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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한일관계 사료집

조선국 신사(信使) 내빙(來聘)에 관한 서문

조선국 신사 내빙에 관한 서문

○ (一) 1599(天正 17) 기사년, 태합(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공이 일본을 통일한 후, 쓰쿠시(筑紫)에서 조부 쓰시마노카미(對馬守) 소 요시시게(宗義調)와 아버지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쓰쿠시 하코자키(箱崎)에 나아가 알현하였다. 주 001
각주 001)
1587년 20만 대군을 이끌고 규슈 평정에 나선 히데요시는 5월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를 항복시키고 규슈 전역을 정복했다. 5월, 요시시게는 소 요시토시(宗義智)와 함께 황급히 규슈로 건너가 하코자키(箱崎, 후쿠오카市)에서 히데요시와 접견하였다. 히데요시는 소씨에게 쓰시마 一國을 安堵하는 한편 ‘고려(조선)에 출병하여 정복한다고 명하였으나 요시시게가 청하니 [출병을] 연기하겠다. 그러니 [조선] 국왕을 일본에 上京(參洛)시키도록 하라. 만약 상경이 지체되면 즉시 도해하여 주벌(誅罰) 할 것이다’라고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발발전 한일교섭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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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태합이 “지금 일본을 통일되게 다스리고, 사해(四海)의 백성들이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모두 치세(治世)를 아우르게 되었으니, 이 때에 이르러 조선에서 축하 사절을 보내야 하는데 아직 보내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요시토시는 곧 소초로(蘇長老)주 002
각주 002)
외교승 겐소(玄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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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가로 야나가와 시모쓰케 시게노부(柳川下野調信)를 데리고 조선으로 도해하여, 그 나라의 수도에 올라가서 태합의 뜻을 자세하게 전달했다. 예전에 가길(嘉吉, 1441~1443) 연간 조선에서 신숙주(申叔舟)가 일본에 건너온 후 사신이 오랫동안 끊어졌으므로 [조선은] 의심스럽게 생각하여 일본 통일을 축하하는 사신이 바다를 건너기는 어렵다고 말했지만, [요시토시 일행이] 여러 가지로 설명하여 [조선이] 승인하였다. 주 003
각주 003)
소씨는 1589년 6월 겐소를 일본국왕사 正使로 삼고 자신은 副使가 되어 조선에 건너가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히데요시가 요구하는 조선국왕의 일본 입조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쓰시마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통신사 파견’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요구로 대체하여 조선과 교섭했던 것이다. 국왕 선조는 평시에야 통신사를 보내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히데요시는 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이므로 불가하다는 입장이었으나, 얼마 후 다음과 같은 방책을 제시하고 이를 비변사와 예조에서 심의하게 하였다. 그 방책을 요약하면, ① 조선이 海路의 험난함을 이유로 들어 통신사 파견을 또 다시 거절하게 되면 소씨가 안내역할을 자청할 것이므로 더 이상 핑계를 댈 수 없게 된다. 예로부터 해로는 험난했으나 거리낌 없이 왕래한 일도 있었으므로 이제 와서 해로만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② 일본이 하루아침에 화친을 단절당한 뒤 조선강토를 침범하여 그 유감을 풀려고 한다면 변방의 문제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 ③ 2년 전 조선을 침탈한 일본의 왜구집단과 포로가 된 조선인을 조선에 인도하라는 조건을 먼저 제시하고, 저들의 대응여하에 따라 통신사를 파견한다면 저들의 정성과 후의에 보답한다는 파견 명분이 설 것이다, 는 구상이었다. 왕위 찬탈자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보다는 왜구 금압 협조에 회사(回謝)하는 사절로써 통신사를 파견하는 편이 한층 외교적 명분이 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발발전 한일교섭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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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해 1590(天正 18) 경인년 조선에서 황(윤길)·김(성일)·허(성) 삼사(三使)가 건너왔고, 오사카(大坂)에서 맞이하였다.

이듬해 1591(天正 19) 신묘년 황·김·허의 삼사가 귀국하게 되었을 때 요시토시에게 태합이 이르시기를, “저 나라(조선)에서 통신사가 일본 통일을 축하하는 것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조선국왕이 직접 건너와서 하례하는 것이 마땅하다. 조선국왕은 일본의 막하(幕下) 에 있으므로 조선의 길을 빌려서 대명(大明)을 정벌할 것이다. 그때 조선국왕은 삼가 대명(大明)에 들어가는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전했는데도 만약 위배한다면 먼저 조선을 정벌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소초로(蘇長老)·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가 삼사(三使)와 함께 조선의 수도에 올라가서 위의 뜻을 자세히 전했지만 의외로 조선이 전혀 동의해 주지 않았고, 귀국해서 이를 아뢰었더니 태합께서 대노하셨다.

