을 머리로 하여 대개 漢에서 封建한 곳이다.”라고 말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89 ~ 4690). 丁謙은 청말부터 민국시기까지 활동한 지리학자이며, 凌雉隆은 明代의 관료이자 학자로 1540년에 進士에 급제하였으며 『漢書評林』·『史記評林』 등의 저서가 있다.
    唐代 張守節의 『史記正義』(이하 『正義』)에서는 “[西南夷는] 蜀의 남쪽에 있다(在蜀之南).”라고 하였다. 『사기』에는 ‘西南夷’라고 되어 있어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 『漢書』 「西南夷列傳」에서는 ‘(西)[南]夷’라 표기하였다. 전체 기사의 구조로 보건대, 『漢書』의 표기가 옳다고 생각된다. ‘서남이’로 보면, “서남이의 군장이 열 몇 있는데, 그 중 夜郞이 가장 크다.”라고 해석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서남이’의 범주가 문제가 된다. 『史記』 「西南夷列傳」의 말미에 “西南夷 君長이 백을 헤아리는데……”라 기술한 부분과도 모순일 뿐더러, 滇·邛都·徙·筰都·冉駹·白馬 등의 大君長 및 昆明·雟 등의 종족집단을 제외한 ‘西南夷’로 불리는 집단이나 공간이 따로 존재했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南夷’는 蜀郡 남쪽의 모든 蠻夷에 대한 다소 추상적 통칭이라기보다는 犍爲郡과 牂牁郡에 ‘屬’했던 蠻夷들만을 구체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唐代 司馬貞의 『史記索隱』(이하 『索隱』)에서도 ‘南夷’를 ‘犍爲(郡)와 牂柯(郡)’ 내지 ‘牂柯(郡)와 夜郞(國)’을 가리키는 것이라 풀고 있다(『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3047;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3052). 이는 漢武帝 시기 서남이 개척이 唐蒙의 ‘夜郞道’, ‘南夷道’ 개척으로부터 시작된 것과 관련이 있다. 이에 비하여 司馬相如가 회유하여 ‘約爲置吏’한 ‘邛·筰’은 ‘西夷’라 칭하였다. 따라서, 『漢書』의 기술을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史記』 기사의 ‘西南夷’는 ‘南夷’의 誤寫로 보아야 할 것이다. 『考證』은 “西字는 衍字인 듯싶다. 『漢書』에는 없다.”라고 한 中井積德의 말을 소개하고 있다(『瀧川資言, 1935 : 4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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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索隱』 : 劉氏는 [數의] 音을 所와 具의 半切이라고 하였고, 鄒氏는 音을 所와 主의 半切이라고 하였다(劉氏音所具反. 鄒氏音所主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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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사마천이 말하는 야랑(夜郞)은 ‘國’名이다. 남이의 10여 군장국 중 하나로 야랑후 혹은 야랑왕의 邑과 야랑에 복속한 주변 小邑들로 구성된 ‘國’이었겠지만, 『後漢書』에 이르면 『史記』나 『漢書』에서 말하는 남이 10여 군장의 권역을 모두 아우르는 ‘國’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索隱』에서 司馬貞은 『後漢書』를 인용하여 “夜郞은 東으로 交阯에 接하고, 그 땅은 胡南에 있으며, 그 君長은 본디 竹에서 나와, 竹을 姓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按 : 後漢書云 「夜郞東接交阯, 其地在胡南, 其君長本出於竹, 以竹爲姓也」). 『사기』와 『후한서』의 이러한 인식의 차이, 즉 ‘야랑’이라는 정치공동체가 이미 소멸한 상태에서 ‘야랑’의 권역을 더욱 크게 묘사하는 『후한서』의 인식의 배경을 추적해 볼 만하지만, 아직 이에 대한 구체적 연구는 없다. 대부분의 정치공동체의 이름, 특히 오래 존속한 정치공동체의 이름은 그 정치공동체가 소멸하더라도 그 인간 집단과 그 인간 집단이 채운 공간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살아남는다. ‘야랑’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安帝 永初 元年(107), 九真郡 徼外의 夜郎 蠻夷가 ‘舉土內屬’하였다는 『後漢書』 「孝安帝紀」(207쪽)와 「南蠻西南夷列傳」(2837쪽)의 기록은 ‘야랑국’이 교지와 접했다는 기록이 전혀 근거 없는 인식이 아님을 보여 준다.
