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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의 문화와 제도

고구려는 요동[군]의 동쪽 천 리에 있다. 남쪽으로 조선·예맥과, 동쪽으로 옥저와, 북쪽으로 부여와 접한다. 환도 아래에 도읍하였다주 001
번역주 001)
〔原註〕 毛本과 局本에서는 ‘於’가 ‘與’로 적혀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丁謙(淸)이 말하길, “高句麗國에는 둘이 있었다. 그 하나는 ‘옛 고구려’로 지금 奉天省 城 동북쪽 英額邊門 바깥의 渾河가 발원하는 곳에 있었다. 渾河는 즉 「地理志」와 『水經注』에서 말한 小遼河이다. 다른 하나는 ‘새 고구려’로 지금 朝鮮의 북쪽 지경인 평안도 성천군(현재 평양의 북동쪽임) 땅에 있었다. 陳壽는 두 나라의 원류를 다 알지 못하여 이들을 뒤섞어 하나로 적었으니, 예컨대 (고구려)전 앞머리의 ‘遼東의 동쪽 천 리 되는 곳에 있고 남쪽으로는 朝鮮·濊貊과 접한다.’ 등의 말은 옛 고구려국의 지경을 언급한 것이고, ‘환도 아래에 도읍했다.’는 말은 즉 새 고구려국의 지경을 언급한 것이다. 이 책(『三國志』)이 이미 오류를 범한 데다, 范蔚宗(范曄)은 『後漢書』에서 이를 답습하였다. 다만 范曄은 本傳(『後漢書』, 「東夷列傳」, 〈高句麗〉)의 후반부에서 小水貊傳을 나누어 적고, 아울러 王莽이 뒤에 高句麗와 中國이 교섭한 여러 사실들을 모두 小水貊傳에 넣었으니, 그릇되고 또한 그릇되었도다. 내(盧弼)가 보건대, 丁謙의 설이 진실로 변별이 있다. 그러나 丸都 아래에 도읍하였으니, 新高句麗國의 지경이 되었다. 新高句麗는 지금의 朝鮮 북쪽 지경인 평안도 성천군 땅이라 한 것은 여전히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胡三省(元)이 이르길, ‘『新唐書』(「地理志」)에서 鴨淥江口로부터 배를 타고 100여 리를 간 뒤, 작은 배로 물길을 거스르며, 동북쪽으로 총 530리를 가면 丸都城에 도착한다.’ 하였으니, 이에 근거하면 즉 丸都城은 압록강변에 있었다. 평안도 성천군에 있는 것은 平壤城이고 이는 대동강의 북쪽에 있었으니, 압록강이 아니다. 근래 사람인 王國維는 『觀堂集林』 卷16 〈魏毌丘儉丸都山紀功刻石跋〉에서 ‘魏나라 毌丘儉이 丸都山에 공을 새긴 殘石을 (淸나라) 光緖 丙午年(光緖 3년, 1877)에 署 奉天輯安縣事 吳 大令(縣令의 경칭) 光國(→吳光國)이 縣의 서북쪽 90리 되는 곳의 板石嶺에서 도로를 뚫다 발견하였다.’ 吳大令(→吳光國)이 [이 殘石에 대해] 발문하여, ‘扳石嶺(板石嶺의 오기)은 높이 6백여 丈으로 [고개가 험해] 수레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즉 옛날의 丸都山으로 보인다.’고 했다. 또한 근래 사람인 吳其昌의 〈丸都山紀功刊石跋尾〉[北平도서관 월간 제3권 제3호에 보인다.]에서는 ‘이 각석은 집안현 扳石嶺(板石嶺의 오기)에서 출토되었는데, 扳石嶺은 즉 丸都山이다. 高句驪의 도읍인 丸都城은 즉 丸都山 아래에 있었다. 輯安縣은 바로 압록강 상류의 북쪽 연안에 있고, 漢·魏나라 때 西安平州는 지금의 安東(중국 요령성 丹東) 조금 북쪽에 있었다. 玄菟郡의 치소는 지금의 鐵嶺(요령성 鐵嶺市·撫順의 북쪽임) 좌우에 있었다. 位宮(→高句麗 東川王)이 보기(步騎) 2만을 이끌고 진군하여 沸流水 가에서 싸웠으니, 이는 丸都城이 있는 沸流水 상류로부터 순류를 타고 내려와 西安平州를 침범한 것이다. 지금의 輯安으로부터 지금의 安東에 이르기까지 바로 압록강의 순류를 타고 내려오게 되니, 즉 沸水(沸流水의 오기)의 지리적 위치가 압록강의 지리적 위치와 꼭 맞다. 毌丘儉이 玄菟郡로부터 곧바로 丸都로 달려가 그의 뒷길을 끊자, 位宮이 회군하여 맞서 싸웠다. 毌丘儉이 마침내 승세를 타고 丸都山을 넘어 丸都城을 도륙했다. 후대 사람들이 沸流水를 대동강으로 오해하여 여러 사서의 「동이전」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르길, 劉宋(남북조시대 劉裕의 송나라, 420~479) 이전 고구려국의 도읍은 지금의 輯安 부근에 있었고, 지금 조선의 평양에 있지는 않았다. 옛사람들이 浿水를 조선의 대동강으로 여겼으니, 이 때문에 丸都와 王險 등의 여러 성이 지금의 평양[지금의 평양은 정남쪽으로 대동강에 임해 있다.]이고, 마치 衛滿과 朱蒙 이래로 평양에 터를 잡고 머물렀던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 살펴보기로는 浿水는 응당 지금의 압록강이고, 옛 王險·忽本·丸都 등의 여러 성은 지금 봉천의 輯安·懷仁 부근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北魏 太武帝(423~452) 말엽에 이르러 비로소 남쪽으로 평양으로 천도했다. 이는 『漢書』, 『三國志』의 「魏志」, 『魏書』, 『北史』, 『唐書』, 〈好大王碑〉, 〈丸都山紀功石刻〉으로 입증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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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방 영역이 2천 리이고, 호수는 3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들판과 못은 없어 산골짜기를 따라 살면서 계곡 물을 마신다. [농사지을 만한] 좋은 토지가 없어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배를 채우기에 부족하므로, 그 습속에 음식을 아껴 먹지만, 궁실은 잘 갖추었다. 거처하는 좌우에 큰 집을 짓고, 귀신에게 제사지내며, 또 영성과 사직에 제사를 지낸다주 002
번역주 002)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귀신·사직·영성에 제사지내기를 좋아한다(好祠鬼神·社稷·零星).”라고 적혀 있다. 章懷太子 李賢이 이에 注하였는데, “『前書音義』에서 龍星(동방7수)의 左角을 天田이라 하니, 즉 農祥이다. 辰日에 소로 제사지내는데, 이를 零星이라 불렀다고 한다. 『風俗通』에서 辰의 신을 零星이라 하였으니, 이 때문에 辰日에 동남쪽에서 제사지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柳從辰이 말하길, “[『後漢書』, 「東夷列傳」 〈高句麗〉조에서 말한] 零星은 『漢書』와 『風俗通』에서는 모두 ‘靈’으로 적고 있다. 靈, 霝, 零이 옛날에는 본래 서로 통하였다. (한나라 때의) 吳仲山碑에서 ‘神零有知’(신령에게 지각이 있다)라 하였으니, 靈을 (漢나라 때부터) 이미 ‘零’으로도 적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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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나라 사람의 성정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그 나라에는 왕이 있다. 그 나라의 관직에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 003
번역주 003)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古鄒大加’로 기재하였다. 章懷가 이를 注하여 “古鄒大加는 高驪에서 손님 접대를 관장하는 관직으로 [중국의] 鴻臚와 같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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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우태·승·사자·조의·선인주 004
번역주 004)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優台使者·帛衣先人’이라고 기재하였다. 沈欽韓이 말하였다. “『唐志』에서는 ‘帛衣·頭大兄’이라고 하였다. ‘帛衣’라는 것은 글자에서 先人을 衍文(글 가운데 쓸데없이 긴 군더더기 글귀)으로 적은 것이다. 『通典』에서는 ‘皁衣가 국정을 총괄하는데, 3년이 되면 한 번 바꾼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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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는데,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등급이 있다주 005
번역주 005)