그래서 또 요시토시가 승려 삼현(三玄)을 데리고 조선에 도해하여 부산에 있으면서 줄곧 국왕이 와서 축하해야 한다고 전했지만 승인하지 않았다. 더욱이 명에 들어가는 길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거절하였다. 그래서 1592(文祿 1) 임술년 4월에 일본의 여러 주(州)에 조선을 정벌한다는 문서를 보내고, 대장(大將) 겸 재상 비젠노카미 히데이에(備前守秀家)주 004
각주 004)
우키타 히데이에(宇喜田秀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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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가토 가즈에노카미 기요마사(加藤主計頭淸正)·고니시 셋쓰노카미 유키나가(小西攝津守行長)·소 쓰시마노카미 요시토시(宗對馬守義智), 이 세 사람에게 전년도에 명령한대로 병사 10여만을 이끌고 도해하여 조선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부산에서 왕도까지 요지는 몇 군데 있었다. 저 나라 여러 지방의 요지를 모두 쳐부수어, 패한 군사는 그 수를 알지 못하고 수도까지 올라가서 왕성을 함락시키고, 그 대장을 데리고 왕자를 잡아 바로 평양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곳은 수도에서 서쪽으로 7일 거리이고, 옛날 중국이 기자(箕子)를 보내서 조선국왕이 되게 한 곳이다. 그런데 기자는 조선의 원조(元朝)로 그 사당과 석비가 지금도 있다고 한다.

1593(文祿 2) 계사년, 조선이 크게 곤란하여 명나라에 구원을 청했을 때 명에서 사용재(謝用梓)·서일관(徐一貫) 2명을 파견하여 일본에 강화를 요청하여, 요시토시와 함께 규슈의 나고야(名護屋)에 가서 태합에게 강화의 뜻을 아뢰었지만, 2명이 말한 내용이 좋지 않다고 생각되어 강화는 무산되었다. 1593년 갑오년 명에서 또 양노유(楊老爺)주 005
각주 005)
부사(副使) 양방형(楊方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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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노유(沈老爺)주 006
각주 006)
심유경(沈惟敬).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비밀리에 파견한 인물로, 명나라의 유격 장군을 가칭하고 적정을 탐지한다는 핑계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오사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만났으나 강화교섭이 결렬된 후 일본으로 망명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가는 도중, 의령 부근에 도달하였을 때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체포되어 ‘나라와 황제를 기만한 죄’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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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유격(游擊)장군 등 3명을 보내어 다시 강화의 뜻을 아뢴다고 하였다. 그래서 요시토시(義智)가 양노유(楊老爺)·심노유(沈老爺) 2명을 부산에 머무르게 하고, 유격대장 1명과 함께 오사카에 가서 아뢰었다. 유격장군은 먼저 ■에 체류하였는데 사신을 부산에 보냈더니 1596(慶長 1) 병신년 양노유(楊老爺)·심노유(沈老爺) 2명을 보내어 전처럼 오사카에서 강화를 청하였다.

이때 명에서 칙호(勅號)와 의관(衣冠) 그 외 여러 가지 진귀한 것을 전하고, 태합을 일본국왕에 봉하였으며 일본의 여러 장수에게도 의관을 전하고 관직을 수여하였다. 이때 태합이 기뻐하여 강화가 되어 평화롭게 될 것이라며 이때에는 만족스럽게 생각하셨다. 그런데 근습하는 신하가 들어와서 아뢰기를 명의 칙호를 받고 이국(異國)의 의관을 입으신 것은 명의 막하가 되는 것이라고 하자, 태합이 맞다고 하시고 명의 칙호를 받은 것은 잘못이라고 하셨다. 명이 거짓으로 나를 속여서 이렇게 했다며 그 의관, 장속(裝束) 등을 모두 버리셨다. 그 후 양노유(楊老爺)·심노유(沈老爺) 2명도 매우 상황이 좋지 않게 되었다. 그 사이에 시게노부가 조선의 사신을 데리고 와 오사카에서 강화에 대해 말하려 했지만, 또 군대의 준비가 있어서 그 건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하였다. 태합이 또한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수만의 사졸을 도해시켜 전라도를 공격하고 그 나라의 대장·관리를 처형하였으며, 그 외 모두 토벌하여 수만명이던 전라도민이 1명도 없도록 하였다.

1598(慶長 3) 무술년 8월 15일, 태합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래서 이에야스(家康) 공의 뜻에 따라서 조선에 건너가 있던 여러 장수와 군을 이끌고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그 후에 양국 간의 통교는 끊어졌다. 1604 갑진년 조선에서 송운대사(松雲大師: 사명당)주 007
각주 007)
사명당(四溟堂, 1544~1610)으로 법명은 유정(惟政). 임진왜란 시기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 법명은 휴정 休靜)와 함께 승병을 이끌고 참전하여 평양성 탈환 등 각종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며, 일본군과의 강화 회담에도 참가하였다. 1604년에는 에도 막부에 사절로서 건너가 협상 끝에 3천여 명의 포로를 송환하는 공적을 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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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손문욱(孫文彧) 2명을 보내어 화의를 청하였다. 곧 야나가와 시모쓰케 시게노부(柳川下野調信)에게 명하여 스루가(駿河)에 그 소식을 아뢰었더니, 조선에서 2명을 보내어 화의에 대해 거론하니 신묘하게 생각하신다고 했다. 이때 요시토시가 병이 나 야나가와 시모쓰케(柳川下野)와 소초로(蘇長老)에게 명령하여 두 사신과 함께 교토(京都)에 갔다. 그때 이에야스 공은 후시미 성(伏見城)에 계셨는데 그곳에서 알현하도록 하셨고, 1605년 송운대사가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1607년 조선에서 정사(正使) 여우길(呂祐吉)·부사 정경라(慶暹)·종사 정호관(丁好寬)의 삼사를 보냈다. 먼저 이에야스(家康) 공의 정도(政道)를 경하해야 하지만, 다이토쿠인(台德院: 도쿠가와 히데타다)님이 쇼군직을 양도받게 되었으므로 곧바로 에도로 가서 다이토쿠인님께 예를 올려야한다는 명을 받았다. 그래서 에도에 가서 배례를 끝내고 귀국하는 길에 슨푸(駿府)에서 이에야스 공에게 예를 올렸다. 요시토시는 삼사(三使)를 동반하고 쓰시마로 돌아갔다