    夜郞은 또한 郡縣의 이름이기도 하였다. 『索隱』에서 韋昭의 말을 들어 “漢代에 縣을 설치하여 牂柯郡에 속하게 하였다(韋昭云 : 「漢爲縣, 屬牂柯」).”라고 하였듯이, 야랑은 漢代에 牂柯郡에 속한 현이었다. 그리고 晉代와 南朝시기에는 郡의 이름이었다. 그 위치와 강역에 대하여는 설이 다양하다. 『索隱』에서는 “犍爲屬國이다.”라고 한 荀悅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荀悅云 : 「犍爲屬國也」), 『正義』 또한 대체로 이에 동의하고 있다. 『正義』는 “지금 瀘州 남쪽 큰 강 南岸의 協州와 曲州는 본디 夜郞國이었다(今瀘州南大江南岸協州·曲州, 本夜郞國).”라고 했는데, 이는 대체로 후한대의 건위속국의 위치 및 강역에 부합한다. 한편, 『考證』은 姚范(1702 ~ 1771)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는 “夜郞은 지금의 遵義府 桐梓縣이고, 瀘州의 남쪽 曲靖州, 貴州의 普安州, 石阡府 興隆, 思南과 廣西 諸州 대부분이 夜郞의 땅이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0). 요범은 현재의 귀주성 桐梓縣을 그 중심지로, 운남성의 동부, 귀주성의 상당부분과 廣西省의 서부 일부를 야랑국의 강역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학자들 또한 설이 분분하다. 朱俊明에 따르면, 우선 야랑국의 강역에 관하여는 크게 漢代 牂柯郡의 강역에 해당한다는 說(一郡說)과 장가군을 넘어서 여러 군이 경지에 해당한다는 설(數郡說)이 있고, 일군설과 수군설에 대체로 각기 3종씩의 구체적 설이 있다고 한다. 대체로 작게는 현재 귀주의 서남과 서북, 운남의 동북과 동남 그리고 광서의 북쪽 일부를 포함하는 영역을 설정한다. 그리고 크게는 북쪽과 서북쪽으로 귀주성 전역과 사천 남부와 운남 동북을 포괄하고, 남쪽으로는 현 광서성의 田林과 南丹까지, 동쪽으로는 湖南省의 新晃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서쪽으로 운남의 곡정과 육량에 달하는 지역을 설정하기도 하였다(夜郞史探 朱俊明, 1988 : 10). 2000년에 貴州의 夜郞 연구 50년을 평가하는 글을 내어놓은 熊宗仁은 여전히 주준명의 정리를 되풀이하고 있다(熊宗仁, 2000 : 5).
    또, 주준명에 따르면, 夜郞國의 핵심세력을 且蘭部로 보는 설과 夜郞部로 보는 설이 나뉘는데, 차란부의 위치는 현재의 貴州省 麻江·福泉·黃平 일대로 보는 데 별 이의가 없다. 이에 비하여 야랑부의 경우는 그 설이 네 가지로 나뉘는데, ① 현재의 귀주성 서남부의 黔西 南州 및 六盤水市 일대로 보는 설, ② 현재의 운남성 동북쪽의 宣威·霑益 일대로 보는 설, ③ 현재의 귀주의 서남지구, 즉 望謨(蔣徹,1994)과 貞豊 일대로 보는 설, ④ 현재의 귀주성 서북부와 운남 동북부 일대로 보는 설이 그것이다(夜郞史探 朱俊明, 1988 : 10 ~ 11). 웅정인의 정리 또한 이와 비슷한데, 다만 야랑부 중심설의 중심에 대하여 두 가지 설을 추가하였다. 즉, 赫章縣 可樂鄕(劉義, 2004)설과 귀주성 중부의 安順·六枝 일대 설이다(熊宗仁, 2000 : 5). 그리고 花溪의 燕樓村이나 桐梓縣의 夜郞鎭, 興義縣과 銅仁 일대(朱路, 2000 : 44) 등을 야랑왕의 古都로 지적하는 연구들 또한 이들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최근에는 〈金氏族譜〉 일부와 대량의 古墓群과 古城池 유지 등이 발견된 長順縣 廣順鎭 일대가 유력한 후보지로 주목되고 있다(朱路, 2000 : 44 ~ 45;沙先貴, 2005 : 11 ~ 13).