〔原註〕 趙一淸이 말하길, “『太平寰宇記』 권173에서 ‘高麗의 관직에는 9등급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吐捽로 옛 이름은 大對盧인데, 국사를 총괄한다. 그 다음은 太大兄이다. 그 다음은 鬱折이고, 중국어로는 主簿이다. 그 다음은 太大夫使者이다. 그 다음은 皁衣頭大兄인데, 東夷에서 전하기로 ‘皁衣先人’이라 일컫는 것이다. 이상의 다섯 관직은 機密을 관장하고, 政事를 논하며, 병마를 징발하고 인재를 가려 관작을 수여하였다. 그 다음은 大使者이고, 그 다음은 大兄이며, 그 다음은 收位使者이고, 그 다음은 上位使者이며, 그 다음은 小兄이고, 그 다음은 諸兄이며, 그 다음은 過節이고, 그 다음은 不過節이며, 그 다음은 先人이다. 또한 狀古雛加가 있어 빈객을 관장하는데, [중국의] 鴻臚卿에 비견되며, 大夫使者가 이를 맡는다. 또한 國子博士·太學博士·舍人·通事·典書客이 있었으며, 이는 모두 小兄 이상이 맡았다. 또한 그 나라의 여러 大城에는 傉蕯(褥薩의 다른 표기)이 있는데, 都督에 비견된다. 여러 성에는 處閭近支를 설치했는데, 刺史에 비견되고, 또한 이를 道使라고도 한다. 그 나라의 무관은 大模達이라 하였는데, [중국의] 衛將軍에 비견되고, 皁衣頭大兄 이상이 이를 맡는다. 그 다음은 末客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中郞將에 비견되고, 大兄 이상이 이를 맡는다. 그 다음으로 천 명 이하를 거느리는 [여러 무관에는] 각기 차등이 있었다.’고 하였다. 내(趙一淸)가 보건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唐書』와 조금 다르다.”라고 하였다. 내(盧弼)가 보건대, 宋나라 徐兢의 『宣和奉使高麗圖經』 권7의 「冠服類」에서 기록한 고려의 관직 설치에 대해 “唐나라 武德(高祖 618~626) 연간에 9등급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太平寰宇記』가 실은 바와 대략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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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이의 옛말에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 하였는데, 언어와 제반 일이 부여와 같은 점이 많지만, 그 기질과 의복에 다른 점이 있다. 본래 다섯 부족(部族)이 있었는데, 연노부주 006
번역주 006)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涓’을 ‘消’로 적혀 있으나, 그 이하는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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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가 있다주 007
번역주 007)
〔原註〕 章懷太子 李賢이 주하기를, “지금 高句麗의 5부는 첫 번째 內部는 일명 黃部로, 즉 桂婁部이다. 두 번째 北部는 일명 後部로, 즉 絶奴部이다. 세 번째 東部는 일명 左部로, 즉 順奴部이다. 네 번째 南部는 일명 前部로, 즉 灌奴部이다. 다섯 번째 西部는 일명 右部로, 즉 消奴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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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연노부에서 왕을 하였는데, 점점 미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에서 이를 대체하였다. 한나라 때에는 고취기인(鼓吹技人)을 하사하였다. 항상 현도군에 가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현도군의] 고구려현령이 그 명적(名籍)을 주관하였다주 008
번역주 008)
〔原註〕 元本에는 ‘令主’가 ‘今王’으로 적혀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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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차츰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다시는 현도군에 오지 않았다주 009
번역주 009)
〔原註〕 元本에는 ‘詣’가 ‘諸’로 적혀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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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에 작은 성(城)을 쌓고서 조복과 의책을 그 안에 두니, 해마다 [고구려에서] 와서 그를 가져갔다. 지금도 胡人들은 여전히 이 성을 책구루라고 부른다. 구루란 [고]구려에서 성을 말한다. 그 나라에서는 관을 둘 적에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왕의 종족(宗族)으로 그 대가는 모두 고추가를 칭한다. 연노부는 본래 국주였으므로 지금은 비록 왕이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을 이은 대인(大人)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으며, 또한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제사지낼 수 있다. 절노부는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였으므로 [그 대인은] 고추의 칭호를 더하였다. 여러 대가는 스스로 사자·조의·선인을 두었는데, 그 명단은 모두 왕에게 보고한다. [대가의 사자·조의·선인은] 마치 [중국의] 경대부 가신과 같은데, 회동할 때 좌석 차례에서 왕가의 사자·조의·선인과 같은 열에는 설 수 없었다. 그 나라의 대가(大家)는 농사를 짓지 않는다. 좌식자(坐食者)가 만여 명으로, 하호가 먼 곳에서 식량과 물고기 및 소금을 짊어지고 와서 그들에게 공급한다. 그 나라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 안의 읍락마다 날이 저물면 남녀가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하며 노닌다. 큰 창고가 없고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으니, 이를 부경(桴京)이라고 이름한다주 010
번역주 010)
〔原註〕 何焯(淸)이 교정하여 ‘桴’를 ‘稃’로 고쳐 적었다. 내(盧弼)가 보건대, “郝經의 『續後漢書』에서는 ‘稃’로 적었다. 郁宋年이 이르길, 『說文』에 의하면 ‘桴’는 棟(마룻대)의 이름이고, ‘稃’는 이고, 는 겨이다. 稃京은 작은 창고(倉, 곡물저장고)의 이름이니, 응당 그 글자가 禾를 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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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하고 정결한 것을 좋아하고, 술을 잘 담근다. 무릎 꿇고 절할 때에는 한쪽 다리를 펴니주 011
번역주 011)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申’을 ‘曳’로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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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와 다르다. 길을 걸을 적에는 모두 달음박질하듯 빨리 간다.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나라 안에서 크게 모이는데, 동맹이라고 이름한다. 그 공회(公會)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는데, 금(金)과 은(銀)으로 스스로 꾸민다주 012
번역주 012)
〔原註〕 趙一淸이 말하길, 『酉陽雜俎』에서 “魏나라 때 高句麗의 客이 있어 針을 잘 썼는데, 1촌 길이의 머리카락을 10여 토막으로 잘라 침으로 이를 꿰고는 머리카락 중에 빈 공간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그 기묘한 솜씨가 이와 같았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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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쓰는데, [중국의] 책과 흡사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는 절풍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弁]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수혈(隧穴)이라고 이름한다주 013
