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루(挹婁)의 문화
읍루는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 여리 떨어져 있다. 큰 바다에 근접해 있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주 001
번역주 001)
.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挹婁는 옛 肅愼의 나라.”라고 하였다. 沈欽韓이 말하길, 『元史』, 「地理志」에서 “瀋陽路는 본래 挹婁의 옛 땅이고, 또한 開元路는 옛 肅愼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通典』에서는 “그 나라가 不咸山의 북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晉나라에서는 肅愼으로, 北魏에서는 勿吉로, 隋나라에서는 靺鞨로 불렀다.] 『一統志』에서는 “長白山(白頭山)이 吉林 鳥喇城 동남쪽에 있는데, 옛 이름이 不咸山이다. 지금의 奉天府 鐵嶺縣과 承德縣 및 寧古塔과 黑龍江이 모두 挹婁國의 땅이다. 挹婁의 옛 성이 지금의 鐵嶺 남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라고 하였다. 『滿洲源流考』 卷2에서는 “挹婁의 명칭은 後漢代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하였다. 역사서와 전해진 말들을 고찰해보건대, [挹婁]는 옛 肅愼氏이니, 『晉書』에서 말한 “肅愼의 한 명칭은 挹婁이다.” 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南北朝 시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勿吉과 靺鞨이라는 호칭이 따로 있게 되었으나, 옛 명칭이 簡册에 보이므로 여전히 이를 상고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遼나라의 瀋州·雙州·定理府와 金나라의 挹婁縣이 모두 다만 [옛 挹婁의] 한쪽 구석 땅을 가리키며, 그 전부는 아니다. 『元史』에서 “瀋陽路가 挹婁의 옛 땅이다.”라 칭했는데, [이와]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開元路는 옛 肅愼의 땅이고, 隋唐때는 [숙신을] 靺鞨이라 하였으니, 또한 두 개로 갈라진 듯하다. 대저 魏晉代 이전에는 부족이 나뉘지 않았다가, 魏晉代 이후로 일곱(말갈 7부족)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그 족속이 더욱 번성하고 땅이 더욱 넓어졌으니, 옛 부족의 명칭으로는 능히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元史』에서 “瀋陽路가 挹婁의 옛 땅이다.”라고 칭했으니, 그럴듯하다. 그리고 “開元路는 곧 옛 肅愼의 땅이고, 隋唐代에는 靺鞨이다.”라고 하였으니, 다시 둘로 갈라진 것 같으며, 대저 魏·晉 이후로 일곱(말갈 7부족)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이며, 그 족속이 더욱 번성하고 땅이 더욱 넓어졌으니, 옛 部의 명칭으로는 능히 다 갖출 수 있지 않게 되었다. 『金史』, 「地理志」에 이르러, 瀋州를 일러 본래 遼나라의 定理府라 했으니, 挹婁의 옛 땅이다. 『遼史』, 「地理志」를 보면, “瀋州 바깥에 따로 定理府가 있었으니, 또한 [옛] 挹婁의 땅에 속한다.”고 하였다. 遼나라의 定理府는 실제로는 唐代에 渤海에 의해 세워졌고, 金나라에 이르러서는 이미 폐지되었다. 金나라에서는 瀋州 挹婁縣을 가리켜 본래 遼나라 때의 옛 興州 常安縣이라 하였다. 『遼史』, 「地理志」를 보건대, 東丹城에서 북쪽으로 挹婁縣과 范河에 이르기까지 270리라 했으니, 즉 遼나라 때 이미 挹婁縣이 있었다. 대저 郡邑이 비록 옮겨진 것으로 보이나, 그 땅의 넓이에 일정함이 있었고, 지금 『盛京通志』에서 보이기로는 承德·鐵嶺·吉林·寧古塔과 같이 奉天府의 치소로부터 동북쪽 끝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挹婁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明一統志』에 기재된 바로는 [明 太祖] 洪武 29년(1396)에 懿路城에 左右千戶를 두었고, [明 成祖] 永樂 8년(1410)에 다시 懿路城에 中千戶를 두었다고 하였다. 그 옛 터가 지금의 鐵嶺縣城 남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 또한 ‘懿路’라는 이름의 站이 있고, 이를 ‘伊魯’로도 적는데, 응당 遼金때 挹婁縣의 터일 것이다. 丁謙이 말하길, “挹婁은 옛 肅愼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肅愼은 『逸周書』, 「王會解」 篇에 ‘稷愼’이라고 적고 있다. 『山海經』에서는 “大荒 중에 不咸山이 있고, 肅愼의 나라가 있다.”고 하였다. 『竹書紀年』에서는 “舜임금 25년에 息愼氏가 내조하여 활과 화살을 바쳤다.”고 하였다. 