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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옥저(東沃沮)의 역사와 문화

동옥저주 001
번역주 001)
동옥저: 沃沮란 표현은 3세기 중반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지』에 처음으로 나온다. 그 이전에는 夫租라고 불렀다. 『漢書』, 「地理志」 樂浪郡 條에 낙랑군의 25현 가운데 하나로 夫租縣이 보이고, 평양 정백동 364호분에서 출토된 「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簿」 木牘에도 낙랑군 25현의 하나로 夫租縣이 전하고 있다. 초원 4년은 기원전 45년에 해당한다. 평양 정백동 1호분에서 ‘夫租薉君’이란 명문이 새겨진 銀製 印章이 발견되었고, 정백동 2호분에서 ‘夫租長印’이 새겨진 인장이 발견되었다. 후자에서 ‘永始三年(기원전 14)’銘 일산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정백동 1호분과 2호분은 대체로 기원전 1세기 말 또는 늦어도 1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夫租薉君’銘 인장은 부조현의 주민들이 예족이었음을 알려주며, 일반적으로 세형동검과 동모 등이 출토된 함흥시 이화동(동홍산)유적 근처에 부조현의 縣治가 위치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 漢代까지 함흥시 일대에 위치한 현을 부조현이라고 부르다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부조를 沃沮라고 바꾸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종래에 부조현이 위치한 함흥평야가 비옥하여 농사짓기에 적합하였기 때문에 夫租를 沃沮로 개칭하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한편 『滿洲源流考』에서는 沃沮가 森林이란 뜻을 지닌 窩集(weji)에서 유래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종래에 함흥 일대에 위치한 부조의 후신인 옥저를 남옥저, 두만강 유역 일대에 위치한 예족 일파를 북옥저라고 불렀고, 『삼국지』의 찬자는 남옥저와 북옥저를 통칭하여 동옥저라고 표현하였다고 이해한 견해(이현혜, 2010)가 제기되었다.
옥저의 문화적 중심지는 크게 함흥을 중심으로 하는 함경남도 지역과 두만강 유역의 함경북도 및 길림성 동남부,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구분된다. 함경남도 지역에서는 토기나 주거지 등의 문화양상을 알 수 있는 발굴 자료는 적지만, 기원전 3세기~2세기에 이르는 청동기와 철기 등 고조선과 낙랑 관련 자료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요령식청동기단계의 거푸집이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일찍부터 청동기문화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고, 기원전 3세기 무렵의 고조선 또는 진국의 청동기문화인 한국식동검과 동과, 세문경 등이 다수 출토되었고, 드물게는 간두령, 동령 등도 출토되었다.
한편 북옥저의 문화로 인식되고 있는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는 러시아 연해주 남부의 흥개호 및 수분하 유역과 중국 길림성과 흑룡강성 동남부 지역의 연변 일대, 두만강 유역 일대에 분포하는 기원전 5세기~2세기에 걸친 초기철기시대의 문화이다. 두만강 유역의 후기 청동기문화인 유정동유형과 연해주 지역의 얀콥스키문화를 계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수분하와 두만강 유역의 넓은 하안지대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 문화를 영위한 주민집단을 북옥저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지만, 다른 견해도 있다. 이현혜(2010)는 30년까지의 옥저는 함흥 일대에 위치한 夫租의 읍락을 지칭하는 용어였고, 1~2세기 고구려가 이 지역을 통합하여 지배하는 과정에서 옥저라고 부르는 대상이 확대되었으므로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는 옥저와 무관하거나 북옥저 이전의 문화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에 비해 연해주와 두만강 유역에서 집단을 이룬 옥저인이 기원전 2세기 무렵에 함흥 일대와 강원도 영서 지역에 진출하여 남옥저 또는 동옥저를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문안식, 2008). 심지어는 마천령산맥 이남의 함경남도 지역을 옥저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중국 측의 연구자(정영진, 1990)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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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주 002
번역주 002)
개마대산: 『漢書』, 「地理志」 玄菟郡 條에는 현도군에 西蓋馬縣이 있다고 전하고, 『後漢書』 郡國志 玄菟郡 條에서는 西蓋鳥로 전한다. 西蓋鳥는 西蓋馬의 誤記로 추정된다. 章懷太子 李賢은 『後漢書』, 「東夷列傳」 東沃沮傳의 注에서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하였다. 그 산은 지금 평양성 서쪽에 있다. 평양은 즉 (고조선의) 王險城이다.”라고 하였다. 이현의 注를 통하여 唐代에 蓋馬山이 평양 서쪽에 위치하였다고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개마고원은 북한의 함경남도 북서부·양강도·자강도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압록강·운총강과 낭림산맥·부전령산맥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개마대산은 개마고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서개마현은 개마고원 서쪽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서개마현의 현치에 대하여 富爾江과 渾江의 합류처인 富爾江口邊에 위치하였다고 이해한 견해(이병도, 1976), 독로강 유역의 江界로 보는 견해(和田淸, 1951), 集安으로 비정하는 견해(張博泉, 1981; 孫進己·王綿厚, 1989; 노태돈, 1999), 위원에서 초산으로 가는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윤용구, 2008) 등이 제기되었다. 근래에 『한서』, 「지리지」에 “馬訾水가 서북쪽으로 鹽難水에 들어가며, 염난수는 서남으로 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2개의 군을 지나고 2천 1백 리를 흐른다.”고 전하는 기록에서 마자수를 독로강, 염난수를 압록강으로 비정한 사실에 근거하여 현도군의 군치, 즉 고구려현의 치소를 집안으로 보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集安縣城 성벽 아래에서 土壁이 확인되었는데, 이것을 서개마현의 치소를 둘러싼 토성과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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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동쪽에 있다주 003
번역주 003)
〔原註〕 漢書 地理志에 이르기를, “玄菟郡의 서쪽은 蓋馬이다.”라고 하였다. 王先謙이 말하기를, “續志에 서쪽이 蓋烏라고 한 것은 잘못 적은 것이다. 章懷의 注에 蓋馬는 縣의 이름으로 玄菟郡에 속했다. 그 산은 지금의 平壤城 서쪽에 있으며, 平壤은 곧 王險城이다.”라고 하였다. 沈欽韓이 말하기를, “明志에서는 海州衛가 본래 沃沮國의 땅으로 지금 奉天 海城縣이다. 또한 奉天 蓋平縣은 高麗國의 蓋牟城이다. 이것 역시 그 땅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李兆洛이 말하기를, “西蓋烏의 옛 성은 지금의 奉天府 蓋平縣의 치소이다.”라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기를, “蓋馬大山은 지금의 朝鮮 평안도와 함경도를 나누는 산이다. 그 산은 남북으로 천여 리에 걸쳐 연접하여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노필이 보건대, 정겸의 설이 옳다. 『후한서』, 「동옥저전」에 동쪽으로 大海를 접한다고 하니, 그 땅이 가히 증명된다. 寰宇記에서도 동쪽으로 大海를 접했다고 했는데, 蓋平이라면 서쪽으로 大海를 접했을 것이다. 심흠한, 이조락의 두 설은 모두 잘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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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바다에 접해 살고 있으며, 그 지형은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다주 004
번역주 004)
그 지형은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다: 동옥저의 지형이 동북방면으로 협소하고, 서남 방면으로는 길게 뻗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후한서』와 그 이후의 사서에서는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길다(東西夾 南北長).”라고 표현하였다.
〔原註〕 『후한서(범서)』에는 ‘東西夾[夾, 音狹]’이라고 쓰여 있다. 丁謙이 말하기를, “당시의 국경은 단지 지금의 조선 함경도 동쪽으로 바다 일대였으며, 小白山 남쪽은 모두 高句麗의 땅이었다. 따라서 동북으로 길고 서남으로 길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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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히 [사방] 천 리이다주 005
번역주 005)
可千里: 『후한서』에는 “가히 사방 천 리쯤 된다(可折方千里).”라고 기술하였다.
〔原註〕 『후한서(范書)』에서는 가히 사방 천 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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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 읍루와 부여, 남쪽으로 예맥과 잇닿아 있다주 006
번역주 006)
남쪽으로 예맥과 잇닿아 있다: 예전에 “(예는) 남쪽은 辰韓,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에 잇닿아 있다.”고 전한다. 이에 따르면, 동옥저의 남쪽 변경과 잇닿아 있는 濊貊은 東濊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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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수는 5천 호이고주 007
번역주 007)
호수는 5천 호이고: 평양 정백동 364호분에서 출토된 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簿 木牘에 夫租縣은 1,150戶, 5,111口였다고 전한다. 5,000호는 부조의 후신인 南沃沮 인구의 자연적인 증가 및 두만강 유역에 위치한 北沃沮의 호수를 합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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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군왕주 008
번역주 008)
대군왕: 동옥저전에 沃沮를 侯國으로 삼았다고 전하는 것에서 동옥저의 지배자를 ‘沃沮侯’라고 불렀음을 엿볼 수 있다. 반면에 『삼국지』에서 인용한 『魏略』에 기원전 4세기 무렵에 朝鮮侯가 스스로 王號를 칭하였고, 부여전과 고구려전에서 부여 및 고구려에는 郡王 또는 王이 있다고 전한다. 대군왕이 없다는 표현은 3세기 중반에 동옥저에서 왕을 칭하는 지배자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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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없었다. 대대로 읍락에는 각기 장수가 있었다주 009
번역주 009)
장수: 읍락의 정치적 지배자인 首長을 가리킨다. 主帥 또는 渠帥 등과 같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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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언어는 [고]구려와 대체로 같으나 가끔씩 약간 다른 부분이 있었다주 010
번역주 010)
그 언어는 ~ 다른 부분이 있다: 『삼국지』에서 부여와 고구려, 예, 동옥저의 언어가 대체로 같다고 전한다. 종래에 이에 근거하여 부여와 고구려, 동예와 옥저의 언어를 부여계제어라고 통칭하고, 고구려어가 부여계제어를 대표한다고 이해하였다(이기문,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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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 초기에 연에서 망명한 사람인 위만주 011
번역주 011)
위만: 『삼국지』, 「한전」에서 『魏略』을 인용하여 “한나라 시기에 이르러 盧綰을 燕王으로 삼았고, 조선과 연은 浿水를 경계로 하였다.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감에 미쳐서 연나라 사람 衛滿이 망명하여 오랑캐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준왕을 설득하여 서쪽 경계에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중국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조선의 제후국[藩屛]이 되었다. 준이 그를 신뢰하고 총애하여 博士로 삼고, 圭를 하사하였으며, 1백 리의 땅을 封해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만이 망명한 사람들을 꾀여서 무리가 점점 많아졌다. 이에 사람을 보내서 준에게 거짓으로 아뢰기를, ‘한나라 군대가 10道로 나누어 이르니, 들어가서 宿衛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돌아와 준왕을 공격하였다. 준이 만과 서로 싸웠으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고 언급한 다음, “준왕은 좌우의 宮人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서 韓의 땅에 거처하였고, 스스로 韓王이라고 불렀다.”라고 기술하였다.
滿은 중국의 여러 문헌에서 姓이 衛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는 연나라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三上次男은 위만이 燕人이라는 중국 사서의 기록을 중시하여 위만조선을 중국 이주민이 외지에 수립한 식민지정권으로 보았다(三上次男, 1954). 이에 대하여 그가 중국에서 망명할 때, 상투머리[魋結]를 하였고, 또 蠻夷服을 입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 아니라 연 지역에 살던 조선인 계통의 사람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54)도 제기되었다. 한편 북한학계에서는 만을 고조선의 변방토호세력이었다고 본다. 그들에 따르면, 衛滿의 衛는 중국인이 위만이 중국인이었던 것처럼 꾸미기 위하여 중국의 衛나라 명칭을 앞에다 붙인 것인데, 『史記』와 『漢書』에 滿이라고만 나오지만, 『三國志』 所引 魏略이나 『後漢書』 東夷列傳에 衛滿으로 나오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위만이 정권을 장악한 후 중국식 관제를 도입하지 않았고, 또 고조선의 수도인 王險城에 그대로 도읍을 정하였다는 사실을 위만이 고조선 사람이라는 근거로 제시하였다(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1979). 일부 학자는 상투머리, 즉 魋結은 반드시 조선인만의 풍속이 아니고 南越이나 중국에도 그러한 풍속이 있었으며, 만이복도 반드시 조선의 의복을 뜻한다고 보기 힘들다고 반박하면서 위만을 조선인 계통으로 보는 견해를 비판(김한규, 1980)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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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선에서 왕이 되자, 이때 옥저[의 읍락]이 모두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다주 012
번역주 012)
이때 옥저[의 읍락]이 모두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다: 『漢書』, 「朝鮮傳」에 遼東太守가 [衛]滿을 漢의 外臣으로 삼은 이후에 滿이 군대의 위력과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小邑을 침략하여 항복시키자, 眞番과 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하므로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한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에 함경도와 강원도 동해안 방면에 臨屯郡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진번과 임둔 등이 위만에게 복속할 때, 부조(옥저) 역시 위만조선에 복속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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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무제 원봉 2년(기원전 109)에주 013
번역주 013)
〔原註〕 趙一淸이 말하기를, “一本에는 ‘武’자 아래 ‘帝’자가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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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주 014
번역주 014)
우거: 右渠(?~기원전 108)는 위만의 손자로서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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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4군을 설치하였으며주 015
번역주 015)
그 땅을 나누어 4군을 설치하였으며: 이에 관해서는 『史記』의 「朝鮮列傳」과 『漢書』의 「朝鮮傳」에 자세하게 나온다.
