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동이전

고구려의 성립과 제도

고구려주 001
번역주 001)
高句驪 : 『양서』에서는 고구려를 ‘高句驪’, ‘句驪’, ‘高驪’, ‘高麗’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닫기
는 그 선조가 동명주 002
번역주 002)
東明 : 東明을 고구려 시조라고 언급한 기록은 『양서』가 최초이다.
닫기
으로부터 나왔다. 동명은 본래 북이 고리왕주 003
번역주 003)
櫜離王 : 『論衡』과 『翰苑』 所引 『後漢書』에는 橐離, 『魏略』에는 槀離(高離, 豪離), 『搜神記』에는 槀離, 『後漢書』에는 索離, 『法苑珠林』에는 寧禀離로 나온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嫩江 하류의 松嫩平原說(李建才, 1982 ; 張博泉, 1998), 동류 松花江 중류의 把彦說(王禹浪·李彦君, 2003)이 있다.
닫기
의 아들이었다. [고]리왕이 출행한 사이에 시비가 후[궁]에서 임신하였다. [고]리왕이 돌아와 [이 사실을 알고] 시비를 죽이려 하였다. 시비가 말하기를 “전에 하늘에 큰 알 같은 기운이 서린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제게 내려와 [이로]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그녀를 가두니, 나중에 드디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은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두었는데,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이 신이하다 여겨 곧 [어미가 아이를] 거두어 기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아이가] 성장해서는 활을 잘 쏘았다. 왕이 그 용맹함을 꺼려하여 다시 그를 죽이려 하였다. 동명이 바로 달아나 남쪽으로 가서 엄체수주 004
번역주 004)
淹滯水 : 東明이 건넜다는 淹滯水는 『論衡』 卷2, 吉驗篇에서는 “掩淲水”라 전하고 있고, 『三國志』 所引 「魏略」에서는 “施掩水”, 『後漢書』 夫餘傳에서는 “掩㴲水”, 『隋書』 高麗傳에서는 “淹水”라고 적고 있다. 한편, 夫餘의 東明神話를 바탕으로 한 朱蒙神話에서는 “淹㴲水”(『三國史記』), 〈廣開土王碑〉에서는 “奄利大水”로 전한다. 橐離國(高離國)으로부터 남하하던 도중 東明이 건넜다는 掩淲水(淹滯水·掩㴲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松花江 또는 그 지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리지린, 1963). 東明의 出自地로 알려진 橐離國 문화에 대해 근래 嫩江 하류의 白金寶·漢書 문화가 주목되면서 東明이 건넜다는 ‘掩淲水’를 松花江으로 보는 견해는 더욱 강화되었는데, 구체적으로 北流 松花江으로 보는 의견과(李健才, 1982) 東流 松花江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송호정, 2015). 한편, 橐離國의 위치를 東流 松花江 北岸에 위치한 黑龍江省 賓縣 慶華城址유적과 연결지어 ‘掩淲水’도 松花江이 아닌 拉林河로 보는 견해도 있다(王綿厚, 1990).
닫기
에 이르렀다. [동명이] 활로 강물을 내리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고, 동명이 이를 타고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부여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왕이 되었다. 그 후 [부여의] 분파가 고구려의 종족이 되었다.
그 나라는 한대의 현도군[지역]에 있다. 요동의 동쪽에 위치하며 요동[군]으로부터 1,000리 떨어져 있다. 한과 [조]위 시기에 남으로는 조선·예맥과 [접하였고], 동으로는 옥저와 [접하였으며], 북으로는 부여와 접하였다. 한 무제(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주 005
번역주 005)
武帝 : 전한의 제7대 황제 劉徹이다. 대내적으로, 董仲舒를 기용하고 유교를 국교화하는 등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대외적으로, 張騫을 大月氏에 파견하고, 장군 衛靑, 霍去病, 李廣 등을 시켜 흉노를 토벌시켜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여 2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119년에는 흉노를 고비 북쪽으로 몰아냈다. 하서에 있던 흉노 渾邪王이 항복하자 그곳에 4군을 설치해 중앙아시아와 연결되는 교통로를 확보하였다. 이후 서역제국의 입공이 계속되었고, 기원전 104년에는 李廣利를 시켜 파미르고원 북서에 있는 大宛國을 정벌하였다. 남쪽으로는 閩越·東越 두 왕국을 병합하고, 기원전 111년에 南越을 멸망시키고 9개 군을 설치하였다. 四川省 변경에서 雲南·貴州에 있던 冉戮·雟·笮·夜郞·滇 등의 종족을 귀순시키고 6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동쪽으로는 조선을 공격하여 기원전 108년에 왕검성을 함락시키고, 4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닫기
원봉 4년(기원전 107)에 조선을 멸하고 현도군을 두어,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거기에 속하게 하였다. 고구려의 영토는 대략 2,000리이다. 그 안에 요산이 있어 요수가 거기에서 흘러나온다.주 006
번역주 006)
『漢書』 卷28下 地理志下에 “遼山 遼水所出 西南至遼隊入大遼水”의 언급이 보인다. 한편, 『水經注』 권14·『通典』 권184·『太平寰宇記』 권173에서는 ‘遼水’ 자리에 ‘小遼水’라고 되어 있다. 大遼水는 지금의 遼河, 小遼水는 지금의 渾河로 비정된다(王綿厚·李健才, 1990).
닫기
도읍은 환도[산]의 아래에 있다.주 007
번역주 007)
丸都山은 中國 吉林省 集安市의 山城子山城을 가리키고, 그 아래의 도읍은 集安市內에 위치한 국내성 일대를 가리킨다.
