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강전(康戩)의 국자감 입학
강전(康戩)주 001
각주 001)
은 고려인으로 국자학(國子學)주 002에 들어가서 학업을 익히고, 태평흥국(太平興國)주 003 5年(980)에 진사에 합격했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청렴결백하다고 소문이 나서 전운사(轉運使)주 004가 되었는데 소이간(蘇易簡)주 005이 추천한 것이다. 나증(羅拯)주 006은 처음에 지단주(知端州)주 007 직책에 있었는데 상소 올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일찍이 각 지역에 사신을 보내 숨은 장정을 찾아 모으고, 판적(版籍)을 개혁하고, 염법(鹽法)·통상(通商)을 의논하기를 청한 것이 무릇 10여 가지였다. 또한 『번우기이집(番禺紀異集)』주 008을 바쳤다. 황제께서 소환하려 했는데 구준(寇準)주 009康戩 : ?~1006. 고려 출신 북송의 관인. 출신은 고려의 信州 永寧(현재 黃海道 松禾郡)이다. 字는 休祐다. 부친은 康允이다. 강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紇升이 契丹과 교전을 벌일 때 그는 아버지 강윤과 함께 木葉山 아래에서 싸웠다. 전투 중에 화살 두 대를 맞았으나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 뒤 거란(요)에게 함락되자 黑斗嶺으로 도망쳐 살았으며, 다시 黃龍府에 이르러 고려로 돌아갔다고 하며 이때에도 아버지 강윤은 고려에 살아 있었다. 송나라 태조 시절에 강윤이 강전을 사행하는 데에 따라 가도록 하니 중국에 들어가 국학에 입학했다. 그 뒤에 송나라에서 관직을 역임하며 文名을 떨쳤다. 1006년에 죽으니, 송나라 眞宗이 특별히 아들 康希齡을 太常寺奉禮郞으로 삼고 녹봉을 주어 강전의 장례를 마치게 하였다.
각주 009)
이 본디 나증을 좋아하지 않아 이에 지낭주(知朗州)주 010로 보내고 통판광주(通判廣州)주 011寇準 : 961~1023. 북송의 관인. 華州 下邽(현재 陝西 渭南 북쪽) 사람. 字는 平仲이다. 太平興國 5年(980) 進士로 급제하고 知巴東縣, 通判鄆州, 三司度支推官 등 관직을 역임했다. 淳化 2年(991) 樞密副使가 되고 후에 知樞密院事, 參知政事가 되었다. 至道 2年(996) 태종이 그의 擅權을 의심하여 知鄧州로 좌천시켰다. 眞宗 즉위 후 三司使가 되고 景德 元年(1004) 재상이 되었다. 그 해 거란(요)의 군대가 대거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진종에게 澶州로 北上할 것을 청하여 거란(요)과 澶淵의 盟을 성립시켰다. 景德 3年(1006) 知陝州가 되고, 大中祥符 7年(1014) 樞密使가 되었다. 다음해(1015) 정쟁에 휘말려 武勝軍節度使, 判河南府로 좌천되었다. 天禧 3年(1019) 다시 재상이 되었다. 다음해(1020) 태자를 내세워 황후를 견제하려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太子太傅·封萊國公으로 좌천되었다. 얼마 후 宦官 周懷의 반란 모의에 연루되어 雷州司戶參軍이 되었다가 곧바로 사망했다.
각주 011)
로 바꾸었다. 구준이 파직되고 나증은 모친상 때문에 안으로 옮기게 해달라고 청했다. 비로소 지강주(知江州)주 012廣州 : 북송의 지명. 삼국시대 吳 黄武 5年(226) 交州를 나누어 처음 설치했다. 이때 관할영역은 현재 광동·광서 양성의 대부분 지역이었고 남조 후에는 점차 축소되었다. 隋唐代에는 치소를 曲江, 南海 등 현으로 옮기고 주 이름도 番州, 南海郡, 淸海軍 등으로 바꾸었다. 五代에 南漢의 國都로서 興王府로 개칭되었다. 북송 開寶 4年(971)에 다시 廣州로 바뀌고 현재 廣州市인 南海, 番禺 두 개 현을 두었다. 端拱 연간 이후에 廣南東路의 치소가 되었다. 남송 祥興 元年(1278)에 翔龍府로 승격되었다가 같은 해인 至元 15년 元에서 廣州路로 고쳤다.