대저 3대(夏·殷·周) 이전에는 동북쪽 변경 바깥에 큰 나라로 지금의 吉林省 동쪽 땅들을 모두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新唐書』, 「地理志」에 수록된 賈耽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 “渤海의 왕성이 忽汗海에 임해 있고, 그 서남쪽 30리에 옛 肅愼城이 있다.”고 하였다. 상고해보건대, 이 성은 寧古塔의 서남쪽 85리 되는 곳으로 上馬蓮河 가에 있었으며, 그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다만 漢나라 때의 挹婁는 비록 옛 肅愼國의 경내에 있었으나, 본래 部가 실제로는 그 서쪽에 있었다. 『新唐書』, 「渤海傳」에 의하면, 高麗(高句麗)가 멸망한 뒤에 大氏(大祚榮)가 挹婁의 東牟山과 奧婁河를 보전했다 하였으니, 그 땅이 지금 吉林 동남쪽의 敦化縣 경내에 있었다. 奧婁는 挹婁이 轉音(발음이 바뀐 것)된 것이고, 挹婁라는 국명은 아마도 이 물(奧婁河)의 이름을 딴 것으로 보인다. 또한 [『新唐書』, 「渤海傳」에서] 이르길, 옛 挹婁의 땅을 定理府와 安邊府 2府로 삼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즉 奉天 동남쪽에 새로 세워진 寬甸과 懷仁 등 여러 현이 있는 곳이다. 『滿洲地誌』에서 挹婁를 肅愼의 일부라 하였는데, 이 말이 극히 옳다. 「挹婁傳」에서는 挹婁가 扶餘의 동북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이 말을] 살펴보건대, 扶餘國의 도읍은 지금의 長春府 農安縣이었으니, 그 방위를 따져보면 실제로는 동남쪽이며 동북쪽은 아니다. 뒤에 金나라 사람들이 遼河 동쪽에 挹婁縣을 설치하였으니, 지금의 懿路驛 땅이다. 즉 挹婁 사람들을 멀리 옮겨서 이곳에 거주하게 한 뒤에 그 이름을 딴 것인데, 후대에 고증하는 자들이 마침내 [이 挹婁縣]을 挹婁國으로 여겼으니, [이는] 큰 잘못이다. 『晉書』, 「四夷傳」에서 “肅愼氏는 일명 挹婁인데, 不咸山의 북쪽에 있으며, 扶餘로부터 60일쯤 걸리는 곳이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닿고, 서쪽으로 宼漫汗에 접하며, 북쪽으로 弱水에 다다른다. 넓이와 길이가 수천 리에 달하고, 깊은 산과 궁벽한 골짜기에 거주하여 수레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길, 『三國志』, 「魏志」의 [「挹婁傳」]에서는 “挹婁가 扶餘의 동북쪽 천 리 되는 곳에 있고, 남쪽으로 北沃沮와 접한다.”고 하였다. 不咸山은 즉 長白山인데, [肅愼氏가] 不咸山의 북쪽에 있다고 말해놓고는 또 『三國志』, 「魏志」, 「挹婁傳」에서는 北沃沮와 접한다고 했으니, 응당 扶餘의 동남쪽이라 말해야 하는 것으로, 동북쪽은 아니다. 宼漫汗은 즉 뒤의 寇莫汗인데, 『北史』에서는 豆莫婁로 적고 있다. 이 부족을 상고해보건대, 北扶餘의 옛 땅으로 지금 鳥蘇里江(우수리강) 일대였다. [『晉書』에서] 肅愼을 일컬어 일명 挹婁라고 말한 것은 옳지 않다. 이어 보건대, 숙신은 舜임금과 夏나라 이래 저명한 나라이나, 挹婁라는 칭호는 『後漢書』에 처음 보이고, “그 나라에 君長이 없고, 邑落마다 각기 大人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挹婁라는 것은 肅愼 경내 중의 하나의 부족에 불과하였고, 아울러 ‘國’으로 부르기에는 부족하다. 인구가 늘고 번성하여 각 방면에 분포하고 肅愼의 主權이 날로 쇠약해져 이들을 제약하기에 부족하게 되었다. 그 나라 사람들이 드디어 땅을 마음대로 점거하고 서로 패권을 잡게 된 것이다. 이에 肅愼이라는 나라는 결국 있는 듯 없는 듯하게 되었다. 내 견해로는 그 나라가 晉나라 때까지는 실제로 아직 망하지 않았던 것 같다. 挹婁는 본래 물 이름이니, 즉 『新唐書』, 「渤海傳」에 나오는 奧婁河로 지금의 敦化縣 경내이며, 渤海가 나라를 세우고는 옛 挹婁의 땅으로써 定里府와 安邊府 등을 세웠으니, 이들이 모두 敦化縣 서쪽으로부터 奉天 동남쪽에 이르는 곳에 있었다. 肅愼의 왕성은 寧古塔 남쪽에 있었는데, 挹婁가 중간에서 방해하여 肅愼이 중국과 교통하는 것을 마침내 막기에 이르렀으니, 이 때문에 당시의 사적이 挹婁만 있는 것을 알고, 肅愼이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한 것이고, 이로 인해서 挹婁를 옛 肅愼이라 하였다. 그리고 『晉書』, 「四夷傳」에서 다시 肅愼을 일명 挹婁라 일컬었으니, 그 오류가 더욱 심해졌다. 晉나라 때에 이르러서도 아직 肅愼이 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비록 사서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실로 확증할 수 있다. 鴨綠江 북쪽에서 나온 高句麗의 好大王碑에 의하면, 그가 즉위한지 8년 째인 “戊戌年(永樂 8,398)에 군사를 동원해 肅愼에 출정하여, 某城 및 그 땅과 인민들을 얻었다.”고 하였다. 戊戌年은 東晉의 安帝 隆安 2년에 해당한다. 이때는 東晉 말 나라를 다시 세워 아직 평안무사하게 다스려질 때다. 뒤에 高句麗가 더욱 강성해져서 肅愼과 挹婁가 모두 [高句麗에] 병합되었다. 