닫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들판과 못은 없어, 백성들은 산과 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계곡 물을 마신다. 비록 농경사회이지만주 008
번역주 008)
土著 : 『史記集解』에 따르면, 土著은 行國의 반대개념으로 전자가 농경사회라고 하면, 후자는 유목사회를 가리킨다.
닫기
좋은 경작지가 없는 까닭에 아껴먹는 것이 습속이 되었다. 궁실을 꾸미기를 좋아한다. [왕이] 사는 곳의 왼편에는 큰 건물을 지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주 009
번역주 009)
『三國志』에는 건물을 ‘左右’에 짓는다고 기재되어 있다.
닫기
또한 영성주 010
번역주 010)
零星 : 농사를 주관하는 별의 이름이다. 『淮南子』 「主術訓」에 “君人之道 其猶零星之尸也”라는 기록이 있다. 『後漢書』의 李賢注에서는 “辰日祠以牛 號曰零星”이라고 한다. 한편 零星은 靈星과 통하는데, 『詩經』 周頌, 絲衣序에 “絲衣 繹賓尸也 高子曰 靈星之尸也”라는 기록이 있고, 『通典』 禮4에는 “周制 仲秋之月 祭靈星於國之東南”이라는 기록이 있다.
닫기
과 사직주 011
번역주 011)
社稷 : 토지신과 곡신을 가리킨다. 『國語』 魯語上에 “共工氏之伯九有也 其子曰后土 能平九土 故祀以爲社”라는 기록이 있고, 여기에 주석을 단 韋昭는 “社 后土之神也”라고 하였다. 『白虎通』 社稷에도 “社者 土地之神也”라고 되어 있다. 또 『禮記』 祭法에 “是故厲山氏之有天下也 其子曰農 能殖百穀 夏之衰也 周棄繼之 故祀以爲稷”이라는 기록이 있고, 여기에 주석을 단 孔穎達은 “故祀以爲稷者 謂農及棄 皆祀之以配稷之神”이라고 하였다. 한편 『尙書』 太甲上에 “先王顧諟天之明命 以承上下神祇 社稷宗廟罔不祗肅”이라는 기록이 있다.
닫기
에도 제사를 지낸다. 사람들의 성정은 매우 흉악하며 [이웃 나라를] 침범하고 노략질하길 좋아한다.
그 관에는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 012
번역주 012)
古鄒加 : 『三國志』·『南史』·『太平御覽』 所引 『魏略』에는 ‘古雛加’로 되어 있다. 『後漢書』·『冊府元龜』·『新唐書』에는 ‘古鄒大加’로 되어 있다. 한편, 李賢(654~684)은 『후한서』에 주석을 달면서, 古鄒大加는 고구려에서 빈객 접대를 관장하는 관직으로 당의 鴻臚와 같다고 설명하였다. 『翰苑』 所引 『高麗記』에도 拔古鄒加가 賓客을 담당하며 鴻臚卿에 비견되고, 관등은 大夫使者라고 하였다.
닫기
·주부주 013
번역주 013)
主簿 : 『翰苑』 所引 『高麗記』에 “次鬱折 比從二品 華言主簿”라는 기록이 있다.
닫기
·우태·사자·조의선인주 014
번역주 014)
皁衣先人 : 『翰苑』 所引 『高麗記』에는 “次皁衣頭大兄 比從三品 一名中裏皁衣頭大兄 東夷相傳 所謂皁衣先人者也”라는 기록과 “次先人 比正九品”이라는 기록이 있다. 한편, 『後漢書』·『南史』·『冊府元龜』에는 ‘皁衣’ 자리에 ‘帛衣’로 되어 있고, 『新唐書』 고려전에 “帛衣頭大兄 所謂帛衣者 先人也”라는 기록이 있다.
닫기
이 있다.주 015
번역주 015)
『三國志』에는 ‘優台’와 ‘使者’ 사이에 ‘丞’이 있고, 『後漢書』에는 ‘丞’이 없다.
닫기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등급이 있다. 언어와 대개의 일상은 부여와 같은 점이 많으나, 그 기질과 의복에는 다른 점이 있다. 본래 5족이 있었는데, 소노부주 016
번역주 016)
消奴部 : 『三國志』에는 ‘涓奴部’로 되어 있는 반면, 『翰苑』 所引 『魏略』·『後漢書』·『南史』·『冊府元龜』에서는 모두 ‘消奴部’로 표기하고 있다.
닫기
·절노부·신노부주 017
번역주 017)
愼奴部 : 『梁書』와 『南史』에는 ‘愼奴部’로 되어 있는 반면, 『三國志』·『後漢書』 등에는 모두 ‘順奴部’로 되어 있다. 梁 太祖文皇帝(梁 武帝의 父의 추존호)의 이름이 蕭順之이므로, 『梁書』는 避諱하여 ‘順奴部’를 ‘愼奴部’로 표기하였다.
닫기
·관노부주 018
번역주 018)
雚奴部 : 『三國志』·『後漢書』 등에는 모두 ‘灌奴部’로 되어 있다.
닫기
·계루부였다. 본래 소노부가 왕을 하였으나 미약해져 계루부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한나라 때에 의책·조 복·고취를 하사하면 항상 현도군에 와서 그것들을 받아갔다. 나중에 점차 교만해져 다시는 [현도]군에 오지 않았다. 다만, [현도군의]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쌓아 [거기에 두니] 그것들을 받아갔다.주 019
번역주 019)
해당 문장에서 『梁書』 찬자는 작은 성을 쌓은 주체가 고구려인 듯 기술하였으나, 『三國志』의 해당 부분은 “後秒驕恣 不復詣郡 於東界築小城 置朝服衣幘其中 歲時來取之”라고 되어 있어 현도군이 성을 쌓은 주체임을 보여준다.
