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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개무역 단절 이후 새 무역구조

4. 중개무역 단절 이후 새 무역구조

1) 일본에 대한 수출품 변화
조선의 인삼생산 부진, 일본의 인삼 국산화, 일본의 은 수출 통제에 따른 생사 유통의 부진, 1752~53년 이후의 은 수입의 단절 등에 의해, 조선과 일본과의 무역은 18세기 중엽 이후 전반적으로 쇠퇴하는 추세였다. 이러한 전반적인 사무역의 쇠퇴는 1774~75년에 사무역이 중지되었다는 ‘사무역 단절론’을 낳았다.주 607
각주 607)
中村榮孝(1971), 『日鮮關係史の硏究』(하), 吉川弘文館, 331쪽에서는 1775년, 林山恒雄(1971), 「對馬藩」 『長崎縣史』(藩政編), 吉川弘文館, 1045쪽에서는 1774년에 단절·중지 되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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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에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조일간의 무역은 공무역에 의해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쓰시마의 ‘사무역 단절’ 주장은 바쿠후의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 거짓으로 꾸민 계책이었다.주 608
각주 608)
정성일(2000),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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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이후 사무역이 단절된 것이 아니고, 중개무역이 단절된 것이다. 사무역은 쇠퇴한 것이지 단절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개무역의 단절과 사무역의 쇠퇴에 따라 사무역 구조가 변하여 갔다. 18세기 후반, 특히 19세기 이후에는 소가죽[牛皮], 소 뿔·발톱[牛角爪], 황금(黃芩), 말린해삼[煎海鼠]의 4품목이 조선의 수출품의 중심이었다. 4품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소가죽이다. 1844~45년 쓰시마번의 4품목의 사무역 이윤 가운데 소가죽이 60~76% 정도를 차지하였다. 조선의 수입품은 은에서 구리로 바뀌었다.주 609
각주 609)
田代和生(1989), 「幕末期日朝私貿易と倭館貿易商人-輸入四商品の取引を中心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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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무역 변화 양상은 왜관 개시무역[사무역]을 담당했던 동래상인들의 인식에 잘 나타나 있다. 1813년 2월에 올린 동래상인 김처순(金處淳)의 등장(等狀)에 의하면, “피집(被執)이 쇠퇴한 후, 자신들의 생애는 전적으로 구리·우피·우각의 매매에 달려있다.”주 610
각주 610)
『慶尙道東萊府商賈等捄弊節目』(규장각도서 18109의 4, 국사편찬위원회 『각사등록』 50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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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19세기 일본과의 사무역은 우피·우각·말린해삼·약재의 수출과, 구리, 황련(黃連)·진피(陳皮)·청피(靑皮) 등 약재의 수입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동래상인은 사무역의 독점권을 보장 받기 위해, 도중(都中)이란 조직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도중을 구성하는 핵심은 수패(受牌)상고였다. 이들은 동래부가 발급한 왜관 출입 허가패를 받고 무역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이들을 수패상고하고 불렀다. 무역독점권은 이들 수패상고가 독점하였다. 이들 수패상고의 독점력이 강화되자, 동래상인 내부에도 분화가 일어나 독점권에서 배제된 상인과의 갈등을 야기시켰다.주 611
각주 611)
김동철(1993b), 405~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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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입품 변화
일본의 은 수출은 겐몬[元文, 1736~1740]시대 이후 바쿠후의 수출억제에 따라 감퇴하다가, 곧 정지되었다. 그 결과 일본의 수출 중심은 은 대신 구리가 차지하게 되었다. 일본-조선의 무역에서 구리의 수출은 은과는 다른 성격과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은이 사무역으로 수출된 것에 비해, 구리는 공무역, 사무역으로 수출되었다.주 612
각주 612)
田代和生(1981), 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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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는 아라도로 수출되었다. 조선에서는 이를 생동(生銅)이라고 부른다. 또한 공무역을 간품(看品)하기 때문에 간품동(看品銅)이라고도 한다. 쓰시마번은 수출은을 주로 교토에서 구입한 것에 비해, 구리는 주로 오사카에서 구입하였다. 나가사키 무역이 은에서 구리로 바뀌어 갔지만, 일본 구리 생산의 저하로 쓰시마번의 구리 조달을 점점 곤란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달하고 싶은 수량을 미리 바쿠후에 제출하여 허락을 받았다. 1706년의 사무역 구리 수출고는 55,200근이다. 여기게 공무역 정액분을 더하면 83,100근이다. 그러나 1707, 1708년은 각각 5,000근 미만으로 감소하였다. 1709년부터 다시 5만근 이상을 확보하였다. 이 수출 구리의 대부분을 유력한 구리 제련업자이자 광산 경영자인 이즈미야 요시자에몬[泉屋吉左衛門, 住友]으로부터 조달하고 있었다.
