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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동이전

한(韓)의 역사

주 001
번역주 001)
한: 삼한의 韓은 한국 민족을 중국인들이 지칭하였던 濊·貊·韓 가운데 하나인 韓을 가리킨다. 한은 주로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거처하였다고 알려졌다. 일부 학자는 이 한이라는 명칭이 기자조선에 대치된 韓氏 조선 때문에 생겨난 말이라고 주장하였고(이병도, 1976), 일부 학자는 중국인들이 한반도 남부의 주민집단이 殷에서 유래한 중국계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韓이라는 명칭을 고안해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이성규, 2003). 한편 일부 고고학자는 기원전 1천 년기 중후반경에 요동 지역의 주민집단이 상당한 규모를 갖추어 서북한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 전이되었고, 이들 가운데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거처한 주민집단을 예맥과 구별하여 韓이라고 불렀다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하였다(이청규, 2011). 고조선의 準王이 衛滿에게 쫓겨 한 지역으로 가서 韓王이 되었다는 내용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전하는 것으로 보건대, 기원전 2세기 초반경에 이미 韓이라는 명칭이 존재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고조선 멸망 이후에 마한과 진한, 변한의 분립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만 현재 마한과 진한·변한이 종족적·지역적 차이에 따른 구분인지, 아니면 정치체의 차이를 반영한 것인지에 대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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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대방주 002
번역주 002)
대방: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建安 연간(196~220)에 公孫康이 屯有縣 이남의 변방[荒地]을 帶方郡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대체로 204~207년 사이에 대방군을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후한 말기에 중국 군현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韓·濊가 강성해지면서 낙랑군의 지배인구가 격감하였고, 삼한과 예에 대한 통제가 매우 어려웠다. 이에 公孫康은 낙랑군을 나누어 대방군을 설치하고, 거기에 태수를 파견하여 군현을 재정비한 다음, 한과 예 세력을 강력하게 통제하려고 의도하였다. 대방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사군의 위치 문제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 낙랑군 등이 한반도 내에 위치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방군은 황해도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이병도, 1976; 권오중, 2011). 반면에 한사군이 한반도 바깥에 위치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방군의 위치 역시 요동에 위치하였다고 파악하였다(리지린, 1964). 현재 학계에서는 전자의 견해를 수용하여 대방군의 치소를 옛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 부근으로 이해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광개토왕릉비에 永樂 14년(404)에 왜가 帶方을 침략하자, 고구려군이 이를 물리쳤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것은 대방군이 황해도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보완해주는 유력한 증거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본래 낙랑군 25현 가운데 대방현이 존재하였고, 낙랑군 남부도위 소관의 7현을 관장하였다고 알려졌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314년(미천왕 15)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고 전하는데, 이때 고구려가 대방군을 고구려의 영토에 병합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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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고, 남쪽은 왜와 접하였으며, 사방 4천 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주 003
번역주 003)
마한: 진한, 변한과 함께 삼한의 하나를 구성하며, 현재의 한반도 서남부 지역인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위치한 54개의 소국을 총칭하는 명칭이다. 마한의 성립 시기에 관하여 기원전 3세기 말경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하기 이전에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辰國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한의 성립 시기를 기원전 108년 이전으로 소급하기는 곤란하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진한의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옛 流亡民들이 秦의 부역을 피하여 韓國으로 오자,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갈라 주었다.”라고 전한다. 진의 부역을 피하여 이주한 유이민들이 마한의 동쪽, 즉 오늘날 영남 지역에 정착함으로써 진한이 성립되었음을 알려준다. 유이민 가운데 漢人이 포함된 고조선유민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위의 기록에서 진한과 변한 성립 이전 시기에 충청과 호남 지역을 망라하여 마한이 이미 존재한 것처럼 밝혔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서 인용한 『魏略』에는 “(우거왕 때에) 朝鮮相 歷谿卿이 右渠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辰國으로 갔다.”고 전한다. 이에서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 전후 사이에 진국이 해체되고, 한강 이남 서부 지역의 한의 땅에서 50여 小國이 등장하였으며, 그들을 아울러서 마한이라고 불렀다고 추론할 수 있다. 진국에서 삼한으로의 전환 과정, 그것은 바로 진국의 중심을 이룬 어떤 정치체가 마한의 목지국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韓의 땅에서 소국을 단위로 정치적 통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움직임을 사서에서 전혀 찾을 수 없다. 현재 삼한 70여 국의 성립과정을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중·남부 지역의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를 활용하는 것뿐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방법론에 의거하여 삼한 소국 문제에 접근하였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기 어렵다.
