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신찬성씨록

기조신(紀朝臣; 기노아소미)

기조신(紀朝臣; 기노아소미)
 석천조신(石川朝臣; 이시카하노아소미)과 조상이 같다. 건내숙녜(建內宿禰; 다케시노우치노스쿠네)의 아들 기각숙녜(紀角宿禰; 기노츠노노스쿠네)의 후손이다.
 
【주석】
1. 기조신(紀朝臣)
기(紀)라는 씨명은 『기씨가첩(紀氏家牒)』에서, 무내숙녜가 기이국조(紀伊國造)인 우두언(宇豆彦)의 딸 우내원(宇乃媛)을 맞아들여 각숙녜(角宿禰)를 낳고, 대왜국(大倭國) 평군현(平群縣) 기리(紀里)에 살았다고 하였으므로, 기리라는 지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기리는 후대의 대화국(大和國) 평군군(平群郡) 평군향(平群鄕)이며,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생구군(生駒郡) 평군정(平群町) 상장(上莊)에 해당한다. 『연희식(延喜式)』 신명장(神名帳)에도 평군(平群)에 위치한 기씨신사(紀氏神社)가 실려 있다. 목국(木國; 기노쿠니) 후대의 기이국(紀伊國; 기노쿠니)을 근거지로 한 기직(紀直)과는 구별된다. 기직은 신혼명(神魂命)의 5세손인 천도근명(天道根命) 혹은 신혼명의 아들인 어식지명(御食持命)을 시조로 하는 신별 씨족이다. 그러나 두 씨족은 전혀 무관하지 않으며, 무내숙녜와 기이국조 가문이 혼인관계를 맺었고 그 때문에 무내숙녜가 살았던 곳의 지명을 기(紀)라고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기조신의 원래 성은 신(臣)이었는데, 『일본서기(日本書紀)』 천무천황(天武天皇) 13년(684) 11월 무신삭에 기(紀) 등 52씨에게 조신이라는 성을 내렸다고 하였다.
기조신(紀朝臣)의 일족으로는 신이라는 성을 쓰던 시대의 기신나솔미마사(紀臣奈率彌麻沙, 『일본서기』 흠명천황 2년 7월조 등), 기신염수(紀臣鹽手, 『일본서기』 서명천황 즉위전기), 기마리기타신(紀麻利耆拕臣, 『일본서기』 대화 2년 3월 신사조 등), 목신마려(木臣麻呂, 『일본서기』 대화 5년 3월 경오조), 기대인신(紀大人臣, 『일본서기』 천지천황 10년 정월 계묘조 등), 기신아폐마려(紀臣阿閉麻呂, 『일본서기』 천무천황 원년 7월 신묘조), 기신대음(紀臣大音, 『일본서기』 천무천황 원년 4월 임자조), 기신가다마려(紀臣訶多麻呂, 『일본서기』천무천황 2년 12월 무술조 등), 기신가좌마려(紀臣訶佐麻呂, 『일본서기』 천무천황 5년 4월 기미조) 등이 있다.
조신이라는 성을 받은 이후에는 기조신진인(紀朝臣眞人, 『일본서기』 주조 원년 9월 갑자조 등), 기조신궁장(紀朝臣弓張, 『일본서기』 주조 원년 9월 병인조 등), 기조신마려(紀朝臣麻呂, 『일본서기』 지통천황 7년 6월 임술조 등), 기조신남인(紀朝臣男人, 『속일본기』 경운 2년 12월 계유조 등), 기조신청인(紀朝臣淸人, 『속일본기』 화동 7년 2월 무술조 등), 기조신마로(紀朝臣麻路, 『속일본기』 양로 4년 정월 갑자조 등), 기조신반마려(紀朝臣飯麻呂, 『속일본기』 천평 원년 3월 갑오조 등), 기조신광순(紀朝臣廣純, 『속일본기』 천평보자 2년 정월 무인조 등), 기조신선수(紀朝臣船守, 『속일본기』 천평보자 8년 9월 을사조 등), 기조신광정(紀朝臣廣庭, 『속일본기』 천평보자 8년 10월 경오조 등), 기조신고좌미(紀朝臣古佐美, 『속일본기』 천평보자 8년 10월 기축조 등), 기조신가수(紀朝臣家守, 『속일본기』 보귀 2년 정월 신사조 등), 기조신견양(紀朝臣犬養, 『속일본기』 보귀 2년 4월 임오조 등), 기조신작량(紀朝臣作良, 『속일본기』 보귀 9년 정월 