〔原註〕 『漢書』, 「朝鮮傳」에서는 “마침내 朝鮮을 평정하여 眞番·臨屯·樂浪·玄莬의 四郡을 두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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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저성을 현도군으로 삼았다주 016
번역주 016)
옥저성을 현도군으로 삼았다: 종래에 이 구절을 근거로 하여 玄菟郡의 郡治가 沃沮(함흥 일대)에 위치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韓鎭書; 安鼎福; 丁若鏞; 金正浩; 池內宏, 1942; 이성제, 2011). 그러나 현재 현도군의 郡治를 高句麗縣의 治所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구체적인 위치를 둘러싸고 集安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6; 和田淸, 1951)와 고구려현의 치소를 桓仁의 西古城으로 비정하는 견해(노태돈, 1999)가 제기되었다. 종래에 학계에서 논란이 분분하였던 내용은 부조현(옥저)을 임둔군의 영현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현도군의 영현으로 볼 것인지에 관해서였다. 이 구절을 사료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한 연구자들은 현도군의 영역은 渾河 하류에서부터 동으로는 함흥평야에 이르는 동서교통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긴 管狀帶와 같은 형상이었고, 이에 근거하여 옥저를 현도군의 영역에 포함시켜 이해하였다(和田淸, 1951; 田中俊明; 노태돈, 1999; 이성제, 2011). 반면에 일찍이 현도군의 군치를 현재의 집안으로 비정하고, 옥저는 지리상으로 집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현도군과 관계가 없고, 함경도 동해안에 위치한 임둔군의 영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이병도, 1976)가 제기되었다. 근래에 압록강 중류의 집안과 위원 용연동, 평북 세죽리, 두만강 유역의 함북 무산 호곡동, 회령 오동 등지에서 출토된 기원전 3세기~2세기경의 유물은 대체로 戰國系 철기가 중심을 이룰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 출토된 청동유물 역시 고조선계통의 세형동검과 다른 요동계통의 것임에 비하여 함경도 금야-토성리유형의 청동기문화는 두만강 유역 및 압록강 유역의 그것과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러한 견해를 보완하기도 하였다(이현혜, 2010). 부조현(옥저)을 임둔군의 영현으로 이해하는 연구자들은 이 구절을 기원전 82년에 임둔군을 폐지하고, 그 영현을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는데, 후대에 동옥저의 연혁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옥저성이 樂浪郡 東部都尉에 예속되기 직전에 현도군에 속하였던 사실을 이처럼 기술하였다고 보고 있다.
〔原註〕 丁謙이 말하기를, “한서 지리지에는 沃沮가 없다. 夫租는 沃沮의 와전이다. 本傳의 沃沮城은 지금의 咸興府 치소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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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에 이맥주 017
번역주 017)
이맥: 夷貊은 고구려를 가리킨다. 기원전 75년경에 고구려인이 현도군을 공격하자, 한은 현도군의 치소를 興京·老城 방면, 즉 지금의 중국 遼寧省 新濱縣 永陵鎭 서남쪽 蘇子河 南岸 永陵鎭古城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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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침략을 받아 [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이른바 현도[군]의 옛 부(府)가 바로 그곳이다주 018
번역주 018)
〔原註〕 丁謙이 말하기를, “(현도군의) 治所를 고구려의 서북으로 옮긴 것은 昭帝 5年(기원전 82)이며, 바로 주몽이 나라를 건국한 이후 변경으로 쫓아 물리친 때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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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옥저는 다시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다주 019
번역주 019)
옥저는 다시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다: 漢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樂浪郡과 眞番郡, 臨屯郡을 설치하고, 그 다음해에 玄菟郡을 설치하였다. 그 후 기원전 82년에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하고, 전자의 領縣은 낙랑군에, 후자의 領縣은 현도군에 예속시켰다. 기원전 75년경에 고구려가 현도군을 공격하자, 한은 그 치소를 遼寧省 新濱縣 永陵鎭으로 옮기면서 옛 임둔군 지역의 관할권을 낙랑군에게 넘겨주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옥저는 낙랑군에 예속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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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는 영토가 넓고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여 단단대령주 020
번역주 020)
단단대령: 單單大領에서 領은 嶺과 같은 의미이다. 濊傳에는 單單大山領으로 나온다. 그 위치에 대하여 鐵嶺, 薛罕嶺, 黃草嶺, 大關嶺, 北大峯山 혹은 철령에서 대관령에 이르는 산줄기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단단대령은 평양에서 함흥 사이에 가로 놓인 峻嶺을 가리키는 것인데, 현재 鐵嶺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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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에 있는 땅을 나누어 동부도위주 021
번역주 021)
동부도위: 『후한서』, 「동이열전」 예전에 “昭帝 始元 5년(기원전 82)에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고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현도를 다시 구려가 있는 곳으로 옮기니, 單單大領으로부터 동쪽의 沃沮와 濊貊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후에 영토가 넓고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겨 다시 영동의 7현을 분할하여 낙랑 동부도위를 두었다.”고 전한다. 옥저를 낙랑군에 예속시킨 후 얼마 있다가 한이 단단대령 동쪽에 동부도위를 설치하고, 옥저 등을 거기에 속하게 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部都尉는 漢代에 주로 邊郡에 설치한 관직으로서 군사 및 경찰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종래에 동부도위가 낙랑군의 영현 가운데 일부를 分治하였다고 이해하였으나(권오중, 2004) 근래에 부도위는 근본적으로 治民하지 않고 군사 방어를 담당하였을 뿐이라는 견해(김병준, 2013)가 제기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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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설치하고주 022
번역주 022)
〔原註〕 元本·吳本·毛本·官本에는 ‘置’가 ‘治’로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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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내성주 023
번역주 023)
불내성: 『한서』, 「지리지」 낙랑군조에서는 不而라고 하였고, 『삼국지』, 「관구검전」과 「위서」, 「동이전」 예전에서는 不耐라고 기술하였다. 관구검전에 魏軍이 고구려 東川王을 뒤쫓아 不耐에 이르러 紀功碑를 세웠다고 전하나 현재까지 그것이 발견되지 않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7년 가을 9월조에 不耐縣과 華麗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騎兵을 이끌고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자, 貊國의 우두머리가 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고 전한다. 예전에 “(正始 8년에 不耐侯가 魏의) 궁궐에 이르러 조공하자, 조서를 내려 다시 不耐濊王으로 제수하였다.”고 전한다. 불이현, 즉 불내성은 북한의 강원도 안변 또는 통천으로 비정하는 설(이병도, 1976)과 영흥으로 비정하는 설(池內宏, 1951; 이현혜, 201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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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치소를 두어주 024
번역주 024)
〔原註〕 漢書 地理志에서, “玄菟郡의 不而가 東部都尉 치소이다. 一統志에서는 ‘不耐의 옛 성이 咸興府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隋書 外國傳에서는 新羅가 沃沮, 不而, 韓, 濊의 땅을 차지했다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기를, ‘不耐城은 지금의 江原道 江陵府이고, 본래 濊王의 도읍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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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로 영동의 7현을 통괄하게 하였는데주 025
번역주 025)
별도로 영동의 7현을 통괄하게 하였는데: 동부도위가 관할한 領東 7縣은 東暆·不而·華麗·蠶台·邪頭昧·前莫·夫租縣이며, 이른바 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簿 木牘에도 7현이 모두 나온다. 『漢書』 권6 武帝紀 元封 3년(기원전 108)조의 臣瓚註에서 인용한 『武陵書』에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이며, 장안으로부터 거리가 6,128리이고, 15縣이 있다.”고 전한다. 東暆縣은 일반적으로 옛 함경남도 덕원 일대로 비정된다. 이병도는 7현 가운데 화려현은 함경남도 영흥, 부조현은 함경남도 함흥, 사두매현은 함남 문천(현재 북한의 강원도 문천시) 혹은 강원도 고성에 위치를 비정하였다(이병도, 1976). 그러나 영흥 일대를 불내(이)현의 치소로 보는 입장도 있다(이현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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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옥저[의 읍락도] 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주 026
번역주 026)
이때 옥저[의 읍락도] 모두 현이 되었다: 여기서 옥저는 夫租縣을 가리킨다. 이 무렵 낙랑군의 부조현에 대한 통치와 관련하여 ‘夫租薉君’銘 銀印이 주목된다. 이것은 평양시 정백동 1호 목곽묘에서 철기, 청동기 등의 토착적인 유물과 함께 출토되었다. 은으로 주물하여 만들었고, 인장면에는 예서체의 4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무덤의 연대는 기원전 1세기 후엽으로 편년된다. 정백동 2호 무덤에서도 高常賢印과 夫租長印이 새겨진 은인과 동인이 출토되었다. 부조예는 함경도 함흥 지역에 있던 정치세력으로 기원전 82년 낙랑군이 동부도위를 설치할 때 영동7현의 하나로 소속되었고, 30년에 동부도위가 폐지되면서 侯國이 되었다. 평양에서 부조의 지배세력 무덤이 발견된 것은 기원전 1세기 무렵에 한이 동부도위 소속의 토착세력 수장을 낙랑의 치소 지역으로 이주시켜 관위를 부여하고 회유하여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거나,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기록된 辰韓 右渠帥 廉斯鑡와 같이 선진 지역인 낙랑에 자발적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출신지와의 교역 등을 담당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原註〕 『滿洲源流考』 卷9에서 이르기를, “前漢과 後漢, 魏, 晉 때에 東方에 있던 나라는 夫餘, 挹婁, 三韓이다. 그 邑落은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있었다. 또한 沃沮, 濊 등의 국명이 있었다. 史傳을 살펴보니, 沃沮는 동쪽에 있는데, 동쪽으로 큰 바다에 접해 있고, 북쪽으로 挹婁, 夫餘와 잇닿아 있었다고 한다. 또한 北沃沮와 南沃沮가 있었는데, 모두 山林에 흩어져 거주하였으며, 大君長은 없었다고 하였다. 이른바 單單大嶺이라는 것은 곧 長白山(백두산)을 이르는 것이다. 單單은 滿洲語 珊延과 음이 거의 비슷하다. 지금 장백산 부근에서 동쪽으로 해변에 이르기까지, 북쪽으로 烏拉(우라), 흑룡강(黑龍江)에 잇닿아 있고, 서쪽으로 俄羅斯(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숲과 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어, 그 사이에 서로 면면히 이어져 있다. 魏의 毌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고 옥저를 거쳐 천여 리에 이르러 肅愼의 남쪽 경계에 도달하였으니, 곧 沃沮는 실은 지금의 窩集을 이른다. 濊 땅의 君長들은 또한 모두 읍락을 분할하여 다스렸고, 오로지 어느 한 나라에게만 복속되는 바가 없었다. 부여, 읍루 역시 모두 그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의 옛 땅을 상고해보건대, 鳳凰城으로부터 모두 바다를 통해 朝鮮에 이르렀다. 三國 이후에서 隋 때에는 高麗(고구려)에 복속되었고, 唐 때에는 渤海에 복속되었다.”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기를, “武帝가 설치한 玄菟郡만이 오직 太守가 다스렸을 뿐이고, 沃沮縣은 沃沮國의 땅이었으며, 그 나머지 7縣은 모두 濊國의 경계 내에 있었다. 이 때문에 范蔚宗(范曄)이 ‘單單大嶺之東’의 한 문장을 생략하고, 이것을 濊國傳에다 옮겨 삽입하였는데, 그 위치가 비교적 부합하는 것이다. 單單大領은 후대에 單大領으로 표기하였는데, 지금의 강원도 중간에 있는 淮陽郡의 동쪽이며, 欱嶺, 朱暉嶺, 大關嶺이라고 부르는 것이 모두 옛날 單單大領을 이른다. 不耐城은 漢書 地理志에는 ‘不而’로 기재되어 있다. 領東 7縣은 不而, 吞列, 東暆, 蠶台, 華麗, 邪頭昧, 前莫이다. 대개 前漢의 樂浪郡 소속이 모두 25縣인데, 후대의 책에서는 단지 18縣 뿐이라고 전하고 있으니, 곧 東暆를 제외하고 不而 등 6현은 모두 東部都尉에서 옛날에 다스린 바 있었는데, 확실하다고 보인다.”고 하였다. 沈家本에 이르기를, “漢志(『漢書』, 「地理志」)에는 沃沮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 元始 때에 이미 폐지되었을 수 있다. 아울러 蠶台,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 및 不而, 沃沮는 곧 이른바 領東 7현이라고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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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한 [광무제] 건무 6년(30)에주 027
번역주 027)
〔原註〕 光武는 응당히 『후한서(范書)』를 따라 建武로 표기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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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군을 줄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동부]도위를 혁파하였다주 028
번역주 028)
이로 말미암아 [동부]도위를 혁파하였다: 25년경 낙랑 지역의 원주민(土人)인 王調가 낙랑군 태수 劉憲을 죽이고 스스로 大將軍樂浪太守라고 칭하고, 이후 5년여에 걸쳐 낙랑 지역을 지배하였다. 建武 6년(30)에 후한의 光武帝가 낙랑태수 王遵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왕조를 평정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왕준이 요동에 이르자 王閎과 郡 決曹史 楊邑 등이 공모하여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하여 후한이 낙랑군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하게 되었을 것이다. 후한 광무제는 후한 건국 이후 변방지역에서 재지세력의 저항이 심해지자, 민심을 수습하고, 지배체제를 재확립하기 위하여 29년에 大赦免令을 반포하면서 동시에 지방기구의 축소정책을 시행하였는데, 후한은 낙랑군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하고 이와 같은 정책에 따라 곧바로 동부도위를 철폐하였던 것이다.