닫기
지금도 여전히 이 성을 책구루주 020
번역주 020)
幘溝婁 : 中國 遼寧省 新濱縣 동쪽의 漢代 白旗堡城을 책구루로 비정한다(孫進己·馮永謙, 1989).
닫기
라고 부른다.주 021
번역주 021)
해당 문장은 『三國志』를 전재한 것이기 때문에 이때의 ‘至今’은 梁代가 아니라, 曹魏代를 가리킨다.
닫기
구루라는 것은 고구려말로 성을 일컫는다.
그 [나라에서는] 관리를 둘 적에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그 습속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 나라 안의 읍락에서는 남녀가 매일 밤 무리지어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논다. 그 사람들은 깨끗하고 정결한 것을 좋아한다. 술을 잘 담근다. 무릎 꿇고 절할 때에는 한 쪽 다리를 펴며,주 022
번역주 022)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高句麗에는 “跪拜申一脚”이라는 기록이 있고, 『後漢書』 卷85, 高句驪에는 “跪拜曳一脚”이라는 기록이 있다. ‘펴다(申)’와 ‘끌다(曳)’의 차이인데, 자형이 유사한 데서 비롯된 오사일 가능성이 있다.
닫기
걸음은 모두 달리는 [듯하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 크게 모인다. 이를 동명주 023
번역주 023)
東明 :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高句麗에 ‘東盟’으로 되어 있다. 이 大會와 관련하여 『三國志』에는 “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隧于神坐”라는 기록이 더 있다.
닫기
이라고 한다. 그 공회에서는 모두 수를 놓은 비단옷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대가·주부가 머리에 쓰는 것은 [중국의] 책과 흡사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그 [나라의] 소가는 절풍을 쓰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다. 그 나라에 뇌옥은 없지만,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제가가 모여 평의하여 그를 죽이고 처와 자식을 적몰주 024
번역주 024)
籍沒 : 재산을 沒收하고 가족까지 처벌하는 것을 의미한다. 『三國志』 卷30, 東夷30 高句麗에서는 “無牢獄 有罪諸加評議 便殺之 沒入妻子爲奴婢”이라고 하였다.
닫기
하여 [노비로] 삼는다. 그 습속이 음란함을 좋아하여, 남녀가 서로 꾀어 야합하는 경우가 많다.주 025
번역주 025)
男女多相奔誘 : 『三國志』와 『後漢書』에는 보이지 않고, 『翰苑』 所引 『魏略』과 이 부분에만 보인다.
닫기
혼인한 뒤에는 곧 수의를 조금씩 만든다. 장사를 지낼 때에는 곽은 쓰나 관은 쓰지 않는다.주 026
번역주 026)
有椁無棺 : 『三國志』와 『後漢書』에는 보이지 않고, 『翰苑』 所引 『魏略』과 이 부분에만 보인다.
닫기
성대한 장례를 좋아하여, 금은과 재화를 장례에 다 소비한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그 주위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열 지어 심는다. 형이 죽으면 [동생은]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그 [나라의] 말은 모두 작아서 산에 오르기에 편리하다. [그] 나라 사람들은 기력을 숭상하여, 활과 화살, 칼과 창을 잘 다루고, 갑옷을 갖추고 있으며, 전투에 능숙하다. 옥저와 동예가 모두 복속되었다.
[신(新)의] 왕망(재위: 8~22)주 027
번역주 027)
王莽 : 전한말의 외척이고, 新의 황제이다. 부친 王曼은 전한 元帝代 황후 王氏의 여러 동생 가운데 하나였고, 王皇后의 동생들은 외척으로 封侯되고 元帝와 成帝 시기에 輔政의 권한을 승계하면서 큰 세도를 누렸다. 이후 哀帝가 죽고, 어린 平帝가 즉위하자 태황태후 왕씨는 왕망을 불러들여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왕망은 반대파를 숙청하고, 평제가 사망한 뒤에는 2살의 孺子嬰을 황제로 옹립한 뒤, 자신은 섭정으로서 천자의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8년, 정식으로 황위에 오르고 국호를 新이라 하였다. 왕망은 『周禮』에 의거한 제도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특히 사회경제분야의 개혁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개혁은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 등의 이유로 큰 혼란만 남긴 채 실패하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22년, 농민들이 봉기하여 赤眉軍과 綠林軍 등이 장안을 함락시키고, 왕망을 살해하였다.
닫기
의 [재위] 초에 고구려 병사를 징발하여 흉노주 028
번역주 028)
胡 : 일반적으로 흉노 이전에는 북방의 이종족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범용되었다. 이후 흉노제국이 등장하면서, 주로 흉노를 지칭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匈奴를 가리키며, 『後漢書』에는 ‘匈奴’로 되어 있다.
닫기
를 공격[하고자] 했는데, [고구려 병들은] 가려하지 않았다. [왕망이] 강하게 다그쳐서 그들을 보내니, 모두 도망하여 새를 나가 도적이 되었다. [유]주와 [요서]군이 책임을 구려후 추주 029
번역주 029)
騶 : 『三國志』에는 ‘騊’로 되어 있는 반면, 『漢書』 王莽列傳과 『後漢書』 고구려전에는 ‘騶’로 되어 있다.