隋나라 焬帝때를 보면, 高句麗를 치러 군사를 24軍으로 나누어, 그 右翼에 肅愼道가 있었으니, 그때에 [肅愼의 땅이] 高句麗에 편입된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어느 때에 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 盧弼이 『一統志』를 보니, “挹婁의 옛 성이 鐵嶺縣의 남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一統志表』에서는 “承德縣을 挹婁國의 땅”이라고 하였다. 이는 「挹婁傳」의 글 중에 “挹婁가 扶餘 동북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한 설명과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盛京通志』에서 承德·鐵嶺·吉林·寧古塔과 같이 奉天府의 治所로부터 동북쪽 끝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挹婁의 땅이었다고 기재하였으니, 그러한 설명은 서로 통한다.
그 토지는 산이 많고 험준하다. 그 사람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 오곡과 소·말·삼베[麻布]가 산출된다. 사람은 용감하고 힘이 센 자가 많다. 대군장(大君長)이 없고, 읍락마다 각각 대인(大人)이 있다. 산림 속에 거주하는데, 항상 동굴생활을 한다. 큰 집은 깊이가 아홉 계단이나 되는데, [계단이] 많을수록 좋다고 여긴다주 002. 그 지방의 기후는 춥기가 부여보다 혹독하다. 그 습속이 돼지 기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철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를 몇 푼이나 되게 하여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주 003. 여름철에는 알몸에다 한 자 정도의 베 조각으로 앞뒤를 둘러서 형체만을 가린다. 그 나라 사람은 불결하여 중앙에 측간을 만들고, 사람은 그 주위를 빙 둘러 모여 산다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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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활의 길이는 4척인데, 위력이 쇠뇌[弩]와 같다. 화살대로는 싸리나무를 쓰는데, 길이는 한 자 여덟 치나 되며, 청석(靑石)으로 화살촉을 만들었으니, 옛 숙신씨(肅愼氏)의 나라이다주 005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 이르길, “그 사람들은 냄새나고 더러우며 불결하여 가운데에 측간을 만들고는 이를 둘러싸서 거주한다.”고 하였다. 『太平寰宇記』 卷175에서 말하길, “挹婁國의 풍속에는 글과 먹이 없고 언어로써 약속한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쭉 펴서 앉고, 다리로 고기를 끼고서 먹는다. 언 고기를 얻으면, 그 위에 앉아 따뜻하게 하여 녹인다. 그 땅에는 소금과 철이 없고,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들어 그것에 물을 부어 잿물을 취해서는 이를 먹는다. 그 풍속은 編髮(땋은 머리)을 한다. 장차 혼인하려 할 때에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에 깃털을 꽂아주고, [여자가] 허락하면 그녀를 데리고 돌아오며, 그 연후에 예를 치러 정식으로 장가든다. 부인은 정숙하나 [혼인하기 전의] 여자는 음란하며, 장건한 자를 귀히 여기고 노약자를 천시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 바로 들에다 묻는데, 나무를 엇대어 작은 槨을 만들고, 돼지를 죽여 그 위에 쌓아놓고는 이를 죽은 자의 양식으로 여긴다. 성정은 흉악하고 사나우며,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을 서로 숭상하므로 부모가 죽어도 남녀가 곡하며 울지 않으며, 만약 곡하는 자가 있으면 씩씩하지 못한 것으로 여긴다. 서로 도둑질하면 물건이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니, 비록 물건을 들에 놓아두어도 서로 범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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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을 잘 쏘아서 사람을 쏘면, 모두 눈[目]을 맞춘다. 화살에 독을 발라서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주 006. 적옥과 좋은 담비가 산출되는데, 지금 이른바 읍루초가 그것이다주 007. 한나라 이후 부여에 신속했는데, 부여가 그 조부(租賦)를 무겁게 하자, 황초 연간(220~226)에 부여에 이반하였다. 부여에서 자주 그들을 정벌하였는데, 그 무리가 비록 적지만, 산의 험지에 소재하였고 이웃 나라 사람이 그 활과 화살을 두려워하였으므로, 끝내 굴복시킬 수 없었다. 