〔原註〕 『후한서(范書)』에서 이르기를, “建武 6年에 都尉官을 폐지하고, 마침내 領東의 땅을 버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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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에 모두 그 현의 거수를 현후(縣侯)로 임명하였는데주 029
번역주 029)
〔原註〕 『후한서』, 「東夷傳」에 이르기를, “광무제 때에 이르러 都尉 관직을 폐지하고 그 뒤에 그 渠帥를 모두 봉하여 沃沮侯로 삼았다.”고 하였다. 沈欽韓이 말하기를, “沃沮는 魏代 이래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百濟가 나라를 그곳에 세우고 沃沮는 없어졌다.”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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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불내와 화려주 030
번역주 030)
화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화려현이 불내현과 함께 신라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고 전한다. 이병도는 옛 영흥군 순녕면에서 발견된 漢代의 土城址인 一名 本宮土城(소라리토성)이 낙랑군 화려현의 치소로 추정된다고 하였다(이병도, 1976). 그렇지만 소라리토성을 불이(내)현과 동부도위의 치소로 보는 설도 강하다(池內宏, 1951; 문안식, 2008; 이현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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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저의 여러 현을 모두 후국주 031
번역주 031)
후국: 『後漢書』에서는 “建武 6년(30)에 도위관직을 폐지하고, 마침내 영동의 땅을 버리고, 모두 그 渠帥를 봉하여 縣侯로 삼았는데, [이들은 모두] 歲時마다 와서 朝賀하였다.”고 전하고, 『삼국지』 예전에서는 “후에 도위를 폐지하고 그 渠帥를 봉하여 侯로 삼았는데, 지금의 不耐濊(侯)가 모두 그 종족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 구절은 王調의 반란 이후 낙랑군의 영동 7현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후한은 군현을 통한 지배를 포기하고 각 현의 渠帥 가운데 유력한 자를 縣侯로 삼은 뒤, 이들에게 기존에 현이 가졌던 현 내 읍락에 대한 통할권을 명목상으로 부여해주고 이들을 통제하려고 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오영찬, 2006).
〔原註〕 漢書 地理志에서, “樂浪郡 華麗縣이다.”라고 하였다. 王先謙이 말하기를, “續志(『후한서』, 「지리지」)에서 後漢에서 폐지한 것이라고 하였다. 「동이전」에서 元初 5년에 고구려왕 宮이 玄菟를 치고 華麗城을 공격하였다고 하여 縣이 본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洪亮吉이 이르기를, “이는 아마 그 옛 城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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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았다. 이적이 다시 서로 공격하여 싸웠는데주 032
번역주 032)
이적이 다시 서로 공격하여 싸웠는데: 불내, 화려, 옥저 등의 후국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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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불내예후만이주 033
번역주 033)
불내예후: 濊傳에 “正始 6년(245)에 樂浪太守 劉茂와 帶方太守 弓遵이 領東의 濊가 구려에 예속되었다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치니, 不耐濊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그 8년(247)에 (魏나라의) 궁궐에 이르러 조공하자, 조서를 내려 다시 不耐濊王으로 제수하였다.”고 전한다. 이를 근거로 하여 30년 이후부터 3세기 중반 사이에 不耐의 渠帥를 不耐濊侯로 삼았음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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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오히려 공조와 주부 등의 제조(諸曹)를 두었으며, 모두 예민(濊民)이 그 직책을 맡고 있다주 034
번역주 034)
공조와 주부 등 ~ 맡고 있다: 漢代에 중앙에서 郡에는 장관인 太守와 副官인 丞을 파견하였고, 邊郡에는 長史, 태수의 보좌관겸 감시역으로 都尉를 여러 명 파견하였다. 태수는 현지에서 지역 출신자들을 屬吏를 임용할 수 있었다. 태수부는 諸曹로 나누어졌는데, 인사를 담당하는 功曹, 속리의 규율을 담당하는 五官掾, 속현의 감찰을 담당하는 督郵 등이 있었고, 諸曹의 문서를 담당하는 主簿나 主記室史가 있었다. 그리고 제조는 掾·史·書佐로 나누어져 있었다. 縣에는 중앙에서 縣令 또는 縣長, 그 아래에 佐官으로 升·尉를 파견하였고, 독우가 없는 것을 제외하고 하급 관직은 군태수부와 같았다. 이 기록은 3세기 중반까지 불내 지역에서 漢代 군현지배시기에 설치하였던 속리제도가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로 이해할 수 있다(嚴耕望, 1974; 池田雄一, 2002; 오영찬, 2006; 이성규,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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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저의 여러 읍락의 거수는 모두 스스로 삼로라고 칭하였으니, 즉 옛 [한의] 현국(縣國) 때의 제도주 035
번역주 035)
현국 때의 제도: 漢代에 三老는 地方民의 敎化를 맡은 鄕官으로 고령자이면서 경제적 기반을 가진 재지 내 父老를 임명하였다. 부로 중 縣과 鄕에서 선출한 대표자를 縣三老, 鄕三老라고 불렀다. 漢은 재지사회의 지도적 존재를 삼로로 임명하여 그들의 의견을 현 통치에 적극 반영함으로써 재지 지배세력과 민의 이반을 방지하고 통치질서의 지속적인 안정을 꾀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동옥저에서는 계층사회의 분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여전히 공동체적인 규제가 읍락사회에 강하게 관철되고 있었기 때문에 읍락의 거수층은 읍락민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강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의 입장에서 군현지배를 원활하게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읍락 거수층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으므로 이들에게 삼로직을 수여하여 縣政에 참여하게 하였고, 이러한 전통이 3세기 중반까지 계속 이어져서 옥저의 여러 읍락 거수들이 三老를 자칭하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오영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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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동옥저는]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주 036
번역주 036)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4년(56) 가을 7월조에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영토를 획득하여 城邑으로 삼았다. (이때) 영토를 개척하여 동쪽으로 滄海(동해)에, 남쪽으로 薩水(청천강)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후한은 30년 무렵에 각지의 縣을 줄이고 관리를 대폭 감원하는 한편, 郡國의 都尉官을 혁파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쳐 단단대령 동쪽의 7현을 관장하던 낙랑군 동부도위가 폐지되어 이 지역에 대한 후한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후한은 동부도위 폐지 이후 이 지역의 토착세력인 거수를 縣侯로 삼아 간접적인 통제를 시도하였지만, 곧바로 불내와 옥저를 비롯한 縣國 사이의 분쟁으로 대혼란이 초래되었다. 고구려 태조왕은 후한의 유화적인 대외정책으로 인해 군사적 대응의 가능성이 한층 더 낮아지고, 영동 7현 지역에 대한 후한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자, 제2현도군과의 교섭을 단절한 다음, 동해안 방면으로 진출하여 동옥저를 정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구려 태조왕은 후한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는 한편, 동옥저 진출을 위해서 환인에서 국내로 遷都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여호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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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려는 그 [지역 인물] 중에 대인을 뽑아 사자주 037
번역주 037)
사자: 使者는 고구려 官階의 하나이다. 고구려 초기에 왕뿐만 아니라 大加들도 사자란 관계를 둘 수 있었다. 이 자료는 고구려가 때에 따라 정복지역 소국 또는 읍락의 首長이나 유력자를 사자로 임명하여 조세수취를 담당하게 하여 간접 지배하였음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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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삼고주 038
번역주 038)
〔原註〕 宋本에서는 ‘主’가 ‘使’로 쓰여 있다. 『후한서(범서)』에서는 ‘使’로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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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착 거수와 함께] 서로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주 039
번역주 039)
대가: 고구려의 왕족 및 각 부의 부장과 부내부장을 大加라고 불렀다(노태돈,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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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하여금주 040
번역주 040)
〔原註〕 北宋本에서는 ‘大’가 ‘犬’으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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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세를 책임지고 통괄토록 하였다주 041
번역주 041)
또 대가로 하여금 ~ 통괄토록 하였다: 大加에 해당하는 각 部(那部)의 지배세력이 계루부 왕권의 통제 아래 각 부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동옥저를 정복하였고, 그 대가로 조세 수취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분배받았으며, 이에 근거하여 3세기 중반 이전에 고구려가 5부를 매개로 지방지배를 실현하였다고 이해한 견해(여호규, 2014)가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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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옥저 사람들에게] 맥포주 042
번역주 042)
맥포: 『후한서』에서는 ‘貂布’라고 기술하였다. 종래에 이에 근거하여 ‘貂布’를 ‘담비가죽과 麻織物’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였다(李成市, 1998). 이에 반해 동옥저전에 전하는 ‘貊布’란 표기를 그대로 인정하여 이것을 ‘貊(族)의 麻織物’로 해석한 다음, 예족이 다수인 옥저에 거주하던 맥계 주민들이 생산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김창석,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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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생선, 소금주 043
번역주 043)
〔原註〕 『후한서(범서)』에서는 ‘責其租稅貂布’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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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초류 등을 천 리나 떨어진 곳에 등에 지고 나르게 하였고, 또한 그 미녀를 보내게 하여주 044
번역주 044)
〔原註〕 毛本에는 ‘美’가 ‘姜’으로 쓰여 있는데,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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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나 첩으로 삼았다주 045
번역주 045)
구려는 그 [지역 인물] 중에 대인을 뽑아 ~ 대우하였다: 『후한서』에서는 “句驪는 다시 그(지역 인물) 중에 大人을 뽑아 使者로 삼고 (토착 거수와) 서로 함께 다스리게 하였다. 그 조세로서 담비 가죽, 생선, 소금, 해초류를 부과하였고, 미녀를 징발하여 노비나 첩으로 삼았다(句驪復置其中大人遂爲使者 以相監領 貴[責]其租稅 貂布魚鹽 海中食物 發美女爲婢妾焉).”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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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사람들이] 그들을 마치 노복처럼 대우하였다주 046
번역주 046)
그들을 마치 노복처럼 대우하였다: 『후한서』에는 없는 내용이다. 종래에 이에 근거하여 고구려가 동옥저를 정복하여 城邑으로 만들고, 그들을 집단예민화하여 지배하였다고 이해하였다(노태돈,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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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토지는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로 향해 있어 오곡주 047
번역주 047)
오곡: 五穀은 쌀, 보리, 콩, 조, 기장을 가리킨다. 고려 후기에 李奎報가 지은 『東明王篇』에 夫餘 解夫婁王의 신하인 阿蘭弗이 동해변의 迦葉原이 오곡 재배에 적당한 기름진 땅이니, 그곳으로 遷都하기를 건의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옥저 지역의 농경 상황을 반영한 자료로서 주목된다(김창석,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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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라기에 적합하고, 농사를 잘 짓는다. 사람들의 성격은 질박하고 정직하며 굳세고 용감하다. 소와 말이 적고, 창을 손에 쥐고 걷거나 뛰면서 싸우는 데에 능하다주 048
번역주 048)
창을 손에 쥐고 ~ 능하다: 『삼국지』 예전에서는 “(동예인들이) 길이 3丈이나 되는 창을 만들어 항상 여러 사람이 함께 (그것을) 손에 쥐고 걷거나 뛰면서 싸우는 데에 능하였다(作矛長三丈, 或數人共持之, 能步戰).”고 기술하였다. 동옥저와 동예에서 여러 사람이 3丈의 긴 창을 쥐고 一列橫隊로 전진하며 적을 격파하는 전법, 즉 이른바 步戰에 의존하는 전투를 하였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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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과 거처, 의복과 예절은 구려와 거의 비슷하였다.
위략에 이르기를, “그 혼인하는 법속은 여자가 10세가 되면 미리 서로 혼인하기로 약속하고, 신랑 집에서 [그 여자를] 맞아들여 장성하도록 길러 부인으로 삼는 것이다. 성인에 이르면, 다시 여자의 집으로 돌려보낸다. 여자 집에서 돈을 요구하면, [신랑 집에서] 돈을 지불하고 나서 이에 다시 신랑 집으로 되돌아온다.”주 049
번역주 049)
그 혼인하는 법속은 ~ 신랑 집으로 되돌아온다: 민며느리제(豫婦制)의 혼인풍습을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童養婚(童養媳)이라고 불렀다. 고려 및 조선시대를 거쳐 20세기 초까지도 서북지방 일부에서 이러한 혼인풍습이 남아 있었다. 滿洲族 사이에서도 20세기까지 이와 유사한 혼인풍습이 존재하였고, 명청시대 徽州에서 童養婚의 혼인풍습이 보편적이었다고 알려졌다.
〔原註〕 梁玉繩이 말하기를, “이것은 지금의 민며느리 제도로 본래 오랑캐의 풍속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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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였다.