계해조 등), 기조신형원(紀朝臣兄原, 『속일본기』 연력 3년정월 기묘조 등), 기조신즙계(紀朝臣楫繼, 『속일본기』 연력 10년 12월 경인조 등), 기조신승장(紀朝臣勝長, 『일본후기』 연력 16년 3월 계축조 등), 기조신광빈(紀朝臣廣濱, 『일본후기』연력 18년 경술조 등), 기조신승마려(紀朝臣繩麻呂, 『일본후기』 연력 18년 5월 신해조 등), 기조신사마려(紀朝臣咋麻呂, 『일본후기』 연력 18년 5월 계축조 등), 기조신국웅(紀朝臣國雄, 『일본후기』 연력 23년 4월 임자조 등), 기조신전상(紀朝臣田上, 『일본후기』 연력 23년 4월임자조 등), 기조신강계(紀朝臣岡繼, 『일본후기』 연력 23년 10월 계축조 등), 기조신량문(紀朝臣良門, 『일본후기』 연력 23년 10월 계축조 등), 기조신백계(紀朝臣百繼, 『일본후기』 대동 원년 정월 계사조 등), 기조신정성(紀朝臣貞成, 『일본후기』 대동 3년 5월 경인조 등), 기조신장전마려(紀朝臣長田麻呂, 『일본후기』대동 3년 5월 을미조 등), 기조신말성(紀朝臣末成, 『일본후기』 홍인 원년 9월 정미조 등), 기조신화기마려(紀朝臣和氣麻呂, 『일본후기』 홍인 2년 6월 계해삭조 등) 등 다수가 사료에 보인다.
신(臣) 성을 가진 인물로는 기신나솔미마사(紀臣奈率彌麻沙)를 들 수 있다. 『일본서기』 흠명(欽明) 2년(541) 7월조의 분주에 “기신나솔은 기신이 한부(韓婦)와 혼인하여 낳았고 그 때문에 백제에 머물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기신 일족이 백제에 건너가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2. 석천조신동조(石川朝臣同祖)
좌경 황별(상)의 「석천조신(石川朝臣)」 조에 효원천황(孝元天皇)의 황자 언태인신명(彦太忍信命)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선대구사본기』 「천황본기」의 효원천황조에 언태인신명이 기신 등의 조상이라고 하였다. 앞의 「석천조신(石川朝臣)」 조(065) 참조.
3. 건내숙녜(建內宿禰)
건내숙녜에 대해서는 좌경 황별(상)의 「전구조신(田口朝臣)」 조(066) 참조. 건내숙녜라는 표기는 『고사기』에 보이며, 『신찬성씨록』에서는 본조 외에 좌경 황별(상)의 「작부조신(雀部朝臣)」 조, 대화국(大和國) 황별의 「강소신(江沼臣)」 조· 「지후신(池後臣)」 조, 섭진국(攝津國) 황별의 「작부조신(雀部朝臣)」 조, 하내국(河內國) 황별의 「기축(紀祝)」 조· 「기부(紀部)」 조, 화천국(和泉國) 황별의 「판본조신(坂本朝臣)」 조· 「적신(的臣)」 조· 「기신미신(紀辛梶臣)」 조· 「대가신(大家臣)」 조에서도 보인다.
4. 기각숙녜(紀角宿禰)
『고사기』 효원천황단(孝元天皇段)에서 목각숙녜(木角宿禰)는 목신(木臣)·도노신(都奴臣)·판본신(坂本臣)의 조상이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응신천황(應神天皇) 3년 시세조(是歲條)에서는 백제의 진사왕(辰斯王)이 즉위한 이후 귀국(貴國)천황(天皇)에게 예를 잃으므로 기각숙녜를 보내어 그 무례함을 꾸짖자, 백제국이 진사왕을 죽여 사과하였으며, 기각숙녜 등이 곧 아화(阿花)를 세워 왕으로 삼고 돌아왔다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인덕천황 41년 3월조에 기각숙녜를 백제에 보내어 처음으로 국군(國郡)의 영역을 나누고 향토에서 나는 것을 자세히 기록하였으며, 이때 백제 왕족인 주군(酒君)이 무례하므로 기각숙녜가 백제 왕을 꾸짖자 백제 왕이 두려워서 주군을 쇠사슬로 묶어 습진언(襲津彦)에 딸려 진상하였다고 한다.