    夜郞의 族屬은 ‘百越系統’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설명이다. 운남을 비롯한 서남지역 고대 소수민족의 족속은 크게 세 개의 갈래로 정리된다. 氐羌系統, 百越系統, 百濮(孟高棉)系統이 그것이다(尤中, 1994 : 19 ~ 35;馬曜, 1983 : 1 ~ 24;王文光, 1997;240 ~ 253). 百越系統에 속하는 고대의 족명으로는 ‘濮’과 ‘僚’ 등이 있고, 越·西甌·雒越·夜郞·句町·漏臥·滇越 등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백월 계통이 분포한 지역은 南越(지금의 廣東·廣西), 交趾(현재의 월남 북부), 夜郞, 同師(현재의 雲南省 保山) 등의 이남지대이다(尤中, 1994 : 30). 현재 소수민족과의 관계에 관하여는 설이 분분한데, 현재의 仡佬族이 바로 야랑의 후예라는 설도 있고, 현재 귀주 일대에 거주하는 彝族이라는 설도 있다. 아울러, 고대의 야랑인이 점차 변하여 현재의 仡佬族과 布依族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현재의 仡佬, 布依, 侗, 水, 壯 여러 족이 고대의 야랑과 어느 정도씩 관련을 갖는다고 하는 설도 있다(夜郞史探 朱俊明, 1988 : 9). 다만, 貴州에 거주하며 ‘竹崇拜’의 풍속을 가진 仡佬族과 夜郞과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연구가 많다. 熊宗仁은 夜郞의 족속 및 주체민족에 관한 연구를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① 周代 徐淮夷 중의 謝人이 천사하여 왔다는 謝人說, ② 현재 옛 夜郞國의 강역 내에 거주하는 布依·水·苗·彝·仡佬 중 흘료가 야랑왕족의 후손이며 토착민족이라는 가정 위에 흘료의 선민인 僚人과 濮人이 야랑의 주체민족이었다는 仡佬族先民濮人說, ③ 백월 계통의 료인과 남만계의 복인, 현 이족의 선민인 강족이 모두 주체민족이었다는 越·濮·羌공동주체민족설, ④ 야랑은 羌 계통의 夷·僰과 百越 계통의 僚人 3개 민족이 연합하여 만든 것이며, 현 彝族의 선민인 夷가 수령의 지위를 가졌다는 彝族先民說, ⑤ 百越說이 그것이다(熊宗仁, 2000 : 6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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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靡莫 : 『索隱』은 靡莫을 夷邑의 이름이며 ‘滇’과 同姓이라고 하였는데(夷邑名, 滇與同姓), 미막은 읍명보다는 族名으로 인식되는 측면이 강하다. 『正義』에서 미막에 대하여 蜀 南쪽 아래로 서쪽에 이르기까지 존재한다고 하고, 唐代에 姚州 北쪽에 존재하였던 靡非라는 족속을 곧 靡莫의 夷라고 한 것(在蜀南以下及西也. 靡非在姚州北, 去京西南四千九百三十五里, 卽靡莫之夷) 또한 읍명보다는 족명으로 인식한 사례이다. 方國瑜는 『中國西南歷史地理考釋』(上)에서 羌族語를 조사한 周汝成이 제기한 미막이 옛 羌人部族이라는 설을 소개하기도 하였다(方國瑜, 1987 : 13). 滇과 靡莫 그리고 僰을 모두 氐·羌系로 보는 시각은 그 유래가 깊다(馬曜, 1983 : 8 ~ 10;馬曜, 1987 : 54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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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滇’은 國名이자 邑名이며 部落名이다. 현재는 운남성을 지칭하는 별칭으로 쓰이기도 하며, 운남성을 지칭하는 별칭으로 사용된 것은 명청대 이후의 일이다. 『考證』에서 인용한 丁謙((1843 ~ 1919)은 ‘滇國’이 ‘滇池’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雲南의 昆明이라고 했지만(『考證』 : 4690), 이는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우선 莊蹻의 ‘入滇’ 전설을 어디까지 신빙해야 할 지 알 수 없지만, 장교의 立國이 해당 지역 최초의 立國이라 하더라도, ‘전’이라는 명칭이 어디에서 기원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方國瑜는 滇國의 도읍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漢代 滇池縣의 위치를 운남성 晉寧縣의 晉城區 및 呈貢縣 지역으로 비정하였고(方國瑜, 1987 : 61), 張增祺는 문헌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지하여 전국 도성의 위치를 晉寧縣 晉城鎭으로 비정하였다(張增祺, 1997 : 3 ~ 10).
    滇國의 강역, 즉 滇을 비롯한 ‘靡莫之屬’ 10여 君長의 강역은 대체로 後漢代의 益州郡, 즉 前漢代 益州郡에서 西部都尉 관할지역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滇池 주변의 平壩地區로부터 曲靖의 평패지구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한다. 張增祺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 즉 滇文化 유물의 분포 범위를 기초로 하여 전국의 강역을 비정하였는데, 서쪽 경계는 安寧縣 太極山 古墓群(晉寧 石寨山 유지로부터 70km 거리), 동쪽 경계는 지금의 路南에서 瀘西에 이르는 선, 남쪽 경계를 新平·元江에서 个舊에 이르는 선, 북쪽 경계는 曲靖·東川 이북의 會澤·昭通 일대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전국의 영역을 현재의 昆明市와 東川市 전부, 曲靖과 玉溪지구 대부분, 紅河州·楚雄州와 文山州의 일부분을 포괄하는 지역으로 비정하였다(張增祺, 1997 : 10 ~ 12). 물론 滇文化 표지 유물의 분포지역이 바로 滇國이라는 정치공동체의 강역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滇國의 주민에 관하여는 앞서 설명한 바 있듯이 靡莫과 僰을 동일한 계통으로 보고, 그 주체 민족을 氐羌系로 인정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尤中, 1994 : 37 ~ 39;馬曜, 1983 : 8 ~ 10). 또, ‘僰’으로 보지만, 氐羌系가 아니라 토착의 濮系로 보는 시각도 있다(童恩正, 1998 : 98). 이에 비하여 최근에 이르러 ‘滇’과 ‘僰’을 분리하여 滇人을 백월 계통에 속하는 민족군체로 정리하거나(王文光, 1997 : 249 ~ 251;王文光·龍曉燕·陳斌, 2005 : 95 ~ 105), 滇國의 주체 민족을 ‘越人’으로 보는 시각도(張增祺, 1997 : 32 ~ 52) 늘어나고 있다. 장증기의 경우 滇國에는 주체민족인 ‘월인’ 이외에도 ‘濮人’, ‘昆明人’, ‘羌人’, ‘叟人’, ‘漢人’ 등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음을 논증하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張增祺가 여기에서 언급한 ‘叟人’은 塞人, 즉 사카족(Saka)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란계로, 본디 발하시 호수(Balkhash Lake)와 이직쿨 호수(Issyk-kul Lake) 일대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기원전 3세기 ~ 2세기 흉노의 冒頓이 大月氏를 압박하자, 대월지가 伊犁河 유역으로 이동하게 되고, 이의 압박을 받은 사카족이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그 한 갈래가 靑藏高原을 건너 운남 서부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張增祺, 1997 : 46). 2005년에 출간된 『中國西南民族關係史』는 叟族에 관한 張增祺의 설을 지지하였다(王文光·龍曉燕·陳斌, 2005 : 105 ~ 107).