닫기
에게 돌렸다. 엄우주 030
번역주 030)
嚴尤 : 본명은 莊尤인데, 後漢 明帝(劉莊)를 避諱하여 嚴尤라 한다. 建國 3년(11)에 왕망이 12장군을 보내 흉노를 공격했을 때, 討穢將軍으로 출정하였다. 위의 기사처럼, 고구려가 新을 離叛하자 왕망은 엄우를 파견하여 공격한 뒤, 고구려의 이름을 ‘下句麗’로 바꾸었다. 이 일로 엄우는 武建伯이 되었다. 19년, 왕망이 西夷를 정벌하는 것을 비판하였다가 면직되었다. 봉기가 일어나자 納言大將軍으로 綠林軍을 막았다. 23년, 昆陽에서 패주하다가 한 황족 劉聖에게 항복하고 대사마의 지위를 얻었지만, 얼마 뒤 피살되었다. 한편, 『梁書』에는 전하지 않지만, 『三國志』에 따르면, 당시 遼西尹 田譚이 邊塞를 侵寇한 고구려 군대를 추격하다가 피살되었는데, 엄우는 이 일을 지나치게 문제 삼을 경우 도리어 고구려가 배반할 것이고, 이에 부여·예맥 등도 동조할 수 있기 때문에 위안책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왕망은 듣지 않았고 엄우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한편, 『三國史記』에는 이때 엄우가 유인하여 살해한 인물이 句麗侯 騶가 아니라 고구려 將軍 ‘延丕’라고 달리 전한다.
닫기
가 [추를] 꾀어내 그를 참하였다. 왕망은 매우 기뻐하며, 이름을 고쳐 고구려를 하구려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이] 후가 되었다.주 031
번역주 031)
『漢書』 王莽列傳의 “其東出者 至玄菟樂浪高句驪夫餘 南出者 隃徼外 歷益州 貶句町王爲侯 西出者 至西域 盡改其王爲侯”라는 기록에 따르면, 왕망은 建國 1년(9)에 동쪽으로 현도와 낙랑, 고구려와 부여, 남쪽으로 익주, 서쪽으로 서역까지의 모든 왕을 후로 격하시켰다.
닫기
[후한] 광무[제]주 032
번역주 032)
光武帝(재위 : 25~57) : 後漢의 제1대 황제 劉秀를 가리킨다. 전한의 외척으로서 제위를 찬탈하고 신조를 세운 왕망이 내·외로 실정하자, 전국 각지에서 赤眉의 난을 위시한 농민봉기와 南陽劉氏 등의 호족반란이 일어나자, 남양의 호족 劉秀도 거병하여 점차 사방의 경쟁세력을 제압하면서 25년에 후한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닫기
8년(32),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때가 되어] 비로소 왕을 칭하였다. [후한] 상제(재위: 106)·안제(재위: 106~125)의 연간에 그 왕의 이름은 궁(고구려 태조왕, 재위: 53~146)이었는데, 여러 차례 요동을 침공하였다. 현도태수 채풍이 그를 토벌하였지만 [그 침공을] 막을 수는 없었다.주 033
번역주 033)
『三國志』·『後漢書』에는 玄菟太守를 姚光으로 蔡諷은 遼東太守였다고 기재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해 『삼국지』에는 “遼東太守蔡風玄菟太守姚光 以宮爲二郡害 興師伐之 宮詐降請和 二郡不進 宮密遣軍攻玄菟 焚燒候城 入遼隧 殺吏民 後宮復犯遼東 蔡風輕將吏士追討之 軍敗沒”의 내용이 보인다. 『後漢書』에는 보다 자세한 내용과 함께 부여가 2만여 병력을 보내 후한을 도왔다는 기사가 보인다.
닫기
궁이 죽자, 아들 백고(신대왕, 재위: 165~179)가 왕위에 올랐다.주 034
번역주 034)
『三國志』·『梁書』에는 伯固를 宮의 아들이라고 전하지만, 『後漢書』에는 伯固를 遂成의 아들이자, 宮의 손자라고 전한다. 반면, 『三國史記』에서는 伯固를 宮과 遂成의 동생으로 전한다.
닫기
[전한] 순제(재위: 125~144)부터 환제주 035
번역주 035)
桓帝 : 원문 ‘和’로 되어 있다. 그러나 和帝는 順帝 이전의 황제이고, 문맥상 ‘殤安之間’ 이후 시기라는 점에서 이때의 ‘和’는 ‘桓’의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 『三國志』와 『後漢書』에는 ‘和’ 대신 ‘桓’으로 되어 있다.
닫기
(재위: 146~167)까지의 연간에 다시 여러 차례 요동을 침공하고 노략질하였다. [전한] 영제 건녕 2년(169) 현도태수 경림이 그를 토벌하여 수백 명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았다.주 036
번역주 036)
『三國史記』 권16 고구려본기에는 이 일을 新大王 3년 즉 建寧元年(168)의 일로 전한다.
닫기
백고가 이에 항복하여 요동[군]에 속하였다. 공손도(?~204)주 037
번역주 037)
公孫度 : 후한 말 현도군의 하급관리였으나, 중앙에 천거되어 尙書郞을 지냈고, 189년에는 董卓에게 遼東太守를 제수받았다. 후한 말 황건적의 난 등으로 중앙집권력이 약화되자 스스로 자립해 나갔다. 고구려와 오환 등을 공격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요동군을 나누어 遼西郡과 中遼郡을 두고, 산동반도의 東萊諸縣을 복속시켜 營州刺史를 설치하였다. 190년에는 스스로 遼東侯·平州牧이라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닫기
가 해동에서 세력을 떨칠 때, 백고가 그와 함께 우호를 통하였다. 백고가 죽고, 아들 이이모주 038
번역주 038)
伊夷模 : 『三國志』와 『梁書』에 따르면, 백고(신대왕) 사후 즉위한 이이모가 건안 연간에 공손강의 공격을 받았던 반면, 『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가 건안 연간에 공손강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이모(고국천왕)의 다음 왕인 산상왕 때의 일이다. 백고 사후 즉위와 공손강의 침입, 이 두 사건을 『삼국사기』에서는 두 왕(고국천왕·산상왕)대에 걸친 일로 전하는 반면, 『삼국지』·『양 서』에서는 이이모 한 명으로 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삼국지』 등의 중국 사서를 더 신뢰하면서 『삼국사기』에서 이이모로 전하는 고국천왕을 실존하지 않는 인물로 보고, 산상왕이 이이모라고 보는 견해이다(池內宏, 1940 ; 武田幸男, 1989). 다른 하나는 『삼국지』 등은 이미 수성(차대왕)도 빠트린 예가 있으므로, 『삼국사기』 기록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보면서 고국천왕의 존재를 인정하는 견해이다(三品彰英, 1950 ; 노태돈, 1994). 단, 이 경우 백고 사후에 즉위한 왕은 고국천왕이지만, 『삼국지』에서 형인 발기와 왕위계승 분쟁을 벌인 끝에 공손강의 공격을 받는 이이모는 『삼국사기』의 산상왕으로 본다(노태돈, 1994).