번역주 013)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隧’를 ‘襚’로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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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국중대회에서 [수신을] 맞이하여 나라의 동쪽의 [물가]로 돌아와 이를 제사지내는데, 신좌(神坐)에 목수(木隧)를 둔다. 뇌옥이 없고, 죄인이 있으면 제가가 평의하여 곧 그를 죽이고 처와 자식을 잡아다가 노비로 삼는다. 그 풍속은 혼인할 때 구두로 미리 정한다. 여자의 집에서 본채 뒤쪽에 작은 집을 짓고, 이를 서옥이라 불렀다. 신랑은 해가 저물 무렵에 신부의 집문 밖에 도착하여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무릎 꿇고 절하면서 신부와 잘 수 있도록 간청한다. 이렇게 두세 번 거듭하면 신부의 부모는 그때서야 서옥에 가서 자도록 허락하고, [신랑이 가져온] 돈과 폐백은 [서옥] 곁에 가지런히 쌓아둔다. 자식을 낳아서 장성하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그 풍속은 음란하다. 남녀가 결혼하면 곧 수의를 만든다. 장례를 성대하게 지내니, 금·은의 재물을 장례에 다 소비하고,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어 소나무·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 그 나라의 말은 모두 체구가 작아서 산에 오르기에 편리하다. 국인은 기력이 있고, 전투에 능숙하여 옥저와 동예가 모두 복속되었다. 또한 소수맥이 있다. 고구려는 대수(大水) 유역에 나라를 세워 거처하였다. 서안평현 북쪽에 소수(小水)가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의 별종이 소수 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이로 인해 소수맥(小水貊)이라고 하였다주 014
번역주 014)
〔原註〕 毛本에는 ‘貊’을 ‘貃’으로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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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활이 생산되는데, 이른바 맥궁이 그것이다주 015
번역주 015)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句麗는 일명 貊이라 하는데, 별종이 있어 小水가에 거주하였으므로 小水貊이라 부른다.”고 기재하였다. [이에 대한] 章懷太子의 注에서 『魏氏春秋』를 인용하며 “遼東郡 西安平縣 북쪽에 小水가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句麗의 별종이 이로 인해 小水貊이라 이름했다.”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길, “西安平은 馬訾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니[馬訾水는 즉 鴨綠江이다], 바로 지금의 九連城 동북쪽 安平의 강변 땅이다. 小水가 [西安平]縣의 북쪽에서 발원한다 했으니, 즉 틀림없이 靉陽河일 것이다. 중국에서 高句麗로 갈 때 반드시 이곳을 거쳐 가야 하니, 이 때문에 陳壽가 「魏志·高句麗傳」에서 그 명칭을 첨가하여 실은 것이다. 이 部는 미미하여 좋은 활이 나온다는 것 외에는 기록할 만한 다른 일이 따로 없고, 그 아래의 쓴 것은 [小水貊이 아니라] 바로 高句麗의 기사이다. 范蔚宗(范曄)은 陳壽의 『三國志』를 본받아, 「高句麗傳」을 두면서도, 또한 小水貊을 截取하여 따로 하나의 傳을 두었으니, 이는 크게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丁謙이 또 이르길, “중국이 朝鮮과 길을 통할 때, 지금 九連城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들어간다. 옛날에는 西安平에서 강을 건넜으니, 즉 [唐나라 때의] 賈耽이 말한 泊汋口이다. 내(盧弼)가 보기에 兩漢志(『漢書』, 「地理志」와 『後漢書』, 「郡國志」)를 살펴 보건대, 西安平은 遼東郡에 속한다. 何焯이 말하길, “涿縣 안에 安平縣이 있으므로 [이와 구별하기 위해] ‘西’자를 덧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王先謙(淸)이 이르길, “孫權이 謝宏과 陸恂(陳恂의 오기)을 사신으로 보내 高句驪王 宮(東川王)을 單于로 봉하였다. [이때] 陸恂 등이 安平口에 도착했으니, 즉 이 西安平縣의 海口이다. 『唐書』, 「地理志」에 의거해볼 때, 응당 압록강 북쪽 바다에 가까운 곳일 것이다. 『新唐書』, 「地理志」에 의하면, 安東都護府의 남쪽에서 압록강 북쪽의 泊汋城까지 7백 리를 간 곳이 옛 西安平縣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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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이 이전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흉노]를 정벌하고자 했는데주 016
번역주 016)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伐匈奴’로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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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에서] 가지 않으려 하자 강압해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새를 나와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살해되었다. [이에 신나라의] 주·군·현이 그 책임을 구려후 추(騊)에게 돌렸다주 017
번역주 017)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騊’을 ‘騶’으로 기재하였다. 『前漢書』, 「王莽傳」에서도 역시 ‘騶’으로 기재하였다. 그 이하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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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우가 말했다. “맥인이 법을 어긴 것은 죄가 추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니, 또한 마땅히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합니다. 지금 외람되이 큰 죄를 씌우게 되면주 018
번역주 018)
〔原註〕 顔師古가 말하길, “‘猥’는 ‘많다(多)’, ‘두텁다(厚)’는 뜻이다. ‘被’는 ‘더하다(加)’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王先謙이 말하길, “‘猥’는 ‘갑자기(猝)’와 같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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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주 019
번역주 019)
〔原註〕 『漢書』, 「王莽傳」에는 이 구절 아래에서 “부여의 무리 중에 반드시 응하여 따르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우리가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한 터에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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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왕망이 따르지 않고, 엄우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엄우는 구려후 추를 꾀어내 만나자 하고서 그가 이르자 참수하여주 020
번역주 020)
〔原註〕 ‘期’자는 아마도 잘못된 글자일 것이다. 范曄의 『漢書』에서는 “고구려후 騶를 꾀어내어 塞로 들어오자 참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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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왕망이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에 포고하여 고구려의 이름을 고쳐 하구려(下句麗)라고 하였다주 021
번역주 021)