그 나라 사람은 배를 타고 노략질하는 데 익숙해 이웃 나라에서 근심으로 여겼다. 동이는 먹고 마실 적에 대개 조두를 사용하는데, 오직 읍루에서는 법속(法俗)이 아니었으니, [동이의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기강이 없다주 008 〔原註〕 肅愼이 楛矢를 보내온 일은 [『三國志』의] 「明帝紀」 靑龍 4년(236)조와 「陳留王紀」 景元 3년조에 상세히 보인다. 『孔子家語』에서 “武王이 商나라를 이기자, 肅愼氏가 楛矢를 바쳤다.”고 하였다. 『史記』, 「孔子世家」에서 매 한 마리가 陳나라 궁정에 떨어져 죽어 있는 일이 있었는데, 楛矢에 꿰뚫려 있었으며, 石弩의 화살 길이는 1척 8촌이었다. 陳나라 湣公이 사람을 仲尼(孔子)에게 보내 이에 관해 묻자, 仲尼가 “隼은 멀리서 온 것이며, 이것은 肅愼의 화살입니다.”라고 하였다. 『山海經』, 「海外西經」에서 “肅愼의 나라는 白民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郭璞이 注하여 이르길, “지금 肅愼國은 襄平으로부터 3천여 리 떨어져 있다. 그 사람들은 모두 활을 잘 쏘는데, 활의 길이가 4척으로 단단하고 강력하며, 화살대는 楛나무로 만들고, 길이 1척 5푼이고, 靑石을 화살촉으로 쓴다. 이것이 바로 春秋時代 集이 陳侯의 궁정에 떨어졌을 때 얻은 그 화살이다.”라고 하였다. 東晉 太興 3년(元帝, 320)에 平州剌史 崔毖가 別駕 高會를 보내 肅愼氏의 활과 화살을 바치게 하니, 그 화살촉이 구리나 뼈로 만든 것과 유사했다. 이에 관해 물었더니, “海內國에 전해져 두루 이것을 쓰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이(肅愼國)를 일컬어 挹婁國이라 한다. 吳任臣이 말하길, 『史記』에서는 ‘息愼’으로 적었고, 「竹書紀年」에서는 “舜임금 25년에 息愼氏가 내빈 왔다.”고 하였다. 『汲冢周書』에서는 周나라 成王 때에 息愼이 와서 ‘賄息愼之命’을 작성토록 명했다고 하였고, 『逸周書』, 「王會解」에서는 이를 ‘稷愼’ 이라 일컬었다. 또는 ‘肅眘’이라고도 하니, 漢武帝의 조서에서는 ‘海外肅眘’이라 하였고. [南朝 陳나라 때] 徐陵의 글에서는 ‘肅眘茫茫, 風牛南偃’이라 하였다. 劉會孟은 “肅愼은 漢나라때는 挹婁, 北魏때는 勿吉, 唐나라때는 靺鞨이라 불렀다.”고 한다. 鬼谷子는 “肅愼氏가 흰 꿩을 文王에게 선물했다.”고 하였다. 『三國志』, 「東夷傳」 서문에서는 唐(堯임금)으로부터 周나라에 이르기까지 肅愼의 물건이 모두 여러 해를 지나서 도착했다.”고 하였다. [「明帝紀」에서는] 靑龍 4년에 “肅愼氏가 楛矢를 보냈다.”고 하였다. 「晉紀」에서는 “景元 3年(262), 咸寧 5年, 太興 2年(279)에 모두 肅愼이 와서 楛矢와 石弩를 선물했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에서는 “肅愼, 燕, 亳이 우리(周나라)의 북쪽 땅”이라 했고, 杜註가 이를 注하여 “肅愼은 玄菟郡 북쪽으로 3천여 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江淹(南朝 梁)의 「遂古」편에서는 “沃沮, 肅愼은 동북변”이라고 하였다. 陳逢衡이 이르길, 『世說新語』에서 “덕이 아름답고 밝으면, 肅愼이 그들의 楛矢를 조공한다.”고 하였다. 鄭樵(南宋)의 『都邑略』에서 “옛 肅愼國이 不咸山에 도읍하였고, 夫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었다.”고 하였다. 混同江이라 불리는 강의 강변에서 큰 느릅나무와 소나무 가지가 말라죽은 뒤에 강으로 떨어져 물결을 일으켜 출렁거리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알 수 없으나, 이것이 변하여 돌이 되니, 이를 취해 화살촉으로 쓸 수 있다. 느릅나무가 변화한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치고, 소나무는 그 다음이다. 서남쪽으로 6백 리 떨어진 곳을 長白山이라 하는데, 그 산 정상의 북쪽과 흑송 숲에 楛나무가 널리 자라서 이를 취해 화살을 만들었는데, 그 성질이 단단하면서도 곧다. 또한 海東靑이라 불리는 새가 있으니, 즉 隼이다.”라고 하였다. 惠棟(淸)이 말하길, 『肅愼國記』에서 “石山이 나라 동북쪽에 있는데, 이를 취할 때면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한다. 그 돌이 날카로워 쇠를 뚫는다.”라고 하였다. 『册府元龜』에서 魏나라 景元 3년(262)에 “肅愼이 5척 5촌 길이의 그 나라 활 30장, 1척 8촌 길이의 梏矢와 石弩 3백 매·가죽·뼈·쇠로 된 잡다한 갑옷 20령, 貂皮 4백 매를 바쳤다.”고 하였다. 『滿洲源流考』에서 “살펴보건대 元나라 戚輔의 『遼東略』에서 말하길, 肅愼의 동북쪽 산에서 石弩가 난다고 하였다.” 