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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탑평리유적

  • 저필자
    표영관
  • 시대
    삼국시대
  • 위치
  • 원소장처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6-6, 117번지 일대
  • 시대
    고구려
  • 유형
    생활
입지
남한강변의 넓은 충적대지 위에 위치한다.
출토유물
* 한국교원대학교박물관이 1992~1993년에 탑평리 7층 석탑 주변 지역을 발굴조사 하여 대규모 건물지와 신라~통일신라시대의 토기와 기와를 확인한 바 있으며, 국립중원문 화재연구소에서 2010년부터 중원경 치소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백제 한성기의 1호 수혈주거지 중앙에서 동편으로 1m 정도 치우친 곳에서 주거지가 폐기된 이후 설치된 고구려 계통은 구들 시설과 토기가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고구려 토기편
해설
중원탑평리칠층석탑(충주중앙탑) 주변 지역에 대한 최초의 발굴은 한국교원대학교 박물관에서 1992년에 시작되었다. 이 때, 예상과는 달리 사찰과는 관련 없는 대규모 건물지들과 삼국시대 유물들이 다량 확인되었다. 이후 이 지역은 ‘탑평리유적’이라는 이름으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번에 걸쳐 연차적으로 시굴 및 발굴조사가 있었다.
조사결과 백제주거지, 신라주거지, 삼국시대 건물지, 통일신라 주거지 등이 다량으로 확인되었다. 이와 함께 고구려 구들이 발견되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유물 역시 토기와 철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종류, 많은 수량이 출토, 수습되었다.
탑평리 일대는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남한강변의 넓은 충적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충주 시내에서는 약 5km 거리에 있으며, 일대에는 중원탑평리칠층석탑을 비롯하여, 중원고구려비, 장미산성, 누암리고분군, 하구암리고분군, 봉황리마애불상군, 탄금대 등을 비롯한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신라의 유적들이 산포하여, 이 지역을 둘러싼 삼국의 쟁탈관계를 엿볼 수 있는 많은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탑평리유적은 일찍부터 신라 진흥왕 18년(557)에 설치된 국원소경(國原小京) 또는 중원소경(中原小京)의 추정지로 주목받았다. 중원소경은 신라의 수도 경주와 함께 작은 수도로 9주 5소경 중의 하나였으며, 진평왕 대에 중원경(中原京)이라 개칭한 중부내륙의 중심지역이었다.
한편 신라가 충주지역을 점령하기 이전에는 고구려의 남진 거점으로 국원성(國原城)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탑평리유적을 국원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탑평리 인근의 충주고구려비와 두정리 고구려고분, 탑평리유적의 고구려 온돌시설, 즉 구들이다. 구들은 백제주거지를 폐기한 이후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형태가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을 띄고 있다. 다만 이와 관련한 고구려 주거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또 탑평리 일대에서 출토된 와당(瓦當)을 고구려 와당으로 주장하는 견해도 있지만, 전형적인 고구려 와당과는 양식적으로 분명한 차이가 있고, 함께 확인된 유물들이 대부분 신라계 유물이어서 명확한 증거로 이용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이는 고구려유적으로 추정되는 봉황리마애불상군이나 장미산성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탑평리유적은 백제와 추정 고구려, 신라, 통일신라의 양식이 약간의 시대적 차이를 보이며 함께 확인되었고, 대규모 주거지였던 점만으로도 중원경의 후보지이자, 4세기부터 7세기 무렵까지 삼국의 격전과 교류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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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평리유적 자료번호 : isea.d_0002_0030_0070_002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