〔原註〕 『漢書』, 「王莽傳」에서 이르길, “王莽이 글을 내려 말했다. ‘저번에는 맹장들에게 명해 천벌을 받들어 행하여 오랑캐 知(흉노의 선우 囊知牙斯)를 주멸하도록 하여 12부로 나누어 보내니, 그 오른팔을 끊거나 그 왼쪽 겨드랑이를 베거나 그 가슴과 배를 무너뜨리거나 양쪽 갈비뼈를 뽑아버리기도 하였다. 올해는 동방에서 형벌을 행해 貉의 부족을 주벌하였으니, 이보다 더 뛰어났도다. 오랑캐 騶를 붙잡아 베고 동쪽 지역을 평정했으니, 오랑캐 知를 진멸할 날이 멀지 않았도다. 이는 바로 천지와 여러 신(神)들과 사직, 종묘가 보우해준 복이고, 공경대부와 사민들이 마음을 합하고 장수들이 울부짖는 범처럼 [용맹하게] 힘쓴 덕분이다. 내가 이를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이제 高句驪의 이름을 바꾸어 下句驪라 하니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 수 있도록 하라.’ 이에 貉人들이 더욱 더 변경을 침범하고, 동북쪽과 서남쪽의 夷가 모두 난을 일으켰다.” 하였다. 丁謙이 이르길, “『朝鮮史』를 살펴보니, 이는 고구려 태조인 東明王의 아들 琉璃王 때의 일이다. 사서에서 이르길, 당초 漢나라 王莽이 고구려에서 징병하자 琉璃王이 불응하고는 鮮卑에게 항복하고 漢나라 변경을 침범하였다. 그러한 즉 잠시 징병에 응했다가, 도리어 도망하여 塞로 달아난 것은 바로 鮮卑와 연합하려는 계책을 쓴 것이다. 다만 嚴尤가 유인하여 벤 句麗侯 騶는 [高句麗王이 아니라], 응당 군대를 지휘하던 관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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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에 [고구려는] 후국(侯國)이 되었다. 한 광무제 8년(32)에 고구려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예물을 보내오니, 비로소 왕으로 칭해졌다주 022
번역주 022)
〔原註〕 范曄의 『後漢書』, 「光武紀」 建武 8年 12月에 “高句驪의 왕이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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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재위: 106)와 안제(재위: 106~125) 연간에 구려왕 궁이 자주 요동군을 공격하였으므로 다시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채풍주 023
번역주 023)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風’을 ‘諷’이라고 썼고, 그 나머지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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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현도태수 요광은 궁이 두 군의 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고자 하였다. 궁이 거짓으로 화의를 청하자, 두 군은 진격하지 않았다. [그 틈을 이용하여] 궁은 몰래 군사를 파견하여 현도군을 공격해 후성을 불사르고, 요수주 024
번역주 024)
〔原註〕 丁謙이 말하길, “候城과 遼隧는 모두 漢나라 縣으로 遼東郡에 속했다. 『漢書』, 「地理志」에 의하면, 候城은 [前漢 때 遼東郡] 中部都尉의 치소였으나, 다만 지금의 어떤 곳인지는 알 수 없다. 遼隧는 「地理志」에서는 遼隊로 기재되었다. 『水經注』에서 小遼水가 塞로 들어와 襄平縣의 서쪽을 지나고, 또 遼隧縣 서쪽을 질러 大遼水로 유입되고, [大遼水는] 安市를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襄平의 옛 성이 지금 奉天省 城의 서남쪽에 있으니, 遼隧는 응당 그 서남쪽으로 遼河에 가까운 곳이었을 것이며, 이 때문에 公孫淵이 군대를 보내 司馬懿를 이곳에서 막으며 물에 의지해 스스로 견고히 지켰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錢坫(淸)이 말하길, “[遼隧는] 지금의 奉天府 海城縣 서쪽의 牛莊이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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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였다. 이후 궁이 다시 요동군을 침범하자, 채풍이 재빨리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해 토벌하였지만, 군대가 패하여 죽었다주 025
번역주 025)
〔原註〕 范曄의 『後漢書』, 「東夷傳」, 〈高句麗〉조에는 “建武 8년(32, 大武神王 15) 高句麗가 사신을 파견하여 예물을 보내오니, 光武帝가 그 왕호를 회복해주었다고 한다. (建武) 23년(47, 閔中王 4) 겨울, 高句驪 蠶支落의 大加 戴升 등 만여 명이 樂浪郡으로 와서 내속했다. (建武) 25년(49, 慕本王 2) 봄에 高句麗가 右北平·漁陽·上谷·太原을 침범하였고, 遼東太守 祭彤(祭肜)이 은혜와 신의로써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그 뒤 高句麗의 왕 宮이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사람들을 보니, 국인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장성하자 용맹하고 씩씩하여 여러 차례 변경을 침범했다. 和帝 元興 원년(105, 太祖大王 53) 봄에 다시 遼東을 침입해 여섯 현을 침구하니, 太守 耿夔가 이를 격파하고, 그 渠帥를 베었다. 安帝 永初 5년(111, 太祖大王 59)에 宮이 사신을 파견하여 예물을 보내오면서 玄菟郡에 속하기를 청했다. 元初 5년(118, 太祖大王 66), 다시 濊貊과 함께 玄菟郡를 침범하고 華麗城을 공격했다. 建光 원년(121, 太祖大王 69) 봄에 幽州刺史 馮煥, 玄菟太守 姚光, 遼東太守 蔡諷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塞를 나가 이를 쳐서 濊貃의 渠帥를 붙잡아 베고 병마와 재물을 노획하였다. 이에 宮이 嗣子 遂成을 보내 2천여 명을 거느리고 姚光 등에 맞서게 하였다. [遂成]이 사자를 보내 거짓 항복하니, 姚光 등이 이를 믿었다. 遂成이 이를 틈타 험하고 막힌 곳을 점거하여 대군을 차단하고는, 몰래 3천 명을 보내 玄菟郡과 遼東郡을 공격해 성곽을 붙태우고 1천여 명을 살상했다. 이에 廣陽郡, 漁陽郡, 右北平郡, 涿郡, 遼東屬國의 3천여 騎를 출동시켜 [玄菟郡과 遼東郡을] 구원케 하였으나, 貊人들은 이미 떠난 뒤였다. [그해] 여름에 다시 遼東의 鮮卑 8천여 명과 함께 遼隊를 공격해 관리와 민간인들을 죽였다. 蔡諷 등이 이를 뒤쫓아, 新昌(遼東郡 新昌縣)를 공격하다 전사하였다. 功曹 耿耗, 兵曹掾 龍端, 兵馬掾 公孫酺가 몸으로 蔡諷을 막아주다 다함께 진중에서 죽었으며, 죽은 자가 백여 명에 달했다. [그해] 가을, 宮이 마침내 馬韓과 濊貊의 수천 騎를 이끌고 玄菟郡를 포위했다. 夫餘王이 아들 尉仇台를 보내 2만여 명을 거느리게 하니, (漢나라의) 州郡과 힘을 합해 이를 쳐서 깨뜨리고 5백여 급을 참수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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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이 죽고, 아들 백고가 즉위하였다주 026
번역주 026)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宮이 죽고, [宮의] 아들 遂成이 즉위했다. 遂成이 죽고, [遂成의] 아들 伯固가 즉위했다.”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길, “『朝鮮史』에는 ‘宮이 연로하여 동생인 遂成에게 양위하니 次大王이라 칭했다고 하는데, 난폭하여 국인들에게 시해당했고, 그의 동생인 伯國을 세워 新大王이라 칭했다고 한다. 즉 그가 『後漢書』, 「東夷列傳」, 〈高句麗〉 중의 伯固다. 「東夷傳」, 〈高句麗〉에서 宮이 죽고 아들 伯固가 즉위했다고 말했으니, 遂成이 누락되었을 뿐 아니라, 동생을 아들이라 하여 또한 그릇되었다.”고 하였다. 내(盧弼)가 아래 글을 보건대, 位宮이 宮의 증손이라 하였으니, 즉 [位宮의 할아버지인] 伯固는 즉 宮의 아들이라서 그 世系에 그릇됨은 없다. 그러나 范曄의 『後漢書』와 『朝鮮史』에는 모두 부합되지 않는다. 또한 惠棟이 말하길, “蔡邕集에서 東夷 高句麗의 翮子(嗣子의 오기) 伯固가 역모하여 도발하였다.”고 말한 것을 보건대, 또한 遂成이 시해된 증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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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제(재위: 125~144)와 환제(재위: 146~167)의 연간에 다시 요동군을 침입하여 신안현과 거향현을 공격하였다주 027