楊賓(淸)의 『柳邊紀略』에서는 “梏나무는 지금의 寧古塔 거주민들이 때로 呼爾哈河에서 얻는데, 길이가 3~4촌에 검은 색이거나 혹은 황색, 혹은 微白色으로 무늬결이 있으나, 쇠도 아니고 돌도 아니며, 서로 전하기를 ‘肅愼의 옛 화살’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柳邊紀略』에서] 楊賓은 “石弩를 楛나무로 잘못 적은 것 같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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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原註〕 『滿洲源流考』 卷1 〈肅愼〉조에서 范蔚宗(范曄)이 말하길 “고깔을 쓰고, 비단옷을 입으며, 그릇은 俎豆를 썼다.”고 했는데, [이는] 실로 헛말이 아니다. 盧弼이 보건대, 范曄의 『後漢書』에서의 이 말은 『後漢書』, 「東夷傳」 서문에 보인다. 이는 바로 東夷를 두루 논하는 것이지, 挹婁만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니다. 더욱이 『後漢書』, 「東夷傳」, 「挹婁傳」에서는 “東夷나 夫餘가 마시고 먹을 때 모두 俎豆를 쓰나, 유독 挹婁에는 그것이 없고 그 법속에 가장 기강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의거 해보면, 『滿洲源流考』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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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1)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挹婁는 옛 肅愼의 나라.”라고 하였다. 沈欽韓이 말하길, 『元史』, 「地理志」에서 “瀋陽路는 본래 挹婁의 옛 땅이고, 또한 開元路는 옛 肅愼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通典』에서는 “그 나라가 不咸山의 북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晉나라에서는 肅愼으로, 北魏에서는 勿吉로, 隋나라에서는 靺鞨로 불렀다.] 『一統志』에서는 “長白山(白頭山)이 吉林 鳥喇城 동남쪽에 있는데, 옛 이름이 不咸山이다. 지금의 奉天府 鐵嶺縣과 承德縣 및 寧古塔과 黑龍江이 모두 挹婁國의 땅이다. 挹婁의 옛 성이 지금의 鐵嶺 남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라고 하였다. 『滿洲源流考』 卷2에서는 “挹婁의 명칭은 後漢代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하였다. 역사서와 전해진 말들을 고찰해보건대, [挹婁]는 옛 肅愼氏이니, 『晉書』에서 말한 “肅愼의 한 명칭은 挹婁이다.” 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南北朝 시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勿吉과 靺鞨이라는 호칭이 따로 있게 되었으나, 옛 명칭이 簡册에 보이므로 여전히 이를 상고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遼나라의 瀋州·雙州·定理府와 金나라의 挹婁縣이 모두 다만 [옛 挹婁의] 한쪽 구석 땅을 가리키며, 그 전부는 아니다. 『元史』에서 “瀋陽路가 挹婁의 옛 땅이다.”라 칭했는데, [이와]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開元路는 옛 肅愼의 땅이고, 隋唐때는 [숙신을] 靺鞨이라 하였으니, 또한 두 개로 갈라진 듯하다. 대저 魏晉代 이전에는 부족이 나뉘지 않았다가, 魏晉代 이후로 일곱(말갈 7부족)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그 족속이 더욱 번성하고 땅이 더욱 넓어졌으니, 옛 부족의 명칭으로는 능히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元史』에서 “瀋陽路가 挹婁의 옛 땅이다.”라고 칭했으니, 그럴듯하다. 그리고 “開元路는 곧 옛 肅愼의 땅이고, 隋唐代에는 靺鞨이다.”라고 하였으니, 다시 둘로 갈라진 것 같으며, 대저 魏·晉 이후로 일곱(말갈 7부족)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이며, 그 족속이 더욱 번성하고 땅이 더욱 넓어졌으니, 옛 部의 명칭으로는 능히 다 갖출 수 있지 않게 되었다. 『金史』, 「地理志」에 이르러, 瀋州를 일러 본래 遼나라의 定理府라 했으니, 挹婁의 옛 땅이다. 『遼史』, 「地理志」를 보면, “瀋州 바깥에 따로 定理府가 있었으니, 또한 [옛] 挹婁의 땅에 속한다.”고 하였다. 遼나라의 定理府는 실제로는 唐代에 渤海에 의해 세워졌고, 金나라에 이르러서는 이미 폐지되었다. 金나라에서는 瀋州 挹婁縣을 가리켜 본래 遼나라 때의 옛 興州 常安縣이라 하였다. 『遼史』, 「地理志」를 보건대, 東丹城에서 북쪽으로 挹婁縣과 范河에 이르기까지 270리라 했으니, 즉 遼나라 때 이미 挹婁縣이 있었다. 