또 1617(元和 3) 정사년 조선에서 오윤겸(吳允謙)·박재(朴梓)·이경직(李景稷)의 삼사를 파견하여 히데타다(秀忠) 공에게 하례하고, 후시미성에서 배례하였다. 이 사신들과 요시나리(義成)가 동행하였다. 1624(寬永 1) 갑자년 조선에서 정사 정립(鄭岦)·부사 강홍중(姜弘重)·종사 신계영(辛啓榮)의 삼사를 파견하여, 이에미쓰(家光) 공을 에도성에서 배례하였다. 이 통신사도 또한 요시나리(義成)와 동행하였다.

  • 각주 001)
    1587년 20만 대군을 이끌고 규슈 평정에 나선 히데요시는 5월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를 항복시키고 규슈 전역을 정복했다. 5월, 요시시게는 소 요시토시(宗義智)와 함께 황급히 규슈로 건너가 하코자키(箱崎, 후쿠오카市)에서 히데요시와 접견하였다. 히데요시는 소씨에게 쓰시마 一國을 安堵하는 한편 ‘고려(조선)에 출병하여 정복한다고 명하였으나 요시시게가 청하니 [출병을] 연기하겠다. 그러니 [조선] 국왕을 일본에 上京(參洛)시키도록 하라. 만약 상경이 지체되면 즉시 도해하여 주벌(誅罰) 할 것이다’라고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발발전 한일교섭 실태」) 바로가기
  • 각주 002)
    외교승 겐소(玄蘇). 바로가기
  • 각주 003)
    소씨는 1589년 6월 겐소를 일본국왕사 正使로 삼고 자신은 副使가 되어 조선에 건너가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히데요시가 요구하는 조선국왕의 일본 입조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쓰시마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통신사 파견’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요구로 대체하여 조선과 교섭했던 것이다. 국왕 선조는 평시에야 통신사를 보내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히데요시는 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이므로 불가하다는 입장이었으나, 얼마 후 다음과 같은 방책을 제시하고 이를 비변사와 예조에서 심의하게 하였다. 그 방책을 요약하면, ① 조선이 海路의 험난함을 이유로 들어 통신사 파견을 또 다시 거절하게 되면 소씨가 안내역할을 자청할 것이므로 더 이상 핑계를 댈 수 없게 된다. 예로부터 해로는 험난했으나 거리낌 없이 왕래한 일도 있었으므로 이제 와서 해로만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② 일본이 하루아침에 화친을 단절당한 뒤 조선강토를 침범하여 그 유감을 풀려고 한다면 변방의 문제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 ③ 2년 전 조선을 침탈한 일본의 왜구집단과 포로가 된 조선인을 조선에 인도하라는 조건을 먼저 제시하고, 저들의 대응여하에 따라 통신사를 파견한다면 저들의 정성과 후의에 보답한다는 파견 명분이 설 것이다, 는 구상이었다. 왕위 찬탈자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보다는 왜구 금압 협조에 회사(回謝)하는 사절로써 통신사를 파견하는 편이 한층 외교적 명분이 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발발전 한일교섭 실태」) 바로가기
  • 각주 004)
    우키타 히데이에(宇喜田秀家). 바로가기
  • 각주 005)
    부사(副使) 양방형(楊方亨). 바로가기
  • 각주 006)
    심유경(沈惟敬).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비밀리에 파견한 인물로, 명나라의 유격 장군을 가칭하고 적정을 탐지한다는 핑계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오사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만났으나 강화교섭이 결렬된 후 일본으로 망명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가는 도중, 의령 부근에 도달하였을 때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체포되어 ‘나라와 황제를 기만한 죄’로 처형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사명당(四溟堂, 1544~1610)으로 법명은 유정(惟政). 임진왜란 시기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 법명은 휴정 休靜)와 함께 승병을 이끌고 참전하여 평양성 탈환 등 각종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며, 일본군과의 강화 회담에도 참가하였다. 1604년에는 에도 막부에 사절로서 건너가 협상 끝에 3천여 명의 포로를 송환하는 공적을 세우기도 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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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신사(信使) 내빙(來聘)에 관한 서문 자료번호 : kn.k_0001_0010_0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