번역주 027)
〔原註〕 郝經의 『續後漢書』에서는 ‘居’를 ‘民’으로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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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서안평현을 공격하여 도중에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주 028
번역주 028)
〔原註〕 范曄의 『後漢書』 에서는 “順帝 陽嘉 원년(132, 太祖王 80)에 玄菟郡에 屯田 6부를 두었다. 質~桓帝 연간에 다시 遼東 西安平을 침범해 帶方令을 죽이고, 樂浪太守의 처와 자식을 사로잡았다.”고 하였다. [『後漢書』] 「郡國志」에 의하면, “帶方은 樂浪郡에 속했고, 『一統志』에 의하면, 帶方의 옛 성은 지금의 平壤 남쪽 지경이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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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제 건령 2년(169)에 현도태수 경림이 그들을 토벌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으니,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군에 속하였다. 희평 연간(172~177)에주 029
번역주 029)
〔原註〕 이는 靈帝 때의 일을 서술한 것이니, 응당 熹平으로 적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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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고가 현도군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공손탁이 해동에 웅거하자 백고는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주 030
번역주 030)
〔原註〕 馮本에는 ‘大’를 ‘犬’으로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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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파견하여 공손탁을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격파하였다. 백고가 죽었다. [그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발기이고, 작은 아들은 이이모였다. 발기는 어질지 못하여 국인이 함께 이이모를 옹립하여 왕으로 세웠다. 백고 때부터 [고구려는]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한 호인(胡人) 5백여 호를 받아들였다. 건안 연간(196~219)에 공손강이 군사를 내어 그를 공격해, 그 나라를 파괴하고 마을들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가와 함께 각기 하호 3만 명을 이끌고 공손강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 유역에 옮겨 살았다. 항복했던 호(胡)도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소재한 곳이다주 031
번역주 031)
〔原註〕 丁謙이 말하길, “伯固의 둘째 아들인 伊夷模는 『東藩紀要』에 의하면, ‘이름이 男武이고 故國川王이라 칭했다.’고 한다. 伊夷模의 아들은 位宮이고, 『東藩紀要』에 의하면 ‘東川王이라 칭했다.’고 한다. 다만 ‘東川王이 즉위하기 전에 또한 山上王이 있어 이름이 延優라 하는데, 伊夷模의 동생으로 建安 2년(197)에 즉위하여 거의 50년간 재위한 뒤에 東川王이 처음 즉위했다.’고 하니, 이 또한 누락되었다. 또 생각하건대, 位宮은 바로 太祖王 宮의 손자이고, 증손이 아니다. 또한 살펴보건대, 位宮이 毋丘儉에 의해 격파된 뒤 비로소 평양으로 옮겨 도읍한 일이 『朝鮮史』와 『東藩紀要』에 실려 있는 것이 같다. ‘作新國(새로 나라를 세웠다)’이라는 것은 山上王이 丸都山城을 쌓은 일을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吳其昌이 말하길, ‘高句麗의 도읍은 [司馬氏의] 晉나라 이전에는 지금의 압록강 북안 奉天境의 경내인 輯安·懷仁 부근에 있었다. 劉宋(南朝 宋) 이후 비로소 남쪽인 지금의 평양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吳其昌의 설은 이미 앞에서 간략히 적었고, 더 상세한 내용은 북평도서관 월간에 보인다. 姚範이 말하길, “‘今日云云’라 한 것은 아마도 옛 글을 그대로 말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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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가고, 그 아들은 [고]구려국에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 박위거가 그이다. 그 뒤에 [고구려가] 다시 현도군을 공격하였으므로 현도군과 요동군이 합세해 공격해 그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었는데 관노부의 여자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으니, 위궁이라고 이름하였다. 이이모가 죽자, 위궁이 왕으로 즉위하였다. 지금의 고구려왕 궁이 그이다. 위궁의 증조부 이름이 궁이었는데주 032
번역주 032)
〔原註〕 宋本에는 ‘宮’ 위에 ‘名’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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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람을 보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였다주 033
번역주 033)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國人懷之’로 적혀 있다. 黃山이 말하길, “[國人懷之] 중의 ‘懷’는 응당 ‘怪’의 오기일 것이다. 예전에는 ‘懷’가 ‘怌’로 혼동되어 쓰이는 일이 많았으므로 베껴 쓰다가 잘못 적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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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이 장성하자, 정말 흉악하여 자주 [이웃 나라를] 공격하다가, 나라가 잔파(殘破)되었다. 지금의 왕도 태어나자마자주 034
번역주 034)
〔原註〕 毛本에는 ‘墮’가 ‘墯’로 기재하였다. 錢大昕(淸)이 말하길, “承祚(陳壽)가 『三國志』를 지을 때는 位宮이 오래전에 이미 패망한 뒤이니, [陳壽가 位宮을 두고] ‘今王’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이전 사서의 글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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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눈을 뜨고 사람을 보았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고 부르는데, 그의 할아버지와 닮았기 때문에 그를 이름하여 위궁이라고 하였다. 위궁은 힘이 세고 용감하였으며주 035
번역주 035)
〔原註〕 趙一淸이 이르길, “‘力勇’은 『太平寰宇記』에 의거해 볼 때, 응당 ‘勇力’으로 적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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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타기에 익숙하였고, 사냥과 활쏘기를 잘하였다. 경초 2년(238)에 태위 사마선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공손연을 토벌하였는데, 위궁이 주부와 대가를 파견하여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사마선왕의] 군사를 조력했다주 036
번역주 036)