마한의 해체 시기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었다. 현재 근초고왕 대에 백제가 마한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였다고 이해한 견해가 학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이병도, 1976; 이현혜, 1984; 노중국, 1987; 천관우, 1991). 반면에 근래에 일부 학자는 5세기 후반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옹관묘를 광범하게 조영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그 이후 시기에 백제가 마한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를 제기하여 주목을 받았다. 이 견해에 따르면, 근초고왕 대에 백제가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을 정복하여 복속시키고, 웅진 천도 이후에 백제가 영산강 유역을 백제의 직접적인 영토로 편제하였다고 한다(임영진, 1995; 권오영, 1996; 강봉룡, 1997; 김영심, 1997). 한편 일부 고고학자는 옹관묘의 소멸과 백제 중앙의 묘제인 횡혈식석실분의 전파에 주목하여 6세기대에 백제가 영산강 유역을 직접적인 영역으로 편제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즉 백제의 중앙 문화가 영산강 유역에 확실하게 침투한 시기가 마한의 멸망 시기이며,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복암리 3호분에서 발견된 금동신발의 사용자를 마한을 대표하는 지배자로 볼 수 있고, 백제가 6세기대에 이들 지역을 영역으로 편제하면서 횡혈식석실분이 널리 조영되었다는 것이다(박순발, 1998; 김낙중, 2011; 서현주,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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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 둘째는 진한주 004
번역주 004)
진한: 마한·변한과 함께 삼한의 하나를 구성하며, 현재의 한반도 동남부 지역인 낙동강 동안의 경상도 지역에 위치한 12개의 소국을 총칭하는 명칭이다. 본서 진한조에,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그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옛 유망인[亡人]들이 秦의 賦役을 피하여 韓國으로 오자, 馬韓이 그 동쪽 경계의 땅을 갈라 주었다.’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이것은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 이미 마한의 소국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영남 지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녔다. 秦은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였다가 기원전 207년에 멸망하였고, 우거왕이 고조선의 왕으로 재위할 무렵에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마한이 아니라 분명하게 진국이 존재하였다. 따라서 진나라의 부역을 피하여 중국 사람들이 한국으로 유망하였다고 전하는 기록의 내용을 그대로 수긍하기 어렵다. 아마도 중국인들이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 마한이 성립된 이후에 고조선 유민과 영남 지역으로 이주한 사실을 그들이 마치 진의 부역을 피하여 유망하였다고 附會하여 중국 사서에 기록하였다고 짐작된다. 본서에서 인용한 『위략』에 王莽의 地皇 연간(20~23)에 이르러 진한의 右渠帥인 廉斯鑡가 낙랑군에 망명하려고 가다가 漢人인 戶來를 만났고, 낙랑군이 그로부터 목재를 벌채하다가 韓人에게 공격받아 노비가 된 漢人 1,500명 가운데 3년 만에 500명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진한을 위협하자, 진한이 그 대가로 辰韓人 1만 5천 인과 牟韓(弁韓) 布 1만 5천 필을 내주었다고 전한다. 이에 따른다면, 진한과 변한이 지황 연간 이전에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진한 소국은 처음에 6개였다가 후에 12개로 늘어났다고 전하는데,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진한 소국 가운데 사로국왕으로 추정되는 진한왕이 3세기 후반에 진한 지역을 대표하여 西晉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보건대, 사로국이 3세기 후반에 진한의 맹주국으로 부상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대체로 진한 소국은 5~6세기 초반의 마립간 시기에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이현혜, 1984; 권오영, 1996; 주보돈,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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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는 변한주 005
번역주 005)
변한: 마한, 진한과 함께 삼한의 하나를 구성하며, 현재의 한반도 동남부 지역인 낙동강 서안의 경남 지역에 위치한 12개의 소국을 총칭하는 명칭이다. 변진(弁辰)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변한은 진한과 마찬가지로 地皇 연간(20~23) 이전에 북방에서 이주한 유이민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변한 소국은 대체로 가야 소국과 연결되었고, 그 가운데 弁辰狗邪國(경남 김해)이 후에 금관가야로 불리면서 전기가야연맹을 이끌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후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5세기에 고령의 대가야가 세력을 크게 신장시켜 후기가야연맹을 주도하다가 562년에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백승충, 1995; 김태식, 2002; 주보돈, 2002; 박대재, 2006; 백승옥,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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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진한은 옛 진국주 006
번역주 006)
진국: 『後漢書』, 「동이열전」 한조의 주 참조.
〔原註〕 趙一淸이 말하기를, “弁韓을 『後漢書』에서는 弁辰으로 표기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弁辰은 별개의 다른 나라이므로 여기서는 당연히 弁韓으로 기술하여야 하고, 三韓의 숫자에도 당연히 맞으니, 내(盧弼)가 보기에는 范氏(범엽)가 틀린 것 같다. 王會汾이 말하기를, “晉書와 梁書의 두 책에서는 모두 弁韓으로 기술하였다.”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기를, “三韓에서는 馬韓이 가장 컸는데, 그 땅은 충청, 전라의 2道와 경상도의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辰韓과 弁韓은 오직 경주 일대뿐이었다. 朝鮮史에서 비록 삼한이 分立했다고 언급하였으나 실제로 진한, 변한 두 나라는 마한의 지배를 받았고 그 형세가 (마한과) 서로 필적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였다. 盧弼(三國志集解 著者)이 보건대, 『漢書』, 「朝鮮傳」에서 “眞番, 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해도 조선이 이를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였고, 顔師古가 (이를) 注하여 “辰은 辰韓의 나라를 일컫는다.”고 하였다. 『後漢書』 光武帝紀에서, “建武 20년(44) 가을에 東夷 韓國人이 무리를 이끌고 樂浪(郡)으로 와서 內附하였다.”고 하였고, 章懷太子(李賢)가 이를 注하여 “東夷에 辰韓, 弁韓, 馬韓이 있어 이를 일컬어 三韓國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梁書(新羅傳)에서는 “辰韓에는 처음 6國이 있었으나 점차 나뉘어 12국이 되었는데, 新羅는 그중 하나였다.”라고 하였고, (百濟傳에서는) “馬韓에는 54國이 있었는데, 백제는 그중 하나였다.”라고 하였다. 舊唐書에서는, “百濟國은 馬韓의 옛 땅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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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다. 그 주민들은 정착생활을 하며, 농사를 짓는다. 양잠을 할 줄 알았고, 면포를 짰다주 007