장례를 치를 때에 큰 목곽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10여 장이나 되고, 한쪽 끝을 열어놓아 문을 만들었다. 새로 죽은 자가 있으면, 모두 [그 시체를] 임시로 매장하였는데주 050
번역주 050)
〔原註〕 『후한서』에는 ‘皆’는 ‘先’으로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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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우 형체만 덮을 만큼 묻었다가 가죽과 살이 모두 썩어 없어지면, 이에 뼈를 취하여 목곽 안에 놓아두었다주 051
번역주 051)
장례를 치를 때에 ~ 놓아두었다: 이와 같은 내용의 장례풍습을 複葬法의 일종인 洗骨葬이라고 부른다. 세골장은 옛날부터 동아시아 일대에서 널리 행해졌다. 石棺墓와 甕棺墓 같은 묘제에서도 그 내부 구조상으로 보아 일부 세골장이 행해졌음을 엿볼 수 있다. 세골장은 20세기까지 서·남해안 및 도서지방, 일본 오키나와 등에 草墳이라는 형태로 존재하였다. 초분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平地葬, 平臺葬, 樹葬, 假埋葬의 4유형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라도 해안지역에서는 시체를 넣은 임시초옥, 즉 초분을 만들고, 대개 100일 또는 3년 후에 초분을 열어 洗骨한다고 한다(이두현, 1974; 박만규·임영진· 나경수·栗本吉基, 2000). 그런데 시체를 가매장했다가 육탈시킨 후 2차로 매장하는 세골장은 옥저의 문화 영역에서는 아직까지 뚜렷한 발견 사례가 없다. 함경남도 지역에서는 대체로 토광묘나 목관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확인되었고, 영흥의 소라리유적에서는 한식목곽묘가 2기 발굴되기도 했다. 또 연해주 지역에서는 석관묘가 확인되었지만, 多人二次葬과는 다른 형태이다. 일제강점기에 연길 지역의 석관묘(고인돌)에서 다수의 성인과 소아 인골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손진태는 고인돌을 한쪽 면이 개방되어 있는 가족 공동묘로 보았고, 옥저의 장속과 연관지어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옥저의 주변지역인 길림성, 흑룡강성 등지에서는 多次多人葬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흑룡강성 泰來縣의 平洋遺蹟은 춘추~전한 시기에 해당하는 무덤유적으로 塼廠區域과 戰鬪區域으로 구분된다. 전창구역의 인골이 있는 묘는 단인장 34기, 합장묘 45기(3인 이상 합장묘가 30기)인데, 합장묘는 일차장한 것, 이차장과 일차장을 합장한 것, 모두 이차장으로 합장한 것으로 구분된다. 그중 140호는 묘광이 길이 350cm, 너비 256cm, 깊이 176cm이고, 목곽은 길이 230cm, 너비 130cm, 높이 75cm인 장방형 목곽묘인데 10구의 이차장 인골이 확인되었다. 133호는 13구의 인골(성인 여성2, 성인 남성 5, 성인불명 3, 영소아 3)을, 111호는 길이 252cm, 너비 200cm, 깊이 93cm의 묘광을 파고, 45개체(성인 남성 19, 성인 여성 10, 성인 불명 2, 미성년 이하 14)의 이차장 인골을 4층으로 배치하였다. 이곳의 11기 무덤은 육탈을 위해 가매장했던 빈 무덤인데, 전투구역에서도 같은 빈 무덤이 확인되었다. 흑룡강성 富裕縣 小登科유적은 2~5인의 이차장 인골을 합장했고, 내몽골 陳巴爾虎旗의 完工유적 목곽묘(ⅠA, ⅠB)는 일차장과 이차장 인골을 합장한 무덤으로 30인 정도(남자 14, 여자 11, 소아 5)의 인골이 확인되었다. 이들 다인장 무덤은 묘형이 다양하고,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어 추가장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출입구가 있는 옥저의 무덤과는 차이가 있다. 다인다차의 장례습속은 한서 2기문화의 형가점식 무덤군과 요령성 및 길림성의 대석개묘에서도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청동기시대부터 초기철기시대에 걸쳐 중국 동북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된 장례습속이라 할 수 있다(黑龍江省文物考古硏究所, 1990; 潘玲·林沄, 2002; 이종수,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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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가족이 모두 하나의 목곽을 함께 쓰고, 나무에 생전의 모습을 새겼는데, 죽은 사람의 수대로 하였다. 또한 질솥이 있는데, 그 안에 쌀을 담아 목곽의 문 옆에 엮어 매달아두었다주 052
번역주 052)
또한 질솥이 있는데 ~ 매달아두었다: 여기에 전하는 동옥저의 葬俗은 개별 가족의 조상숭배사상의 강화과정 속에서 죽은 조상에 대한 상시적인 공양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목곽은 일종의 가족공동묘를 가리키고, 木像은 일종의 肖像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질솥 속에 담긴 쌀은 죽은 자를 위한 糧食의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송호정,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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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주 053
번역주 053)
관구검: 毌丘儉은 중국 삼국시대 魏의 武將이다. 235~246년 사이에 幽州刺史에 임명되어 요동 방면의 경영을 담당하였다. 고구려 정벌 후 預州刺史가 되었으며, 25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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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려를 토벌하자주 054
번역주 054)
관구검이 구려를 토벌하자: 毌丘儉이 고구려를 정벌한 시기에 대해 기록마다 차이가 난다. 『三國志』, 「魏書」 齊王芳紀에서 관구검이 正始 7년(246)에 고구려를 정벌하였다고 하였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역시 동천왕 20년(246) 가을 8월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고 전한다. 반면에 『三國志』, 「관구검전」에서는 正始中에 1차 정벌을 단행하고, 정시 6년(245)에 2차로 정벌한 것으로, 「毌丘儉紀功碑」에서는 정시 6년에 고구려를 정벌한 것으로 전하며,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정시 5년(244)에 고구려를 정벌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일찍이 池內宏은 「관구검기공비」와 「관구검전」에 근거하여 관구검 자신의 1차 정벌은 정시 5년(244)에 시작하여 정시 6년(245) 5월에 종료되었고, 다시 그 다음 해에 王頎가 2차로 고구려를 정벌하였다고 이해한 바 있다(池內宏, 1928;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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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려의 왕 궁(宮: 동천왕)주 055
번역주 055)
궁: 고구려전에 伊夷模(산상왕)가 아들이 없어 灌奴部의 여자와 私通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바로 位宮(동천왕)인데, 그의 증조인 宮(태조왕)과 마찬가지로 동천왕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사람)을 보았기 때문에 位宮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동천왕의 이름은 憂位居이고, 어릴 적의 이름은 郊彘였으며, 어머니는 酒桶村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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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옥저로 달아났다. 마침내 군사를 전진시켜 공격하여 옥저의 읍락을 모두 깨뜨리고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포로가 3천여 급이었다. 궁이 북옥저로 달아났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주 056
번역주 056)
치구루: 『삼국지』, 「관구검전」에서는 宮(동천왕)이 買溝로 달아났다(宮遂奔買溝)고 하였다. 買溝는 買溝婁에서 婁가 脫字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置溝婁는 고구려 중기 동북 경계에 해당하는 柵城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구려에서 溝婁는 城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置와 柵은 음운상 통한다고 이해한 것이다. 책성은 두만강 하류의 琿春에 위치한 溫特赫部城이나 薩其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동명성왕 10년(기원전 28)에 왕이 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고 전하며, 태조왕 46년(98)에 왕이 柵城을 순행하였고, 그로부터 4년 뒤인 태조왕 50년(102)에 사신을 파견하여 책성의 백성을 按撫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여러 자료들을 통하여 이른 시기에 고구려가 두만강 유역에 위치한 置溝婁, 즉 북옥저를 고구려에 복속시켰음을 엿볼 수 있다.
285년에 선비족 慕容廆가 부여를 공격하자, 부여는 晉의 東夷校尉府에 구원을 요청하고 선비족에 대항하였으나 실패하여 부여왕 依慮가 자살하였다. 이때 왕의 자제 등 부여의 핵심 지배층 다수가 동쪽의 옥저로 피난하였다. 여기서 옥저는 일반적으로 북옥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286년에 의려를 이어 부여의 왕위에 오른 依羅는 진의 동위교위부의 지원을 받아 선비족 모용외의 군대를 격파하고 復國하였다. 복국 이후에 옥저로 피난하여 왔던 지배층 가운데 일부가 다시 옛 부여 지역으로 되돌아갔고, 일부는 옥저 지역에 그대로 남아 거주하면서 부여를 칭하였는데, 이를 흔히 東夫餘라고 부른다. 동부여의 王城을 광개토왕릉비에서 ‘餘城’이라고 표기하였는데, 대체로 ‘餘城’이 바로 柵城이었다고 보고 있다(노태돈, 1989; 1999). 한편 買溝婁는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동부여의 味九婁와 동일한 지명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6), 광개토왕릉비의 守墓人烟戶 조항에 보이는 買句余와 동일한 지명으로 보는 견해(여호규, 2008)가 제기되었다. 대체로 置溝婁와 買溝婁는 같은 곳을 가리키는 지명으로서 柵城을 이른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일부 학자는 치구루는 책성을 가리키고 매구루(미구루)는 치구루와 별개의 지명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노태돈, 1989; 1999). 현재 학계에서는 치구루를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책성으로 비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북옥저의 영역은 두만강 하류 일대와 함경북도 해안지대를 망라하는 범위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이병도, 1976; 이현혜, 1997; 이현혜, 2010; 김미경, 2000).
〔原註〕 宋本에는 ‘漊’를 ‘婁’로 썼다. 丁謙이 말하기를, “溝漊는 城을 가리키며, ‘오히려 置城’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趙一淸이 말하기를, “毋丘儉傳에 ‘置’를 ‘買’라고 썼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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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불렀으며, 남옥저로부터 거리가 800여 리였다주 057
번역주 057)
남옥저로부터 거리가 800여 리였다: 『삼국지』, 「관구검전」에는 “(魏軍이) 沃沮를 지나 천여 리를 추격하여 肅愼의 남계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이 기록에서 보듯이 남옥저는 함흥 일대에 위치한 夫租의 후신인 본래의 옥저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이현혜, 2010). 반면에 중국 학계에서는 한국 학계와 다른 견해를 제기하였다. 匡瑜는 牧丹江, 綏芬河,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 즉 신석기와 청동기, 철기시대의 문화를 다 포함하여 북옥저의 문화로 보았고, 그 분포 범위는 북으로는 興凱湖로부터 남으로는 두만강까지, 동으로는 동해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張廣才嶺東側까지인데, 이 지방의 원시문화를 북옥저문화라고 부르거나 전형적인 유적을 들어 團結文化라고 불렀다. 그리고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 즉 지금의 백두산 동쪽인 북한의 함경북도이고, 옥저와 800리인 지금의 두만강 서쪽 백두산 북쪽은 북옥저라고 보았다(匡瑜, 1982). 張太湘은 장광재령 동쪽부터 동해까지인 목단강, 수분하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된 단결문화를 역사상 漢代 옥저문화라고 인정한 다음. 그 문화의 분포 범위는 동쪽으로는 동해까지이고, 서쪽으로는 장광재령이며, 남쪽으로는 두만강 하류까지이고, 북으로는 흥개호, 목단강, 穆稜河 下流까지라고 보았다(張太湘, 1982). 林澐은 목단강 유역, 수분하 유역, 두만강 兩岸 및 러시아 연해주의 원시문화를 상세하게 분석한 기초 위에서 두만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柳庭洞類型과 그보다도 더 이른 시기의 유적, 목단강 유역의 鶯歌嶺 상층 유형과 東康 유형을 단결문화 범주에서 제외시켜, 두만강 유역에서 흥개호,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일대의 단결문화를 옥저문화로 규정하였다(林澐, 1985). 李强은 동옥저의 강역은 대체로 동으로 한반도 북부 및 러시아 연해주지구의 동해까지이고, 西界北部는 老爺嶺이고, 서계 남부는 북한 양강도 경내의 개마고원까지이며, 남쪽 경계는 함경북도지간의 마천령을 넘지 않고, 북쪽으로는 흥개호를 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李强, 1986). 干志秋, 孫秀仁은 남옥저의 범위를 남계는 지금의 북한 함경남도, 서쪽 경계는 지금의 백두산 및 백두산이 남쪽으로 뻗은 북한의 낭림산맥 동쪽까지, 동쪽으로는 동해까지이고, 북옥저의 범위는 지금의 훈춘 전역을 비롯하여 그 북쪽으로 老爺嶺 동쪽, 수분하 유역 및 흥개호 남쪽까지라고 이해하였다(干志秋·孫秀仁, 1987). 이 밖에 정영진은 옥저의 강역은 북으로는 흥개호 남쪽까지이고, 서부북계는 老爺嶺까지이며, 남부는 蓋馬高原東摩天嶺까지, 동쪽으로는 북한 동해안 북부와 러시아 南濱海地區의 동해까지이고, 두만강을 경계로 하여 남옥저와 북옥저가 나뉘었다고 보았다(정영진, 1990).〔原註〕 丁謙이 말하기를, “땅을 보면 마땅히 圖門江 남북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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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풍속은 남과 북이 모두 같으며주 058
번역주 058)
그들의 풍속은 남과 북이 모두 같으며: 초기철기시대에 함흥 일대의 부조, 즉 옥저는 세형동검문화권에 속하였고, 두만강 유역의 읍락들은 團結-크로우노프카문화에 속하였지만, 1세기 말 이래 이들 두 지역이 모두 고구려의 통제하에 들어가 지배를 받게 되면서 양 지역 사이에 활발한 인적, 물적 교류가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양 지역은 서로 간에 문화적으로 비슷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현혜, 2010).