〔原註〕 ‘宮’은 마땅히 ‘位宮’으로 적어야 하며, 그 나머지는 같다. 北宋本에는 ‘大’를 ‘犬’으로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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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시 3년(242)에 위궁이 서안평을 침략하였다. [정시] 5년(244)에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격파당했는데, 그때의 사실은 〈관구검전〉에 실려 있다주 037
번역주 037)
〔原註〕 『三國志』 권28, 「위지」 28, 〈毌丘儉〉에서는 正始 연간(魏 齊王 曹芳 240~248)에 毌丘儉이 여러 군사를 지휘해 高句麗를 쳤다 하였고, (正始) 6년(245)에 다시 쳤다 하였다. 『三國志』, 「齊王紀」에서는 (正始) 7년(246)에 毌丘儉이 高句麗를 쳐서 격파했다고 하였다. 아마도 군사를 씀에 수년이 걸려 이 「東夷列傳」 〈高句麗〉조는 그 시작을 기록하였고, 「齊王紀」는 그 끝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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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주 001)
    〔原註〕 毛本과 局本에서는 ‘於’가 ‘與’로 적혀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丁謙(淸)이 말하길, “高句麗國에는 둘이 있었다. 그 하나는 ‘옛 고구려’로 지금 奉天省 城 동북쪽 英額邊門 바깥의 渾河가 발원하는 곳에 있었다. 渾河는 즉 「地理志」와 『水經注』에서 말한 小遼河이다. 다른 하나는 ‘새 고구려’로 지금 朝鮮의 북쪽 지경인 평안도 성천군(현재 평양의 북동쪽임) 땅에 있었다. 陳壽는 두 나라의 원류를 다 알지 못하여 이들을 뒤섞어 하나로 적었으니, 예컨대 (고구려)전 앞머리의 ‘遼東의 동쪽 천 리 되는 곳에 있고 남쪽으로는 朝鮮·濊貊과 접한다.’ 등의 말은 옛 고구려국의 지경을 언급한 것이고, ‘환도 아래에 도읍했다.’는 말은 즉 새 고구려국의 지경을 언급한 것이다. 이 책(『三國志』)이 이미 오류를 범한 데다, 范蔚宗(范曄)은 『後漢書』에서 이를 답습하였다. 다만 范曄은 本傳(『後漢書』, 「東夷列傳」, 〈高句麗〉)의 후반부에서 小水貊傳을 나누어 적고, 아울러 王莽이 뒤에 高句麗와 中國이 교섭한 여러 사실들을 모두 小水貊傳에 넣었으니, 그릇되고 또한 그릇되었도다. 내(盧弼)가 보건대, 丁謙의 설이 진실로 변별이 있다. 그러나 丸都 아래에 도읍하였으니, 新高句麗國의 지경이 되었다. 新高句麗는 지금의 朝鮮 북쪽 지경인 평안도 성천군 땅이라 한 것은 여전히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胡三省(元)이 이르길, ‘『新唐書』(「地理志」)에서 鴨淥江口로부터 배를 타고 100여 리를 간 뒤, 작은 배로 물길을 거스르며, 동북쪽으로 총 530리를 가면 丸都城에 도착한다.’ 하였으니, 이에 근거하면 즉 丸都城은 압록강변에 있었다. 평안도 성천군에 있는 것은 平壤城이고 이는 대동강의 북쪽에 있었으니, 압록강이 아니다. 근래 사람인 王國維는 『觀堂集林』 卷16 〈魏毌丘儉丸都山紀功刻石跋〉에서 ‘魏나라 毌丘儉이 丸都山에 공을 새긴 殘石을 (淸나라) 光緖 丙午年(光緖 3년, 1877)에 署 奉天輯安縣事 吳 大令(縣令의 경칭) 光國(→吳光國)이 縣의 서북쪽 90리 되는 곳의 板石嶺에서 도로를 뚫다 발견하였다.’ 吳大令(→吳光國)이 [이 殘石에 대해] 발문하여, ‘扳石嶺(板石嶺의 오기)은 높이 6백여 丈으로 [고개가 험해] 수레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즉 옛날의 丸都山으로 보인다.’고 했다. 또한 근래 사람인 吳其昌의 〈丸都山紀功刊石跋尾〉[北平도서관 월간 제3권 제3호에 보인다.]에서는 ‘이 각석은 집안현 扳石嶺(板石嶺의 오기)에서 출토되었는데, 扳石嶺은 즉 丸都山이다. 高句驪의 도읍인 丸都城은 즉 丸都山 아래에 있었다. 輯安縣은 바로 압록강 상류의 북쪽 연안에 있고, 漢·魏나라 때 西安平州는 지금의 安東(중국 요령성 丹東) 조금 북쪽에 있었다. 玄菟郡의 치소는 지금의 鐵嶺(요령성 鐵嶺市·撫順의 북쪽임) 좌우에 있었다. 位宮(→高句麗 東川王)이 보기(步騎) 2만을 이끌고 진군하여 沸流水 가에서 싸웠으니, 이는 丸都城이 있는 沸流水 상류로부터 순류를 타고 내려와 西安平州를 침범한 것이다. 지금의 輯安으로부터 지금의 安東에 이르기까지 바로 압록강의 순류를 타고 내려오게 되니, 즉 沸水(沸流水의 오기)의 지리적 위치가 압록강의 지리적 위치와 꼭 맞다. 毌丘儉이 玄菟郡로부터 곧바로 丸都로 달려가 그의 뒷길을 끊자, 位宮이 회군하여 맞서 싸웠다. 毌丘儉이 마침내 승세를 타고 丸都山을 넘어 丸都城을 도륙했다. 후대 사람들이 沸流水를 대동강으로 오해하여 여러 사서의 「동이전」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르길, 劉宋(남북조시대 劉裕의 송나라, 420~479) 이전 고구려국의 도읍은 지금의 輯安 부근에 있었고, 지금 조선의 평양에 있지는 않았다. 옛사람들이 浿水를 조선의 대동강으로 여겼으니, 이 때문에 丸都와 王險 등의 여러 성이 지금의 평양[지금의 평양은 정남쪽으로 대동강에 임해 있다.]이고, 마치 衛滿과 朱蒙 이래로 평양에 터를 잡고 머물렀던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 살펴보기로는 浿水는 응당 지금의 압록강이고, 옛 王險·忽本·丸都 등의 여러 성은 지금 봉천의 輯安·懷仁 부근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北魏 太武帝(423~452) 말엽에 이르러 비로소 남쪽으로 평양으로 천도했다. 이는 『漢書』, 『三國志』의 「魏志」, 『魏書』, 『北史』, 『唐書』, 〈好大王碑〉, 〈丸都山紀功石刻〉으로 입증된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귀신·사직·영성에 제사지내기를 좋아한다(好祠鬼神·社稷·零星).”라고 적혀 있다. 章懷太子 李賢이 이에 注하였는데, “『前書音義』에서 龍星(동방7수)의 左角을 天田이라 하니, 즉 農祥이다. 辰日에 소로 제사지내는데, 이를 零星이라 불렀다고 한다. 『風俗通』에서 辰의 신을 零星이라 하였으니, 이 때문에 辰日에 동남쪽에서 제사지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柳從辰이 말하길, “[『後漢書』, 「東夷列傳」 〈高句麗〉조에서 말한] 零星은 『漢書』와 『風俗通』에서는 모두 ‘靈’으로 적고 있다. 靈, 霝, 零이 옛날에는 본래 서로 통하였다. (한나라 때의) 吳仲山碑에서 ‘神零有知’(신령에게 지각이 있다)라 하였으니, 靈을 (漢나라 때부터) 이미 ‘零’으로도 적었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古鄒大加’로 기재하였다. 章懷가 이를 注하여 “古鄒大加는 高驪에서 손님 접대를 관장하는 관직으로 [중국의] 鴻臚와 같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優台使者·帛衣先人’이라고 기재하였다. 沈欽韓이 말하였다. “『唐志』에서는 ‘帛衣·頭大兄’이라고 하였다. ‘帛衣’라는 것은 글자에서 先人을 衍文(글 가운데 쓸데없이 긴 군더더기 글귀)으로 적은 것이다. 『通典』에서는 ‘皁衣가 국정을 총괄하는데, 3년이 되면 한 번 바꾼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原註〕 趙一淸이 말하길, “『太平寰宇記』 권173에서 ‘高麗의 관직에는 9등급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吐捽로 옛 이름은 大對盧인데, 국사를 총괄한다. 그 다음은 太大兄이다. 그 다음은 鬱折이고, 중국어로는 主簿이다. 그 다음은 太大夫使者이다. 그 다음은 皁衣頭大兄인데, 東夷에서 전하기로 ‘皁衣先人’이라 일컫는 것이다. 이상의 다섯 관직은 機密을 관장하고, 政事를 논하며, 병마를 징발하고 인재를 가려 관작을 수여하였다. 그 다음은 大使者이고, 그 다음은 大兄이며, 그 다음은 收位使者이고, 그 다음은 上位使者이며, 그 다음은 小兄이고, 그 다음은 諸兄이며, 그 다음은 過節이고, 그 다음은 不過節이며, 그 다음은 先人이다. 또한 狀古雛加가 있어 빈객을 관장하는데, [중국의] 鴻臚卿에 비견되며, 大夫使者가 이를 맡는다. 또한 國子博士·太學博士·舍人·通事·典書客이 있었으며, 이는 모두 小兄 이상이 맡았다. 또한 그 나라의 여러 大城에는 傉蕯(褥薩의 다른 표기)이 있는데, 都督에 비견된다. 여러 성에는 處閭近支를 설치했는데, 刺史에 비견되고, 또한 이를 道使라고도 한다. 그 나라의 무관은 大模達이라 하였는데, [중국의] 衛將軍에 비견되고, 皁衣頭大兄 이상이 이를 맡는다. 그 다음은 末客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中郞將에 비견되고, 大兄 이상이 이를 맡는다. 그 다음으로 천 명 이하를 거느리는 [여러 무관에는] 각기 차등이 있었다.’고 하였다. 내(趙一淸)가 보건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唐書』와 조금 다르다.”라고 하였다. 