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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덕눌(默德訥)의 역사적인 연혁과 경서(經書) 및 종교 등에 대한 여러 설명

  • 국가
    묵덕나(默德那)
묵덕나(默德那) 주 001
각주 001)
默德那: 메디나(Medina)의 音譯이다. 메디나라는 이름은 ‘예언자의 도시’라는 의미이다. 아랍어로는 알마디나(al-Madinah)라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헤자즈 지방에 있는 내륙도시로서 이슬람교의 성지로 유명하다. 메카에서 북쪽으로 약 340km 거리이며, 와디함두강 상류의 오아시스 지역에 위치한다. 원래는 야스리브(Yathrib)라 불리는 유대인 촌락이었으나, 5세기 말에 아랍인이 정착하였다. 특히 622년 무함마드가 메카로부터 이곳으로 이주(즉 헤지라)한 후 이슬람의 정치와 교단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무함마드의 사후에도 4대 칼리프인 알리가 이라크의 쿠파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이슬람 국가의 수도로 기능했다. 한편 메디나는 메카와는 달리 오아시스 도시로서 농업 지역을 배후에 두어 대추야자를 비롯한 과일과 곡류의 집산 및 거래가 활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회의 구성은 메카보다 복잡하여 아랍족으로서 카브라지족과 아우스족이 있었고, 그 외에 세 종족으로 나누어진 유태교도가 있었다. 무함마드의 ‘헤지라’에 앞서 아우스족 대부분과 카즈라지족 일부가 서로 싸웠으므로, 무함마드는 이 분쟁에 대한 조정자로서 또한 예언자로서 메디나에 초빙되어, 이 두 종족을 이슬람의 결합 원리에 의하여 통일·연합시켰다. 이 연합은 불안정한 것이었으나 무함마드軍의 메카 약탈에 의하여 메디나 경제가 윤택해져서 이슬람을 지지하게 되었다. 무함마드가 죽은 뒤에도 ‘정통 칼리파’ 시대의 수도였다. 정치의 중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간 뒤부터 이곳은 하디스 학문 형성이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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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회의 조국(祖國)인데, 위치는 천방과 가까웠다. 선덕 연간(1426~1435)에 그 추장이 사신을 보내 천방의 사신과 함께 내조하여 공물을 바쳤지만, 후에는 다시 이르지 않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처음에 국왕 모한맥덕(謨罕驀德) 주 002
각주 002)
謨罕驀德: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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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어나면서 신령(神靈)스러워, 서역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복(臣服)하였고, 여러 나라에서 별암발이(別諳拔爾)주 003
각주 003)
別諳拔爾: 이슬람교의 칭호인 Paighambar의 音譯으로서 派安拜爾, 別庵伯爾, 擗奄八而 등으로도 쓰인다. 그 뜻은 아라비아어의 al-Rasul과 같은데, 이슬람교의 使者 혹은 先知者를 가리킨다. 중국의 이슬람교 저술 속에서 항상 이 용어로서 무함마드를 지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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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존칭하였는데, 천사(天使)라는 말이었다. 나라 안에 경서(經書) 30책이 있었으니, 모두 3,600여 단(段)이었다. 그 책은 옆으로 [글씨가] 쓰여 있었고, 전서(篆書)·초서(草書)·해서(楷書)의 3종 글자체를 겸용(兼用)하였는데,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모두 이를 사용하였다. 그 종교는 하늘을 받들어 섬기는 것을 주로 했지만, 신상(神像)은 두지 않았다. 매일 서쪽을 향하여 경건하게 예배하였다. 해마다 1개월은 재계(齋戒)하며, 목욕(沐浴)하고 옷을 바꾸었으며, 거처는 반드시 상주(常住)하는 곳을 바꾸었다. 수(隋)나라 개황(開皇) 연간(581~600)에 그 나라의 살합팔살아적간갈사(撒哈八撒阿的干葛思)가 처음으로 그 종교를 전하여 중국으로 들여왔다. 나라 때에 이르러 그 나라 사람이 사방으로 두루 퍼졌는데, 모두 그 가르침을 지키어 바꾸지 않았다.

  • 각주 001)
    默德那: 메디나(Medina)의 音譯이다. 메디나라는 이름은 ‘예언자의 도시’라는 의미이다. 아랍어로는 알마디나(al-Madinah)라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헤자즈 지방에 있는 내륙도시로서 이슬람교의 성지로 유명하다. 메카에서 북쪽으로 약 340km 거리이며, 와디함두강 상류의 오아시스 지역에 위치한다. 원래는 야스리브(Yathrib)라 불리는 유대인 촌락이었으나, 5세기 말에 아랍인이 정착하였다. 특히 622년 무함마드가 메카로부터 이곳으로 이주(즉 헤지라)한 후 이슬람의 정치와 교단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무함마드의 사후에도 4대 칼리프인 알리가 이라크의 쿠파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이슬람 국가의 수도로 기능했다. 한편 메디나는 메카와는 달리 오아시스 도시로서 농업 지역을 배후에 두어 대추야자를 비롯한 과일과 곡류의 집산 및 거래가 활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회의 구성은 메카보다 복잡하여 아랍족으로서 카브라지족과 아우스족이 있었고, 그 외에 세 종족으로 나누어진 유태교도가 있었다. 무함마드의 ‘헤지라’에 앞서 아우스족 대부분과 카즈라지족 일부가 서로 싸웠으므로, 무함마드는 이 분쟁에 대한 조정자로서 또한 예언자로서 메디나에 초빙되어, 이 두 종족을 이슬람의 결합 원리에 의하여 통일·연합시켰다. 이 연합은 불안정한 것이었으나 무함마드軍의 메카 약탈에 의하여 메디나 경제가 윤택해져서 이슬람을 지지하게 되었다. 무함마드가 죽은 뒤에도 ‘정통 칼리파’ 시대의 수도였다. 정치의 중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간 뒤부터 이곳은 하디스 학문 형성이 중심이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謨罕驀德: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를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別諳拔爾: 이슬람교의 칭호인 Paighambar의 音譯으로서 派安拜爾, 別庵伯爾, 擗奄八而 등으로도 쓰인다. 그 뜻은 아라비아어의 al-Rasul과 같은데, 이슬람교의 使者 혹은 先知者를 가리킨다. 중국의 이슬람교 저술 속에서 항상 이 용어로서 무함마드를 지칭하였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모한맥덕(謨罕驀德), 살합팔살아적간갈사(撒哈八撒阿的干葛思)
지명
묵덕나(默德那), 회회, 천방, 천방, 서역,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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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덕눌(默德訥)의 역사적인 연혁과 경서(經書) 및 종교 등에 대한 여러 설명 자료번호 : jo.k_0024_0332_03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