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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陳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오면서 거친 합리(哈里) 등 17개국의 산천 등을 기록하여『사서역기(使西域記)』를 지어 바쳤다는 내용

  • 국가
    복화아(卜花兒)
영락 13년(1415)에 진성서역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중간에] 거친 곳이 합렬·살마아한·별실팔리·엄도회(俺都淮)·팔답흑상(八答黑商)·질리미(迭里迷)·사록해아·새람·갈석(渴石)·양이·화주(火州) 주 001
각주 001)
火州: 哈剌이라고도 한다. 土魯番에서 동으로 약 30里의 거리에 위치한다. 哈剌은 漢代의 車師前王 지역이고, 隋代에는 高昌國이었으며, 唐 太宗이 高昌을 멸하고 西州라 칭하였다. 宋代에는 回鶻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貢物을 바쳤으며, 元代에는 火州라 불렀는데,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한 바 있다. 농목생활을 위주로 했으며, 語系는 돌궐어족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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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柳城)·토로번·염택(鹽澤)·합밀(哈密) 주 002
각주 002)
哈密: 위구르어로 Hami 또는 Qomul, 몽골어로 Khamil이라 부르며, 新疆 위구르자치구(維吾爾自治區) 가장 동쪽 지역을 일컫는데, 일반적으로 哈密地區라 칭한다. 기원전 2세기 초에 이곳은 匈奴 呼衍王의 통치 하에 들어갔고 伊吾盧라 불리게 되었으며, 漢 明帝는 匈奴를 정복하여 伊吾盧를 얻어 이곳에 宜禾都尉를 설치하였다. 이후 伊吾盧는 다시 匈奴에 귀속되었지만 삼국시대에 중국에 편입되어 魏나라는 伊吾郡을 세우고, 晉은 伊吾都尉라 했지만 北魏 시대에 다시 伊吾郡이라 했다. 이후 西突厥에게 점거되었는데, 隋 煬帝는 薛世雄을 보내 이곳을 탈환하고 新城을 건설하였다. 이곳은 隋나라 말에 혼란을 틈타 突厥이 다시 탈취하였지만 唐 貞觀 연간(627~649)에 귀부하여 西伊州라 했다. 五代 시대에는 小月氏에 점거되어 胡盧磧이라 불렸는데, 元朝에 들어와 서역에 阿力麻里行中書省을 설치하고 哈密을 이에 속하게 했으며, 忽納失里를 肅王으로 삼았다. 당시 伊州를 哈密力이라 칭했는데, 이때부터 이곳을 哈密이라 했다, 明 永樂 연간(1403~1424)부터 명조에 조공하기 시작했으며, 명조는 安克帖木兒(Engke Temür)를 忠順王에 봉하였고, 이곳에 哈密衛를 설치하였다. 이후 하미는 투르판에게 倂呑되었고, 1678년에는 몽골의 准噶爾(Jungar)部에 점령되었으며, 후에 淸朝에 복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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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실간·복화아(卜花兒) 등 무릇 17개국으로서 각국의 산천·인물·풍속을 모두 상세히 기록하여 『사서역기(使西域記)주 003
각주 003)
『使西域記』: 永樂 연간(1403~1424)에 吏部 員外郞 陳誠이 撰修한 西域 各國으로의 出使 見聞錄으로서 『西域蕃國志』라고도 한다. 陳誠은 永樂 12년(1414)에 戶部主事 李暹 등과 함께 命을 받들고 哈烈(지금의 아프카니스탄 헤라트)로 出使하였는데, 新疆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17개국을 거치면서 20여 개 민족 및 부락과 접촉하였다. 10개월 정도 지나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永樂 14년(1416) 도중에 見聞한 바를 撰述하여 이를 『使西域記』라 명명하였다. 그 내용으로는 관련 민족의 원류, 경제상황, 종교와 신앙, 민족풍속, 산천경색, 도시 분포, 물산과 교통 등이 포함되는데 모두 實地를 고찰한 기록이었다. 全書는 모두 2권으로 구성되는데, 하나가 『西域蕃國志』이고 다른 하나가 『西域行程紀』이다. 『西域蕃國志』 내용의 반 이상은 티무르(帖木兒) 帝國의 都城 哈烈에 관한 것이다. 나머지 부분은 해당 지역의 일반상황을 기록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대량의 이슬람교에 관한 언급이 있다. 즉, 이슬람교의 신앙과 禮儀, 무슬림의 음식 禁忌와 習俗, 티무르 제국의 이슬람교 전파 등이 포함된다. 『西域行程紀』에는 陳誠 등이 肅州로부터 출발하여 撒馬兒罕에 이르기까지, 다시 서남 방향으로 내려가 哈烈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데, 沿道에 見聞한 내용이 날짜별로 기재되어 있다. 특히 明代 西域 일대의 산천경색, 城鄕交通, 명승고적 등이 소개되어 있어 당시 중국의 西北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리에 관한 중요한 史料가 된다. 한편 『使西域記』는 이슬람교의 서역에서의 전파 상황과 무슬림 사회, 종교생활에 관한 종종의 기록은 15세기 실크로드가 여전히 매우 번영을 누리고 있었고, 이슬람교가 사회생활의 각 방면에까지 깊이 침투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책은 당시 중국인이 서역의 이슬람 사회를 소개하는 제1급의 진귀한 자료로서, 明代 서역의 민족사, 종교사, 지방사와 아프카니스탄 서북 민족사 연구에 중요한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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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지어 바쳤는데, [이러한] 까닭에 중국에서 참고할 수 있게 되었다. 선덕 7년(1432)에 이달에게 명하여 서역을 안무하여 효유토록 했는데, 복화아도 포함되었다.