내(盧弼)가 보건대, 宋나라 徐兢의 『宣和奉使高麗圖經』 권7의 「冠服類」에서 기록한 고려의 관직 설치에 대해 “唐나라 武德(高祖 618~626) 연간에 9등급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太平寰宇記』가 실은 바와 대략 같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涓’을 ‘消’로 적혀 있으나, 그 이하는 동일하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原註〕 章懷太子 李賢이 주하기를, “지금 高句麗의 5부는 첫 번째 內部는 일명 黃部로, 즉 桂婁部이다. 두 번째 北部는 일명 後部로, 즉 絶奴部이다. 세 번째 東部는 일명 左部로, 즉 順奴部이다. 네 번째 南部는 일명 前部로, 즉 灌奴部이다. 다섯 번째 西部는 일명 右部로, 즉 消奴部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原註〕 元本에는 ‘令主’가 ‘今王’으로 적혀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原註〕 元本에는 ‘詣’가 ‘諸’로 적혀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原註〕 何焯(淸)이 교정하여 ‘桴’를 ‘稃’로 고쳐 적었다. 내(盧弼)가 보건대, “郝經의 『續後漢書』에서는 ‘稃’로 적었다. 郁宋年이 이르길, 『說文』에 의하면 ‘桴’는 棟(마룻대)의 이름이고, ‘稃’는 이고, 는 겨이다. 稃京은 작은 창고(倉, 곡물저장고)의 이름이니, 응당 그 글자가 禾를 따라야 할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申’을 ‘曳’로 적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2)
    〔原註〕 趙一淸이 말하길, 『酉陽雜俎』에서 “魏나라 때 高句麗의 客이 있어 針을 잘 썼는데, 1촌 길이의 머리카락을 10여 토막으로 잘라 침으로 이를 꿰고는 머리카락 중에 빈 공간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그 기묘한 솜씨가 이와 같았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3)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隧’를 ‘襚’로 적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4)
    〔原註〕 毛本에는 ‘貊’을 ‘貃’으로 기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5)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句麗는 일명 貊이라 하는데, 별종이 있어 小水가에 거주하였으므로 小水貊이라 부른다.”고 기재하였다. [이에 대한] 章懷太子의 注에서 『魏氏春秋』를 인용하며 “遼東郡 西安平縣 북쪽에 小水가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句麗의 별종이 이로 인해 小水貊이라 이름했다.”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길, “西安平은 馬訾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니[馬訾水는 즉 鴨綠江이다], 바로 지금의 九連城 동북쪽 安平의 강변 땅이다. 小水가 [西安平]縣의 북쪽에서 발원한다 했으니, 즉 틀림없이 靉陽河일 것이다. 중국에서 高句麗로 갈 때 반드시 이곳을 거쳐 가야 하니, 이 때문에 陳壽가 「魏志·高句麗傳」에서 그 명칭을 첨가하여 실은 것이다. 이 部는 미미하여 좋은 활이 나온다는 것 외에는 기록할 만한 다른 일이 따로 없고, 그 아래의 쓴 것은 [小水貊이 아니라] 바로 高句麗의 기사이다. 范蔚宗(范曄)은 陳壽의 『三國志』를 본받아, 「高句麗傳」을 두면서도, 또한 小水貊을 截取하여 따로 하나의 傳을 두었으니, 이는 크게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丁謙이 또 이르길, “중국이 朝鮮과 길을 통할 때, 지금 九連城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들어간다. 옛날에는 西安平에서 강을 건넜으니, 즉 [唐나라 때의] 賈耽이 말한 泊汋口이다. 내(盧弼)가 보기에 兩漢志(『漢書』, 「地理志」와 『後漢書』, 「郡國志」)를 살펴 보건대, 西安平은 遼東郡에 속한다. 何焯이 말하길, “涿縣 안에 安平縣이 있으므로 [이와 구별하기 위해] ‘西’자를 덧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王先謙(淸)이 이르길, “孫權이 謝宏과 陸恂(陳恂의 오기)을 사신으로 보내 高句驪王 宮(東川王)을 單于로 봉하였다. [이때] 陸恂 등이 安平口에 도착했으니, 즉 이 西安平縣의 海口이다. 『唐書』, 「地理志」에 의거해볼 때, 응당 압록강 북쪽 바다에 가까운 곳일 것이다. 『新唐書』, 「地理志」에 의하면, 安東都護府의 남쪽에서 압록강 북쪽의 泊汋城까지 7백 리를 간 곳이 옛 西安平縣이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6)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伐匈奴’로 기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7)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騊’을 ‘騶’으로 기재하였다. 『前漢書』, 「王莽傳」에서도 역시 ‘騶’으로 기재하였다. 그 이하는 같다.바로가기
  • 번역주 018)
    〔原註〕 顔師古가 말하길, “‘猥’는 ‘많다(多)’, ‘두텁다(厚)’는 뜻이다. ‘被’는 ‘더하다(加)’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王先謙이 말하길, “‘猥’는 ‘갑자기(猝)’와 같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9)
    〔原註〕 『漢書』, 「王莽傳」에는 이 구절 아래에서 “부여의 무리 중에 반드시 응하여 따르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우리가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한 터에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0)
    〔原註〕 ‘期’자는 아마도 잘못된 글자일 것이다. 范曄의 『漢書』에서는 “고구려후 騶를 꾀어내어 塞로 들어오자 참하였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1)
    〔原註〕 『漢書』, 「王莽傳」에서 이르길, “王莽이 글을 내려 말했다. ‘저번에는 맹장들에게 명해 천벌을 받들어 행하여 오랑캐 知(흉노의 선우 囊知牙斯)를 주멸하도록 하여 12부로 나누어 보내니, 그 오른팔을 끊거나 그 왼쪽 겨드랑이를 베거나 그 가슴과 배를 무너뜨리거나 양쪽 갈비뼈를 뽑아버리기도 하였다. 올해는 동방에서 형벌을 행해 貉의 부족을 주벌하였으니, 이보다 더 뛰어났도다. 오랑캐 騶를 붙잡아 베고 동쪽 지역을 평정했으니, 오랑캐 知를 진멸할 날이 멀지 않았도다. 이는 바로 천지와 여러 신(神)들과 사직, 종묘가 보우해준 복이고, 공경대부와 사민들이 마음을 합하고 장수들이 울부짖는 범처럼 [용맹하게] 힘쓴 덕분이다. 내가 이를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이제 高句驪의 이름을 바꾸어 下句驪라 하니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 수 있도록 하라.’ 이에 貉人들이 더욱 더 변경을 침범하고, 동북쪽과 서남쪽의 夷가 모두 난을 일으켰다.” 하였다. 丁謙이 이르길, “『朝鮮史』를 살펴보니, 이는 고구려 태조인 東明王의 아들 琉璃王 때의 일이다. 사서에서 이르길, 당초 漢나라 王莽이 고구려에서 징병하자 琉璃王이 불응하고는 鮮卑에게 항복하고 漢나라 변경을 침범하였다. 그러한 즉 잠시 징병에 응했다가, 도리어 도망하여 塞로 달아난 것은 바로 鮮卑와 연합하려는 계책을 쓴 것이다. 다만 嚴尤가 유인하여 벤 句麗侯 騶는 [高句麗王이 아니라], 응당 군대를 지휘하던 관원이었을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22)
    〔原註〕 范曄의 『後漢書』, 「光武紀」 建武 8年 12月에 “高句驪의 왕이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하였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3)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風’을 ‘諷’이라고 썼고, 그 나머지는 같다.바로가기
  • 번역주 024)