대저 郡邑이 비록 옮겨진 것으로 보이나, 그 땅의 넓이에 일정함이 있었고, 지금 『盛京通志』에서 보이기로는 承德·鐵嶺·吉林·寧古塔과 같이 奉天府의 치소로부터 동북쪽 끝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挹婁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明一統志』에 기재된 바로는 [明 太祖] 洪武 29년(1396)에 懿路城에 左右千戶를 두었고, [明 成祖] 永樂 8년(1410)에 다시 懿路城에 中千戶를 두었다고 하였다. 그 옛 터가 지금의 鐵嶺縣城 남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 또한 ‘懿路’라는 이름의 站이 있고, 이를 ‘伊魯’로도 적는데, 응당 遼金때 挹婁縣의 터일 것이다. 丁謙이 말하길, “挹婁은 옛 肅愼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肅愼은 『逸周書』, 「王會解」 篇에 ‘稷愼’이라고 적고 있다. 『山海經』에서는 “大荒 중에 不咸山이 있고, 肅愼의 나라가 있다.”고 하였다. 『竹書紀年』에서는 “舜임금 25년에 息愼氏가 내조하여 활과 화살을 바쳤다.”고 하였다. 대저 3대(夏·殷·周) 이전에는 동북쪽 변경 바깥에 큰 나라로 지금의 吉林省 동쪽 땅들을 모두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新唐書』, 「地理志」에 수록된 賈耽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 “渤海의 왕성이 忽汗海에 임해 있고, 그 서남쪽 30리에 옛 肅愼城이 있다.”고 하였다. 상고해보건대, 이 성은 寧古塔의 서남쪽 85리 되는 곳으로 上馬蓮河 가에 있었으며, 그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다만 漢나라 때의 挹婁는 비록 옛 肅愼國의 경내에 있었으나, 본래 部가 실제로는 그 서쪽에 있었다. 『新唐書』, 「渤海傳」에 의하면, 高麗(高句麗)가 멸망한 뒤에 大氏(大祚榮)가 挹婁의 東牟山과 奧婁河를 보전했다 하였으니, 그 땅이 지금 吉林 동남쪽의 敦化縣 경내에 있었다. 奧婁는 挹婁이 轉音(발음이 바뀐 것)된 것이고, 挹婁라는 국명은 아마도 이 물(奧婁河)의 이름을 딴 것으로 보인다. 또한 [『新唐書』, 「渤海傳」에서] 이르길, 옛 挹婁의 땅을 定理府와 安邊府 2府로 삼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즉 奉天 동남쪽에 새로 세워진 寬甸과 懷仁 등 여러 현이 있는 곳이다. 『滿洲地誌』에서 挹婁를 肅愼의 일부라 하였는데, 이 말이 극히 옳다. 「挹婁傳」에서는 挹婁가 扶餘의 동북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이 말을] 살펴보건대, 扶餘國의 도읍은 지금의 長春府 農安縣이었으니, 그 방위를 따져보면 실제로는 동남쪽이며 동북쪽은 아니다. 뒤에 金나라 사람들이 遼河 동쪽에 挹婁縣을 설치하였으니, 지금의 懿路驛 땅이다. 즉 挹婁 사람들을 멀리 옮겨서 이곳에 거주하게 한 뒤에 그 이름을 딴 것인데, 후대에 고증하는 자들이 마침내 [이 挹婁縣]을 挹婁國으로 여겼으니, [이는] 큰 잘못이다. 『晉書』, 「四夷傳」에서 “肅愼氏는 일명 挹婁인데, 不咸山의 북쪽에 있으며, 扶餘로부터 60일쯤 걸리는 곳이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닿고, 서쪽으로 宼漫汗에 접하며, 북쪽으로 弱水에 다다른다. 넓이와 길이가 수천 리에 달하고, 깊은 산과 궁벽한 골짜기에 거주하여 수레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길, 『三國志』, 「魏志」의 [「挹婁傳」]에서는 “挹婁가 扶餘의 동북쪽 천 리 되는 곳에 있고, 남쪽으로 北沃沮와 접한다.”고 하였다. 不咸山은 즉 長白山인데, [肅愼氏가] 不咸山의 북쪽에 있다고 말해놓고는 또 『三國志』, 「魏志」, 「挹婁傳」에서는 北沃沮와 접한다고 했으니, 응당 扶餘의 동남쪽이라 말해야 하는 것으로, 동북쪽은 아니다. 宼漫汗은 즉 뒤의 寇莫汗인데, 『北史』에서는 豆莫婁로 적고 있다. 이 부족을 상고해보건대, 北扶餘의 옛 땅으로 지금 鳥蘇里江(우수리강) 일대였다. [『晉書』에서] 肅愼을 일컬어 일명 挹婁라고 말한 것은 옳지 않다. 이어 보건대, 숙신은 舜임금과 夏나라 이래 저명한 나라이나, 挹婁라는 칭호는 『後漢書』에 처음 보이고, “그 나라에 君長이 없고, 邑落마다 각기 大人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挹婁라는 것은 肅愼 경내 중의 하나의 부족에 불과하였고, 아울러 ‘國’으로 부르기에는 부족하다. 인구가 늘고 번성하여 각 방면에 분포하고 肅愼의 主權이 날로 쇠약해져 이들을 제약하기에 부족하게 되었다. 그 나라 사람들이 드디어 땅을 마음대로 점거하고 서로 패권을 잡게 된 것이다. 이에 肅愼이라는 나라는 결국 있는 듯 없는 듯하게 되었다. 내 견해로는 그 나라가 晉나라 때까지는 실제로 아직 망하지 않았던 것 같다. 挹婁는 본래 물 이름이니, 즉 『新唐書』, 「渤海傳」에 나오는 奧婁河로 지금의 敦化縣 경내이며, 渤海가 나라를 세우고는 옛 挹婁의 땅으로써 定里府와 安邊府 등을 세웠으니, 이들이 모두 敦化縣 서쪽으로부터 奉天 동남쪽에 이르는 곳에 있었다. 肅愼의 왕성은 寧古塔 남쪽에 있었는데, 挹婁가 중간에서 방해하여 肅愼이 중국과 교통하는 것을 마침내 막기에 이르렀으니, 이 때문에 당시의 사적이 挹婁만 있는 것을 알고, 肅愼이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한 것이고, 이로 인해서 挹婁를 옛 肅愼이라 하였다. 