번역주 007)
양잠을 할 줄 알았고 면포를 짰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실을 만드는데 필요한 방추차가 출토되고 있지만, 언제부터 누에를 쳐 잠사를 뽑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삼한 시기에는 기록에서와 같이 누에를 쳐 면포를 생산하였고, 실물자료도 광주 신창동유적에서 확인되었다. 신창동유적에서 출토된 직물은 칠기용기 내부에 부착된 1점과 현장에서 수습한 2점이다(조현종,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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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기 우두머리가 있는데, 큰 자는 스스로 신지라고 부르고, 그 다음은 읍차라고 불렀다. 산과 바다 사이에 산재해 있고, 성곽은 없다주 008
번역주 008)
성곽은 없다: 이 기사는 돌로 쌓은 성곽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당시에 방어를 위하여 土城을 쌓거나 취락 주위에 環濠를 두르거나 木柵을 세웠음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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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한에는] 원양국주 009
번역주 009)
원양국: 경기도 화성시 남양면 일대(이병도, 1976) 또는 경기도 파주나 연천 방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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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수국주 010
번역주 010)
모수국: 광개토왕릉비에서 고구려가 정복하였다고 전하는 牟水城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추정된다. 종래에 경기도 수원시 일대(이병도, 1976)나 경기도 양주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하였으나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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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외국주 011
번역주 011)
상외국: 경기도 수원시 장안 지역, 화성시 우정면 일대(이병도, 1976)나 경기도 파주·연천 방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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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석색국주 012
번역주 012)
소석색국: 大石索國이 존재한 것으로 보아, 석색국이 대, 소로 분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9 경기도 남양도호부 고적조에 부 33리 되는 곳에 石山城이 있다고 전하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18년조에 전하는 북위에 보낸 國書 가운데 “지난 庚辰年 후에 우리나라(백제) 서쪽 경계의 小石山北國 바다 가운데서 시체 10여 개를 발견하고 습득하였는데, 살펴보니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두 기록에 보이는 석산성, 소석산이 바로 대·소색국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되며, 이를 통하여 두 나라가 경기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종래에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여 소색국을 경기도 서해의 어떤 섬으로 비정한 견해(이병도, 1976)가 제기되었다. 반면에 이것을 구체적으로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천관우, 1989)도 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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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석색국주 013
번역주 013)
대석색국: 소색국과 인접하거나(이병도, 1976) 또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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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휴모탁국주 014
번역주 014)
우휴모탁국: 우휴의 半切은 主(Ju)와 통하는 점, 모탁은 水堤의 뜻인 점 등을 주목하여 우휴모탁국을 고구려의 主夫吐郡(경기도 부천시와 인천광역시 부평구), 즉 長堤郡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이 밖에 우휴를 牛首 또는 牛頭와 연결시켜 우휴모탁국을 강원도 춘천시로 비정하는 견해(천관우, 1989), 백제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優台와 연결시켜 경기도 개풍·파주·김포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김기섭, 1993)가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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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분고국주 015
번역주 015)
신분고국: 신분고국은 百衲本[남송 紹興本]을 비롯하여 소흥본·소희본·촉각소자본 등에 의거한 표기이다. 한편 남감본·급고각본·무영전본 등에서는 신분활국(臣濆活國)이라 표기하였고, 『翰苑』 所引 魏略에서는 臣濆沾國이라고 표기하였다. 신분고국 다음에 伯濟國이 보이고 있어, 일반적으로 전자는 후자보다 더 북쪽에 위치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 종래에 이에 근거하여 신분고국을 경기도 가평군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천관우, 1989). 이와 더불어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이나 경기도 가평 지역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고(이병도, 1976), 근래에 파주시 육계토성을 신분고국의 중심지로 추정한 견해가 제출되기도 하였다(정재윤, 2001).
〔原註〕 北宋本에서는 活을 沽라고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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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국주 016
번역주 016)
백제국(伯濟國): 후대의 百濟이다. 백제국의 중심지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지만, 근래에 서울시 송파구에 위치한 풍납토성을 백제국의 왕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널리 수용되고 있다. 부여족의 일파인 온조계 집단이 한강 유역인 하북위례성을 중심으로 소국을 형성하여 十濟라고 불렀고, 초고왕 대에 온조계 집단이 미추홀집단을 흡수하여 연맹체를 형성한 후에 수도를 하남위례성으로 옮기고, 국호를 십제에서 백제(伯濟 또는 百濟)로 바꾸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노중국, 1988). 이와 더불어 4세기 이후에 백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맹세력이 목지국과 영산강 유역 중심의 연맹세력을 압도하고 점차 집권적인 국가로 발전하면서 국호를 伯濟에서 百濟로 개칭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권오영, 1996).