1712년 도자[銅座]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리 부족 상태는 지속되었다. 바쿠후는 지금까지 이상으로 조선 수출 구리의 조달을 억제하였다. 1714~1717년에는 쓰시마번의 신청액인 20만근에 대하여 바쿠후는 절반인 10만근을 허락하였다. 쓰시마번은 조선의 화폐주조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많은 수량을 주장했지만, 바쿠후의 강한 규제로 좌절되었다. 이 규제는 1714년 처음 시작되었다. 1715년 쇼토쿠신레이가 발령되기에 앞서, 이런 모습으로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 특별한 이유가 있는 해를 제외하면, 쓰시마번의 신청과 바쿠후의 허가는 둘 다 대체로 10만근이라는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것이 새로운 관례가 되었다. 결국 이 상태가 수년가 계속되어 일본 측의 구리 수출 한도액, 즉 수출 정액이 되었다.
3) 중국과의 모자, 홍삼 무역
일본은과 중국생사·비단을 중심으로 1720년대까지 지속된 중개무역을 주도한 사람은 부연(赴燕)역관, 서울상인, 개성상인, 평양상인, 의주상인, 안주상인 등이었다. 특히 서울상인과 개성상인이 중개무역을 통해 거상으로 성장하였다.주 613
각주 613)
이철성(2004), 370~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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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서 중개무역이 쇠퇴하면서 호조의 일본은 수세량도 줄어들어, 호조의 은 수입 총량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총량은 1713년에 66,780근으로 정점에 달하였으나 1723년 31,156냥, 1730년 28,332냥, 1732년 12,922냥으로 1720~30년대에 크게 줄었다. 그러다가 1778년 3,042근, 1779년 752근으로 격감하였다. 1780년대에는 1천근을 밑돌 정도로 거의 정체상태였다. 이것은 국내 광산은 수입의 하락보다는 일본은의 영향 때문이었다.주 614
각주 614)
김소은(2008), 『조선후기 호조 재정정책사』, 서울 : 혜안,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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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중국 사행원 가운데는 팔포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연행사를 통해 청과의 외교관계를 유지하던 조선은 역관을 부양하는 방도를 찾아야 했다. 공용 여비용의 은 마련과 함께 역관의 무역 이익을 보장하는 방안으로 1758년(영조 34) 관모제(官帽制)를 실시하였다. 정부가 지급한 자금으로 역관이 모자를 수입해 오는 대신, 사행에 필요한 공용은을 역관에게 부담시키는 제도이다. 중앙 5군영, 평양감·병영 등 각 아문으로부터 관은(官銀) 4만냥을 거두어 역관에게 지급하고, 이들은 공용경비를 제하고 남는 은을 무역자금으로 삼아 모자를 수입하는 것이다. 수입 모자는 모자전민(帽子廛民), 의주사인, 개성상인에게 국내판매를 위임시켰다. 그러나 국내 은 확보량이 크게 고갈된 상황에서 관은을 마련하여 무역하는 것이므로, 오히려 국내 은화를 더욱 소모하는 모순에 빠졌다. 관은 대출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관모 수입과 관모 가격의 환수가 원활하지 못했다. 관이 직접 무역에 참여한다는 명분론까지 대두하여 관모제는 1774년(영조 50)폐지되었다.주 615
각주 615)
이철성(2004), 439~4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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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은 대출 문제, 관무역이라는 명분, 외교비용 마련 등을 모두 충족시키는 방안으로 1777년(정조 1) 세모법(稅帽法)이 제정되었다. 세모법은 모자무역을 통해 공용은을 마련하는 점에서는 관모법과 동일하다. 그러나 ① 주체가 역관에서 개성상인, 의주상인, ② 자금이 관은에서 상인 자금, ③모자의 국내 판매와 수익의 관리가 관에서 상인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관모제와 큰 차이를 보였다.주 616
각주 616)