그리고 『晉書』, 「四夷傳」에서 다시 肅愼을 일명 挹婁라 일컬었으니, 그 오류가 더욱 심해졌다. 晉나라 때에 이르러서도 아직 肅愼이 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비록 사서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실로 확증할 수 있다. 鴨綠江 북쪽에서 나온 高句麗의 好大王碑에 의하면, 그가 즉위한지 8년 째인 “戊戌年(永樂 8,398)에 군사를 동원해 肅愼에 출정하여, 某城 및 그 땅과 인민들을 얻었다.”고 하였다. 戊戌年은 東晉의 安帝 隆安 2년에 해당한다. 이때는 東晉 말 나라를 다시 세워 아직 평안무사하게 다스려질 때다. 뒤에 高句麗가 더욱 강성해져서 肅愼과 挹婁가 모두 [高句麗에] 병합되었다. 隋나라 焬帝때를 보면, 高句麗를 치러 군사를 24軍으로 나누어, 그 右翼에 肅愼道가 있었으니, 그때에 [肅愼의 땅이] 高句麗에 편입된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어느 때에 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 盧弼이 『一統志』를 보니, “挹婁의 옛 성이 鐵嶺縣의 남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一統志表』에서는 “承德縣을 挹婁國의 땅”이라고 하였다. 이는 「挹婁傳」의 글 중에 “挹婁가 扶餘 동북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한 설명과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盛京通志』에서 承德·鐵嶺·吉林·寧古塔과 같이 奉天府의 治所로부터 동북쪽 끝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挹婁의 땅이었다고 기재하였으니, 그러한 설명은 서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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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 이르길, “그 사람들은 냄새나고 더러우며 불결하여 가운데에 측간을 만들고는 이를 둘러싸서 거주한다.”고 하였다. 『太平寰宇記』 卷175에서 말하길, “挹婁國의 풍속에는 글과 먹이 없고 언어로써 약속한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쭉 펴서 앉고, 다리로 고기를 끼고서 먹는다. 언 고기를 얻으면, 그 위에 앉아 따뜻하게 하여 녹인다. 그 땅에는 소금과 철이 없고,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들어 그것에 물을 부어 잿물을 취해서는 이를 먹는다. 그 풍속은 編髮(땋은 머리)을 한다. 장차 혼인하려 할 때에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에 깃털을 꽂아주고, [여자가] 허락하면 그녀를 데리고 돌아오며, 그 연후에 예를 치러 정식으로 장가든다. 부인은 정숙하나 [혼인하기 전의] 여자는 음란하며, 장건한 자를 귀히 여기고 노약자를 천시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 바로 들에다 묻는데, 나무를 엇대어 작은 槨을 만들고, 돼지를 죽여 그 위에 쌓아놓고는 이를 죽은 자의 양식으로 여긴다. 성정은 흉악하고 사나우며,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을 서로 숭상하므로 부모가 죽어도 남녀가 곡하며 울지 않으며, 만약 곡하는 자가 있으면 씩씩하지 못한 것으로 여긴다. 서로 도둑질하면 물건이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니, 비록 물건을 들에 놓아두어도 서로 범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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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5)
〔原註〕 肅愼이 楛矢를 보내온 일은 [『三國志』의] 「明帝紀」 靑龍 4년(236)조와 「陳留王紀」 景元 3년조에 상세히 보인다. 『孔子家語』에서 “武王이 商나라를 이기자, 肅愼氏가 楛矢를 바쳤다.”고 하였다. 『史記』, 「孔子世家」에서 매 한 마리가 陳나라 궁정에 떨어져 죽어 있는 일이 있었는데, 楛矢에 꿰뚫려 있었으며, 石弩의 화살 길이는 1척 8촌이었다. 陳나라 湣公이 사람을 仲尼(孔子)에게 보내 이에 관해 묻자, 仲尼가 “隼은 멀리서 온 것이며, 이것은 肅愼의 화살입니다.”라고 하였다. 『山海經』, 「海外西經」에서 “肅愼의 나라는 白民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郭璞이 注하여 이르길, “지금 肅愼國은 襄平으로부터 3천여 리 떨어져 있다. 