각주 012)
에 임명하라고 명했다.江州 : 북송의 지명. 西晉 惠帝 元康 元年(291)에 설치되었고, 이때의 위치는 현재 江西 南昌市의 동쪽이었다. 東晉 咸康 六年(340)에 위치를 현재 湖北 黃梅縣 서남쪽으로 옮겼다. 南朝 宋의 升明 元年(477)에 다시 위치를 현재 江西 九江市 서남쪽으로 이동시켰고, 梁 太平 二年(557)에 위치를 현재 南昌市의 동쪽으로 옮겼다. 陳 天嘉 초에 다시 현재의 九江市로 위치를 옮겼다. 隋 大業 三年(607)에는 九江郡으로 변경되었다가 唐 武德 四年(621)에 다시 江州가 되었고, 天寶 元年(742)에 潯陽郡으로 바뀌었다가 乾元 元年(758)에 다시 江州가 되었다. 唐代에 관할했던 범위는 현재 九江, 德安, 彭澤, 湖口, 都昌 등의 市와 縣이 있는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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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康戩 : ?~1006. 고려 출신 북송의 관인. 출신은 고려의 信州 永寧(현재 黃海道 松禾郡)이다. 字는 休祐다. 부친은 康允이다. 강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紇升이 契丹과 교전을 벌일 때 그는 아버지 강윤과 함께 木葉山 아래에서 싸웠다. 전투 중에 화살 두 대를 맞았으나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 뒤 거란(요)에게 함락되자 黑斗嶺으로 도망쳐 살았으며, 다시 黃龍府에 이르러 고려로 돌아갔다고 하며 이때에도 아버지 강윤은 고려에 살아 있었다. 송나라 태조 시절에 강윤이 강전을 사행하는 데에 따라 가도록 하니 중국에 들어가 국학에 입학했다. 그 뒤에 송나라에서 관직을 역임하며 文名을 떨쳤다. 1006년에 죽으니, 송나라 眞宗이 특별히 아들 康希齡을 太常寺奉禮郞으로 삼고 녹봉을 주어 강전의 장례를 마치게 하였다.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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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9)
寇準 : 961~1023. 북송의 관인. 華州 下邽(현재 陝西 渭南 북쪽) 사람. 字는 平仲이다. 太平興國 5年(980) 進士로 급제하고 知巴東縣, 通判鄆州, 三司度支推官 등 관직을 역임했다. 淳化 2年(991) 樞密副使가 되고 후에 知樞密院事, 參知政事가 되었다. 至道 2年(996) 태종이 그의 擅權을 의심하여 知鄧州로 좌천시켰다. 眞宗 즉위 후 三司使가 되고 景德 元年(1004) 재상이 되었다. 그 해 거란(요)의 군대가 대거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진종에게 澶州로 北上할 것을 청하여 거란(요)과 澶淵의 盟을 성립시켰다. 景德 3年(1006) 知陝州가 되고, 大中祥符 7年(1014) 樞密使가 되었다. 다음해(1015) 정쟁에 휘말려 武勝軍節度使, 判河南府로 좌천되었다. 天禧 3年(1019) 다시 재상이 되었다. 다음해(1020) 태자를 내세워 황후를 견제하려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太子太傅·封萊國公으로 좌천되었다. 얼마 후 宦官 周懷의 반란 모의에 연루되어 雷州司戶參軍이 되었다가 곧바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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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1)
廣州 : 북송의 지명. 삼국시대 吳 黄武 5年(226) 交州를 나누어 처음 설치했다. 이때 관할영역은 현재 광동·광서 양성의 대부분 지역이었고 남조 후에는 점차 축소되었다. 隋唐代에는 치소를 曲江, 南海 등 현으로 옮기고 주 이름도 番州, 南海郡, 淸海軍 등으로 바꾸었다. 五代에 南漢의 國都로서 興王府로 개칭되었다. 북송 開寶 4年(971)에 다시 廣州로 바뀌고 현재 廣州市인 南海, 番禺 두 개 현을 두었다. 端拱 연간 이후에 廣南東路의 치소가 되었다. 남송 祥興 元年(1278)에 翔龍府로 승격되었다가 같은 해인 至元 15년 元에서 廣州路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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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2)
江州 : 북송의 지명. 西晉 惠帝 元康 元年(291)에 설치되었고, 이때의 위치는 현재 江西 南昌市의 동쪽이었다. 東晉 咸康 六年(340)에 위치를 현재 湖北 黃梅縣 서남쪽으로 옮겼다. 南朝 宋의 升明 元年(477)에 다시 위치를 현재 江西 九江市 서남쪽으로 이동시켰고, 梁 太平 二年(557)에 위치를 현재 南昌市의 동쪽으로 옮겼다. 陳 天嘉 초에 다시 현재의 九江市로 위치를 옮겼다. 隋 大業 三年(607)에는 九江郡으로 변경되었다가 唐 武德 四年(621)에 다시 江州가 되었고, 天寶 元年(742)에 潯陽郡으로 바뀌었다가 乾元 元年(758)에 다시 江州가 되었다. 唐代에 관할했던 범위는 현재 九江, 德安, 彭澤, 湖口, 都昌 등의 市와 縣이 있는 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