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성립과 제도
고구려주 001는 그 선조가 동명주 002으로부터 나왔다. 동명은 본래 북이 고리왕주 003의 아들이었다. [고]리왕이 출행한 사이에 시비가 후[궁]에서 임신하였다. [고]리왕이 돌아와 [이 사실을 알고] 시비를 죽이려 하였다. 시비가 말하기를 “전에 하늘에 큰 알 같은 기운이 서린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제게 내려와 [이로]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그녀를 가두니, 나중에 드디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은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두었는데,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이 신이하다 여겨 곧 [어미가 아이를] 거두어 기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아이가] 성장해서는 활을 잘 쏘았다. 왕이 그 용맹함을 꺼려하여 다시 그를 죽이려 하였다. 동명이 바로 달아나 남쪽으로 가서 엄체수주 004
번역주 004)
에 이르렀다. [동명이] 활로 강물을 내리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고, 동명이 이를 타고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부여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왕이 되었다. 그 후 [부여의] 분파가 고구려의 종족이 되었다. 淹滯水 : 東明이 건넜다는 淹滯水는 『論衡』 卷2, 吉驗篇에서는 “掩淲水”라 전하고 있고, 『三國志』 所引 「魏略」에서는 “施掩水”, 『後漢書』 夫餘傳에서는 “掩㴲水”, 『隋書』 高麗傳에서는 “淹水”라고 적고 있다. 한편, 夫餘의 東明神話를 바탕으로 한 朱蒙神話에서는 “淹㴲水”(『三國史記』), 〈廣開土王碑〉에서는 “奄利大水”로 전한다. 橐離國(高離國)으로부터 남하하던 도중 東明이 건넜다는 掩淲水(淹滯水·掩㴲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松花江 또는 그 지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리지린, 1963). 東明의 出自地로 알려진 橐離國 문화에 대해 근래 嫩江 하류의 白金寶·漢書 문화가 주목되면서 東明이 건넜다는 ‘掩淲水’를 松花江으로 보는 견해는 더욱 강화되었는데, 구체적으로 北流 松花江으로 보는 의견과(李健才, 1982) 東流 松花江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송호정, 2015). 한편, 橐離國의 위치를 東流 松花江 北岸에 위치한 黑龍江省 賓縣 慶華城址유적과 연결지어 ‘掩淲水’도 松花江이 아닌 拉林河로 보는 견해도 있다(王綿厚, 1990).
그 나라는 한대의 현도군[지역]에 있다. 요동의 동쪽에 위치하며 요동[군]으로부터 1,000리 떨어져 있다. 한과 [조]위 시기에 남으로는 조선·예맥과 [접하였고], 동으로는 옥저와 [접하였으며], 북으로는 부여와 접하였다. 한 무제(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주 005
번역주 005)
원봉 4년(기원전 107)에 조선을 멸하고 현도군을 두어,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거기에 속하게 하였다. 고구려의 영토는 대략 2,000리이다. 그 안에 요산이 있어 요수가 거기에서 흘러나온다.주 006 도읍은 환도[산]의 아래에 있다.주 007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들판과 못은 없어, 백성들은 산과 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계곡 물을 마신다. 비록 농경사회이지만주 008 좋은 경작지가 없는 까닭에 아껴먹는 것이 습속이 되었다. 궁실을 꾸미기를 좋아한다. [왕이] 사는 곳의 왼편에는 큰 건물을 지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주 009 또한 영성주 010과 사직주 011에도 제사를 지낸다. 사람들의 성정은 매우 흉악하며 [이웃 나라를] 침범하고 노략질하길 좋아한다. 武帝 : 전한의 제7대 황제 劉徹이다. 대내적으로, 董仲舒를 기용하고 유교를 국교화하는 등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대외적으로, 張騫을 大月氏에 파견하고, 장군 衛靑, 霍去病, 李廣 등을 시켜 흉노를 토벌시켜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여 2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119년에는 흉노를 고비 북쪽으로 몰아냈다. 하서에 있던 흉노 渾邪王이 항복하자 그곳에 4군을 설치해 중앙아시아와 연결되는 교통로를 확보하였다. 이후 서역제국의 입공이 계속되었고, 기원전 104년에는 李廣利를 시켜 파미르고원 북서에 있는 大宛國을 정벌하였다. 남쪽으로는 閩越·東越 두 왕국을 병합하고, 기원전 111년에 南越을 멸망시키고 9개 군을 설치하였다. 