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여비(餘毘)가 표(表)를 올려 〈역림(易林)〉 등을 요구함
[원가] 7년에 백제왕 여비[비유왕, 재위: 427~455]가 다시 조공하므로 영(映)의 작호를 주었다.주 001 [원가] 27년(450)에 [여]비가 글을 올리고 특산물을 바치며 사사로이 대사(臺使)주 002 풍야부주 003
번역주 003)
를 서하태수주 004로 가칭하고, 또한 표를 올려 『역림』주 005·식점주 006·요노주 007를 요구하니 태조가 모두 들어주었다. [여]비가 죽자 아들 [여]경[개로왕, 재위: 455~475]이 왕위를 이었다. 세조 대명 원년(457)에 사신을 보내 작호를 내려달라고 요청하니 조서를 내려 허가하였다. 馮野夫 : 407년에 지금의 요령성 朝陽을 중심으로 건국했다가 436년에 멸망한 북연 왕실과 성씨가 같으므로 망명객이거나 망명객의 후예인 듯하다. 436년, 북위가 북연을 침공하자 昭成帝 馮弘은 일족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하였다가 438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472년에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상표문에서 “풍씨의 운수가 다하여 남은 무리들이 바삐 달아나 숨으면서부터 추악한 무리들이 점차 번성하여 마침내 [백제가] 능멸과 핍박을 당하였습니다. 원한을 맺고 재난이 30여 년이나 이어지자 재물도 다하고 힘도 다하여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북연 멸망이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을 더욱 격화시켰다면, 송나라가 풍홍의 망명을 적극 수용하려 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백제는 풍씨 일족을 대송 외교에 활용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번역주 001)
- 번역주 002)
-
번역주 003)
馮野夫 : 407년에 지금의 요령성 朝陽을 중심으로 건국했다가 436년에 멸망한 북연 왕실과 성씨가 같으므로 망명객이거나 망명객의 후예인 듯하다. 436년, 북위가 북연을 침공하자 昭成帝 馮弘은 일족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하였다가 438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472년에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상표문에서 “풍씨의 운수가 다하여 남은 무리들이 바삐 달아나 숨으면서부터 추악한 무리들이 점차 번성하여 마침내 [백제가] 능멸과 핍박을 당하였습니다. 원한을 맺고 재난이 30여 년이나 이어지자 재물도 다하고 힘도 다하여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북연 멸망이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을 더욱 격화시켰다면, 송나라가 풍홍의 망명을 적극 수용하려 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백제는 풍씨 일족을 대송 외교에 활용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번역주 004)
- 번역주 005)
- 번역주 006)
- 번역주 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