  • 각주 001)
    火州: 哈剌이라고도 한다. 土魯番에서 동으로 약 30里의 거리에 위치한다. 哈剌은 漢代의 車師前王 지역이고, 隋代에는 高昌國이었으며, 唐 太宗이 高昌을 멸하고 西州라 칭하였다. 宋代에는 回鶻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貢物을 바쳤으며, 元代에는 火州라 불렀는데,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한 바 있다. 농목생활을 위주로 했으며, 語系는 돌궐어족에 속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哈密: 위구르어로 Hami 또는 Qomul, 몽골어로 Khamil이라 부르며, 新疆 위구르자치구(維吾爾自治區) 가장 동쪽 지역을 일컫는데, 일반적으로 哈密地區라 칭한다. 기원전 2세기 초에 이곳은 匈奴 呼衍王의 통치 하에 들어갔고 伊吾盧라 불리게 되었으며, 漢 明帝는 匈奴를 정복하여 伊吾盧를 얻어 이곳에 宜禾都尉를 설치하였다. 이후 伊吾盧는 다시 匈奴에 귀속되었지만 삼국시대에 중국에 편입되어 魏나라는 伊吾郡을 세우고, 晉은 伊吾都尉라 했지만 北魏 시대에 다시 伊吾郡이라 했다. 이후 西突厥에게 점거되었는데, 隋 煬帝는 薛世雄을 보내 이곳을 탈환하고 新城을 건설하였다. 이곳은 隋나라 말에 혼란을 틈타 突厥이 다시 탈취하였지만 唐 貞觀 연간(627~649)에 귀부하여 西伊州라 했다. 五代 시대에는 小月氏에 점거되어 胡盧磧이라 불렸는데, 元朝에 들어와 서역에 阿力麻里行中書省을 설치하고 哈密을 이에 속하게 했으며, 忽納失里를 肅王으로 삼았다. 당시 伊州를 哈密力이라 칭했는데, 이때부터 이곳을 哈密이라 했다, 明 永樂 연간(1403~1424)부터 명조에 조공하기 시작했으며, 명조는 安克帖木兒(Engke Temür)를 忠順王에 봉하였고, 이곳에 哈密衛를 설치하였다. 이후 하미는 투르판에게 倂呑되었고, 1678년에는 몽골의 准噶爾(Jungar)部에 점령되었으며, 후에 淸朝에 복속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使西域記』: 永樂 연간(1403~1424)에 吏部 員外郞 陳誠이 撰修한 西域 各國으로의 出使 見聞錄으로서 『西域蕃國志』라고도 한다. 陳誠은 永樂 12년(1414)에 戶部主事 李暹 등과 함께 命을 받들고 哈烈(지금의 아프카니스탄 헤라트)로 出使하였는데, 新疆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17개국을 거치면서 20여 개 민족 및 부락과 접촉하였다. 10개월 정도 지나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永樂 14년(1416) 도중에 見聞한 바를 撰述하여 이를 『使西域記』라 명명하였다. 그 내용으로는 관련 민족의 원류, 경제상황, 종교와 신앙, 민족풍속, 산천경색, 도시 분포, 물산과 교통 등이 포함되는데 모두 實地를 고찰한 기록이었다. 全書는 모두 2권으로 구성되는데, 하나가 『西域蕃國志』이고 다른 하나가 『西域行程紀』이다. 『西域蕃國志』 내용의 반 이상은 티무르(帖木兒) 帝國의 都城 哈烈에 관한 것이다. 나머지 부분은 해당 지역의 일반상황을 기록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대량의 이슬람교에 관한 언급이 있다. 즉, 이슬람교의 신앙과 禮儀, 무슬림의 음식 禁忌와 習俗, 티무르 제국의 이슬람교 전파 등이 포함된다. 『西域行程紀』에는 陳誠 등이 肅州로부터 출발하여 撒馬兒罕에 이르기까지, 다시 서남 방향으로 내려가 哈烈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데, 沿道에 見聞한 내용이 날짜별로 기재되어 있다. 특히 明代 西域 일대의 산천경색, 城鄕交通, 명승고적 등이 소개되어 있어 당시 중국의 西北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리에 관한 중요한 史料가 된다. 한편 『使西域記』는 이슬람교의 서역에서의 전파 상황과 무슬림 사회, 종교생활에 관한 종종의 기록은 15세기 실크로드가 여전히 매우 번영을 누리고 있었고, 이슬람교가 사회생활의 각 방면에까지 깊이 침투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책은 당시 중국인이 서역의 이슬람 사회를 소개하는 제1급의 진귀한 자료로서, 明代 서역의 민족사, 종교사, 지방사와 아프카니스탄 서북 민족사 연구에 중요한 근거가 된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진성, 이달
지명
서역, 합렬, 살마아한, 별실팔리, 엄도회(俺都淮), 팔답흑상(八答黑商), 질리미(迭里迷), 사록해아, 새람, 갈석(渴石), 양이, 화주(火州), 유성(柳城), 토로번, 염택(鹽澤), 합밀(哈密), 달실간, 복화아(卜花兒), 중국, 서역, 복화아
서명
사서역기(使西域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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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陳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오면서 거친 합리(哈里) 등 17개국의 산천 등을 기록하여『사서역기(使西域記)』를 지어 바쳤다는 내용 자료번호 : jo.k_0024_0332_008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