四川省 변경에서 雲南·貴州에 있던 冉戮·雟·笮·夜郞·滇 등의 종족을 귀순시키고 6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동쪽으로는 조선을 공격하여 기원전 108년에 왕검성을 함락시키고, 4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그 관에는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 012·주부주 013·우태·사자·조의선인주 014이 있다.주 015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등급이 있다. 언어와 대개의 일상은 부여와 같은 점이 많으나, 그 기질과 의복에는 다른 점이 있다. 본래 5족이 있었는데, 소노부주 016·절노부·신노부주 017·관노부주 018·계루부였다. 본래 소노부가 왕을 하였으나 미약해져 계루부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한나라 때에 의책·조 복·고취를 하사하면 항상 현도군에 와서 그것들을 받아갔다. 나중에 점차 교만해져 다시는 [현도]군에 오지 않았다. 다만, [현도군의]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쌓아 [거기에 두니] 그것들을 받아갔다.주 019 지금도 여전히 이 성을 책구루주 020라고 부른다.주 021 구루라는 것은 고구려말로 성을 일컫는다.
그 [나라에서는] 관리를 둘 적에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그 습속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 나라 안의 읍락에서는 남녀가 매일 밤 무리지어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논다. 그 사람들은 깨끗하고 정결한 것을 좋아한다. 술을 잘 담근다. 무릎 꿇고 절할 때에는 한 쪽 다리를 펴며,주 022 걸음은 모두 달리는 [듯하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 크게 모인다. 이를 동명주 023이라고 한다. 그 공회에서는 모두 수를 놓은 비단옷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대가·주부가 머리에 쓰는 것은 [중국의] 책과 흡사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그 [나라의] 소가는 절풍을 쓰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다. 그 나라에 뇌옥은 없지만,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제가가 모여 평의하여 그를 죽이고 처와 자식을 적몰주 024하여 [노비로] 삼는다. 그 습속이 음란함을 좋아하여, 남녀가 서로 꾀어 야합하는 경우가 많다.주 025 혼인한 뒤에는 곧 수의를 조금씩 만든다. 장사를 지낼 때에는 곽은 쓰나 관은 쓰지 않는다.주 026 성대한 장례를 좋아하여, 금은과 재화를 장례에 다 소비한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그 주위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열 지어 심는다. 형이 죽으면 [동생은]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그 [나라의] 말은 모두 작아서 산에 오르기에 편리하다. [그] 나라 사람들은 기력을 숭상하여, 활과 화살, 칼과 창을 잘 다루고, 갑옷을 갖추고 있으며, 전투에 능숙하다. 옥저와 동예가 모두 복속되었다.
[신(新)의] 왕망(재위: 8~22)주 027
번역주 027)
의 [재위] 초에 고구려 병사를 징발하여 흉노주 028를 공격[하고자] 했는데, [고구려 병들은] 가려하지 않았다. [왕망이] 강하게 다그쳐서 그들을 보내니, 모두 도망하여 새를 나가 도적이 되었다. [유]주와 [요서]군이 책임을 구려후 추주 029에게 돌렸다. 엄우주 030 王莽 : 전한말의 외척이고, 新의 황제이다. 부친 王曼은 전한 元帝代 황후 王氏의 여러 동생 가운데 하나였고, 王皇后의 동생들은 외척으로 封侯되고 元帝와 成帝 시기에 輔政의 권한을 승계하면서 큰 세도를 누렸다. 이후 哀帝가 죽고, 어린 平帝가 즉위하자 태황태후 왕씨는 왕망을 불러들여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왕망은 반대파를 숙청하고, 평제가 사망한 뒤에는 2살의 孺子嬰을 황제로 옹립한 뒤, 자신은 섭정으로서 천자의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8년, 정식으로 황위에 오르고 국호를 新이라 하였다. 왕망은 『周禮』에 의거한 제도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특히 사회경제분야의 개혁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개혁은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 등의 이유로 큰 혼란만 남긴 채 실패하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22년, 농민들이 봉기하여 赤眉軍과 綠林軍 등이 장안을 함락시키고, 왕망을 살해하였다.