    劉宋代 裴駰의 『史記集解』(이하 『集解』)에서는 如淳의 말을 인용하여, “滇의 音은 ‘顚’이다. 顚馬가 나는 그 國이다.”라고 하였고(如淳曰 : 「滇音顚. 顚馬出其國也.」), 『索隱』에서는 崔浩의 말을 인용하여, “나중에 縣이 되었으며, 越嶲太守에 의해 다스려졌다.”라고 하였다(崔浩云 : 「後爲縣, 越嶲太守所理也.」). 『索隱』이 소개한 崔浩의 말은 근거를 찾기 어렵지만, 越嶲郡의 설치와 益州郡의 설치에는 2년의 시차가 있으므로, 漢과 滇王 사이에 唐蒙과 夜郞侯 多同 사이에 맺어진 ‘約’과 같은 수준의 ‘約’이 존재하였다면,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 『正義』는 “昆州·郞州 等은 본디 滇國으로, 京師와의 거리가 5,370里이다(昆州·郞州等本滇國, 去京西五千三百七十里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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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考證』에서 인용한 丁謙은 “邛都는 지금 四川의 寧遠府이다.”라고 했는데(瀧川資言, 1935 : 4690), 영원부는 오늘날의 四川省 남부의 西昌에 치소를 두었다. 方國瑜는 邛都가 漢代에 越嶲郡에 있었고, 오늘날의 西昌 및 涼山地區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부족의 거민은 옛 羌人이라고 하였다(方國瑜, 1987 : 13 ~ 14). 이에 비하여 童恩正은 1979년에 저술한 『古代的巴蜀』에서 ‘僰’과 ‘濮’을 사실상 동일시하고, 邛都를 滇·夜郞과 함께 濮系의 僰族으로 규정하였다(童恩正, 1998 : 94 ~ 99). 한편, 『中國西南民族關係史』는 邛都를 滇·夜郞과 함께 百越 계통에 속하는 족군으로 분류하였다(王文光·龍曉燕·陳斌, 2005 : 102 ~ 105).
    『集解』는 漢文帝 6년(전158) 모반한 淮南王 長을 蜀의 ‘嚴道·邛都’로 유배하는 내용의 「文帝紀」 기사에 주를 달면서 東晉末 劉宋初 사람인 徐廣의 말을 인용하였다. 徐廣이 말하기를, “『漢書』의 어떤 판본에는 (‘都’字를) ‘郵’字로 적었으며, 어떤 판본에는 바로잡는다며 이르기를 ‘邛僰’이라 하였다. 邛都는 본디 西南夷이며, 이때(문제 6년)에는 아직 嚴道와 교통하지 않았고, 邛僰山이 있다.”라고 하였다(『史記』 卷10 「孝文本紀」 第10, 426쪽). 현행 中華書局 표점본 『漢書』의 같은 기사에는 ‘邛都’가 생략되어 있다. 文帝 당시 (漢朝의 입장에서) 嚴道와 邛都 사이에 아직 교통이 없었다는 서광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正義』 또한 앞 「文帝紀」의 기사에 주를 달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邛은 其(기)와 恭(공)의 半切(공)이다.『括地志』에서 이르기를, “嚴道는 지금 縣이 되었으니, 곧 邛州에서 관할하는 縣이다. 縣에 蠻夷가 있으면 일러 道라 하는 까닭에 嚴道라 말하는 것이다.邛都縣은 본디 邛都國인데, 漢이 縣으로 만들었으며, 지금의 嶲州이다. 「西南夷傳」에 이르기를 ‘滇池 以北으로 君長이 열을 헤아리는데, 邛都가 가장 크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다.” 생각컨대, 羣臣이 請하여 淮南王 長을 蜀의 嚴道에 두자고 한 것은 여기가 아니라, 더 멀리 邛都 서편에 있는 邛僰山이었을 것이다. 邛僰山은 雅州의 榮經縣 경계에 있다. 榮經은 武德 年閒에 설치하였는데, 본디 秦의 嚴道 땅이다. 『華陽國志』에서 이르기를, “邛筰山은 옛 邛人과 筰人의 경계이다. 山과 巖石이 가파르고 높은데다, 굽이굽이 아홉 번은 꺾어져야 이를 수 있으며, 아래위로 얼음이 얼어있다. 생각컨대, 바로 (漢代의) 王尊이 올랐던 산이다. 지금 九折阪으로부터 서남쪽으로 가서 嶲州에 이르는 길은 산에 비가 많이 내리고 개인날이 적어 속칭 ‘漏天’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史記』 卷10 「孝文本紀」 第10, 426쪽). 여기서 말하는 邛僰山은 현재 四川省 서부에 있는 邛崃山(Qiong lai Shan)이며, 嚴道는 현재 四川省 雅安의 榮經縣에 해당한다. 그리고 王尊은 漢元帝時 益州刺史가 되어 部內를 순시하던 중 邛崍山에 오른 적이 있는 사람이다(『漢書』 卷76 「王尊傳」 第46, 3229쪽). 참고로 「司馬相如列傳」에 따르면, “邛都를 비롯한 筰都, 冉駹의 西夷 지역에도 秦代에 郡縣이 설치된 바 있다(『史記』,3046쪽).”