〔原註〕 伯濟國은 곧 百濟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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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로불사국주 017
번역주 017)
속로불사국: 『삼국사기』 지리지 한주조에 長堤郡의 영현인 戍城縣이 본래 고구려 首尒忽이라고 전하는데, 首尒와 戍는 ‘수리’, ‘술’의 借字로 速盧와 상통한다. 한편 한주조에 장제군의 영현인 分津縣이 본래 고구려 平准押縣이었다고 전하고, 고구려 한산주조에서 평준압현을 또는 別史波衣라고 부른다고 하였는데, 별사와 不斯는 통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종래에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속로불사국을 옛 경기도 통진 지역(현재의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월곶면 일대)으로 비정한 견해(이병도, 1976)가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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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화국주 018
번역주 018)
일화국: 경기도 양평·지평 방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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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탄자국주 019
번역주 019)
고탄자국: 경기도 양평·지평 방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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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리국주 020
번역주 020)
고리국: 『삼국사기』 지리지 한주조에서 漢陽郡의 영현인 荒壤縣이 본래 고구려 骨衣奴縣이라고 전한다. 한편 광개토왕릉비에 고구려가 백제에게서 빼앗은 성 가운데 古利城이 보인다. 骨衣와 古利가 古離와 상통한다고 이해하여 고리국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하고 있다(이병도, 1976). 반면에 泝川郡의 영현인 黃驍縣이 본래 고구려 骨乃斤縣임을 주목하여 고리국을 경기도 여주시로 비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천관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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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람국주 021
번역주 021)
노람국: 경기도 이천시 음죽면 일대(이병도, 1976)나 경기도 이천시 율면·음죽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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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지국주 022
번역주 022)
월지국: 『翰苑』에 인용된 『魏略』이나 『후한서』의 「동이열전」과 『通典』에는 目支國으로 표기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月은 目의 오자로 보고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月支國으로 이해하고 있기도 하다. 목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직산(이병도, 1976), 인천(천관우, 1989), 전북 익산(정약용; 한진서; 박찬규, 2010)으로 보는 해가 제기되었다. 근래에 마한 소국들을 포괄할 수 있는 중심 위치이면서도 중국과의 교류가 편리한 충남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체적으로 아산만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이현혜, 1997; 이도학, 1998)와 천안 청당동유적을 그 중심지로 이해하는 견해(권오영, 1996)가 제기되었다. 반면에 일부 학자는 초기에 목지국이 전북 익산에 위치하였다가 후에 충남 예산으로 옮겼다는 견해(김정배, 1985), 초기에 목지국이 천안 직산이나 평택, 성환 일대에 위치하였다가 근초고왕 대 이후에 전남 나주로 옮겼다는 견해(최몽룡, 1986)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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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리모로국주 023
번역주 023)
자리모로국: 경기도 이천시의 일부로서 노람국과 인접한 소국이라고 추정하거나(이병도, 1976) 또는 충남 서산시 지곡면 일대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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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건국주 024
번역주 024)
소위건국: 당이 백제고지에 설치한 熊津都督府의 속현인 散昆縣의 ‘산곤’과 ‘소위건’의 음상사에 주목하여 소위건국을 충남 보령시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천관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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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원국주 025
번역주 025)
고원국: 충남 당진군 우강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나(천관우, 1989)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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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로국주 026
번역주 026)
막로국: 막로국은 본서에 2번 나온다. 잘못 중복된 것인지, 아니면 본래 서로 다른 나라였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한원』 所引 위략에서는 莫盧卑離國이라고 하였다. 종래에 이를 근거로 막로국과 비리국을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천관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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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리국주 027
번역주 027)
비리국: 卑離는 들판을 의미하는 夫里·伐·發·弗·火와 같은 뜻을 지닌 말로서 흔히 국읍명 끝에 붙는 것으로 알려졌다. 종래에 비리국은 卑卑離國의 脫誤로 이해한 다음, 신라의 옥구 군 澮尾縣의 본래 이름인 夫夫里縣의 ‘夫夫里’와 ‘卑卑離’의 음상사를 근거로 하여 비비리국을 전북 군산시 회현면 일대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한편 막로국과 서로 연결시켜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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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리비국주 028
번역주 028)
점리비국: 『한원』 所引 위략에서는 古卑離國이라고 표기하였다. 이를 수용하여 전북 고부군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이병도, 1976). 반면에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89).
〔原註〕 馮本에서는 卑를 甲이라고 표기하였으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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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흔국주 029
번역주 029)
신흔국: 충남의 옛 진잠현(대전시 유성구 진잠동)이나(이병도, 1976) 온양 방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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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침국주 030
번역주 030)
지침국: 당이 백제고지에 설치한 支潯州의 속현 支潯縣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종래에 이에 근거하여 지침국을 일반적으로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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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로국주 031
번역주 031)
구로국: 『삼국사기』 지리지 웅주조에 任城郡의 영현인 靑正縣이 본래 백제 古良夫里縣이라고 전한다. ‘良’은 ‘라’로 독음되고, ‘부리’는 들을 가리킨다. 종래에 ‘구로’와 ‘고라’의 음이 비슷하다고 이해하여 구로국을 충남 청양군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하였다(이병도, 1976; 천관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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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미국주 032