닫기
가 왕위에 올랐다. 이이모는 백고 때부터 여러 차례 요동을 침공하였었다. 또한 망명한 호 500여 호를 거두어들였다. [후한 헌제의] 건안 연간(196~220), 공손강(?~221)주 039
번역주 039)
公孫康 : 公孫度의 아들이며, 대를 이어 요동을 지배하였다. 조조가 3郡의 오환을 정벌하고 柳城을 도륙하자 원소 등이 요동으로 달아났는데, 공손강은 원소를 참하여 조조에게 그 수급을 보냈다. 이 공으로 그는 襄平侯에 봉해지고 左將軍에 임명되었다. 조위에서 대사마로 추증되었다.
닫기
이 군사를 내어 그 [나라]를 공격하여 그 나라를 격파하고 읍락을 불살랐다. 항복했던 호도 이이모를 배반하였다.주 040
번역주 040)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高句麗에는 이이모와 그의 형 拔奇의 왕위계승 분쟁과 공손강의 고구려 침입에 대해 보다 자세히 전한다. “伯固死 有二子 長子拔奇 小子伊夷模 拔奇不肖 國人便共立伊夷模爲王 自固時 數寇遼東 又受亡胡五百餘家 建安中 公孫康出軍擊之 破其國 焚燒邑落 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 還住沸流水 降胡亦叛伊夷模 伊夷模更作新國 今日所在是也 拔奇遂往遼東 有子留句麗國 今古雛加駮位居是也 其後復擊玄菟 玄菟與遼東合擊 大破之”
닫기
이이모는 다시 나라를 세웠다. 그 후 이이모가 다시 현도[군]을 공격하자, 현도[군]과 요동[군]이 함께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이이모가 죽고, 아들 위궁(동천왕, 재위: 227~248)이 즉위하였다. 위궁은 용력이 있었고, 말을 잘 탔으며, 사냥을 잘하였다. [조]위 경초 2년(238)에 태부 사마선왕(사마의, 179~251)주 041
번역주 041)
司馬懿 : 京兆尹을 지낸 司馬防의 둘째 아들이다. 魏의 4代 황제 동안 관직을 역임했고, 屯田制를 건의하였다. 특히 226년 조비의 사후 曹眞·陳群·曹休 등과 함께 輔政大臣으로 明帝 曹叡를 보좌하였다. 사후 舞陽侯에 봉해졌다. 손자 司馬炎(236~290)이 西晉을 수립한 이후 宣帝로 추존되었고, 廟號를 高祖라고 하였다.
닫기
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공손연(?~238)주 042
번역주 042)
公孫淵 : 228년 숙부 公孫恭의 지위를 빼앗아 집권하였다. 吳 대신 魏의 편에서 서서 요동태수의 관직을 받았지만, 이후 자립하여 燕王을 자칭하였다. 이에 위에서는 사마의를 보내 공격하였고, 그 결과 처형되고 정권이 몰락하였다.
닫기
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때] 위궁은 주부·대가를 보내 병력 천여 명을 거느리게 하여 [조위의] 군대를 도왔다.