고 하는데,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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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索隱』;魋는 『漢書』에서 ‘椎’라 적었는데, 音은 直과 追의 半切이다. 結은 音이 ‘計’이다(魋, 漢書作 「椎」, 音直追反. 結音計). 여기에서는 『索隱』을 좇아 ‘魋結’의 ‘結’은 ‘계’로 읽었다. 『考證』에서는 『漢書』의 師古注를 인용하였는데, “結은 髻라고 읽는데, 상투를 만들되 몽치[椎]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0). 張增祺는 이 ‘추계’의 습속을 ‘滇人’을 ‘越人’으로 판단하는 근거의 하나로 제시한 바 있다(張增祺, 1997 : 34). 물론 ‘추계’가 월인 만의 습속은 아니었다. 「朝鮮列傳」에도 ‘추계’가 보인다(『史記』 : 2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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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邑과 聚 모두 집주의 주거형태를 지칭하며, 취는 보통 읍보다 규모가 작은 취락을 지칭한다. 여기에서는 구체적 취락의 형태를 지칭하기보다는, 이들이 정착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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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同師 : 『集解』와 『索隱』에서도 三國時代 吳나라 사람인 韋昭의 말을 인용하여 지적하였듯이, 同師는 邑의 이름이다. 『색은』은 또 『漢書』에서는 ‘桐師’로 적고 있음을 지적하였다([集解]韋昭曰 : 「邑名也.」; [索隱]韋昭云邑名. 漢書作 「桐師」.). 『考證』에서는 丁謙의 말을 인용하여 “桐師는 滇國의 西南 邊界이다. 『讀史兵略』에서 이르기를 곧 龍陵縣이라고 했는데, 사실에 가깝다.”라고 했다(瀧川資言, 1935 : 4690). 龍陵은 오늘날의 雲南省 保山地區의 龍陵이다. 方國瑜는 同師가 嶲唐의 지역에 있었다고 하고, 嶲唐의 지역을 지금의 保山이라고 하여 결과적으로 동사의 소재를 현재 雲南의 保山으로 비정하였다(方國瑜, 1987 : 15, 20). 尤中 또한 保山으로 비정하였다(尤中, 1994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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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0)
    楪楡 : 『集解』와 『索隱』에서는 韋昭를 인용하여 “楪의 音은 葉”이라고 했는데([集解] 韋昭曰 : 「在益州. 楪音葉.」 [索隱] 韋昭曰 : 「益州縣. 楪音葉), 여기에서도 이를 따라 楪楡를 ‘엽유’라고 읽었다. 『正義』 또한 음을 ‘葉’이라 하였다(上音葉). 『正義』에서는 또 “楪澤은 靡의 北쪽 100餘 里에 있다. 漢의 楪楡縣은 澤의 西쪽 益都에 있다. 靡非는 본디 葉楡王의 屬國이다(楪澤在靡北百餘里. 漢楪楡縣在澤西益都. 靡非, 本葉楡王屬國也).”라고 했는데, 『正義』의 지적은 이른바 ‘白子國’에 관한 여러 설화들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하다. 백자국에 관하여는 藤澤義美(1969 : 15 ~ 44)와 林超民(1991) 참조.
    『考證』에서는 丁謙의 말을 인용하여, “葉楡는 漢의 縣이고 益州郡에 屬하며, 나중에는 永昌郡에 예속되는데, 葉楡水로 인하여 이름을 얻었다. 葉楡水는 곧 元江의 上游이며 그 발원지는 현재의 雲南縣 北梁王山에 있으니, 縣이 운남 땅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1). 엽유는 일반적으로 현재의 雲南省 大理로 비정된다(尤中, 1994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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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集解』;徐廣이 말하기를 “永昌(郡)에는 嶲唐縣이 있다.”라고 하였다(徐廣曰 : 「永昌有嶲唐縣」).