〔原註〕 『후한서』에서는 그 풍속은 모두 남쪽과 같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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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루와 잇닿아 있다주 059
번역주 059)
〔原註〕 『후한서』에서는 남쪽으로 읍루와 잇닿아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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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루가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여 북옥저가 [이를] 두려워하였다. [북옥저는] 여름철에는 항상 산속의 깊은 바위굴에서 살며 수비하였다.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 뱃길이 막히면, 이에 [산에서] 내려와 촌락에 거처하였다. 왕기주 060
번역주 060)
왕기: 王頎는 字는 孔碩이며 東萊 출신이다. 238년에 현도군 태수에 임명되었고, 正始 年間에 관구검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10여 년 후인 263年에 天水太守로서 魏의 蜀 정벌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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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별도로 [군대를] 파견하여 궁을 뒤쫓아 치게 하여 그 동쪽 경계 끝까지 다다랐다. 그 기로에게 묻기를, “바다 동쪽에 다시 사람이 살고 있는가?”라고 하였다. 기로들이 “나라 사람들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다가 풍랑을 만나 수십 일 동안 바람이 부는 대로 표류하다가 동쪽의 한 섬주 061
번역주 061)
동쪽의 한 섬: 종래에 옥저 동쪽의 바다 가운데 위치한 섬의 실체를 울릉도라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59; 池內宏,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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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닿았다. 섬 위에 사람이 있었으나 말을 서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풍속에 항상 7월에 어린 여자 아이를 취하여 바다에 빠트린다.”고 말하였다. 또한 “한 나라가 역시 바다 가운데에 있었는데, 순전히 여자만 있고, 남자가 없었다.”주 062
번역주 062)
남자가 없었다: 중국의 주변 민족에 대하여 서술한 문헌에 女人國 관련 기사가 가끔 보이고 있다. 여성만이 존재한 국가라고 쓰여 있지만, 실제상으로는 巫女的인 성격의 女王이 정치를 행하는 나라를 이와 같이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原註〕 『후한서』에서 이르기를, “혹은 그 나라에 神井이 있어 들여다보면 자식을 낳는다고 전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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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하였다. 또한 “바다 가운데로부터 떠오른 베옷 입은 한 사람을 건졌는데, 그 신체에 중국인과 같은 의복을 입었고주 063
번역주 063)
〔原註〕 『후한서』에는 ‘其形如中人衣’이라고 쓰여 있고, ‘國’字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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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양 소매의 길이가 3장이나 되었다.”고 말하였다. 또한 “파도를 따라 해안가로 밀려온 부서진 배 하나를 얻었는데, 거기에 목덜미에 다시 얼굴이 있는 한 사람이 있어주 064
번역주 064)
〔原註〕 『후한서』에는 ‘項’을 ‘頂’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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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았으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으며, [그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고 말하였다. 그 지역은 모두 옥저 동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 번역주 001)
    동옥저: 沃沮란 표현은 3세기 중반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지』에 처음으로 나온다. 그 이전에는 夫租라고 불렀다. 『漢書』, 「地理志」 樂浪郡 條에 낙랑군의 25현 가운데 하나로 夫租縣이 보이고, 평양 정백동 364호분에서 출토된 「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簿」 木牘에도 낙랑군 25현의 하나로 夫租縣이 전하고 있다. 초원 4년은 기원전 45년에 해당한다. 평양 정백동 1호분에서 ‘夫租薉君’이란 명문이 새겨진 銀製 印章이 발견되었고, 정백동 2호분에서 ‘夫租長印’이 새겨진 인장이 발견되었다. 후자에서 ‘永始三年(기원전 14)’銘 일산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정백동 1호분과 2호분은 대체로 기원전 1세기 말 또는 늦어도 1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夫租薉君’銘 인장은 부조현의 주민들이 예족이었음을 알려주며, 일반적으로 세형동검과 동모 등이 출토된 함흥시 이화동(동홍산)유적 근처에 부조현의 縣治가 위치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 漢代까지 함흥시 일대에 위치한 현을 부조현이라고 부르다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부조를 沃沮라고 바꾸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종래에 부조현이 위치한 함흥평야가 비옥하여 농사짓기에 적합하였기 때문에 夫租를 沃沮로 개칭하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한편 『滿洲源流考』에서는 沃沮가 森林이란 뜻을 지닌 窩集(weji)에서 유래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종래에 함흥 일대에 위치한 부조의 후신인 옥저를 남옥저, 두만강 유역 일대에 위치한 예족 일파를 북옥저라고 불렀고, 『삼국지』의 찬자는 남옥저와 북옥저를 통칭하여 동옥저라고 표현하였다고 이해한 견해(이현혜, 2010)가 제기되었다.
    옥저의 문화적 중심지는 크게 함흥을 중심으로 하는 함경남도 지역과 두만강 유역의 함경북도 및 길림성 동남부,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구분된다. 함경남도 지역에서는 토기나 주거지 등의 문화양상을 알 수 있는 발굴 자료는 적지만, 기원전 3세기~2세기에 이르는 청동기와 철기 등 고조선과 낙랑 관련 자료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요령식청동기단계의 거푸집이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일찍부터 청동기문화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고, 기원전 3세기 무렵의 고조선 또는 진국의 청동기문화인 한국식동검과 동과, 세문경 등이 다수 출토되었고, 드물게는 간두령, 동령 등도 출토되었다.
    한편 북옥저의 문화로 인식되고 있는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는 러시아 연해주 남부의 흥개호 및 수분하 유역과 중국 길림성과 흑룡강성 동남부 지역의 연변 일대, 두만강 유역 일대에 분포하는 기원전 5세기~2세기에 걸친 초기철기시대의 문화이다. 두만강 유역의 후기 청동기문화인 유정동유형과 연해주 지역의 얀콥스키문화를 계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수분하와 두만강 유역의 넓은 하안지대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 문화를 영위한 주민집단을 북옥저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지만, 다른 견해도 있다. 이현혜(2010)는 30년까지의 옥저는 함흥 일대에 위치한 夫租의 읍락을 지칭하는 용어였고, 1~2세기 고구려가 이 지역을 통합하여 지배하는 과정에서 옥저라고 부르는 대상이 확대되었으므로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는 옥저와 무관하거나 북옥저 이전의 문화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에 비해 연해주와 두만강 유역에서 집단을 이룬 옥저인이 기원전 2세기 무렵에 함흥 일대와 강원도 영서 지역에 진출하여 남옥저 또는 동옥저를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문안식, 2008). 심지어는 마천령산맥 이남의 함경남도 지역을 옥저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중국 측의 연구자(정영진, 1990)도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2)
    개마대산: 『漢書』, 「地理志」 玄菟郡 條에는 현도군에 西蓋馬縣이 있다고 전하고, 『後漢書』 郡國志 玄菟郡 條에서는 西蓋鳥로 전한다. 西蓋鳥는 西蓋馬의 誤記로 추정된다. 章懷太子 李賢은 『後漢書』, 「東夷列傳」 東沃沮傳의 注에서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하였다. 그 산은 지금 평양성 서쪽에 있다. 평양은 즉 (고조선의) 王險城이다.”라고 하였다. 이현의 注를 통하여 唐代에 蓋馬山이 평양 서쪽에 위치하였다고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개마고원은 북한의 함경남도 북서부·양강도·자강도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압록강·운총강과 낭림산맥·부전령산맥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개마대산은 개마고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서개마현은 개마고원 서쪽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서개마현의 현치에 대하여 富爾江과 渾江의 합류처인 富爾江口邊에 위치하였다고 이해한 견해(이병도, 1976), 독로강 유역의 江界로 보는 견해(和田淸, 1951), 集安으로 비정하는 견해(張博泉, 1981; 孫進己·王綿厚, 1989; 노태돈, 1999), 위원에서 초산으로 가는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윤용구, 2008) 등이 제기되었다. 근래에 『한서』, 「지리지」에 “馬訾水가 서북쪽으로 鹽難水에 들어가며, 염난수는 서남으로 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2개의 군을 지나고 2천 1백 리를 흐른다.”고 전하는 기록에서 마자수를 독로강, 염난수를 압록강으로 비정한 사실에 근거하여 현도군의 군치, 즉 고구려현의 치소를 집안으로 보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集安縣城 성벽 아래에서 土壁이 확인되었는데, 이것을 서개마현의 치소를 둘러싼 토성과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原註〕 漢書 地理志에 이르기를, “玄菟郡의 서쪽은 蓋馬이다.”라고 하였다. 王先謙이 말하기를, “續志에 서쪽이 蓋烏라고 한 것은 잘못 적은 것이다. 章懷의 注에 蓋馬는 縣의 이름으로 玄菟郡에 속했다. 그 산은 지금의 平壤城 서쪽에 있으며, 平壤은 곧 王險城이다.”라고 하였다. 沈欽韓이 말하기를, “明志에서는 海州衛가 본래 沃沮國의 땅으로 지금 奉天 海城縣이다. 또한 奉天 蓋平縣은 高麗國의 蓋牟城이다. 이것 역시 그 땅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李兆洛이 말하기를, “西蓋烏의 옛 성은 지금의 奉天府 蓋平縣의 치소이다.”라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기를, “蓋馬大山은 지금의 朝鮮 평안도와 함경도를 나누는 산이다. 그 산은 남북으로 천여 리에 걸쳐 연접하여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노필이 보건대, 정겸의 설이 옳다. 『후한서』, 「동옥저전」에 동쪽으로 大海를 접한다고 하니, 그 땅이 가히 증명된다. 寰宇記에서도 동쪽으로 大海를 접했다고 했는데, 蓋平이라면 서쪽으로 大海를 접했을 것이다. 심흠한, 이조락의 두 설은 모두 잘못되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4)
    그 지형은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다: 동옥저의 지형이 동북방면으로 협소하고, 서남 방면으로는 길게 뻗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후한서』와 그 이후의 사서에서는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길다(東西夾 南北長).”라고 표현하였다.
    〔原註〕 『후한서(범서)』에는 ‘東西夾[夾, 音狹]’이라고 쓰여 있다. 丁謙이 말하기를, “당시의 국경은 단지 지금의 조선 함경도 동쪽으로 바다 일대였으며, 小白山 남쪽은 모두 高句麗의 땅이었다. 따라서 동북으로 길고 서남으로 길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5)
    可千里: 『후한서』에는 “가히 사방 천 리쯤 된다(可折方千里).”라고 기술하였다.
    〔原註〕 『후한서(范書)』에서는 가히 사방 천 리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남쪽으로 예맥과 잇닿아 있다: 예전에 “(예는) 남쪽은 辰韓,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에 잇닿아 있다.”고 전한다. 이에 따르면, 동옥저의 남쪽 변경과 잇닿아 있는 濊貊은 東濊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7)
    호수는 5천 호이고: 평양 정백동 364호분에서 출토된 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簿 木牘에 夫租縣은 1,150戶, 5,111口였다고 전한다. 5,000호는 부조의 후신인 南沃沮 인구의 자연적인 증가 및 두만강 유역에 위치한 北沃沮의 호수를 합친 것으로 이해된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8)
    대군왕: 동옥저전에 沃沮를 侯國으로 삼았다고 전하는 것에서 동옥저의 지배자를 ‘沃沮侯’라고 불렀음을 엿볼 수 있다. 반면에 『삼국지』에서 인용한 『魏略』에 기원전 4세기 무렵에 朝鮮侯가 스스로 王號를 칭하였고, 부여전과 고구려전에서 부여 및 고구려에는 郡王 또는 王이 있다고 전한다. 대군왕이 없다는 표현은 3세기 중반에 동옥저에서 왕을 칭하는 지배자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9)
    장수: 읍락의 정치적 지배자인 首長을 가리킨다. 主帥 또는 渠帥 등과 같은 의미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그 언어는 ~ 다른 부분이 있다: 『삼국지』에서 부여와 고구려, 예, 동옥저의 언어가 대체로 같다고 전한다. 종래에 이에 근거하여 부여와 고구려, 동예와 옥저의 언어를 부여계제어라고 통칭하고, 고구려어가 부여계제어를 대표한다고 이해하였다(이기문, 1972).바로가기
  • 번역주 011)
    위만: 『삼국지』, 「한전」에서 『魏略』을 인용하여 “한나라 시기에 이르러 盧綰을 燕王으로 삼았고, 조선과 연은 浿水를 경계로 하였다.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감에 미쳐서 연나라 사람 衛滿이 망명하여 오랑캐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준왕을 설득하여 서쪽 경계에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중국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조선의 제후국[藩屛]이 되었다. 준이 그를 신뢰하고 총애하여 博士로 삼고, 圭를 하사하였으며, 1백 리의 땅을 封해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만이 망명한 사람들을 꾀여서 무리가 점점 많아졌다. 이에 사람을 보내서 준에게 거짓으로 아뢰기를, ‘한나라 군대가 10道로 나누어 이르니, 들어가서 宿衛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돌아와 준왕을 공격하였다. 준이 만과 서로 싸웠으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고 언급한 다음, “준왕은 좌우의 宮人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서 韓의 땅에 거처하였고, 스스로 韓王이라고 불렀다.”라고 기술하였다.
