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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궤

왜선(倭船)이 표류를 핑계삼아 계책을 부릴 수 있다는 조선국왕의 긴급 자보(咨報)

3. 本國咨報緊急賊情
  • 발신자
    조선국왕
  • 발송일
    1595년 1월 (음)(만력 23년 1월 일)
발신: 조선국왕
사유: 긴급한 왜정의 일입니다.
 
[조선국왕] 만력 23년 1월 9일 배신 제도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 권율(權慄)의 치계(馳啓)를 받았습니다.
[권율] 본월 3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김응서(金應瑞)가 비보(飛報)하였습니다.
[김응서] 만력 22년 12월 21일 웅천현에 주둔하고 있는 적추(賊酋) 다이라노 유키나가주 001
각주 001)
원문에는 ‘平行長’으로 기재되어 있다. 다이라(平)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평정하면서 취한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의 대표적인 성씨이다. 당시 호조(北条) 씨 등이 헤이시(平氏)의 후손이었고, 오다 노부나가(職田信長) 등이 일본의 실력자로서 헤이시를 칭했다. 히데요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로서 평민(하쿠쇼)이었으나 1582년 노부나가 사망 이후 전국시대의 주도권을 쥐었고, 1583년부터 1585년까지 공식적인 시메이(氏名)로 다이라노 히데요시(平秀吉)로 칭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또한 히데요시의 가신으로서 대외적으로 다이라노 유키나가로 자신을 칭한 것이다. 이에 반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원래 마츠다이라(松平) 집안이었으며, 겐지(源氏)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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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그 나라의 통사(通事) 요시라(要時羅)에게 본영으로 가게 하여 다음의 내용을 아뢰도록 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본월 18일 일본의 곡식을 실은 배 300여 척이 바람을 만나 표류하였다가 모두 귀국의 전라도로 향하게 되었으니, 장군께서는 급히 해도(該道)의 연해 파절 장령 등 관원에게 이문하여 그 배들이 표류하여 닿게 되면 공격하여 죽이지 말고 바로 보내 주십시오.
[김응서] 또 아뢰었습니다.
[요시라] 관백이 직책이 높은 감군을 차견하여 각 진에 와서 군사의 많고 적음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본관주 002
각주 002)
감군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1560~1600)·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1545~1615)·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繼, 1558~1600)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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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하여금 유키나가 등에게 “오랫동안 황조(皇朝)로부터 봉공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하라 말라 하는 말이 없다. 금년 또한 다 지나갔는데 너희들은 하는 일이 무엇인가. 내년 2월 5일에 우리는 마땅히 군사를 조발하여 움직여 순풍을 타고 바다를 건너 전라 지역을 쳐들어 갈 것이다.”라고 말하도록 했습니다. 유키나가가 “황조에서 이미 봉공을 준허했고 조사(詔使)가 조석 간에 곧 이를 것이니 다시 흔단을 내서는 안 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어서 갖가지 좋은 말로 타일러 돌려보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관백은 본래 성격이 급하고 또한 (공격하는) 날짜가 이미 정해졌으니 이 말로 중지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유키나가는 이 때문에 밤낮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말이 실로 공갈 협박하는 듯 하지만 끝내 숨길 수 없는 형세가 있어 감히 먼저 아뢰어 알려드립니다.
[김응서] 또 아뢰었습니다.
[요시라] 관백은 귀국이 봉공을 멈추어야 한다고 (황제에게) 주청한 내용을 들어 알고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조선에 전달해서 봉공을 청한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조선에 군사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진실로 처음부터 원한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조선이 나를 대우함이 지금 또한 이와 같으니 너희들은 원래 거느린 군사로 전라로 쳐들어가 남김없이 초멸하라.”고 했습니다.
[권율] 이러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조선국왕] 갖추어 온 장계를 받고서 당직이 가만히 살펴보건대, 본적은 흉악 교활하여 헤아릴 수 없고 그 말이 쉽게 변하여 본디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배신이 보고한 바를 보건대 적은 소방이 그 봉공의 일을 저지할까 우려하는 까닭에 공갈을 일삼은 것으로 이는 아직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생각건대 전라도를 적이 항상 엿보았고 관백이 봄을 틈타 나온다는 말이 전부터 있었는데, 지금 바로 순풍이 이미 불기 시작하였으니 양선(糧船)이 표류되었다고 말한 일은 혹시 따라 들어와 찾아본다는 말을 핑계로 미리 군사를 옮기려는 계책이 아니라면 반드시 병선(兵船)을 파견하여 전라 연해 지역에 나누어 정박시키고 속이는 말로 우리의 방비를 늦추려는 것이 의심할 바 없이 분명합니다. 살펴보건대 작년 1월에 본적은 일찍이 양선을 찾겠다는 말로 핑계를 대고 전라도의 내지로 들어가 형세를 직접 살펴보려 하였으나, 천장(天將) 총병 유(劉)주 003
각주 003)
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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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흉정(兇情)을 통찰함에 힘입어 준절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아주 004
각주 004)
1594년 2월 일본군 6명이 부총병 유정을 찾아가 일본의 군량을 실은 배 40척이 전라도에 표류되어 전라도에 들어가 찾으려 했으나 유정이 이를 거부했다. 이와 관련하여 『事大文軌』 卷8, 緊急倭情咨 萬曆 二十二年二月初一日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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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모략이 마침내 저지되었습니다. 지금 또한 순풍이 거의 불어와 다시 이전의 계책을 펼치려 하는데 천병(川兵)주 005
각주 005)
명나라 사천(泗川)의 군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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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미 철수했고, 관문은 텅 비었으며 전라도의 사세는 크게 폐허가 되어 또한 전날의 사정에 미치지 못하니 과연 이 관적(關賊)주 006
각주 006)
관백(關白)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를 낮추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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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거 쳐들어온다면 전라 1도뿐만 아닐 것이라 온 나라에 화가 얼마 전보다 더 심할 것임을 말할 수 없습니다. 번거롭겠지만 귀사에서는 이 긴급한 사정을 총독군문에게 전보(轉報)하여 원래부터 보고했던 적정을 통찰하여 속히 구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문이 잘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이 자문을 요동도지휘사사에게 보냅니다.
 