  • 번역주 001)
    高句驪 : 『양서』에서는 고구려를 ‘高句驪’, ‘句驪’, ‘高驪’, ‘高麗’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東明 : 東明을 고구려 시조라고 언급한 기록은 『양서』가 최초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櫜離王 : 『論衡』과 『翰苑』 所引 『後漢書』에는 橐離, 『魏略』에는 槀離(高離, 豪離), 『搜神記』에는 槀離, 『後漢書』에는 索離, 『法苑珠林』에는 寧禀離로 나온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嫩江 하류의 松嫩平原說(李建才, 1982 ; 張博泉, 1998), 동류 松花江 중류의 把彦說(王禹浪·李彦君, 2003)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淹滯水 : 東明이 건넜다는 淹滯水는 『論衡』 卷2, 吉驗篇에서는 “掩淲水”라 전하고 있고, 『三國志』 所引 「魏略」에서는 “施掩水”, 『後漢書』 夫餘傳에서는 “掩㴲水”, 『隋書』 高麗傳에서는 “淹水”라고 적고 있다. 한편, 夫餘의 東明神話를 바탕으로 한 朱蒙神話에서는 “淹㴲水”(『三國史記』), 〈廣開土王碑〉에서는 “奄利大水”로 전한다. 橐離國(高離國)으로부터 남하하던 도중 東明이 건넜다는 掩淲水(淹滯水·掩㴲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松花江 또는 그 지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리지린, 1963). 東明의 出自地로 알려진 橐離國 문화에 대해 근래 嫩江 하류의 白金寶·漢書 문화가 주목되면서 東明이 건넜다는 ‘掩淲水’를 松花江으로 보는 견해는 더욱 강화되었는데, 구체적으로 北流 松花江으로 보는 의견과(李健才, 1982) 東流 松花江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송호정, 2015). 한편, 橐離國의 위치를 東流 松花江 北岸에 위치한 黑龍江省 賓縣 慶華城址유적과 연결지어 ‘掩淲水’도 松花江이 아닌 拉林河로 보는 견해도 있다(王綿厚, 1990).바로가기
  • 번역주 005)
    武帝 : 전한의 제7대 황제 劉徹이다. 대내적으로, 董仲舒를 기용하고 유교를 국교화하는 등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대외적으로, 張騫을 大月氏에 파견하고, 장군 衛靑, 霍去病, 李廣 등을 시켜 흉노를 토벌시켜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여 2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기원전 119년에는 흉노를 고비 북쪽으로 몰아냈다. 하서에 있던 흉노 渾邪王이 항복하자 그곳에 4군을 설치해 중앙아시아와 연결되는 교통로를 확보하였다. 이후 서역제국의 입공이 계속되었고, 기원전 104년에는 李廣利를 시켜 파미르고원 북서에 있는 大宛國을 정벌하였다. 남쪽으로는 閩越·東越 두 왕국을 병합하고, 기원전 111년에 南越을 멸망시키고 9개 군을 설치하였다. 四川省 변경에서 雲南·貴州에 있던 冉戮·雟·笮·夜郞·滇 등의 종족을 귀순시키고 6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동쪽으로는 조선을 공격하여 기원전 108년에 왕검성을 함락시키고, 4개의 군을 설치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漢書』 卷28下 地理志下에 “遼山 遼水所出 西南至遼隊入大遼水”의 언급이 보인다. 한편, 『水經注』 권14·『通典』 권184·『太平寰宇記』 권173에서는 ‘遼水’ 자리에 ‘小遼水’라고 되어 있다. 大遼水는 지금의 遼河, 小遼水는 지금의 渾河로 비정된다(王綿厚·李健才, 1990).바로가기
  • 번역주 007)
    丸都山은 中國 吉林省 集安市의 山城子山城을 가리키고, 그 아래의 도읍은 集安市內에 위치한 국내성 일대를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土著 : 『史記集解』에 따르면, 土著은 行國의 반대개념으로 전자가 농경사회라고 하면, 후자는 유목사회를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三國志』에는 건물을 ‘左右’에 짓는다고 기재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零星 : 농사를 주관하는 별의 이름이다. 『淮南子』 「主術訓」에 “君人之道 其猶零星之尸也”라는 기록이 있다. 『後漢書』의 李賢注에서는 “辰日祠以牛 號曰零星”이라고 한다. 한편 零星은 靈星과 통하는데, 『詩經』 周頌, 絲衣序에 “絲衣 繹賓尸也 高子曰 靈星之尸也”라는 기록이 있고, 『通典』 禮4에는 “周制 仲秋之月 祭靈星於國之東南”이라는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社稷 : 토지신과 곡신을 가리킨다. 『國語』 魯語上에 “共工氏之伯九有也 其子曰后土 能平九土 故祀以爲社”라는 기록이 있고, 여기에 주석을 단 韋昭는 “社 后土之神也”라고 하였다. 『白虎通』 社稷에도 “社者 土地之神也”라고 되어 있다. 또 『禮記』 祭法에 “是故厲山氏之有天下也 其子曰農 能殖百穀 夏之衰也 周棄繼之 故祀以爲稷”이라는 기록이 있고, 여기에 주석을 단 孔穎達은 “故祀以爲稷者 謂農及棄 皆祀之以配稷之神”이라고 하였다. 한편 『尙書』 太甲上에 “先王顧諟天之明命 以承上下神祇 社稷宗廟罔不祗肅”이라는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2)
    古鄒加 : 『三國志』·『南史』·『太平御覽』 所引 『魏略』에는 ‘古雛加’로 되어 있다. 『後漢書』·『冊府元龜』·『新唐書』에는 ‘古鄒大加’로 되어 있다. 한편, 李賢(654~684)은 『후한서』에 주석을 달면서, 古鄒大加는 고구려에서 빈객 접대를 관장하는 관직으로 당의 鴻臚와 같다고 설명하였다. 『翰苑』 所引 『高麗記』에도 拔古鄒加가 賓客을 담당하며 鴻臚卿에 비견되고, 관등은 大夫使者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3)
    主簿 : 『翰苑』 所引 『高麗記』에 “次鬱折 比從二品 華言主簿”라는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4)
    皁衣先人 : 『翰苑』 所引 『高麗記』에는 “次皁衣頭大兄 比從三品 一名中裏皁衣頭大兄 東夷相傳 所謂皁衣先人者也”라는 기록과 “次先人 比正九品”이라는 기록이 있다. 한편, 『後漢書』·『南史』·『冊府元龜』에는 ‘皁衣’ 자리에 ‘帛衣’로 되어 있고, 『新唐書』 고려전에 “帛衣頭大兄 所謂帛衣者 先人也”라는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5)