    『索隱』;崔浩가 이르기를, “(嶲와 昆明은) 두 國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韋昭가 이르기를, “嶲는 益州(郡)의 縣이다.”라고 하였다(崔浩云 : 「二國名.」 韋昭云 : 「嶲, 益州縣」).
    『正義』;嶲의 音은 髓이다. 지금의 嶲州이다. 昆明은 嶲州의 縣이며, 대개 남쪽으로 昆明의 땅에 접해 있는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嶲音髓. 今嶲州也. 昆明, 嶲州縣, 蓋南接昆明之地, 因名也).
    『考證』은 丁謙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雟와 昆明은 葉楡와 桐師의 사이에 있으니, 마땅히 지금의 永昌·騰越·順寧 등의 지역이 된다. 師古의 注에 이르기를, 雟는 곧 雟州이고, 昆明은 그 동남쪽에 있으니, 곧 南寧州라고 했는데, 틀렸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1). 方國瑜는 嶲를 嶲唐으로 보아, 종족적으로 昆明과 분리하였다. 嶲唐은 지금의 雲南 保山지역에 해당하며, 현 雲南省 騰衝지역에 해당하는 滇越과 함께 哀牢夷의 거주지역이라고 비정하였다. 따라서, 수는 애뢰이의 일종이며, 그 주체민족은 옛 ‘濮人’, 즉 오늘날의 蒲曼族, 崩龍族, 佤族의 공통 선민이라고 비정하였다(方國瑜, 1987 : 19 ~ 22). 그리고 昆明에 대하여는 공도(월수군 지역), 전(익주군 동부 전지지역)과 함께 오래 전에 雲南지역으로 천사하여 온 羌族의 후예로 보았다. 그리고 그 거주지역을 익주군의 서부(楚雄지역 이서로부터 현재의 洱海地區에 이르는 지역)로 비정하였다(方國瑜, 1987 : 15 ~ 17).
    尤中은 嶲를 삼국시대 이후 주로 등장하는 叟와 동일시하였는데, 이 嶲(叟)족은 漢代의 越嶲郡 지역을 최대 거주지로 하는 氐·羌族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지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위 『史記』 기사에 등장하는 嶲는 곤명과 함께 현재의 운남성 保山 일대로부터 大理州 일대에 걸쳐 잡거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滇越과는 구분하였다(尤中, 1994 : 35 ~ 43). 王文光 또한 叟(嶲)族과 昆明族 모두 氐羌系統으로 분류하였으며, 『華陽國志』 「南中志」의 “夷人大種曰昆, 小種曰叟”라는 기사를 들어 昆明과 叟가 秦漢시기 중국 西南지구 인구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였음을 지적하였다(王文光, 1997 : 243 ~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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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正義』;編(변)은 步(보)와 典(전)의 半切(변)이며, 畜(축)은 許(허)와 又(우)의 半切이다. 모두 嶲와 昆明의 풍속이다(編, 步典反. 畜, 許又反. 皆嶲·昆明之俗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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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사마천의 이와 같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발굴자료에 의거하여 당시 大理 洱海지역의 주민, 즉 昆明族이 상당한 정도의 定住農耕社會를 형성하였음이 지적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藤澤義美, 1969 : 3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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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徙와 筰都 : 『集解』에서는 徐廣이 말하기를, “徙는 漢嘉(郡)에 있다. 筰은 音이 昨(작)이며, 越嶲(郡)에 있다.”라고 하였다(徐廣曰 : 「徙在漢嘉. 筰音昨, 在越嶲.」). 『索隱』은 후한 말 사람인 服虔을 인용하여, “(徙·筰都는) 두 國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韋昭의 말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徙縣은 蜀(郡)에 屬한다. 筰縣은 越嶲(郡)에 있다.”라고 하였다. 또, 『集解』와 마찬가지로 徐廣을 인용하여, “筰의 音은 昨이다.”라고 하였다(服虔云 : 「二國名.」 韋昭云 : 「徙縣屬蜀. 筰縣在越嶲.」 徐廣云 : 「筰音昨.」). 『正義』는 徙의 音은 斯라 하고, 『括地志』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筰州는 본디 西蜀의 徼外에 있었고, 貓羌嶲라 불렀다. 「地理志」에 이르기를 徙縣이라 하였다. 『華陽國志』에 따르면, 雅州의 邛郲山은 본디 이름이 邛筰山이었는데, 邛人과 筰人의 境界에 있었던 까닭이다.”라고 하였다(徙音斯. 括地志云 : 「筰州本西蜀徼外, 曰貓羌嶲. 地理志云徙縣也. 華陽國志雅州邛郲山本名邛筰山, 故邛人·筰人界.」).