만력 23년 1월 일.

  • 각주 001)
    원문에는 ‘平行長’으로 기재되어 있다. 다이라(平)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평정하면서 취한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의 대표적인 성씨이다. 당시 호조(北条) 씨 등이 헤이시(平氏)의 후손이었고, 오다 노부나가(職田信長) 등이 일본의 실력자로서 헤이시를 칭했다. 히데요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로서 평민(하쿠쇼)이었으나 1582년 노부나가 사망 이후 전국시대의 주도권을 쥐었고, 1583년부터 1585년까지 공식적인 시메이(氏名)로 다이라노 히데요시(平秀吉)로 칭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또한 히데요시의 가신으로서 대외적으로 다이라노 유키나가로 자신을 칭한 것이다. 이에 반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원래 마츠다이라(松平) 집안이었으며, 겐지(源氏)를 칭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감군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1560~1600)·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1545~1615)·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繼, 1558~1600) 등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유정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4)
    1594년 2월 일본군 6명이 부총병 유정을 찾아가 일본의 군량을 실은 배 40척이 전라도에 표류되어 전라도에 들어가 찾으려 했으나 유정이 이를 거부했다. 이와 관련하여 『事大文軌』 卷8, 緊急倭情咨 萬曆 二十二年二月初一日 참고. 바로가기
  • 각주 005)
    명나라 사천(泗川)의 군사를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6)
    관백(關白)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를 낮추는 말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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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선(倭船)이 표류를 핑계삼아 계책을 부릴 수 있다는 조선국왕의 긴급 자보(咨報) 자료번호 : sdmg.k_0003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