번역주 032)
비미국: 충남 서천군의 일부나 서천군 비인면 일대에 위치한 소국(이병도, 1976)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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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해비리국주 033
번역주 033)
감해비리국: 조선시대에 현재 충남 홍성군 금마면이 大甘介面이었다. ‘감해’와 ‘감개’의 음상사에 주목하여 종래에 감해비리국을 충남 홍성군으로 비정하였다(이병도, 1976). 이와 달리 충남 공주시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천관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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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포국주 034
번역주 034)
고포국: 충남 부여군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나(천관우, 1989)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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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리국국주 035
번역주 035)
치리국국: 충남 서산시 지곡면 일대(이병도, 1976)나 서천군 한산면 일대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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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로국주 036
번역주 036)
염로국: 종래에 ‘冉’을 ‘甘’의 오기로 이해한 다음, 당이 백제고지에 설치한 魯山州의 州治인 노산현의 옛 이름이 甘勿阿인 점을 주목하여, 염로국을 전북 익산시 함열 일대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천관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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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림국주 037
번역주 037)
아림국: 『삼국사기』 지리지 웅주조에 西林郡이 백제 舌林郡이라고 전한다. 종래에 ‘舌林’과 ‘阿林’을 연결시켜 아림국을 충남 서천군 서천읍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하였다(那珂通世,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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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로국주 038
번역주 038)
사로국: 『삼국사기』 지리지 웅주조에 潔城郡의 영현인 新良縣이 본래 백제 沙尸良縣으로 전한다. 일반적으로 ‘尸’는 ‘ㄹ’ 받침을 나타내고, ‘良’이 ‘라’로 독음된다고 알려졌다(양주동, 1965). 따라서 ‘沙尸良’은 ‘살라’ 또는 ‘사라’로 독음이 가능하다. 한편 고구려의 5부의 명칭에 대하여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노(奴)’라고 표기하였음에 반하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나(那)’로 표기하였음이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盧’와 ‘羅’도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종래에 이와 같은 사실을 주목하여 사로국을 충남 홍성군 장곡면 일대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鮎貝房之進, 1931; 이병도, 1976). 이와는 달리 충남 논산시 은진면 방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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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비리국주 039
번역주 039)
내비리국: 비리(卑離)는 들(평야)을 가리키는 부리(夫里)를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종래에 백제 노사지현(奴斯只懸)과 내비리국을 연결시켜 대전시 유성구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천관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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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해국주 040
번역주 040)
감해국: 종래에 ‘感奚’를 ‘개’, ‘고마개’ 등으로 독음하고, 함열에 熊浦(곰개)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감해국을 전북 익산시 함열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한편 ‘감해’를 金馬渚 또는 당이 백제고지에 설치한 魯山州의 속현인 支牟縣의 본래 이름인 只馬馬知를 연결시켜 전북 익산시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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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로국주 041
번역주 041)
만로국: 『삼국사기』 지리지 전주조에 臨陂郡의 영현인 沃溝縣이 본래 백제 馬西良縣이라고 전한다. 또한 당이 백제고지에 설치한 웅진도독부의 속현인 歸化縣이 본래 麻斯良이었다고 한다. 종래에 만로국을 마서량 및 마사량과 연결시켜 전북 군산시 옥구읍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천관우, 1989). 한편 西林郡의 영현인 藍浦縣의 본래 이름인 백제 寺浦縣의 ‘사포’에서 ‘寺’는 ‘마을’ 또는 ‘말’로 독음된다고 이해하여 만로국을 충남 보령시 남포면으로 비정한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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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비리국주 042
번역주 042)
벽비리국: 신라의 金堤郡이 본래 碧骨郡인 점에 주목하여 벽비리국을 전북 김제시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하거나(이병도, 1976; 천관우, 1989), 陵城郡의 영현인 富里縣이 본래 백제 波夫里縣이었던 사실을 근거로 하여 벽비리국을 전남 보성군 복내면 일대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이병도, 1976). 최근에 이도학은 내비리국을 나주 반남 지역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이도학,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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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사오단국주 043
번역주 043)
구사오단국: 『삼국사기』 지리지 무주조에 岬城郡의 영현인 珍原縣이 본래 백제 丘斯珍兮縣이라고 전한다. 『삼국사기』 지리지 명주조에 奈城郡의 영현인 子春縣이 본래 乙阿旦縣이었다고 전하고, 『鷄林類事』에서 ‘男兒曰丫妲’이라고 하였다. 男兒, 즉 아들을 고려시대에 ‘아달(아)’이라고 불렀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것을 주목하건대, 을아단현에서 ‘아단’은 ‘子’에 대응되고, 阿旦은 ‘아달(아)’로 읽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서 고대에 ‘旦’을 ‘달()’로 읽었음을 살필 수 있음은 물론이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 웅진도독부조에 分嵯州의 영현인 貴旦縣이 본래 仇斯珍兮이었다고 전하는데, 여기서 貴는 仇斯, 旦은 珍에 대응됨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고대에 ‘진(珍)’은 ‘돌’로 발음하였다. 『일본서기』 권제9 중애천황(仲哀天皇) 9년 겨울 10월조에 ‘微叱已知波珍干岐’가 나오는데, 파진간기를 고대 일본인들이 ‘はとりかんき’라고 읽었다고 전하고, 이를 통하여 珍을 ‘とり’, 즉 ‘돌’로 읽었음을 살필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백제조에서 임실군의 영현인 馬靈縣의 옛 이름 馬突을 다른 말로 馬珍이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珍을 突로 읽었음을 시사해주는 좋은 증거의 하나다. 이처럼 ‘旦’을 ‘달’로. ‘진’을 ‘돌’로 독음하였다고 할 때, 구사오단과 구사진혜는 그 음이 서로 비슷하였다고 보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종래에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여 구사오단국을 전남 장성군 진원면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한편 신라 전주(全州)의 영현인 金溝縣이 본래 백제 仇知只山縣인 사실을 주목하여 구사오단국을 전북 김제시 금구면 일대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천관우, 1989).
