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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후쿠라노츠

福良津
  • 저필자
    한영화(성균관대학교)
  • 시대
    발해
  • 위치
  • 원소장처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하쿠이[羽咋]군 시카[志賀]정 후쿠라[福浦]
  • 시대
    발해
  • 유형
    건축지
입지
후쿠라는 바다 쪽을 낀 항만을 제외하고 배후로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항만 또한 평지가 적다.
유적개관
항구주위가 평지가 적기 때문에 항구 근처에는 발해사절단을 안치할 수 있는 시설을 조영할 수 없었지만, 배후 구릉에는 건물의 조영이 가능하므로, 사절단을 안치한 유적이 나타날 가성이 있다.
참고문헌
윤재운, 일본소재 발해 유적유물의 종합적 검토, 한국사학보41, 2010년 11월
해설
후쿠라[福良]진(津)은 이시카와[石川]현 하쿠이[羽咋]군 시카[志賀]정에 위치한다. 현재 후쿠라[福浦]항이다. 후쿠라진 주변은 바다쪽을 낀 항만을 제외하고 배후로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있어서 평지가 적다. 후쿠라진이 위치한 노토[能登] 반도는 외부에서 수도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 곳은 일찍이 훗카이도[北海道]와 왕래하는 가타마에부네[北前船]의 기항지로 번영했던 항구이다. 현재 후쿠라항을 살펴보면 해안선이 완만하게 육지 쪽으로 휘어들어가는 2개의 만입(灣入)이 있어 태풍을 피할 수 있는 데에 적합하여 태풍과 조난을 피하는 항구이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해상에서 조난하여 표착했던 발해 사절단을 후쿠라진에 머물게 했다고도 하며,(『속일본기』에 의하면 771년 일만복(壹萬福) 등 325인의 발해 사신단이 일본으로 출발하여 6월 데와[出羽]국에 도착하였다. 이들 사신단은 772년 정월 일본 수도에 들어가 신년 축하 의례에 참여하고, 9월 일본을 출발하였다. 이 때 일본 조정은 다케후 도리모리[武生鳥守]를 발해 사신단과 함께 동행하도록 하였는데, 도중에 폭풍을 만나 노토[能登]국에 겨우 표착하여 후쿠라[福良]진에 몇 달동안 머물렀다가 나중에야 발해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일만복 일행의 귀국이 늦어지자 773년 오수불(烏須弗)을 일본에 대사로 파견되어 6월 그 일행이 일본 노토국에 도착한 바 있었다. 오수불 일행은 수도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당해 결국 노토에서 발해로 귀국하였다.) 『일본삼대실록』에 의하면 발해의 사신들이 돌아갈 때 배를 만들기 위해 백성들이 후쿠라도마리[福良泊]의 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한다면 후쿠라는 일본에서 발해로 가는 출발지였으며 발해로 건너갈 배를 만드는 장소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쿠라진는 고대의 항구 조건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지만, 항구 주위에 평지가 적고 산과 바로 붙어 있어 공간이 협소하다. 그렇기 때문에 항구 근처에 발해 사절단을 머무르게 할 수 있는 시설을 조영하기가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배후 구릉에는 건물을 세울 수 있었을 것으로 보여, 유적이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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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라노츠 자료번호 : isea.d_0003_0020_012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