    滿은 중국의 여러 문헌에서 姓이 衛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는 연나라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三上次男은 위만이 燕人이라는 중국 사서의 기록을 중시하여 위만조선을 중국 이주민이 외지에 수립한 식민지정권으로 보았다(三上次男, 1954). 이에 대하여 그가 중국에서 망명할 때, 상투머리[魋結]를 하였고, 또 蠻夷服을 입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 아니라 연 지역에 살던 조선인 계통의 사람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54)도 제기되었다. 한편 북한학계에서는 만을 고조선의 변방토호세력이었다고 본다. 그들에 따르면, 衛滿의 衛는 중국인이 위만이 중국인이었던 것처럼 꾸미기 위하여 중국의 衛나라 명칭을 앞에다 붙인 것인데, 『史記』와 『漢書』에 滿이라고만 나오지만, 『三國志』 所引 魏略이나 『後漢書』 東夷列傳에 衛滿으로 나오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위만이 정권을 장악한 후 중국식 관제를 도입하지 않았고, 또 고조선의 수도인 王險城에 그대로 도읍을 정하였다는 사실을 위만이 고조선 사람이라는 근거로 제시하였다(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1979). 일부 학자는 상투머리, 즉 魋結은 반드시 조선인만의 풍속이 아니고 南越이나 중국에도 그러한 풍속이 있었으며, 만이복도 반드시 조선의 의복을 뜻한다고 보기 힘들다고 반박하면서 위만을 조선인 계통으로 보는 견해를 비판(김한규, 1980)하기도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2)
    이때 옥저[의 읍락]이 모두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다: 『漢書』, 「朝鮮傳」에 遼東太守가 [衛]滿을 漢의 外臣으로 삼은 이후에 滿이 군대의 위력과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小邑을 침략하여 항복시키자, 眞番과 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하므로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한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에 함경도와 강원도 동해안 방면에 臨屯郡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진번과 임둔 등이 위만에게 복속할 때, 부조(옥저) 역시 위만조선에 복속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13)
    〔原註〕 趙一淸이 말하기를, “一本에는 ‘武’자 아래 ‘帝’자가 있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4)
    우거: 右渠(?~기원전 108)는 위만의 손자로서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5)
    그 땅을 나누어 4군을 설치하였으며: 이에 관해서는 『史記』의 「朝鮮列傳」과 『漢書』의 「朝鮮傳」에 자세하게 나온다.
    〔原註〕 『漢書』, 「朝鮮傳」에서는 “마침내 朝鮮을 평정하여 眞番·臨屯·樂浪·玄莬의 四郡을 두었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6)
    옥저성을 현도군으로 삼았다: 종래에 이 구절을 근거로 하여 玄菟郡의 郡治가 沃沮(함흥 일대)에 위치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韓鎭書; 安鼎福; 丁若鏞; 金正浩; 池內宏, 1942; 이성제, 2011). 그러나 현재 현도군의 郡治를 高句麗縣의 治所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구체적인 위치를 둘러싸고 集安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6; 和田淸, 1951)와 고구려현의 치소를 桓仁의 西古城으로 비정하는 견해(노태돈, 1999)가 제기되었다. 종래에 학계에서 논란이 분분하였던 내용은 부조현(옥저)을 임둔군의 영현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현도군의 영현으로 볼 것인지에 관해서였다. 이 구절을 사료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한 연구자들은 현도군의 영역은 渾河 하류에서부터 동으로는 함흥평야에 이르는 동서교통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긴 管狀帶와 같은 형상이었고, 이에 근거하여 옥저를 현도군의 영역에 포함시켜 이해하였다(和田淸, 1951; 田中俊明; 노태돈, 1999; 이성제, 2011). 반면에 일찍이 현도군의 군치를 현재의 집안으로 비정하고, 옥저는 지리상으로 집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현도군과 관계가 없고, 함경도 동해안에 위치한 임둔군의 영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이병도, 1976)가 제기되었다. 근래에 압록강 중류의 집안과 위원 용연동, 평북 세죽리, 두만강 유역의 함북 무산 호곡동, 회령 오동 등지에서 출토된 기원전 3세기~2세기경의 유물은 대체로 戰國系 철기가 중심을 이룰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 출토된 청동유물 역시 고조선계통의 세형동검과 다른 요동계통의 것임에 비하여 함경도 금야-토성리유형의 청동기문화는 두만강 유역 및 압록강 유역의 그것과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러한 견해를 보완하기도 하였다(이현혜, 2010). 부조현(옥저)을 임둔군의 영현으로 이해하는 연구자들은 이 구절을 기원전 82년에 임둔군을 폐지하고, 그 영현을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는데, 후대에 동옥저의 연혁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옥저성이 樂浪郡 東部都尉에 예속되기 직전에 현도군에 속하였던 사실을 이처럼 기술하였다고 보고 있다.
    〔原註〕 丁謙이 말하기를, “한서 지리지에는 沃沮가 없다. 夫租는 沃沮의 와전이다. 本傳의 沃沮城은 지금의 咸興府 치소이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7)
    이맥: 夷貊은 고구려를 가리킨다. 기원전 75년경에 고구려인이 현도군을 공격하자, 한은 현도군의 치소를 興京·老城 방면, 즉 지금의 중국 遼寧省 新濱縣 永陵鎭 서남쪽 蘇子河 南岸 永陵鎭古城으로 옮겼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8)
    〔原註〕 丁謙이 말하기를, “(현도군의) 治所를 고구려의 서북으로 옮긴 것은 昭帝 5年(기원전 82)이며, 바로 주몽이 나라를 건국한 이후 변경으로 쫓아 물리친 때이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9)
    옥저는 다시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다: 漢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樂浪郡과 眞番郡, 臨屯郡을 설치하고, 그 다음해에 玄菟郡을 설치하였다. 그 후 기원전 82년에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하고, 전자의 領縣은 낙랑군에, 후자의 領縣은 현도군에 예속시켰다. 기원전 75년경에 고구려가 현도군을 공격하자, 한은 그 치소를 遼寧省 新濱縣 永陵鎭으로 옮기면서 옛 임둔군 지역의 관할권을 낙랑군에게 넘겨주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옥저는 낙랑군에 예속되었던 것이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0)
    단단대령: 單單大領에서 領은 嶺과 같은 의미이다. 濊傳에는 單單大山領으로 나온다. 그 위치에 대하여 鐵嶺, 薛罕嶺, 黃草嶺, 大關嶺, 北大峯山 혹은 철령에서 대관령에 이르는 산줄기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단단대령은 평양에서 함흥 사이에 가로 놓인 峻嶺을 가리키는 것인데, 현재 鐵嶺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1)
    동부도위: 『후한서』, 「동이열전」 예전에 “昭帝 始元 5년(기원전 82)에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고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현도를 다시 구려가 있는 곳으로 옮기니, 單單大領으로부터 동쪽의 沃沮와 濊貊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후에 영토가 넓고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겨 다시 영동의 7현을 분할하여 낙랑 동부도위를 두었다.”고 전한다. 옥저를 낙랑군에 예속시킨 후 얼마 있다가 한이 단단대령 동쪽에 동부도위를 설치하고, 옥저 등을 거기에 속하게 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部都尉는 漢代에 주로 邊郡에 설치한 관직으로서 군사 및 경찰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종래에 동부도위가 낙랑군의 영현 가운데 일부를 分治하였다고 이해하였으나(권오중, 2004) 근래에 부도위는 근본적으로 治民하지 않고 군사 방어를 담당하였을 뿐이라는 견해(김병준, 2013)가 제기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2)
    〔原註〕 元本·吳本·毛本·官本에는 ‘置’가 ‘治’로 쓰여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3)
    불내성: 『한서』, 「지리지」 낙랑군조에서는 不而라고 하였고, 『삼국지』, 「관구검전」과 「위서」, 「동이전」 예전에서는 不耐라고 기술하였다. 관구검전에 魏軍이 고구려 東川王을 뒤쫓아 不耐에 이르러 紀功碑를 세웠다고 전하나 현재까지 그것이 발견되지 않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7년 가을 9월조에 不耐縣과 華麗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騎兵을 이끌고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자, 貊國의 우두머리가 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고 전한다. 예전에 “(正始 8년에 不耐侯가 魏의) 궁궐에 이르러 조공하자, 조서를 내려 다시 不耐濊王으로 제수하였다.”고 전한다. 불이현, 즉 불내성은 북한의 강원도 안변 또는 통천으로 비정하는 설(이병도, 1976)과 영흥으로 비정하는 설(池內宏, 1951; 이현혜, 2010)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4)
    〔原註〕 漢書 地理志에서, “玄菟郡의 不而가 東部都尉 치소이다. 一統志에서는 ‘不耐의 옛 성이 咸興府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隋書 外國傳에서는 新羅가 沃沮, 不而, 韓, 濊의 땅을 차지했다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기를, ‘不耐城은 지금의 江原道 江陵府이고, 본래 濊王의 도읍이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5)
    별도로 영동의 7현을 통괄하게 하였는데: 동부도위가 관할한 領東 7縣은 東暆·不而·華麗·蠶台·邪頭昧·前莫·夫租縣이며, 이른바 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簿 木牘에도 7현이 모두 나온다. 『漢書』 권6 武帝紀 元封 3년(기원전 108)조의 臣瓚註에서 인용한 『武陵書』에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이며, 장안으로부터 거리가 6,128리이고, 15縣이 있다.”고 전한다. 東暆縣은 일반적으로 옛 함경남도 덕원 일대로 비정된다. 이병도는 7현 가운데 화려현은 함경남도 영흥, 부조현은 함경남도 함흥, 사두매현은 함남 문천(현재 북한의 강원도 문천시) 혹은 강원도 고성에 위치를 비정하였다(이병도, 1976). 그러나 영흥 일대를 불내(이)현의 치소로 보는 입장도 있다(이현혜, 2010).바로가기
  • 번역주 026)
    이때 옥저[의 읍락도] 모두 현이 되었다: 여기서 옥저는 夫租縣을 가리킨다. 이 무렵 낙랑군의 부조현에 대한 통치와 관련하여 ‘夫租薉君’銘 銀印이 주목된다. 이것은 평양시 정백동 1호 목곽묘에서 철기, 청동기 등의 토착적인 유물과 함께 출토되었다. 은으로 주물하여 만들었고, 인장면에는 예서체의 4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무덤의 연대는 기원전 1세기 후엽으로 편년된다. 정백동 2호 무덤에서도 高常賢印과 夫租長印이 새겨진 은인과 동인이 출토되었다. 부조예는 함경도 함흥 지역에 있던 정치세력으로 기원전 82년 낙랑군이 동부도위를 설치할 때 영동7현의 하나로 소속되었고, 30년에 동부도위가 폐지되면서 侯國이 되었다. 평양에서 부조의 지배세력 무덤이 발견된 것은 기원전 1세기 무렵에 한이 동부도위 소속의 토착세력 수장을 낙랑의 치소 지역으로 이주시켜 관위를 부여하고 회유하여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거나,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기록된 辰韓 右渠帥 廉斯鑡와 같이 선진 지역인 낙랑에 자발적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출신지와의 교역 등을 담당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原註〕 『滿洲源流考』 卷9에서 이르기를, “前漢과 後漢, 魏, 晉 때에 東方에 있던 나라는 夫餘, 挹婁, 三韓이다. 그 邑落은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있었다. 또한 沃沮, 濊 등의 국명이 있었다. 史傳을 살펴보니, 沃沮는 동쪽에 있는데, 동쪽으로 큰 바다에 접해 있고, 북쪽으로 挹婁, 夫餘와 잇닿아 있었다고 한다. 또한 北沃沮와 南沃沮가 있었는데, 모두 山林에 흩어져 거주하였으며, 大君長은 없었다고 하였다. 이른바 單單大嶺이라는 것은 곧 長白山(백두산)을 이르는 것이다. 單單은 滿洲語 珊延과 음이 거의 비슷하다. 지금 장백산 부근에서 동쪽으로 해변에 이르기까지, 북쪽으로 烏拉(우라), 흑룡강(黑龍江)에 잇닿아 있고, 서쪽으로 俄羅斯(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숲과 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어, 그 사이에 서로 면면히 이어져 있다. 魏의 毌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고 옥저를 거쳐 천여 리에 이르러 肅愼의 남쪽 경계에 도달하였으니, 곧 沃沮는 실은 지금의 窩集을 이른다. 濊 땅의 君長들은 또한 모두 읍락을 분할하여 다스렸고, 오로지 어느 한 나라에게만 복속되는 바가 없었다. 부여, 읍루 역시 모두 그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의 옛 땅을 상고해보건대, 鳳凰城으로부터 모두 바다를 통해 朝鮮에 이르렀다. 三國 이후에서 隋 때에는 高麗(고구려)에 복속되었고, 唐 때에는 渤海에 복속되었다.”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기를, “武帝가 설치한 玄菟郡만이 오직 太守가 다스렸을 뿐이고, 沃沮縣은 沃沮國의 땅이었으며, 그 나머지 7縣은 모두 濊國의 경계 내에 있었다. 이 때문에 范蔚宗(范曄)이 ‘單單大嶺之東’의 한 문장을 생략하고, 이것을 濊國傳에다 옮겨 삽입하였는데, 그 위치가 비교적 부합하는 것이다. 單單大領은 후대에 單大領으로 표기하였는데, 지금의 강원도 중간에 있는 淮陽郡의 동쪽이며, 欱嶺, 朱暉嶺, 大關嶺이라고 부르는 것이 모두 옛날 單單大領을 이른다. 不耐城은 漢書 地理志에는 ‘不而’로 기재되어 있다. 領東 7縣은 不而, 吞列, 東暆, 蠶台, 華麗, 邪頭昧, 前莫이다. 대개 前漢의 樂浪郡 소속이 모두 25縣인데, 후대의 책에서는 단지 18縣 뿐이라고 전하고 있으니, 곧 東暆를 제외하고 不而 등 6현은 모두 東部都尉에서 옛날에 다스린 바 있었는데, 확실하다고 보인다.”고 하였다. 沈家本에 이르기를, “漢志(『漢書』, 「地理志」)에는 沃沮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 元始 때에 이미 폐지되었을 수 있다. 아울러 蠶台,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 및 不而, 沃沮는 곧 이른바 領東 7현이라고 이른다.”바로가기
  • 번역주 027)
    〔原註〕 光武는 응당히 『후한서(范書)』를 따라 建武로 표기하여야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28)
    이로 말미암아 [동부]도위를 혁파하였다: 25년경 낙랑 지역의 원주민(土人)인 王調가 낙랑군 태수 劉憲을 죽이고 스스로 大將軍樂浪太守라고 칭하고, 이후 5년여에 걸쳐 낙랑 지역을 지배하였다. 建武 6년(30)에 후한의 光武帝가 낙랑태수 王遵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왕조를 평정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왕준이 요동에 이르자 王閎과 郡 決曹史 楊邑 등이 공모하여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하여 후한이 낙랑군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하게 되었을 것이다. 후한 광무제는 후한 건국 이후 변방지역에서 재지세력의 저항이 심해지자, 민심을 수습하고, 지배체제를 재확립하기 위하여 29년에 大赦免令을 반포하면서 동시에 지방기구의 축소정책을 시행하였는데, 후한은 낙랑군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하고 이와 같은 정책에 따라 곧바로 동부도위를 철폐하였던 것이다.