〔原註〕 宋本에서는 臼를 라고 표기하였으니, 곧 匊字이다. 臼와 는 서로 다른 글자인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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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리국주 044
번역주 044)
일리국: 『일본서기』 권9 神功皇后 攝政 49년 봄 3월조에 比利·辟中·布彌支·半古 4읍이 보이는데, 종래에 이 가운데 比利를 일리국과 연결시켜 그것을 전북 부안·태인 방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였다(천관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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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미국주 045
번역주 045)
불미국: 종래에 불미국은 不彌知國의 오기로 이해한 다음, 당이 백제고지에 설치한 帶方州의 속현인 布賢縣이 본래 巴老彌였고, 파로미와 ‘發羅’가 통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불미국을 전남 나주시에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한편 『일본서기』 권9 神功皇后 섭정 49년 봄 3월조에 전하는 比利, 辟中, 布彌, 支半古 4邑 가운데 포미와 연결하여 불미국을 전남 나주나 전북 부안·태인 방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천관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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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반국주 046
번역주 046)
지반국: 『일본서기』 권9 神功皇后 섭정 49년 봄 3월조에 전하는 比利, 辟中, 布彌, 支半古 4邑 가운데 지반고와 연결하여 지반국을 전북 부안·태인 방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천관우, 1989).
〔原註〕 宋本에서는 支를 犮이라고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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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소국주 047
번역주 047)
구소국: 古阜郡의 본래 이름인 古沙夫里郡과 『일본서기』 권9 神功皇后 섭정 49년 봄 3월조에 전하는 古四邑과 연결하여 구소국을 전북 정읍시 고부면·고사 방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였다(천관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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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첩로국주 048
번역주 048)
첩로국: 전북 정읍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나(천관우, 1989)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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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로비리국주 049
번역주 049)
모리비리국: 신라 무주 武靈郡의 영현인 高敞縣의 본래 이름인 牟良夫里縣과 모로비리가 그 음이 서로 통한다. 따라서 모로비리국은 전북 고창에 위치한 소국으로 이해된다(이병도, 1976; 천관우, 1989; 신채호,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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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소도국주 050
번역주 050)
신소도국: 종래에 신소도국에서 ‘臣’은 臣智의 ‘臣’과 마찬가지로 ‘大’의 뜻으로 이해하여 신소도국을 ‘대소도국’이라고 파악한 다음, 정치 지역에 있어 맹주국인 辰王의 目支國이 있듯이 蘇塗에도 종교적인 대소도에 해당한다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하였다(이병도, 1976). 이와 더불어 신라 웅주 富城郡의 영현인 蘇泰縣의 본래 이름이 省大兮縣인 점을 주목하여 신소도국을 충남 태안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전북 고창군 흥덕면 일대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천관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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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로국주 051
번역주 051)
막로국: 같은 이름이 두 번째 나온 것이다. 한편 이를 앞의 것과 분리하여 전남 영광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박찬규, 2013).
〔原註〕 錢大昭가 말하기를, “莫盧國은 이미 앞 글에 보인다. 이것은 중복하여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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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랍국주 052
번역주 052)
고랍국: 『삼국사기』 지리지 전주조에 南原小京이 본래 백제 古龍郡으로 전한다. 종래에 ‘고랍’과 ‘고룡’의 음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고랍국을 전북 남원시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였다(이병도, 1976). 한편 신라 무주 岬城郡의 본래 이름인 武尸伊縣과 고랍국을 연결시켜 전남 장성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박찬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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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소반국주 053
번역주 053)
임소반국: 전북 군산시 옥구읍(이병도, 1976), 또는 전남 광주시 광산구 또는 나주시 방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 또는 나주시에 위치한 소국(박찬규, 2013)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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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운신국주 054
번역주 054)
신운신국: 본서에 辰王의 加優呼 가운데 ‘臣雲遣支報’가 보이는데, ‘신운’은 바로 신운신국을 가리킨다. 이로 보아 신운신국은 마한 소국 가운데 상당한 위상을 지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종래에 광주광역시 광산구 또는 전남 나주시 방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나주시에 위치한 소국(박찬규, 2013)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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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래비리국주 055
번역주 055)
여래비리국: 신라 전주 德殷郡의 영현 礪良縣과 연결시켜 여래비리국을 전북 익산시 여산면 일대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거나(이병도), 또는 신라 무주 陵城郡의 본래 이름인 尒陵夫里郡과 연결하여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였으나(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박찬규, 2013)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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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산도비리국주 056
번역주 056)
초산도비리국: 종래에 초산도비리국을 ‘초산도’와 ‘비리국’의 2국으로 이해한 다음,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4 전라도 정읍현조에서 정읍을 ‘楚山’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하는 사실을 주목하여 초산도를 전북 정읍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한편 초산도비리국을 전남 진도군 군내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박찬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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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난국주 057
번역주 057)
일난국: 신라 영암군의 옛 이름 月奈郡과 연결하여 일난국을 전남 영암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나(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박찬규, 2013)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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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해국주 058
번역주 058)
구해국: 『일본서기』 권9 神功皇后 섭정 49년 봄 3월조에 古奚津이 보인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7 전라도 강진군 고적조에 舊溪所가 현 남쪽 37리에 있다고 전한다. 종래에 ‘舊溪’와 ‘狗奚’ 및 ‘古奚’가 음이 비슷하다고 여겨 구해국을 전남 강진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이와 달리 신라 무주 陽武郡 영현인 固安縣의 본래 이름인 古西伊縣을 구해국과 연결하여 전남 해남군 마산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박찬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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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운국주 059
번역주 059)
불운국: 충남 공주시 서부지방(이병도, 1976) 또는 전남 보성군 복내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 이영문, 2002)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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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사분야국주 060
번역주 060)
불사분야국: 『삼국사기』 지리지에 分嵯郡을 혹은 夫沙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불사분야국을 夫沙와 연결시켜 전남 순천시 낙안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또는 보성군과 고흥군 일대로 추정하기도 한다(박찬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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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지국주 061
번역주 061)
원지국: 신라 昇平郡의 영현인 海邑縣의 본래 이름인 猿村縣과 연결하여 원지국을 전남 여수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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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마국주 062
번역주 062)
건마국: 신라의 金馬郡과 백제 金馬渚의 ‘금마’와 ‘건마’가 상통한다고 보아, 건마국을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한다(이병도, 1976; 김정배, 1976; 노중국, 2001; 송호정, 2015). 이와 달리 신라 보성군의 영현인 馬邑縣의 본래 이름인 古馬彌知縣과 연결하여 건마국을 전남 장흥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한 견해도 있다(천관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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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리국주 063
번역주 063)
초리국: 신라 무주 分嶺郡의 영현인 忠烈縣의 본래 이름인 助助禮縣과 연결하여 초리국을 전남 고흥군 남양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나(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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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무릇 50여 국이 있다주 064
번역주 064)
무릇 50여 국이 있다: 본문에 언급된 소국은 55국이다. 이 가운데 莫盧國은 두 번 나오므로 실질적으로 54국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後漢書』, 「東夷列傳」에서는 54국이라고 하였다.