번역주 030)
가 [추를] 꾀어내 그를 참하였다. 왕망은 매우 기뻐하며, 이름을 고쳐 고구려를 하구려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이] 후가 되었다.주 031 [후한] 광무[제]주 032 8년(32),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때가 되어] 비로소 왕을 칭하였다. [후한] 상제(재위: 106)·안제(재위: 106~125)의 연간에 그 왕의 이름은 궁(고구려 태조왕, 재위: 53~146)이었는데, 여러 차례 요동을 침공하였다. 현도태수 채풍이 그를 토벌하였지만 [그 침공을] 막을 수는 없었다.주 033 궁이 죽자, 아들 백고(신대왕, 재위: 165~179)가 왕위에 올랐다.주 034 [전한] 순제(재위: 125~144)부터 환제주 035(재위: 146~167)까지의 연간에 다시 여러 차례 요동을 침공하고 노략질하였다. [전한] 영제 건녕 2년(169) 현도태수 경림이 그를 토벌하여 수백 명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았다.주 036 백고가 이에 항복하여 요동[군]에 속하였다. 공손도(?~204)주 037가 해동에서 세력을 떨칠 때, 백고가 그와 함께 우호를 통하였다. 백고가 죽고, 아들 이이모주 038 嚴尤 : 본명은 莊尤인데, 後漢 明帝(劉莊)를 避諱하여 嚴尤라 한다. 建國 3년(11)에 왕망이 12장군을 보내 흉노를 공격했을 때, 討穢將軍으로 출정하였다. 위의 기사처럼, 고구려가 新을 離叛하자 왕망은 엄우를 파견하여 공격한 뒤, 고구려의 이름을 ‘下句麗’로 바꾸었다. 이 일로 엄우는 武建伯이 되었다. 19년, 왕망이 西夷를 정벌하는 것을 비판하였다가 면직되었다. 봉기가 일어나자 納言大將軍으로 綠林軍을 막았다. 23년, 昆陽에서 패주하다가 한 황족 劉聖에게 항복하고 대사마의 지위를 얻었지만, 얼마 뒤 피살되었다. 한편, 『梁書』에는 전하지 않지만, 『三國志』에 따르면, 당시 遼西尹 田譚이 邊塞를 侵寇한 고구려 군대를 추격하다가 피살되었는데, 엄우는 이 일을 지나치게 문제 삼을 경우 도리어 고구려가 배반할 것이고, 이에 부여·예맥 등도 동조할 수 있기 때문에 위안책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왕망은 듣지 않았고 엄우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한편, 『三國史記』에는 이때 엄우가 유인하여 살해한 인물이 句麗侯 騶가 아니라 고구려 將軍 ‘延丕’라고 달리 전한다.