    『考證』은 丁謙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徙國은 武帝時에 徙縣이 되었으며, 나중에 屬國都尉에 예속되었다. 『會典』에서는 곧 雅州 西쪽의 天全州라고 말하였다. 筰都는 漢이 蜀郡 嚴道縣으로 삼았으며, 지금은 淸溪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1). 『考證』에서 筰都를 漢代에 嚴道縣으로 삼았다고 했는데, 이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西南夷列傳」에서 司馬遷은 기원전 111년에 비로소 筰都를 沈黎郡으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嚴道縣은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 전국시대 秦나라는 기원전 329年에 蜀나라를 합병하고, 臨邛(현재의 邛崃市 臨邛鎭)로부터 지금의 榮經에 이르는 길을 닦고, 그 길의 이름을 엄도라 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316年에 秦은 이곳에 嚴道縣을 설치하여, 蜀國守에 예속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285年(秦昭襄王 22年)에 蜀國守를 폐하고 蜀郡을 설치한 뒤 엄도현을 촉군에 예속시켰다. ‘鄧氏錢’으로 유명한 漢文帝의 寵臣 鄧通은 바로 이 嚴道縣의 銅鑛을 사여받아 鑄錢하였다(於是賜鄧通蜀嚴道銅山, 得自鑄錢, 「鄧氏錢」 布天下. 其富如此. : 『史記』 卷125 「佞幸列傳」 第65, 3192쪽).
    方國瑜는 筰都를 邛都와 묶어 설명하면서, 그 부족의 거민이 모두 옛 羌人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위치는 三國時代의 漢嘉郡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었으며, 지금의 四川省 남부 雅安地區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남과 북으로 邛과 莋이 거처가 나뉘어져 있었으나, 잦은 천사로 잡처하게 되었다고 한다(方國瑜, 1987 : 13 ~ 14). 한편, 童恩正은 邛都와 筰都를 종족적으로 구분하였다. 邛都는 ‘濮系의 僰族’으로 분류한 반면 筰都(ts'a)는 徙(si)와 함꼐 氐·羌系로 구분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徙’와 ‘斯’가 고대에 音이 같았다는 점, 그리고 ‘徙’를 『史記』 「司馬相如列傳」에 ‘斯楡’로, 『華陽國志』에서는 ‘斯叟’로 칭했다는 점을 들어 ‘徙’와 ‘叟(so)’를 연결시켰다. 그리고 ‘叟’를 중국 西南지역 氐羌 계통 소수민족의 범칭으로 규정하였다. 아울러 徙(斯)는 氐族에 속하며 土着의 유형에 속한다고 추정하였다. 이에 비하여 筰都는 ‘移徙’ 유형의 羌族에 속한다고 논증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거주지 또한 둘 다 오늘날의 雅安지구에서 활동하였다고 하면서도, 徙는 오늘날의 사천성 天全縣 지역으로 筰都는 오늘날의 漢源 근처로 세분하여 비정하였다(童恩正, 1998 : 99 ~ 104).
    藍勇은 橫斷山脈 六江文化를 네 지역으로 구분하면서, 四川省 雅安地區 북부의 天全·寶興·蘆山·石綿 등지의 청동기 문화를 川西徙文化로 규정하고, 그 문화적 특징으로 土坑墓와 石棺葬의 병행과 三叉格 銅劍을 들었다. 여기서 6강이란 大渡河, 岷江 상류, 雅礱江, 金沙江 상류, 怒江 상류, 灡滄江 상류를 지칭한다(藍勇, 1997 : 17 ~ 18). 이와 관련하여 김병준은 寶興縣에서 발굴된 여러 좌의 石棺葬墓에서 발견된 자루가 굽어 있는 馬鞍形 銅劍과 三叉格(‘山’字形) 동검은 大渡河 이서의 石棺葬, 혹은 四川省 西南部의 邛都, 雲南省 서부의 昆明문화와 일치하는 것들이라고 하였다(김병준, 1997 :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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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冉駹 : 중화서국본에서 염과 방에 따로 옆줄을 그어 표시한 까닭에 염과 방의 한자 표기를 따로 나누어 달았다. 『索隱』은 後漢代의 학자인 應劭(約153 ~ 196)의 말을 인용하여, “汶江郡은 본디 冄駹(ranmang)이다. 音은 亡(망)과 江(강)의 반절이다.”라고 하였다(案 : 應劭云 「汶江郡本冄駹. 音亡江反」). 『正義』는 『括地志』를 인용하여, “(冄駹은) 蜀의 西쪽 徼外의 羌으로, 茂州·冄州는 본디 冄駹國의 땅이다. 『後漢書』에서 이르기를, 冄駹 그 山에는 6夷, 7羌, 9氐가 있는데, 각기 部落을 가졌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括地志云 : 「蜀西徼外羌, 茂州·冄州本冄駹國地也. 後漢書云冄駹其山有六夷·七羌·九氐, 各有部落也.」). 『考證』은 丁謙의 말을 인용하여, “冉駹은 漢이 汶山縣으로 삼았고, 지금은 茂州를 말한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1).