〔原註〕 범엽의 『후한서』에서는 “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개국이 있고, 그 북쪽은 樂浪, 남쪽은 倭와 잇닿아 있다.”고 이르렀다. 『滿洲源流考』 권2에서 “(살펴보건대) 三韓의 統名(총칭)은 辰國이고 한나라 초부터 이미 보인다. 뒤에 신라, 백제에 의해 겸병되었다. 그 78국의 이름은 魏志(『삼국지』, 「한전」)에 갖추어 실려 있는데, 監奚卑離, 內卑離, 辟卑離, 如來卑離와 같이 卑離 두 글자에 연계된 국명이 많다. 滿洲語로 이를 고찰해보면, 응당 (卑離는) 貝勒(베일러)의 轉音(음이 변한 것)으로 汗이 와전되어 韓이 된 것과 똑같으며, 三汗이 여러 貝勒을 統帥하니 체제에 있어 흡사하고 서로 부합한다. 馬韓에 이르러 또한 慕韓으로도 적고, 辰韓은 또한 秦韓으로도 적으며, 弁韓은 또한 弁辰이나 卞韓으로도 적는다. 尙書傳에서 扶餘馯이라 아울러 칭했고, 正義에서 馯은 즉 韓이라고 이르렀다. 당시의 다만 諧音(비슷한 음)일 뿐이고, 모두 漢語가 아니다. 范蔚宗(범엽)이 처음으로 ‘韓國’, ‘韓人’이라고 칭하였고, 魏志(『삼국지』, 「한전」)에서는 마침내 ‘韓地’, ‘韓王’이란 말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거짓으로 ‘韓氏’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弁韓도 삼한 중에 있었으나 그에 관해 기재한 바가 유독 적다. 史記 중의 眞番에 관한 (史記集解의) 注에서 ‘番의 음은 普와 寒의 반절’이라고 하였다. 遼東(郡)에 潘汗縣이 있었는데, 혹 (潘汗은) 弁韓의 轉音인 듯하나 역시 확정할 수 없다. 간혹 三韓이 高麗가 되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宋史 高麗傳에서 起因한 것 같으니, “(북송 휘종) 崇寧 연간(1102~1106) 뒤에 (고려가) 三韓通寶를 주조하였다.”는 글이 있고, 또한 遼史 外紀에 “遼나라 때에 항상 三韓國公을 고려의 封號로 삼았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삼한 땅이 모두 고려에 편입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고, 고려의 경역이 또한 삼한이 통할하던 곳(의 일부)에 속함은 알지 못하였으니, 당시에 假借해서 쓴 것을 매우 깊게 詳考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리고 요나라의 三韓縣에 이르러서는 고려의 俘戶(포로)를 취해 설치한 것으로, 그 옛 영역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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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국은 1만여 가이고, 소국은 수천 가이며주 065
번역주 065)
〔原註〕 毛本에서는 小를 千이라고 썼으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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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합하여 십여만 호이다. 진왕주 066
번역주 066)
진왕: 종래에 『후한서』, 「한전」의 기록에 의거하여 진왕을 삼한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파악하였다(이병도, 1976). 즉 진왕은 목지국을 거점으로 하여 여러 소국과의 宗主·附庸 관계를 기본으로 하면서 소국들을 대표하여 중국 군현과의 외교 교섭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한편 여기에 나오는 진왕은 한강 유역에 정착한 백제국의 왕으로 보고, 변진조에 나오는 진왕은 신라왕으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6; 문창로, 1997)도 있다. 대개 여기에 언급된 진왕은 마한연맹체의 장(長)이며, 그 치소(治所), 즉 목지국을 마한의 領導國으로 본다. 이 진왕을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진(辰) 지역(금강 중·하류 유역)을 통치하던 역사적 존재라고 한정하여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박대재, 2002). 이 밖에 진왕이 諸韓國首長의 상호관계를 조정하면서 대중국 교섭을 수행해나가는 대외적 대표로서 목지국의 신지와 동일한 장소를 치소로 하는 별도의 왕인데, 3세기 초에 요동의 公孫氏가 중국 대외교역에 정통한 마한인을 시켜서 진왕으로 임명하고 그 지위를 세습시킨 것이라고 보는 견해(武田幸男, 1995; 1996; 윤선태, 2001)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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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월지국을 다스리며, 신지를 혹은 더 우대하여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 안야축지(安邪踧支) 분신리아불례(濆臣離兒不例) 구야진지렴(狗邪秦支廉)’주 067
번역주 067)