번역주 038)
가 왕위에 올랐다. 이이모는 백고 때부터 여러 차례 요동을 침공하였었다. 또한 망명한 호 500여 호를 거두어들였다. [후한 헌제의] 건안 연간(196~220), 공손강(?~221)주 039이 군사를 내어 그 [나라]를 공격하여 그 나라를 격파하고 읍락을 불살랐다. 항복했던 호도 이이모를 배반하였다.주 040 이이모는 다시 나라를 세웠다. 그 후 이이모가 다시 현도[군]을 공격하자, 현도[군]과 요동[군]이 함께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伊夷模 : 『三國志』와 『梁書』에 따르면, 백고(신대왕) 사후 즉위한 이이모가 건안 연간에 공손강의 공격을 받았던 반면, 『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가 건안 연간에 공손강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이모(고국천왕)의 다음 왕인 산상왕 때의 일이다. 백고 사후 즉위와 공손강의 침입, 이 두 사건을 『삼국사기』에서는 두 왕(고국천왕·산상왕)대에 걸친 일로 전하는 반면, 『삼국지』·『양 서』에서는 이이모 한 명으로 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삼국지』 등의 중국 사서를 더 신뢰하면서 『삼국사기』에서 이이모로 전하는 고국천왕을 실존하지 않는 인물로 보고, 산상왕이 이이모라고 보는 견해이다(池內宏, 1940 ; 武田幸男, 1989). 다른 하나는 『삼국지』 등은 이미 수성(차대왕)도 빠트린 예가 있으므로, 『삼국사기』 기록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보면서 고국천왕의 존재를 인정하는 견해이다(三品彰英, 1950 ; 노태돈, 1994). 단, 이 경우 백고 사후에 즉위한 왕은 고국천왕이지만, 『삼국지』에서 형인 발기와 왕위계승 분쟁을 벌인 끝에 공손강의 공격을 받는 이이모는 『삼국사기』의 산상왕으로 본다(노태돈, 1994).
이이모가 죽고, 아들 위궁(동천왕, 재위: 227~248)이 즉위하였다. 위궁은 용력이 있었고, 말을 잘 탔으며, 사냥을 잘하였다. [조]위 경초 2년(238)에 태부 사마선왕(사마의, 179~251)주 041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공손연(?~238)주 042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때] 위궁은 주부·대가를 보내 병력 천여 명을 거느리게 하여 [조위의] 군대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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淹滯水 : 東明이 건넜다는 淹滯水는 『論衡』 卷2, 吉驗篇에서는 “掩淲水”라 전하고 있고, 『三國志』 所引 「魏略」에서는 “施掩水”, 『後漢書』 夫餘傳에서는 “掩㴲水”, 『隋書』 高麗傳에서는 “淹水”라고 적고 있다. 한편, 夫餘의 東明神話를 바탕으로 한 朱蒙神話에서는 “淹㴲水”(『三國史記』), 〈廣開土王碑〉에서는 “奄利大水”로 전한다. 橐離國(高離國)으로부터 남하하던 도중 東明이 건넜다는 掩淲水(淹滯水·掩㴲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松花江 또는 그 지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리지린, 1963). 東明의 出自地로 알려진 橐離國 문화에 대해 근래 嫩江 하류의 白金寶·漢書 문화가 주목되면서 東明이 건넜다는 ‘掩淲水’를 松花江으로 보는 견해는 더욱 강화되었는데, 구체적으로 北流 松花江으로 보는 의견과(李健才, 1982) 東流 松花江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송호정, 2015). 한편, 橐離國의 위치를 東流 松花江 北岸에 위치한 黑龍江省 賓縣 慶華城址유적과 연결지어 ‘掩淲水’도 松花江이 아닌 拉林河로 보는 견해도 있다(王綿厚,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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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5)
武帝 : 전한의 제7대 황제 劉徹이다. 대내적으로, 董仲舒를 기용하고 유교를 국교화하는 등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대외적으로, 張騫을 大月氏에 파견하고, 장군 衛靑, 霍去病, 李廣 등을 시켜 흉노를 토벌시켜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여 2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119년에는 흉노를 고비 북쪽으로 몰아냈다. 하서에 있던 흉노 渾邪王이 항복하자 그곳에 4군을 설치해 중앙아시아와 연결되는 교통로를 확보하였다. 이후 서역제국의 입공이 계속되었고, 기원전 104년에는 李廣利를 시켜 파미르고원 북서에 있는 大宛國을 정벌하였다. 남쪽으로는 閩越·東越 두 왕국을 병합하고, 기원전 111년에 南越을 멸망시키고 9개 군을 설치하였다. 