    〔原註〕 『후한서(范書)』에서 이르기를, “建武 6年에 都尉官을 폐지하고, 마침내 領東의 땅을 버렸다.”고 하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9)
    〔原註〕 『후한서』, 「東夷傳」에 이르기를, “광무제 때에 이르러 都尉 관직을 폐지하고 그 뒤에 그 渠帥를 모두 봉하여 沃沮侯로 삼았다.”고 하였다. 沈欽韓이 말하기를, “沃沮는 魏代 이래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百濟가 나라를 그곳에 세우고 沃沮는 없어졌다.” 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0)
    화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화려현이 불내현과 함께 신라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고 전한다. 이병도는 옛 영흥군 순녕면에서 발견된 漢代의 土城址인 一名 本宮土城(소라리토성)이 낙랑군 화려현의 치소로 추정된다고 하였다(이병도, 1976). 그렇지만 소라리토성을 불이(내)현과 동부도위의 치소로 보는 설도 강하다(池內宏, 1951; 문안식, 2008; 이현혜, 2010).바로가기
  • 번역주 031)
    후국: 『後漢書』에서는 “建武 6년(30)에 도위관직을 폐지하고, 마침내 영동의 땅을 버리고, 모두 그 渠帥를 봉하여 縣侯로 삼았는데, [이들은 모두] 歲時마다 와서 朝賀하였다.”고 전하고, 『삼국지』 예전에서는 “후에 도위를 폐지하고 그 渠帥를 봉하여 侯로 삼았는데, 지금의 不耐濊(侯)가 모두 그 종족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 구절은 王調의 반란 이후 낙랑군의 영동 7현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후한은 군현을 통한 지배를 포기하고 각 현의 渠帥 가운데 유력한 자를 縣侯로 삼은 뒤, 이들에게 기존에 현이 가졌던 현 내 읍락에 대한 통할권을 명목상으로 부여해주고 이들을 통제하려고 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오영찬, 2006).
    〔原註〕 漢書 地理志에서, “樂浪郡 華麗縣이다.”라고 하였다. 王先謙이 말하기를, “續志(『후한서』, 「지리지」)에서 後漢에서 폐지한 것이라고 하였다. 「동이전」에서 元初 5년에 고구려왕 宮이 玄菟를 치고 華麗城을 공격하였다고 하여 縣이 본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洪亮吉이 이르기를, “이는 아마 그 옛 城일 것이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2)
    이적이 다시 서로 공격하여 싸웠는데: 불내, 화려, 옥저 등의 후국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33)
    불내예후: 濊傳에 “正始 6년(245)에 樂浪太守 劉茂와 帶方太守 弓遵이 領東의 濊가 구려에 예속되었다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치니, 不耐濊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그 8년(247)에 (魏나라의) 궁궐에 이르러 조공하자, 조서를 내려 다시 不耐濊王으로 제수하였다.”고 전한다. 이를 근거로 하여 30년 이후부터 3세기 중반 사이에 不耐의 渠帥를 不耐濊侯로 삼았음을 엿볼 수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34)
    공조와 주부 등 ~ 맡고 있다: 漢代에 중앙에서 郡에는 장관인 太守와 副官인 丞을 파견하였고, 邊郡에는 長史, 태수의 보좌관겸 감시역으로 都尉를 여러 명 파견하였다. 태수는 현지에서 지역 출신자들을 屬吏를 임용할 수 있었다. 태수부는 諸曹로 나누어졌는데, 인사를 담당하는 功曹, 속리의 규율을 담당하는 五官掾, 속현의 감찰을 담당하는 督郵 등이 있었고, 諸曹의 문서를 담당하는 主簿나 主記室史가 있었다. 그리고 제조는 掾·史·書佐로 나누어져 있었다. 縣에는 중앙에서 縣令 또는 縣長, 그 아래에 佐官으로 升·尉를 파견하였고, 독우가 없는 것을 제외하고 하급 관직은 군태수부와 같았다. 이 기록은 3세기 중반까지 불내 지역에서 漢代 군현지배시기에 설치하였던 속리제도가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로 이해할 수 있다(嚴耕望, 1974; 池田雄一, 2002; 오영찬, 2006; 이성규, 2006). 바로가기
  • 번역주 035)
    현국 때의 제도: 漢代에 三老는 地方民의 敎化를 맡은 鄕官으로 고령자이면서 경제적 기반을 가진 재지 내 父老를 임명하였다. 부로 중 縣과 鄕에서 선출한 대표자를 縣三老, 鄕三老라고 불렀다. 漢은 재지사회의 지도적 존재를 삼로로 임명하여 그들의 의견을 현 통치에 적극 반영함으로써 재지 지배세력과 민의 이반을 방지하고 통치질서의 지속적인 안정을 꾀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동옥저에서는 계층사회의 분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여전히 공동체적인 규제가 읍락사회에 강하게 관철되고 있었기 때문에 읍락의 거수층은 읍락민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강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의 입장에서 군현지배를 원활하게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읍락 거수층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으므로 이들에게 삼로직을 수여하여 縣政에 참여하게 하였고, 이러한 전통이 3세기 중반까지 계속 이어져서 옥저의 여러 읍락 거수들이 三老를 자칭하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오영찬, 2006). 바로가기
  • 번역주 036)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4년(56) 가을 7월조에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영토를 획득하여 城邑으로 삼았다. (이때) 영토를 개척하여 동쪽으로 滄海(동해)에, 남쪽으로 薩水(청천강)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후한은 30년 무렵에 각지의 縣을 줄이고 관리를 대폭 감원하는 한편, 郡國의 都尉官을 혁파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쳐 단단대령 동쪽의 7현을 관장하던 낙랑군 동부도위가 폐지되어 이 지역에 대한 후한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후한은 동부도위 폐지 이후 이 지역의 토착세력인 거수를 縣侯로 삼아 간접적인 통제를 시도하였지만, 곧바로 불내와 옥저를 비롯한 縣國 사이의 분쟁으로 대혼란이 초래되었다. 고구려 태조왕은 후한의 유화적인 대외정책으로 인해 군사적 대응의 가능성이 한층 더 낮아지고, 영동 7현 지역에 대한 후한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자, 제2현도군과의 교섭을 단절한 다음, 동해안 방면으로 진출하여 동옥저를 정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구려 태조왕은 후한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는 한편, 동옥저 진출을 위해서 환인에서 국내로 遷都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여호규, 2005). 바로가기
  • 번역주 037)
    사자: 使者는 고구려 官階의 하나이다. 고구려 초기에 왕뿐만 아니라 大加들도 사자란 관계를 둘 수 있었다. 이 자료는 고구려가 때에 따라 정복지역 소국 또는 읍락의 首長이나 유력자를 사자로 임명하여 조세수취를 담당하게 하여 간접 지배하였음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바로가기
  • 번역주 038)
    〔原註〕 宋本에서는 ‘主’가 ‘使’로 쓰여 있다. 『후한서(범서)』에서는 ‘使’로 표기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9)
    대가: 고구려의 왕족 및 각 부의 부장과 부내부장을 大加라고 불렀다(노태돈, 1999).바로가기
  • 번역주 040)
    〔原註〕 北宋本에서는 ‘大’가 ‘犬’으로 표기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41)
    또 대가로 하여금 ~ 통괄토록 하였다: 大加에 해당하는 각 部(那部)의 지배세력이 계루부 왕권의 통제 아래 각 부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동옥저를 정복하였고, 그 대가로 조세 수취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분배받았으며, 이에 근거하여 3세기 중반 이전에 고구려가 5부를 매개로 지방지배를 실현하였다고 이해한 견해(여호규, 2014)가 제기되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42)
    맥포: 『후한서』에서는 ‘貂布’라고 기술하였다. 종래에 이에 근거하여 ‘貂布’를 ‘담비가죽과 麻織物’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였다(李成市, 1998). 이에 반해 동옥저전에 전하는 ‘貊布’란 표기를 그대로 인정하여 이것을 ‘貊(族)의 麻織物’로 해석한 다음, 예족이 다수인 옥저에 거주하던 맥계 주민들이 생산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김창석, 2013).바로가기
  • 번역주 043)
    〔原註〕 『후한서(범서)』에서는 ‘責其租稅貂布’라고 쓰여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44)
    〔原註〕 毛本에는 ‘美’가 ‘姜’으로 쓰여 있는데, 잘못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45)
    구려는 그 [지역 인물] 중에 대인을 뽑아 ~ 대우하였다: 『후한서』에서는 “句驪는 다시 그(지역 인물) 중에 大人을 뽑아 使者로 삼고 (토착 거수와) 서로 함께 다스리게 하였다. 그 조세로서 담비 가죽, 생선, 소금, 해초류를 부과하였고, 미녀를 징발하여 노비나 첩으로 삼았다(句驪復置其中大人遂爲使者 以相監領 貴[責]其租稅 貂布魚鹽 海中食物 發美女爲婢妾焉).”라고 전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46)
    그들을 마치 노복처럼 대우하였다: 『후한서』에는 없는 내용이다. 종래에 이에 근거하여 고구려가 동옥저를 정복하여 城邑으로 만들고, 그들을 집단예민화하여 지배하였다고 이해하였다(노태돈, 1999).바로가기
  • 번역주 047)
    오곡: 五穀은 쌀, 보리, 콩, 조, 기장을 가리킨다. 고려 후기에 李奎報가 지은 『東明王篇』에 夫餘 解夫婁王의 신하인 阿蘭弗이 동해변의 迦葉原이 오곡 재배에 적당한 기름진 땅이니, 그곳으로 遷都하기를 건의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옥저 지역의 농경 상황을 반영한 자료로서 주목된다(김창석, 2013).바로가기
  • 번역주 048)
    창을 손에 쥐고 ~ 능하다: 『삼국지』 예전에서는 “(동예인들이) 길이 3丈이나 되는 창을 만들어 항상 여러 사람이 함께 (그것을) 손에 쥐고 걷거나 뛰면서 싸우는 데에 능하였다(作矛長三丈, 或數人共持之, 能步戰).”고 기술하였다. 동옥저와 동예에서 여러 사람이 3丈의 긴 창을 쥐고 一列橫隊로 전진하며 적을 격파하는 전법, 즉 이른바 步戰에 의존하는 전투를 하였음을 알려준다.바로가기
  • 번역주 049)
    그 혼인하는 법속은 ~ 신랑 집으로 되돌아온다: 민며느리제(豫婦制)의 혼인풍습을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童養婚(童養媳)이라고 불렀다. 고려 및 조선시대를 거쳐 20세기 초까지도 서북지방 일부에서 이러한 혼인풍습이 남아 있었다. 滿洲族 사이에서도 20세기까지 이와 유사한 혼인풍습이 존재하였고, 명청시대 徽州에서 童養婚의 혼인풍습이 보편적이었다고 알려졌다.