『기씨가첩(紀氏家牒)』에서는 무내숙녜(武內宿禰)가 기이국조(紀伊國造) 우두언(宇豆彦)의 딸 우내원(宇乃媛)과 혼인하여 각숙녜(角宿禰)를 낳고 대왜국(大倭國) 평군현(平群縣) 기리(紀里)에 살았으므로 이름을 기각숙녜라고 하였으며, 기신(紀臣), 각신(角臣), 판본신(坂本臣)의 조상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신찬성씨록』 좌경 황별(상)의 「각조신(角朝臣)」 · 「판본조신(坂本朝臣)」, 하내국(河內國) 황별의 「기축(紀祝)」, 화천국(和泉國) 황별의 「판본조신(坂本朝臣)」 · 「기신미신(紀辛梶臣)」 · 「대가신(大家臣)」 · 「소수전수(掃守田首)」 등의 각 조에 기각숙녜의 이름이 보인다. 한편 우경 황별의 「소수전수(掃守田首)」 조에는 기도노숙녜(紀都奴宿禰; 기노츠노노스쿠네), 하내국 황별의 「기부(紀部)」 조에는 도야숙녜명(都野宿禰命; 츠노노스쿠네노미토토)이라는 이름으로 보인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보이지 않지만, 기각숙녜의 아들로는 백성숙녜(白城宿禰; 시라기노스쿠네)가 있어서, 기각숙녜와 한반도의 관련성을 짐작하게 한다. 좌경 황별(상)의 「판본조신(坂本朝臣)」 조 및 화천국 황별의 「판본조신」 조에 백성숙녜가 보이며, 『기씨가첩』에 보이는 기대반숙녜(紀大磐宿禰)의 아들 신미숙녜(辛梶宿禰), 기신미숙녜(紀辛梶宿禰)의 아우 건일숙녜(建日宿禰)라고 한 계보와 화천국 황별의 「판본조신(坂本朝臣)」조에서 백성숙녜(白城宿禰)의 3세손 건일신(建日臣)이라는 계보를 비교해 보면, 『일본서기』 웅략(雄略) 9년 3월조에 보이는 기소궁숙녜(紀小弓宿禰)일 가능성이 있다.
기소궁숙녜는 『일본서기』 웅략 9년 3월조에 의하면, 신라를 정벌하는 장군의 한 사람으로 신라에 건너갔다가 병으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같은 해 5월 아버지 기소궁숙녜의 죽음을 알게 된 기대반숙녜가 신라로 가서 소록화숙녜(小鹿火宿禰)가 장악하고 있던 병마(兵馬), 선관(船官) 등 여러 관직을 차지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면서, 소록화숙녜 및 소아한자숙녜(蘇我韓子宿禰)와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기대반숙녜가 소아한자숙녜를 활로 쏘아 죽이기에 이른다. 또한 현종(顯宗) 3년 시세조에 기생반숙녜(紀生磐宿禰)라는 표기로 보이며, 임나에 근거해서 고구려와 교통하고 장차 서쪽으로 삼한의 왕이 되려고 하여 관부(官府)를 정비하고 스스로 신성하다고 주장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어서 흠명(欽明)부터 추고(推古) 때 활동한 인물로 기남마려숙녜(紀男麻呂宿禰)가 있다. 『일본서기』 흠명 23년(562) 7월조에, 대장군 기남마려숙녜가 다리(哆唎)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신라가 임나를 멸한 일을 문책하고자 임나로 들어갔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후 기남마려숙녜는 용명(用明) 2년(587) 7월에 물부수옥대련(物部守屋大連)을토멸하는 측에 가담하였으며(『일본서기』 숭준천황 즉위전기), 숭준(崇峻) 4년(591) 11월에는 거세원신(巨勢猿臣) 등과 더불어 대장군이 되어 임나를 부흥시키기 위한 군사를 이끌고 축자(筑紫)에 나아갔으나, 한반도로 건너가지 못하고 추고 3년(595) 7월에 귀환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기각숙녜를 비롯한 기남마려숙녜 등 기씨 일족은 한반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집단임을 알 수 있다.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기조신(紀朝臣; 기노아소미) 자료번호 : ss.k_0001_0030_0060_0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