四川省 변경에서 雲南·貴州에 있던 冉戮·雟·笮·夜郞·滇 등의 종족을 귀순시키고 6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동쪽으로는 조선을 공격하여 기원전 108년에 왕검성을 함락시키고, 4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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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莽 : 전한말의 외척이고, 新의 황제이다. 부친 王曼은 전한 元帝代 황후 王氏의 여러 동생 가운데 하나였고, 王皇后의 동생들은 외척으로 封侯되고 元帝와 成帝 시기에 輔政의 권한을 승계하면서 큰 세도를 누렸다. 이후 哀帝가 죽고, 어린 平帝가 즉위하자 태황태후 왕씨는 왕망을 불러들여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왕망은 반대파를 숙청하고, 평제가 사망한 뒤에는 2살의 孺子嬰을 황제로 옹립한 뒤, 자신은 섭정으로서 천자의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8년, 정식으로 황위에 오르고 국호를 新이라 하였다. 왕망은 『周禮』에 의거한 제도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특히 사회경제분야의 개혁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개혁은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 등의 이유로 큰 혼란만 남긴 채 실패하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22년, 농민들이 봉기하여 赤眉軍과 綠林軍 등이 장안을 함락시키고, 왕망을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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嚴尤 : 본명은 莊尤인데, 後漢 明帝(劉莊)를 避諱하여 嚴尤라 한다. 建國 3년(11)에 왕망이 12장군을 보내 흉노를 공격했을 때, 討穢將軍으로 출정하였다. 위의 기사처럼, 고구려가 新을 離叛하자 왕망은 엄우를 파견하여 공격한 뒤, 고구려의 이름을 ‘下句麗’로 바꾸었다. 이 일로 엄우는 武建伯이 되었다. 19년, 왕망이 西夷를 정벌하는 것을 비판하였다가 면직되었다. 봉기가 일어나자 納言大將軍으로 綠林軍을 막았다. 23년, 昆陽에서 패주하다가 한 황족 劉聖에게 항복하고 대사마의 지위를 얻었지만, 얼마 뒤 피살되었다. 한편, 『梁書』에는 전하지 않지만, 『三國志』에 따르면, 당시 遼西尹 田譚이 邊塞를 侵寇한 고구려 군대를 추격하다가 피살되었는데, 엄우는 이 일을 지나치게 문제 삼을 경우 도리어 고구려가 배반할 것이고, 이에 부여·예맥 등도 동조할 수 있기 때문에 위안책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왕망은 듣지 않았고 엄우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한편, 『三國史記』에는 이때 엄우가 유인하여 살해한 인물이 句麗侯 騶가 아니라 고구려 將軍 ‘延丕’라고 달리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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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夷模 : 『三國志』와 『梁書』에 따르면, 백고(신대왕) 사후 즉위한 이이모가 건안 연간에 공손강의 공격을 받았던 반면, 『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가 건안 연간에 공손강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이모(고국천왕)의 다음 왕인 산상왕 때의 일이다. 백고 사후 즉위와 공손강의 침입, 이 두 사건을 『삼국사기』에서는 두 왕(고국천왕·산상왕)대에 걸친 일로 전하는 반면, 『삼국지』·『양 서』에서는 이이모 한 명으로 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삼국지』 등의 중국 사서를 더 신뢰하면서 『삼국사기』에서 이이모로 전하는 고국천왕을 실존하지 않는 인물로 보고, 산상왕이 이이모라고 보는 견해이다(池內宏, 1940 ; 武田幸男, 1989). 다른 하나는 『삼국지』 등은 이미 수성(차대왕)도 빠트린 예가 있으므로, 『삼국사기』 기록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보면서 고국천왕의 존재를 인정하는 견해이다(三品彰英, 1950 ; 노태돈, 1994). 단, 이 경우 백고 사후에 즉위한 왕은 고국천왕이지만, 『삼국지』에서 형인 발기와 왕위계승 분쟁을 벌인 끝에 공손강의 공격을 받는 이이모는 『삼국사기』의 산상왕으로 본다(노태돈,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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