    〔原註〕 梁玉繩이 말하기를, “이것은 지금의 민며느리 제도로 본래 오랑캐의 풍속이다.”라고 하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50)
    〔原註〕 『후한서』에는 ‘皆’는 ‘先’으로 쓰여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51)
    장례를 치를 때에 ~ 놓아두었다: 이와 같은 내용의 장례풍습을 複葬法의 일종인 洗骨葬이라고 부른다. 세골장은 옛날부터 동아시아 일대에서 널리 행해졌다. 石棺墓와 甕棺墓 같은 묘제에서도 그 내부 구조상으로 보아 일부 세골장이 행해졌음을 엿볼 수 있다. 세골장은 20세기까지 서·남해안 및 도서지방, 일본 오키나와 등에 草墳이라는 형태로 존재하였다. 초분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平地葬, 平臺葬, 樹葬, 假埋葬의 4유형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라도 해안지역에서는 시체를 넣은 임시초옥, 즉 초분을 만들고, 대개 100일 또는 3년 후에 초분을 열어 洗骨한다고 한다(이두현, 1974; 박만규·임영진· 나경수·栗本吉基, 2000). 그런데 시체를 가매장했다가 육탈시킨 후 2차로 매장하는 세골장은 옥저의 문화 영역에서는 아직까지 뚜렷한 발견 사례가 없다. 함경남도 지역에서는 대체로 토광묘나 목관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확인되었고, 영흥의 소라리유적에서는 한식목곽묘가 2기 발굴되기도 했다. 또 연해주 지역에서는 석관묘가 확인되었지만, 多人二次葬과는 다른 형태이다. 일제강점기에 연길 지역의 석관묘(고인돌)에서 다수의 성인과 소아 인골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손진태는 고인돌을 한쪽 면이 개방되어 있는 가족 공동묘로 보았고, 옥저의 장속과 연관지어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옥저의 주변지역인 길림성, 흑룡강성 등지에서는 多次多人葬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흑룡강성 泰來縣의 平洋遺蹟은 춘추~전한 시기에 해당하는 무덤유적으로 塼廠區域과 戰鬪區域으로 구분된다. 전창구역의 인골이 있는 묘는 단인장 34기, 합장묘 45기(3인 이상 합장묘가 30기)인데, 합장묘는 일차장한 것, 이차장과 일차장을 합장한 것, 모두 이차장으로 합장한 것으로 구분된다. 그중 140호는 묘광이 길이 350cm, 너비 256cm, 깊이 176cm이고, 목곽은 길이 230cm, 너비 130cm, 높이 75cm인 장방형 목곽묘인데 10구의 이차장 인골이 확인되었다. 133호는 13구의 인골(성인 여성2, 성인 남성 5, 성인불명 3, 영소아 3)을, 111호는 길이 252cm, 너비 200cm, 깊이 93cm의 묘광을 파고, 45개체(성인 남성 19, 성인 여성 10, 성인 불명 2, 미성년 이하 14)의 이차장 인골을 4층으로 배치하였다. 이곳의 11기 무덤은 육탈을 위해 가매장했던 빈 무덤인데, 전투구역에서도 같은 빈 무덤이 확인되었다. 흑룡강성 富裕縣 小登科유적은 2~5인의 이차장 인골을 합장했고, 내몽골 陳巴爾虎旗의 完工유적 목곽묘(ⅠA, ⅠB)는 일차장과 이차장 인골을 합장한 무덤으로 30인 정도(남자 14, 여자 11, 소아 5)의 인골이 확인되었다. 이들 다인장 무덤은 묘형이 다양하고,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어 추가장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출입구가 있는 옥저의 무덤과는 차이가 있다. 다인다차의 장례습속은 한서 2기문화의 형가점식 무덤군과 요령성 및 길림성의 대석개묘에서도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청동기시대부터 초기철기시대에 걸쳐 중국 동북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된 장례습속이라 할 수 있다(黑龍江省文物考古硏究所, 1990; 潘玲·林沄, 2002; 이종수, 2012).바로가기
  • 번역주 052)
    또한 질솥이 있는데 ~ 매달아두었다: 여기에 전하는 동옥저의 葬俗은 개별 가족의 조상숭배사상의 강화과정 속에서 죽은 조상에 대한 상시적인 공양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목곽은 일종의 가족공동묘를 가리키고, 木像은 일종의 肖像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질솥 속에 담긴 쌀은 죽은 자를 위한 糧食의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송호정, 2008). 바로가기
  • 번역주 053)
    관구검: 毌丘儉은 중국 삼국시대 魏의 武將이다. 235~246년 사이에 幽州刺史에 임명되어 요동 방면의 경영을 담당하였다. 고구려 정벌 후 預州刺史가 되었으며, 25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피살되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54)
    관구검이 구려를 토벌하자: 毌丘儉이 고구려를 정벌한 시기에 대해 기록마다 차이가 난다. 『三國志』, 「魏書」 齊王芳紀에서 관구검이 正始 7년(246)에 고구려를 정벌하였다고 하였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역시 동천왕 20년(246) 가을 8월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고 전한다. 반면에 『三國志』, 「관구검전」에서는 正始中에 1차 정벌을 단행하고, 정시 6년(245)에 2차로 정벌한 것으로, 「毌丘儉紀功碑」에서는 정시 6년에 고구려를 정벌한 것으로 전하며,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정시 5년(244)에 고구려를 정벌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일찍이 池內宏은 「관구검기공비」와 「관구검전」에 근거하여 관구검 자신의 1차 정벌은 정시 5년(244)에 시작하여 정시 6년(245) 5월에 종료되었고, 다시 그 다음 해에 王頎가 2차로 고구려를 정벌하였다고 이해한 바 있다(池內宏, 1928; 1951). 바로가기
  • 번역주 055)
    궁: 고구려전에 伊夷模(산상왕)가 아들이 없어 灌奴部의 여자와 私通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바로 位宮(동천왕)인데, 그의 증조인 宮(태조왕)과 마찬가지로 동천왕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사람)을 보았기 때문에 位宮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동천왕의 이름은 憂位居이고, 어릴 적의 이름은 郊彘였으며, 어머니는 酒桶村 사람이었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56)
    치구루: 『삼국지』, 「관구검전」에서는 宮(동천왕)이 買溝로 달아났다(宮遂奔買溝)고 하였다. 買溝는 買溝婁에서 婁가 脫字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置溝婁는 고구려 중기 동북 경계에 해당하는 柵城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구려에서 溝婁는 城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置와 柵은 음운상 통한다고 이해한 것이다. 책성은 두만강 하류의 琿春에 위치한 溫特赫部城이나 薩其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동명성왕 10년(기원전 28)에 왕이 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고 전하며, 태조왕 46년(98)에 왕이 柵城을 순행하였고, 그로부터 4년 뒤인 태조왕 50년(102)에 사신을 파견하여 책성의 백성을 按撫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여러 자료들을 통하여 이른 시기에 고구려가 두만강 유역에 위치한 置溝婁, 즉 북옥저를 고구려에 복속시켰음을 엿볼 수 있다.
    285년에 선비족 慕容廆가 부여를 공격하자, 부여는 晉의 東夷校尉府에 구원을 요청하고 선비족에 대항하였으나 실패하여 부여왕 依慮가 자살하였다. 이때 왕의 자제 등 부여의 핵심 지배층 다수가 동쪽의 옥저로 피난하였다. 여기서 옥저는 일반적으로 북옥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286년에 의려를 이어 부여의 왕위에 오른 依羅는 진의 동위교위부의 지원을 받아 선비족 모용외의 군대를 격파하고 復國하였다. 복국 이후에 옥저로 피난하여 왔던 지배층 가운데 일부가 다시 옛 부여 지역으로 되돌아갔고, 일부는 옥저 지역에 그대로 남아 거주하면서 부여를 칭하였는데, 이를 흔히 東夫餘라고 부른다. 동부여의 王城을 광개토왕릉비에서 ‘餘城’이라고 표기하였는데, 대체로 ‘餘城’이 바로 柵城이었다고 보고 있다(노태돈, 1989; 1999). 한편 買溝婁는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동부여의 味九婁와 동일한 지명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6), 광개토왕릉비의 守墓人烟戶 조항에 보이는 買句余와 동일한 지명으로 보는 견해(여호규, 2008)가 제기되었다. 대체로 置溝婁와 買溝婁는 같은 곳을 가리키는 지명으로서 柵城을 이른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일부 학자는 치구루는 책성을 가리키고 매구루(미구루)는 치구루와 별개의 지명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노태돈, 1989; 1999). 현재 학계에서는 치구루를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책성으로 비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북옥저의 영역은 두만강 하류 일대와 함경북도 해안지대를 망라하는 범위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이병도, 1976; 이현혜, 1997; 이현혜, 2010; 김미경, 2000).
    〔原註〕 宋本에는 ‘漊’를 ‘婁’로 썼다. 丁謙이 말하기를, “溝漊는 城을 가리키며, ‘오히려 置城’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趙一淸이 말하기를, “毋丘儉傳에 ‘置’를 ‘買’라고 썼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57)
    남옥저로부터 거리가 800여 리였다: 『삼국지』, 「관구검전」에는 “(魏軍이) 沃沮를 지나 천여 리를 추격하여 肅愼의 남계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이 기록에서 보듯이 남옥저는 함흥 일대에 위치한 夫租의 후신인 본래의 옥저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이현혜, 2010). 반면에 중국 학계에서는 한국 학계와 다른 견해를 제기하였다. 匡瑜는 牧丹江, 綏芬河,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 즉 신석기와 청동기, 철기시대의 문화를 다 포함하여 북옥저의 문화로 보았고, 그 분포 범위는 북으로는 興凱湖로부터 남으로는 두만강까지, 동으로는 동해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張廣才嶺東側까지인데, 이 지방의 원시문화를 북옥저문화라고 부르거나 전형적인 유적을 들어 團結文化라고 불렀다. 그리고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 즉 지금의 백두산 동쪽인 북한의 함경북도이고, 옥저와 800리인 지금의 두만강 서쪽 백두산 북쪽은 북옥저라고 보았다(匡瑜, 1982). 張太湘은 장광재령 동쪽부터 동해까지인 목단강, 수분하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된 단결문화를 역사상 漢代 옥저문화라고 인정한 다음. 그 문화의 분포 범위는 동쪽으로는 동해까지이고, 서쪽으로는 장광재령이며, 남쪽으로는 두만강 하류까지이고, 북으로는 흥개호, 목단강, 穆稜河 下流까지라고 보았다(張太湘, 1982). 林澐은 목단강 유역, 수분하 유역, 두만강 兩岸 및 러시아 연해주의 원시문화를 상세하게 분석한 기초 위에서 두만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柳庭洞類型과 그보다도 더 이른 시기의 유적, 목단강 유역의 鶯歌嶺 상층 유형과 東康 유형을 단결문화 범주에서 제외시켜, 두만강 유역에서 흥개호,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일대의 단결문화를 옥저문화로 규정하였다(林澐, 1985). 李强은 동옥저의 강역은 대체로 동으로 한반도 북부 및 러시아 연해주지구의 동해까지이고, 西界北部는 老爺嶺이고, 서계 남부는 북한 양강도 경내의 개마고원까지이며, 남쪽 경계는 함경북도지간의 마천령을 넘지 않고, 북쪽으로는 흥개호를 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李强, 1986). 干志秋, 孫秀仁은 남옥저의 범위를 남계는 지금의 북한 함경남도, 서쪽 경계는 지금의 백두산 및 백두산이 남쪽으로 뻗은 북한의 낭림산맥 동쪽까지, 동쪽으로는 동해까지이고, 북옥저의 범위는 지금의 훈춘 전역을 비롯하여 그 북쪽으로 老爺嶺 동쪽, 수분하 유역 및 흥개호 남쪽까지라고 이해하였다(干志秋·孫秀仁, 1987). 이 밖에 정영진은 옥저의 강역은 북으로는 흥개호 남쪽까지이고, 서부북계는 老爺嶺까지이며, 남부는 蓋馬高原東摩天嶺까지, 동쪽으로는 북한 동해안 북부와 러시아 南濱海地區의 동해까지이고, 두만강을 경계로 하여 남옥저와 북옥저가 나뉘었다고 보았다(정영진, 1990).〔原註〕 丁謙이 말하기를, “땅을 보면 마땅히 圖門江 남북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58)
    그들의 풍속은 남과 북이 모두 같으며: 초기철기시대에 함흥 일대의 부조, 즉 옥저는 세형동검문화권에 속하였고, 두만강 유역의 읍락들은 團結-크로우노프카문화에 속하였지만, 1세기 말 이래 이들 두 지역이 모두 고구려의 통제하에 들어가 지배를 받게 되면서 양 지역 사이에 활발한 인적, 물적 교류가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양 지역은 서로 간에 문화적으로 비슷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현혜, 2010).
    〔原註〕 『후한서』에서는 그 풍속은 모두 남쪽과 같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59)
    〔原註〕 『후한서』에서는 남쪽으로 읍루와 잇닿아 있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60)
    왕기: 王頎는 字는 孔碩이며 東萊 출신이다. 238년에 현도군 태수에 임명되었고, 正始 年間에 관구검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10여 년 후인 263年에 天水太守로서 魏의 蜀 정벌에 참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61)
    동쪽의 한 섬: 종래에 옥저 동쪽의 바다 가운데 위치한 섬의 실체를 울릉도라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59; 池內宏, 1943).바로가기
  • 번역주 062)
    남자가 없었다: 중국의 주변 민족에 대하여 서술한 문헌에 女人國 관련 기사가 가끔 보이고 있다. 여성만이 존재한 국가라고 쓰여 있지만, 실제상으로는 巫女的인 성격의 女王이 정치를 행하는 나라를 이와 같이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原註〕 『후한서』에서 이르기를, “혹은 그 나라에 神井이 있어 들여다보면 자식을 낳는다고 전한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63)
    〔原註〕 『후한서』에는 ‘其形如中人衣’이라고 쓰여 있고, ‘國’字는 없다.바로가기
  • 번역주 064)
    〔原註〕 『후한서』에는 ‘項’을 ‘頂’으로 썼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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