    『三國志』에는 ‘優台’와 ‘使者’ 사이에 ‘丞’이 있고, 『後漢書』에는 ‘丞’이 없다.바로가기
  • 번역주 016)
    消奴部 : 『三國志』에는 ‘涓奴部’로 되어 있는 반면, 『翰苑』 所引 『魏略』·『後漢書』·『南史』·『冊府元龜』에서는 모두 ‘消奴部’로 표기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7)
    愼奴部 : 『梁書』와 『南史』에는 ‘愼奴部’로 되어 있는 반면, 『三國志』·『後漢書』 등에는 모두 ‘順奴部’로 되어 있다. 梁 太祖文皇帝(梁 武帝의 父의 추존호)의 이름이 蕭順之이므로, 『梁書』는 避諱하여 ‘順奴部’를 ‘愼奴部’로 표기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8)
    雚奴部 : 『三國志』·『後漢書』 등에는 모두 ‘灌奴部’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9)
    해당 문장에서 『梁書』 찬자는 작은 성을 쌓은 주체가 고구려인 듯 기술하였으나, 『三國志』의 해당 부분은 “後秒驕恣 不復詣郡 於東界築小城 置朝服衣幘其中 歲時來取之”라고 되어 있어 현도군이 성을 쌓은 주체임을 보여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0)
    幘溝婁 : 中國 遼寧省 新濱縣 동쪽의 漢代 白旗堡城을 책구루로 비정한다(孫進己·馮永謙, 1989). 바로가기
  • 번역주 021)
    해당 문장은 『三國志』를 전재한 것이기 때문에 이때의 ‘至今’은 梁代가 아니라, 曹魏代를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22)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高句麗에는 “跪拜申一脚”이라는 기록이 있고, 『後漢書』 卷85, 高句驪에는 “跪拜曳一脚”이라는 기록이 있다. ‘펴다(申)’와 ‘끌다(曳)’의 차이인데, 자형이 유사한 데서 비롯된 오사일 가능성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3)
    東明 :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高句麗에 ‘東盟’으로 되어 있다. 이 大會와 관련하여 『三國志』에는 “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隧于神坐”라는 기록이 더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4)
    籍沒 : 재산을 沒收하고 가족까지 처벌하는 것을 의미한다. 『三國志』 卷30, 東夷30 高句麗에서는 “無牢獄 有罪諸加評議 便殺之 沒入妻子爲奴婢”이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5)
    男女多相奔誘 : 『三國志』와 『後漢書』에는 보이지 않고, 『翰苑』 所引 『魏略』과 이 부분에만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26)
    有椁無棺 : 『三國志』와 『後漢書』에는 보이지 않고, 『翰苑』 所引 『魏略』과 이 부분에만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27)
    王莽 : 전한말의 외척이고, 新의 황제이다. 부친 王曼은 전한 元帝代 황후 王氏의 여러 동생 가운데 하나였고, 王皇后의 동생들은 외척으로 封侯되고 元帝와 成帝 시기에 輔政의 권한을 승계하면서 큰 세도를 누렸다. 이후 哀帝가 죽고, 어린 平帝가 즉위하자 태황태후 왕씨는 왕망을 불러들여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왕망은 반대파를 숙청하고, 평제가 사망한 뒤에는 2살의 孺子嬰을 황제로 옹립한 뒤, 자신은 섭정으로서 천자의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8년, 정식으로 황위에 오르고 국호를 新이라 하였다. 왕망은 『周禮』에 의거한 제도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특히 사회경제분야의 개혁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개혁은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 등의 이유로 큰 혼란만 남긴 채 실패하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22년, 농민들이 봉기하여 赤眉軍과 綠林軍 등이 장안을 함락시키고, 왕망을 살해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8)
    胡 : 일반적으로 흉노 이전에는 북방의 이종족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범용되었다. 이후 흉노제국이 등장하면서, 주로 흉노를 지칭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匈奴를 가리키며, 『後漢書』에는 ‘匈奴’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9)
    騶 : 『三國志』에는 ‘騊’로 되어 있는 반면, 『漢書』 王莽列傳과 『後漢書』 고구려전에는 ‘騶’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30)
    嚴尤 : 본명은 莊尤인데, 後漢 明帝(劉莊)를 避諱하여 嚴尤라 한다. 建國 3년(11)에 왕망이 12장군을 보내 흉노를 공격했을 때, 討穢將軍으로 출정하였다. 위의 기사처럼, 고구려가 新을 離叛하자 왕망은 엄우를 파견하여 공격한 뒤, 고구려의 이름을 ‘下句麗’로 바꾸었다. 이 일로 엄우는 武建伯이 되었다. 19년, 왕망이 西夷를 정벌하는 것을 비판하였다가 면직되었다. 봉기가 일어나자 納言大將軍으로 綠林軍을 막았다. 23년, 昆陽에서 패주하다가 한 황족 劉聖에게 항복하고 대사마의 지위를 얻었지만, 얼마 뒤 피살되었다. 한편, 『梁書』에는 전하지 않지만, 『三國志』에 따르면, 당시 遼西尹 田譚이 邊塞를 侵寇한 고구려 군대를 추격하다가 피살되었는데, 엄우는 이 일을 지나치게 문제 삼을 경우 도리어 고구려가 배반할 것이고, 이에 부여·예맥 등도 동조할 수 있기 때문에 위안책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왕망은 듣지 않았고 엄우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한편, 『三國史記』에는 이때 엄우가 유인하여 살해한 인물이 句麗侯 騶가 아니라 고구려 將軍 ‘延丕’라고 달리 전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31)