그 사람들은 모두 활을 잘 쏘는데, 활의 길이가 4척으로 단단하고 강력하며, 화살대는 楛나무로 만들고, 길이 1척 5푼이고, 靑石을 화살촉으로 쓴다. 이것이 바로 春秋時代 集이 陳侯의 궁정에 떨어졌을 때 얻은 그 화살이다.”라고 하였다. 東晉 太興 3년(元帝, 320)에 平州剌史 崔毖가 別駕 高會를 보내 肅愼氏의 활과 화살을 바치게 하니, 그 화살촉이 구리나 뼈로 만든 것과 유사했다. 이에 관해 물었더니, “海內國에 전해져 두루 이것을 쓰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이(肅愼國)를 일컬어 挹婁國이라 한다. 吳任臣이 말하길, 『史記』에서는 ‘息愼’으로 적었고, 「竹書紀年」에서는 “舜임금 25년에 息愼氏가 내빈 왔다.”고 하였다. 『汲冢周書』에서는 周나라 成王 때에 息愼이 와서 ‘賄息愼之命’을 작성토록 명했다고 하였고, 『逸周書』, 「王會解」에서는 이를 ‘稷愼’ 이라 일컬었다. 또는 ‘肅眘’이라고도 하니, 漢武帝의 조서에서는 ‘海外肅眘’이라 하였고. [南朝 陳나라 때] 徐陵의 글에서는 ‘肅眘茫茫, 風牛南偃’이라 하였다. 劉會孟은 “肅愼은 漢나라때는 挹婁, 北魏때는 勿吉, 唐나라때는 靺鞨이라 불렀다.”고 한다. 鬼谷子는 “肅愼氏가 흰 꿩을 文王에게 선물했다.”고 하였다. 『三國志』, 「東夷傳」 서문에서는 唐(堯임금)으로부터 周나라에 이르기까지 肅愼의 물건이 모두 여러 해를 지나서 도착했다.”고 하였다. [「明帝紀」에서는] 靑龍 4년에 “肅愼氏가 楛矢를 보냈다.”고 하였다. 「晉紀」에서는 “景元 3年(262), 咸寧 5年, 太興 2年(279)에 모두 肅愼이 와서 楛矢와 石弩를 선물했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에서는 “肅愼, 燕, 亳이 우리(周나라)의 북쪽 땅”이라 했고, 杜註가 이를 注하여 “肅愼은 玄菟郡 북쪽으로 3천여 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江淹(南朝 梁)의 「遂古」편에서는 “沃沮, 肅愼은 동북변”이라고 하였다. 陳逢衡이 이르길, 『世說新語』에서 “덕이 아름답고 밝으면, 肅愼이 그들의 楛矢를 조공한다.”고 하였다. 鄭樵(南宋)의 『都邑略』에서 “옛 肅愼國이 不咸山에 도읍하였고, 夫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었다.”고 하였다. 混同江이라 불리는 강의 강변에서 큰 느릅나무와 소나무 가지가 말라죽은 뒤에 강으로 떨어져 물결을 일으켜 출렁거리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알 수 없으나, 이것이 변하여 돌이 되니, 이를 취해 화살촉으로 쓸 수 있다. 느릅나무가 변화한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치고, 소나무는 그 다음이다. 서남쪽으로 6백 리 떨어진 곳을 長白山이라 하는데, 그 산 정상의 북쪽과 흑송 숲에 楛나무가 널리 자라서 이를 취해 화살을 만들었는데, 그 성질이 단단하면서도 곧다. 또한 海東靑이라 불리는 새가 있으니, 즉 隼이다.”라고 하였다. 惠棟(淸)이 말하길, 『肅愼國記』에서 “石山이 나라 동북쪽에 있는데, 이를 취할 때면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한다. 그 돌이 날카로워 쇠를 뚫는다.”라고 하였다. 『册府元龜』에서 魏나라 景元 3년(262)에 “肅愼이 5척 5촌 길이의 그 나라 활 30장, 1척 8촌 길이의 梏矢와 石弩 3백 매·가죽·뼈·쇠로 된 잡다한 갑옷 20령, 貂皮 4백 매를 바쳤다.”고 하였다. 『滿洲源流考』에서 “살펴보건대 元나라 戚輔의 『遼東略』에서 말하길, 肅愼의 동북쪽 산에서 石弩가 난다고 하였다.” 楊賓(淸)의 『柳邊紀略』에서는 “梏나무는 지금의 寧古塔 거주민들이 때로 呼爾哈河에서 얻는데, 길이가 3~4촌에 검은 색이거나 혹은 황색, 혹은 微白色으로 무늬결이 있으나, 쇠도 아니고 돌도 아니며, 서로 전하기를 ‘肅愼의 옛 화살’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柳邊紀略』에서] 楊賓은 “石弩를 楛나무로 잘못 적은 것 같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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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註〕 『滿洲源流考』 卷1 〈肅愼〉조에서 范蔚宗(范曄)이 말하길 “고깔을 쓰고, 비단옷을 입으며, 그릇은 俎豆를 썼다.”고 했는데, [이는] 실로 헛말이 아니다. 盧弼이 보건대, 范曄의 『後漢書』에서의 이 말은 『後漢書』, 「東夷傳」 서문에 보인다. 이는 바로 東夷를 두루 논하는 것이지, 挹婁만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니다. 더욱이 『後漢書』, 「東夷傳」, 「挹婁傳」에서는 “東夷나 夫餘가 마시고 먹을 때 모두 俎豆를 쓰나, 유독 挹婁에는 그것이 없고 그 법속에 가장 기강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의거 해보면, 『滿洲源流考』가 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