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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무생숙녜(武生宿禰; 다케후노스쿠네)

무생숙녜(武生宿禰; 다케후노스쿠네)
 문숙녜(文宿禰; 후미노스쿠네)와 같은 조상이며, 왕인(王仁)의 손인 아랑고수(阿浪古首; 아라코노오비토)의 후손이다.
 
【주석】
1. 무생숙녜(武生宿禰)
무생(武生)이라는 씨명은 이 씨족의 본거지인 하내국(河內國) 고시군(古市郡)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무생숙녜의 옛 씨성은 마비등(馬毗登)이고 후에 무생련(武生連)으로 개성되었다. 『속일본기』 천평신호(天平神護) 원년(765) 12월조에 따르면 우경인(右京人) 외종5위하 마비등국인(馬毗登國人), 하내국 고시군 사람 정6위상 마비등익인(馬毗登益人) 등 44인이 무생련(武生連) 성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 동 연력(延曆) 10년(791) 4월에 문기촌최제(文忌寸最弟), 무생련진상(武生連眞象) 등 8인이 숙녜(宿禰) 성을 받아 개성되었다. 이 씨족도 자신의 선조를 한 고조에서 구하고 있다.
상기 사료에 의하면 한 고조의 후예인 난(鸞)의 자손인 왕구(王狗)라는 사람이 백제에 정착해서 백제 근구수왕 때에 왕구의 손자인 왕인(王仁)을 일본에 보냈는데, 무생씨(武生氏)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8세기 나라 시대의 도래계 승려인 행기(行基)의 묘지(墓誌)에는 “본래 백제 왕자 왕이(王爾)의 후손으로부터 나왔다.(本出於百濟王子王爾之後.)”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이는 왕인을 가리키고 『고사기』 에는 화이(和邇)로 표기되어 있다. 고훈(古訓)에서는 왕이, 왕인, 화이를 모두 ‘와니’로 발음한다. 행기의 묘지명에 따르면 그는 천평(天平) 21년(749) 3월 23일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어, 적어도 8세기 중엽까지는 왕인의 후예씨족들은 그들 선조의 본관을 백제로 보고 있었다. 행기는 당시 최고의 고승으로서 일본 불교계를 총괄하는 승강(僧綱)의 최고위인 대승정이라는 지위에 있던 인물이다. 그가 공적인 성격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백제의 왕인이 그의 선조라는 것을 공사에 걸쳐 인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고사기』, 『일본서기』 가 편찬되고 행기가 사망하는 8세기 중엽 이전에는 왕인의 후예들이 백제 출자설을 주장하다가 그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중국 출자로 개변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생숙녜의 일족 중에 마사이마려(馬史伊麻呂)가 있다. 『속일본기』 영귀(靈龜) 2년(716) 6월조에 정7위상 마사이마려 등이 신라국 자표마(紫驃馬)의 크기를 기록하고 있듯이 마사(馬史, 毗登)씨는 좌우마료(左右馬寮)의 마부(馬部)인 부명씨(負名氏)로 추정된다. 동 천평신호(天平神護) 원년(765) 9월조에 이들은 후견련(厚見連)의 씨성을 받고 있다.
2. 문숙녜동조(文宿禰同祖)
『속일본기』 신호경운(神護慶雲) 4년(770)조에 칭덕천황(稱德天皇)이 하내(河內)의 유의궁(由義宮) 설치를 축하하는 행사에서 왕인을 시조로 하는 문씨(文氏), 장씨(藏氏), 마씨(馬氏)와 왕진이(王辰爾) 일족의 시조인 선씨(船氏), 백저(白猪, 葛井)씨, 진(津, 菅野)씨 양 계통의 6씨가 공동으로 가원(歌垣)을 행했던 사실을 말한다. 가원은 일종의 집단 가무이고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전해져 처음에는 도래계 씨족이 주체가 되어 행해졌다. 『속일본기』 연력(延曆) 14년(785) 4월조에는 왕인을 문(文), 무생(武生) 양씨의 조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3. 왕인(王仁)
왕인에 대해서는 『고사기』 응신천황단에 “백제국주 조고왕(照古王)이 암수 말 각 1필을 아지길사(阿知吉師)에게 딸려 바쳤다.[아지길사라는 자는 아직사(阿直史) 등의 조상이다.] 또 횡도(橫刀) 및 대경(大鏡)을 바쳤다. 또 백제국에 만약 현인이 있으면 공상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므로 명을 받들어 화이길사(和邇吉師)를 바치고, 이 사람에 딸려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포함하여 모두 11권을 바쳤다[화이길사라는 사람은 문수(文首)의 조상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 응신기 15년 8월조에도, “백제 왕이 아직기(阿直岐)를 보내 양마 2필을 바쳤다. 경판상구(輕坂上廐)에서 길렀다. 따라서 아직기에게 사육을 담당시켰다. 그 말을 기른 곳을 주판(廐坂)이라고 한다. 아직기는 또한 능히 경전을 잘 읽어, 태자 토도치랑자(菟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에 천황이 아직기에게 그대를 능가하는 박사가 있느냐 하고 묻자 왕인이라는 사람이 있고 우수하다고 하였다. 이때에 상모야군(上毛野君)의 조상인 황전별(荒田別), 무별(巫別)을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불렀다. 아직기는 아직기사(阿直岐史)의 시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동 응신기 16년 2월조에는 “왕인이 왔다.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되었다. 왕인에게 여러 전적을 배웠다. 통달하지 못한 바가 없었다. 고로 왕인은 서수(書首)의 시조가 되었다”라고 한다.
왕인을 조상으로 하는 씨족은 문씨(文氏, 書氏)이다. 이 중에서 서문씨(西文氏) 계열의 씨족이 본가에 해당한다. 왕인을 조상으로 하는 씨족들은 문서 행정에 종사하는 사성(史姓) 씨족을 중심으로 백제계라는 동류의식 속에서 동족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일본서기』 에는 왕인을 모시러 백제에 파견된 인물로 황전별이 있다. 그는 상모야군의 조상으로 나오는데, 상모야씨는 백제계 도래씨족인 전변씨(田邊氏)가 상모야로 이주하면서 전변씨계 상모야씨를 칭하게 된 사실도 있어 왕인 전승에는 여러 씨족의 시조 전승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고대 사료에 보이는 왕인에 대한 사적을 보면, 『천자문』 과 『논어』 를 전해 준 유식자의 대명사로서 알려져 있다. 일본 최고의 한시집(漢詩集)인 『회풍조(懷風藻)』(751)의 서문에 “왕인은 응신조에 학문을 깨닫게 하였고, 왕진이는 민달조에 가르침을 널리 알렸다. 그 결과 사회에 유학의 풍습이 퍼져 사람들이 공자의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8세기 나라 시대에서도 왕인에 의한 사회적 영향은 지속되었다. 특히 왕인을 조상으로 주장하는 씨족들이 등장하는 등 당시에 백제계 씨족들이 선호하는 인물상으로 인식되었다.
4. 아랑고수(阿浪古首)
이 인명은 다음의 「앵야수(櫻野首)」 조(748) 이외에는 사료상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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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생숙녜(武生宿禰; 다케후노스쿠네) 자료번호 : ss.k_0002_0020_0010_0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