이철성(2004), 441~4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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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법은 모자의 수입과 판매를 의주상인과 개성상인에게 맡기는 대신, 세금을 거둠으로써 공용은을 마련하려는 정책이다. 이것은 18세기 후반 사상의 성장을 인정한 정책이다. 그러나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1년 한도액인 1천척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모무역을 통한 공용은 확보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청과의 외교관계 변화가 없는 한, 역관을 위한 부양책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 부양책 제도로 실시된 것이 1797년의 포삼제(包蔘制)다. 포삼은 팔포에 채우는 홍삼을 가리킨다. 이로써 대청무역은 모자 수입 무역에서 홍삼 수출 무역으로 전환되어 갔다.주 617
각주 617)
이철성(2000),『조선후기 대청무역사 연구』, 서울 : 국학자료원, 97~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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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에는 전국에서 인삼재배가 성행하였다. 이에 따라 재배삼인 가삼(家蔘)을 쪄 말려 상품화하는 홍삼제조 기술이 보급되었다. 자연산 인삼의 품귀 현상을 농법상의 기술로 극복하면서, 은을 대체하는 무역 결제수단이 창출된 것이다.주 618
각주 618)
이철성(2000), 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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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삼은 침체된 국제무역에 돌파구를 열었다. 1797년 처음으로 120근이 중국에 수출되었다. 포삼 1근은 약 160개 인삼으로 구성되었다. 1근의 값은 순도 100% 천은(天銀) 100냥 정도였다. 이것이 중국에 넘어가면 은 350~700냥에 팔렸다. 1851년에는 4만근으로 증가하였다. 홍삼무역을 처음에는 역관과 서울상인 주도하였으나, 가삼생산과 홍삼제조를 독점하고 있던 개성상인과 그 협력자인 의주상인에게로 넘어갔다. 개성상인이 포삼 전매권을 장악, 의주상인이 포삼 무역권을 독점하면서, 개성의 삼포는 더욱 확장하고, 홍삼 생산량도 급증하였다.주 619
각주 619)
이철성(2004), 375~4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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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청으로 유출되었던 은은 18세기말 홍삼무역의 개시에 의해, 역으로 청에서 조선으로 유입되게 되었다. 조선은 청에서 유입되는 은으로써, 청에 대한 조공관계를 유지시켜 나갔다.주 620
각주 620)
烟地正憲(1981),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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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607)
    中村榮孝(1971), 『日鮮關係史の硏究』(하), 吉川弘文館, 331쪽에서는 1775년, 林山恒雄(1971), 「對馬藩」 『長崎縣史』(藩政編), 吉川弘文館, 1045쪽에서는 1774년에 단절·중지 되었다고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608)
    정성일(2000), 200쪽. 바로가기
  • 각주 609)
    田代和生(1989), 「幕末期日朝私貿易と倭館貿易商人-輸入四商品の取引を中心に-」 바로가기
  • 각주 610)
    『慶尙道東萊府商賈等捄弊節目』(규장각도서 18109의 4, 국사편찬위원회 『각사등록』 50에 수록.) 바로가기
  • 각주 611)
    김동철(1993b), 405~425쪽. 바로가기
  • 각주 612)
    田代和生(1981), 349쪽. 바로가기
  • 각주 613)
    이철성(2004), 370~371쪽. 바로가기
  • 각주 614)
    김소은(2008), 『조선후기 호조 재정정책사』, 서울 : 혜안, 86쪽. 바로가기
  • 각주 615)
    이철성(2004), 439~440쪽. 바로가기
  • 각주 616)
    이철성(2004), 441~442쪽. 바로가기
  • 각주 617)
    이철성(2000),『조선후기 대청무역사 연구』, 서울 : 국학자료원, 97~98쪽. 바로가기
  • 각주 618)
    이철성(2000), 113쪽. 바로가기
  • 각주 619)
    이철성(2004), 375~444쪽. 바로가기
  • 각주 620)
    烟地正憲(1981), 100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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