    童恩正은 冉駹은 冉과 駹 두 족속이며, 지금의 사천 서부 阿壩藏族自治州 경내가 그 활동 범위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氐人의 일종이라고 하였다(童恩正, 1998 : 105 ~ 109). 馬長壽는 冉駹이 隋唐시기의 嘉良이며, 近代의 嘉戎이라고 하면서, 氐도 아니고 羌도 아니라 하였다. 嘉戎, 즉 冉駹은 遠古시기 西藏의 琼部로부터 東遷하여 온 一族이라고 하였다(馬長壽, 1984 : 25 ~ 26). 藍勇은 현재의 阿壩羌族藏族自治州 경내를 고대 冉駹민족의 취거지구로 규정하고,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를 ‘川西北冉駹文化’로 명명하였다. 이 문화의 전형적 유지는 岷江 상류 유역의 理縣, 汶川, 茂汶(茂縣과 汶川)의 沿河 兩岸이라고 지적하였으며, 그 대표적 문화적 특징으로 石棺葬과 石碉樓를 꼽았다. 석관장이란 토갱을 만들고 주변에 열석을 쌓은 후 그 위에 板岩이나 片麻巖을 깨뜨려 만든 장방형의 석판을 계단 모양으로 덮어 만든 석관으로 장례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석조루란 고대 염방 민족의 주거 건축으로 돌을 쌓아 집을 만든 것이며, “邛籠”이라 부른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羌族의 중요 주거 형태이다(藍勇, 1997 : 17). 이 茂汶지역의 문화와 관련하여 김병준은 이 지역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石棺葬·雙耳罐의 형식을 띠고 있으면서도, 은주시기 이래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川西평원 蜀文化로부터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다고 하면서, 『華陽國志』에서 ‘以汶山爲畜牧’이라고 하여 촉국의 범위를 茂汶지구까지로 기록한 것과 고고자료의 결과가 일치한다고 지적하였다(김병준, 1997 :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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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白馬 : 『索隱』;“살피건대, 夷邑의 이름이고, 곧 白馬氐이다(案 : 夷邑名, 卽白馬氐).” 『正義』;“『括地志』에 이르기를, ‘隴右의 成州와 武州는 모두 白馬氐이며, 그 豪族 楊氏는 成州의 仇池山 위에 居한다.’라고 하였다(括地志云 : 「隴右成州·武州皆白馬氐, 其豪族楊氏居成州仇池山上」).”
    『考證』에서는 丁謙의 말을 인용하여, “白馬는 漢이 陰平道로 삼았으며, 지금은 階州 成縣 서남쪽의 白馬關 지역이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2). 司馬遷은 白馬를 ‘氐類’라고 하였고, 馬長壽도 이를 좇아 백마를 氐族의 전형으로 보았다(馬長壽, 1984 : 10). 王文光은 ‘白馬羌’이라 하여 羌의 일종으로 보았으며, 그 주요 분포지역을 後漢시기의 蜀郡 北部都尉·廣漢屬國 경내, 즉 오늘날의 四川省 綿陽지구 북부와 甘肅省 武都지구 남부의 감숙성과 사천성의 경계지역으로 비정하였다. 따라서, ‘廣漢羌’이라 칭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또, 백마강의 일부분은 나중에 발전하여 오늘날 四川省 平武 등지의 白馬藏人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王文光, 1997 : 241 ~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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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氐 : 中國 西北지역의 古代民族으로 陝西省 甘肅省과 四川省의 변계지구에 거주하였다. ‘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同源異派’說과 ‘不同’說이 있다. 馬長壽는 氐와 羌은 기원전 16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존재하였던, 상대에 이미 그 기록이 존재하는 역사가 유구한 민족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다른 민족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로 원시 분포 중심지의 거리 차이, 자칭 및 타칭의 차이, 복식과 건축형태 등 문화와 생활 습속의 차이 등을 들었다. 馬長壽가 말한 氐의 원시 분포 중심지는 甘肅省 동남부의 西漢水·白龍江 유역이고, 羌의 원시 분포 중심지는 靑海省 동부의 河曲지역 및 그 以西 以北 등의 지역이다. 氐의 自稱은 ‘蓋稚’이고, 강의 자칭은 ‘羋’, ‘綿’ 혹은 ‘瑪’이다. 그리고 氐와 羌은 漢人들이 붙여 준 이름이다(馬長壽, 1984 : 1 ~ 22). 王文光은 氐와 羌이 매우 깊은 친연관계에 있으며, 현대의 언어학적 관점에서 보면 모두 漢藏語系 藏緬語族에 해당하는 까닭에 항상 氐羌이 연칭된다고 하였다(王文光, 1997 :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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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지명
야랑(夜郞), 전(滇), , 동사(同師), 촉(蜀), 파촉(巴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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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이(西南夷)의 군장(君長)을 종족과 생활양식, 풍속, 크기에 따라 분류하여 설명 자료번호 : jo.k_0001_0116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