    『漢書』 王莽列傳의 “其東出者 至玄菟樂浪高句驪夫餘 南出者 隃徼外 歷益州 貶句町王爲侯 西出者 至西域 盡改其王爲侯”라는 기록에 따르면, 왕망은 建國 1년(9)에 동쪽으로 현도와 낙랑, 고구려와 부여, 남쪽으로 익주, 서쪽으로 서역까지의 모든 왕을 후로 격하시켰다.바로가기
  • 번역주 032)
    光武帝(재위 : 25~57) : 後漢의 제1대 황제 劉秀를 가리킨다. 전한의 외척으로서 제위를 찬탈하고 신조를 세운 왕망이 내·외로 실정하자, 전국 각지에서 赤眉의 난을 위시한 농민봉기와 南陽劉氏 등의 호족반란이 일어나자, 남양의 호족 劉秀도 거병하여 점차 사방의 경쟁세력을 제압하면서 25년에 후한의 황제로 즉위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3)
    『三國志』·『後漢書』에는 玄菟太守를 姚光으로 蔡諷은 遼東太守였다고 기재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해 『삼국지』에는 “遼東太守蔡風玄菟太守姚光 以宮爲二郡害 興師伐之 宮詐降請和 二郡不進 宮密遣軍攻玄菟 焚燒候城 入遼隧 殺吏民 後宮復犯遼東 蔡風輕將吏士追討之 軍敗沒”의 내용이 보인다. 『後漢書』에는 보다 자세한 내용과 함께 부여가 2만여 병력을 보내 후한을 도왔다는 기사가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34)
    『三國志』·『梁書』에는 伯固를 宮의 아들이라고 전하지만, 『後漢書』에는 伯固를 遂成의 아들이자, 宮의 손자라고 전한다. 반면, 『三國史記』에서는 伯固를 宮과 遂成의 동생으로 전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35)
    桓帝 : 원문 ‘和’로 되어 있다. 그러나 和帝는 順帝 이전의 황제이고, 문맥상 ‘殤安之間’ 이후 시기라는 점에서 이때의 ‘和’는 ‘桓’의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 『三國志』와 『後漢書』에는 ‘和’ 대신 ‘桓’으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36)
    『三國史記』 권16 고구려본기에는 이 일을 新大王 3년 즉 建寧元年(168)의 일로 전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37)
    公孫度 : 후한 말 현도군의 하급관리였으나, 중앙에 천거되어 尙書郞을 지냈고, 189년에는 董卓에게 遼東太守를 제수받았다. 후한 말 황건적의 난 등으로 중앙집권력이 약화되자 스스로 자립해 나갔다. 고구려와 오환 등을 공격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요동군을 나누어 遼西郡과 中遼郡을 두고, 산동반도의 東萊諸縣을 복속시켜 營州刺史를 설치하였다. 190년에는 스스로 遼東侯·平州牧이라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8)
    伊夷模 : 『三國志』와 『梁書』에 따르면, 백고(신대왕) 사후 즉위한 이이모가 건안 연간에 공손강의 공격을 받았던 반면, 『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가 건안 연간에 공손강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이모(고국천왕)의 다음 왕인 산상왕 때의 일이다. 백고 사후 즉위와 공손강의 침입, 이 두 사건을 『삼국사기』에서는 두 왕(고국천왕·산상왕)대에 걸친 일로 전하는 반면, 『삼국지』·『양 서』에서는 이이모 한 명으로 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삼국지』 등의 중국 사서를 더 신뢰하면서 『삼국사기』에서 이이모로 전하는 고국천왕을 실존하지 않는 인물로 보고, 산상왕이 이이모라고 보는 견해이다(池內宏, 1940 ; 武田幸男, 1989). 다른 하나는 『삼국지』 등은 이미 수성(차대왕)도 빠트린 예가 있으므로, 『삼국사기』 기록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보면서 고국천왕의 존재를 인정하는 견해이다(三品彰英, 1950 ; 노태돈, 1994). 단, 이 경우 백고 사후에 즉위한 왕은 고국천왕이지만, 『삼국지』에서 형인 발기와 왕위계승 분쟁을 벌인 끝에 공손강의 공격을 받는 이이모는 『삼국사기』의 산상왕으로 본다(노태돈, 1994).바로가기
  • 번역주 039)
    公孫康 : 公孫度의 아들이며, 대를 이어 요동을 지배하였다. 조조가 3郡의 오환을 정벌하고 柳城을 도륙하자 원소 등이 요동으로 달아났는데, 공손강은 원소를 참하여 조조에게 그 수급을 보냈다. 이 공으로 그는 襄平侯에 봉해지고 左將軍에 임명되었다. 조위에서 대사마로 추증되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40)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 高句麗에는 이이모와 그의 형 拔奇의 왕위계승 분쟁과 공손강의 고구려 침입에 대해 보다 자세히 전한다. “伯固死 有二子 長子拔奇 小子伊夷模 拔奇不肖 國人便共立伊夷模爲王 自固時 數寇遼東 又受亡胡五百餘家 建安中 公孫康出軍擊之 破其國 焚燒邑落 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 還住沸流水 降胡亦叛伊夷模 伊夷模更作新國 今日所在是也 拔奇遂往遼東 有子留句麗國 今古雛加駮位居是也 其後復擊玄菟 玄菟與遼東合擊 大破之”바로가기
  • 번역주 041)
    司馬懿 : 京兆尹을 지낸 司馬防의 둘째 아들이다. 魏의 4代 황제 동안 관직을 역임했고, 屯田制를 건의하였다. 특히 226년 조비의 사후 曹眞·陳群·曹休 등과 함께 輔政大臣으로 明帝 曹叡를 보좌하였다. 사후 舞陽侯에 봉해졌다. 손자 司馬炎(236~290)이 西晉을 수립한 이후 宣帝로 추존되었고, 廟號를 高祖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42)
    公孫淵 : 228년 숙부 公孫恭의 지위를 빼앗아 집권하였다. 吳 대신 魏의 편에서 서서 요동태수의 관직을 받았지만, 이후 자립하여 燕王을 자칭하였다. 이에 위에서는 사마의를 보내 공격하였고, 그 결과 처형되고 정권이 몰락하였다.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고구려의 성립과 제도 자료번호 : jd.k_0008_0054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