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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소야신매자가 당의 배세청과 함께 축자에 도착함

16년 여름 4월에 소야신매자가 대당에서 귀국하였다. 당국(唐國)에서는 매자신을 소인고(蘇因高)주 001
번역주 001)
『日本書紀』 추고천황 15년 가을 7월 경술조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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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불렀다. 대당의 사인 배세청(裴世淸) 주 002
번역주 002)
『隋書』 倭國傳에 “明年(大業 4)上(煬帝)이 文林郞裴淸을 倭國에 보냈다.”라고 하였으며, 9월에 귀국하였다고 한다. 裴淸은 裴世淸인데, 이는 당태종 李世民의 ‘世’를 기피하였기 때문이다. 文林郞은 종8품의 관품인데 大使 신분이 종8품으로 낮은 것은 隋의 왜에 대한 국제의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9년조(608)에는 “隋의 文林郞 裴淸이 왜국에 받들어 사신을 감에 우리나라의 남로를 거쳐 갔다.”라는 관련 기사가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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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하객(下客)12명이 매자신을 따라서 축자에 도착하였다. 천황은 난파길사 웅성(雄成;오나리)주 003
번역주 003)
裴世淸의 귀국 시에 小使 자격으로 수에 파견되었으며, 그 국서에 大禮乎那利란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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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 대당의 객 배세청 등을 부르고, 당의 객을 위해 새로운 관을 난파(難波;나니하)의 고구려관 옆에 지었다.

  • 번역주 001)
    『日本書紀』 추고천황 15년 가을 7월 경술조에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隋書』 倭國傳에 “明年(大業 4)上(煬帝)이 文林郞裴淸을 倭國에 보냈다.”라고 하였으며, 9월에 귀국하였다고 한다. 裴淸은 裴世淸인데, 이는 당태종 李世民의 ‘世’를 기피하였기 때문이다. 文林郞은 종8품의 관품인데 大使 신분이 종8품으로 낮은 것은 隋의 왜에 대한 국제의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9년조(608)에는 “隋의 文林郞 裴淸이 왜국에 받들어 사신을 감에 우리나라의 남로를 거쳐 갔다.”라는 관련 기사가 보이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裴世淸의 귀국 시에 小使 자격으로 수에 파견되었으며, 그 국서에 大禮乎那利란 이름이 보인다.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소야신매자, 매자신, 배세청(裴世淸), 매자신, 웅성
지명
축자, 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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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신매자가 당의 배세청과 함께 축자에 도착함 자료번호 : ns.k_0036_0170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