    〔原註〕 丁謙이 말하길, “候城과 遼隧는 모두 漢나라 縣으로 遼東郡에 속했다. 『漢書』, 「地理志」에 의하면, 候城은 [前漢 때 遼東郡] 中部都尉의 치소였으나, 다만 지금의 어떤 곳인지는 알 수 없다. 遼隧는 「地理志」에서는 遼隊로 기재되었다. 『水經注』에서 小遼水가 塞로 들어와 襄平縣의 서쪽을 지나고, 또 遼隧縣 서쪽을 질러 大遼水로 유입되고, [大遼水는] 安市를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襄平의 옛 성이 지금 奉天省 城의 서남쪽에 있으니, 遼隧는 응당 그 서남쪽으로 遼河에 가까운 곳이었을 것이며, 이 때문에 公孫淵이 군대를 보내 司馬懿를 이곳에서 막으며 물에 의지해 스스로 견고히 지켰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錢坫(淸)이 말하길, “[遼隧는] 지금의 奉天府 海城縣 서쪽의 牛莊이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5)
    〔原註〕 范曄의 『後漢書』, 「東夷傳」, 〈高句麗〉조에는 “建武 8년(32, 大武神王 15) 高句麗가 사신을 파견하여 예물을 보내오니, 光武帝가 그 왕호를 회복해주었다고 한다. (建武) 23년(47, 閔中王 4) 겨울, 高句驪 蠶支落의 大加 戴升 등 만여 명이 樂浪郡으로 와서 내속했다. (建武) 25년(49, 慕本王 2) 봄에 高句麗가 右北平·漁陽·上谷·太原을 침범하였고, 遼東太守 祭彤(祭肜)이 은혜와 신의로써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그 뒤 高句麗의 왕 宮이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사람들을 보니, 국인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장성하자 용맹하고 씩씩하여 여러 차례 변경을 침범했다. 和帝 元興 원년(105, 太祖大王 53) 봄에 다시 遼東을 침입해 여섯 현을 침구하니, 太守 耿夔가 이를 격파하고, 그 渠帥를 베었다. 安帝 永初 5년(111, 太祖大王 59)에 宮이 사신을 파견하여 예물을 보내오면서 玄菟郡에 속하기를 청했다. 元初 5년(118, 太祖大王 66), 다시 濊貊과 함께 玄菟郡를 침범하고 華麗城을 공격했다. 建光 원년(121, 太祖大王 69) 봄에 幽州刺史 馮煥, 玄菟太守 姚光, 遼東太守 蔡諷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塞를 나가 이를 쳐서 濊貃의 渠帥를 붙잡아 베고 병마와 재물을 노획하였다. 이에 宮이 嗣子 遂成을 보내 2천여 명을 거느리고 姚光 등에 맞서게 하였다. [遂成]이 사자를 보내 거짓 항복하니, 姚光 등이 이를 믿었다. 遂成이 이를 틈타 험하고 막힌 곳을 점거하여 대군을 차단하고는, 몰래 3천 명을 보내 玄菟郡과 遼東郡을 공격해 성곽을 붙태우고 1천여 명을 살상했다. 이에 廣陽郡, 漁陽郡, 右北平郡, 涿郡, 遼東屬國의 3천여 騎를 출동시켜 [玄菟郡과 遼東郡을] 구원케 하였으나, 貊人들은 이미 떠난 뒤였다. [그해] 여름에 다시 遼東의 鮮卑 8천여 명과 함께 遼隊를 공격해 관리와 민간인들을 죽였다. 蔡諷 등이 이를 뒤쫓아, 新昌(遼東郡 新昌縣)를 공격하다 전사하였다. 功曹 耿耗, 兵曹掾 龍端, 兵馬掾 公孫酺가 몸으로 蔡諷을 막아주다 다함께 진중에서 죽었으며, 죽은 자가 백여 명에 달했다. [그해] 가을, 宮이 마침내 馬韓과 濊貊의 수천 騎를 이끌고 玄菟郡를 포위했다. 夫餘王이 아들 尉仇台를 보내 2만여 명을 거느리게 하니, (漢나라의) 州郡과 힘을 합해 이를 쳐서 깨뜨리고 5백여 급을 참수했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6)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宮이 죽고, [宮의] 아들 遂成이 즉위했다. 遂成이 죽고, [遂成의] 아들 伯固가 즉위했다.”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길, “『朝鮮史』에는 ‘宮이 연로하여 동생인 遂成에게 양위하니 次大王이라 칭했다고 하는데, 난폭하여 국인들에게 시해당했고, 그의 동생인 伯國을 세워 新大王이라 칭했다고 한다. 즉 그가 『後漢書』, 「東夷列傳」, 〈高句麗〉 중의 伯固다. 「東夷傳」, 〈高句麗〉에서 宮이 죽고 아들 伯固가 즉위했다고 말했으니, 遂成이 누락되었을 뿐 아니라, 동생을 아들이라 하여 또한 그릇되었다.”고 하였다. 내(盧弼)가 아래 글을 보건대, 位宮이 宮의 증손이라 하였으니, 즉 [位宮의 할아버지인] 伯固는 즉 宮의 아들이라서 그 世系에 그릇됨은 없다. 그러나 范曄의 『後漢書』와 『朝鮮史』에는 모두 부합되지 않는다. 또한 惠棟이 말하길, “蔡邕集에서 東夷 高句麗의 翮子(嗣子의 오기) 伯固가 역모하여 도발하였다.”고 말한 것을 보건대, 또한 遂成이 시해된 증거라 할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7)
    〔原註〕 郝經의 『續後漢書』에서는 ‘居’를 ‘民’으로 기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8)
    〔原註〕 范曄의 『後漢書』 에서는 “順帝 陽嘉 원년(132, 太祖王 80)에 玄菟郡에 屯田 6부를 두었다. 質~桓帝 연간에 다시 遼東 西安平을 침범해 帶方令을 죽이고, 樂浪太守의 처와 자식을 사로잡았다.”고 하였다. [『後漢書』] 「郡國志」에 의하면, “帶方은 樂浪郡에 속했고, 『一統志』에 의하면, 帶方의 옛 성은 지금의 平壤 남쪽 지경이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9)
    〔原註〕 이는 靈帝 때의 일을 서술한 것이니, 응당 熹平으로 적어야 할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30)
    〔原註〕 馮本에는 ‘大’를 ‘犬’으로 기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1)
    〔原註〕 丁謙이 말하길, “伯固의 둘째 아들인 伊夷模는 『東藩紀要』에 의하면, ‘이름이 男武이고 故國川王이라 칭했다.’고 한다. 伊夷模의 아들은 位宮이고, 『東藩紀要』에 의하면 ‘東川王이라 칭했다.’고 한다. 다만 ‘東川王이 즉위하기 전에 또한 山上王이 있어 이름이 延優라 하는데, 伊夷模의 동생으로 建安 2년(197)에 즉위하여 거의 50년간 재위한 뒤에 東川王이 처음 즉위했다.’고 하니, 이 또한 누락되었다. 또 생각하건대, 位宮은 바로 太祖王 宮의 손자이고, 증손이 아니다. 또한 살펴보건대, 位宮이 毋丘儉에 의해 격파된 뒤 비로소 평양으로 옮겨 도읍한 일이 『朝鮮史』와 『東藩紀要』에 실려 있는 것이 같다. ‘作新國(새로 나라를 세웠다)’이라는 것은 山上王이 丸都山城을 쌓은 일을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吳其昌이 말하길, ‘高句麗의 도읍은 [司馬氏의] 晉나라 이전에는 지금의 압록강 북안 奉天境의 경내인 輯安·懷仁 부근에 있었다. 劉宋(南朝 宋) 이후 비로소 남쪽인 지금의 평양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吳其昌의 설은 이미 앞에서 간략히 적었고, 더 상세한 내용은 북평도서관 월간에 보인다. 姚範이 말하길, “‘今日云云’라 한 것은 아마도 옛 글을 그대로 말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2)
    〔原註〕 宋本에는 ‘宮’ 위에 ‘名’자가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33)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國人懷之’로 적혀 있다. 黃山이 말하길, “[國人懷之] 중의 ‘懷’는 응당 ‘怪’의 오기일 것이다. 예전에는 ‘懷’가 ‘怌’로 혼동되어 쓰이는 일이 많았으므로 베껴 쓰다가 잘못 적은 것이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4)
    〔原註〕 毛本에는 ‘墮’가 ‘墯’로 기재하였다. 錢大昕(淸)이 말하길, “承祚(陳壽)가 『三國志』를 지을 때는 位宮이 오래전에 이미 패망한 뒤이니, [陳壽가 位宮을 두고] ‘今王’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이전 사서의 글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5)
    〔原註〕 趙一淸이 이르길, “‘力勇’은 『太平寰宇記』에 의거해 볼 때, 응당 ‘勇力’으로 적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6)
    〔原註〕 ‘宮’은 마땅히 ‘位宮’으로 적어야 하며, 그 나머지는 같다. 北宋本에는 ‘大’를 ‘犬’으로 기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7)
    〔原註〕 『三國志』 권28, 「위지」 28, 〈毌丘儉〉에서는 正始 연간(魏 齊王 曹芳 240~248)에 毌丘儉이 여러 군사를 지휘해 高句麗를 쳤다 하였고, (正始) 6년(245)에 다시 쳤다 하였다. 『三國志』, 「齊王紀」에서는 (正始) 7년(246)에 毌丘儉이 高句麗를 쳐서 격파했다고 하였다. 아마도 군사를 씀에 수년이 걸려 이 「東夷列傳」 〈高句麗〉조는 그 시작을 기록하였고, 「齊王紀」는 그 끝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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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의 문화와 제도 자료번호 : jd.k_0004_003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