신운견지보 안야축지 분신리아불례 구야진지렴: 종래에 이 부분에 나오는 臣雲遣支報는 마한 臣雲(新)國의 견지보[險側?], 安邪踧支는 弁辰安邪國의 축지[臣智?], 濆臣離兒不例는 마한 臣濆沽國[濆臣은 臣濆의 도치로 이해]의 불례[樊濊?], 狗邪秦支廉은 弁辰狗邪國의 진지[臣智?] 렴(廉은 인명?)으로’ 해석하였다(이병도, 1976). 여기서 종래에 논란이 분분하였던 문제는 더 우대하여 부른 호칭, 즉 加優呼의 주체에 관해서이다. 종래의 견해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진왕이 신지에게 혹 우호를 더 내린다고 해석하는 견해인데, 이 경우 긴 우호 전체를 하나로 보아 진왕이 목지국의 신지에게 내린 것으로 보는 견해(武田幸男, 1995; 1996), 진왕이 4국의 신지들에게 각 해당 우호를 더 내려준 것으로 보는 견해(노중국, 1990; 윤선태, 2001)로 나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4국의 신지들이 진왕에게 혹 해당 우호를 추가하여 준다고 해석하는 견해인데, 이는 4국의 신지들이 이 긴 우호를 진왕에게 추가하여 그를 진왕으로 추대하였다는 의미와 통한다(井上幹夫, 1978). 이 밖에 여타 제국의 신지 중 목지국의 진왕처럼 일반적인 신지 명칭에 만족하지 못하고 특별히 加優呼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권오영, 1996; 박대재, 2002). 이 기사의 성격에 대한 견해로는, 진왕이 중국과 교역할 때 실질적으로 각 소국들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마한과 변한 제국 가운데 이들 대국의 신지들의 칭호를 연명해야 했는데, 『삼국지』의 찬자가 이를 ‘우호’로 착각한 것이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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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그 관직에는 위솔선읍군주 068
번역주 068)
위솔선읍군: 漢은 변방의 모든 세력에 대하여 그 규모에 따라 王·侯·邑君·邑長 등의 관작을 수여하였다. 동옥저전과 예전에 領東 7현의 渠帥를 侯로 삼았다고 전하는데, 실제로 不耐濊侯의 존재가 확인된다. 평양 정백동 1호분에서 출토된 인장에 새겨진 ‘夫租薉君’은 부조 지역의 지배자에게 읍군이란 관작을 수여하였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삼한에도 廉斯地域의 거수인 蘇馬諟에게 ‘漢廉斯邑君’을 사여한 사실 및 景初 연간(237~239)에 위나라가 여러 韓國의 신지들에게 邑君의 印綬를, 그 다음의 지배자에게는 邑長의 인수를 더하여 주었음이 확인된다. 결국 魏率善邑君은 위나라가 마한의 신지들에게 수여한 관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率善’은 ‘선하게 따른다’는 의미이고, ‘歸義’와 동일한 뜻으로서 이민족이 중국의 德에 歸服한다는 것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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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의후주 069
번역주 069)
귀의후: 『後漢書』, 「百官志」에 四夷國王·率衆王·歸義侯·邑君·邑長이 있고, 이들은 각기 부관인 丞을 두었다고 전한다. 귀의라는 말은 한대(漢代)에 처음 사용하였는데, 모두 蠻夷, 즉 한에 歸順한 이민족의 지배자에게만 수여한 것이다. 이들 이민족의 지배자에게 그들의 세력기반 규모에 따라 국왕, 솔중왕, 귀의후, 읍군, 읍장이란 칭호를 내려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漢委奴王’, ‘晉帰義氐侯’, ‘晉烏丸帰義侯’, ‘晉鮮卑帰義侯’ 등의 인장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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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랑장주 070
번역주 070)
중랑장: 중랑장은 秦代에 처음 설치한 관직으로 郎中領의 屬官이었다. 三署郞을 거느리고 宿衛하면서 宮殿과 後宮의 門戶를 지키는 일을 담당하였다. 前漢에서도 역시 진의 제도를 계승하여 이 관직을 설치하였는데, 光祿勳이 이들을 관할하였다. 후한은 동·서·남·북 등 4중랑장을 더 설치하였다. 또 虎賁中郞將과 羽林中郞將 등이 있었다. 그 밖에도 ‘使匈奴中郞將’과 같이 임시로 설치된 중랑장이 있었는데, 이들을 雜中郞將이라고 하였고, 率善中郞將도 그중 하나이다. 秩祿은 比二千石이고, 그 지위는 將軍 다음이었다. 魏晉王朝 이후에는 지방에서 각각 스스로 官署와 官號를 설치하였는데, 중랑장이란 관호가 가장 많았다. 隋代에는 ‘中’자를 避諱하여 낭장으로 줄였다. 唐代에 다시 중랑장을 설치하고, 이들을 諸衛의 대장군과 장군에 예속시켰다(兪鹿年 編著, 1992, 『中國官制大辭典』, 黑龍江人民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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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위주 071
번역주 071)
도위: 漢代의 관직명으로서 주로 郡의 군사 및 경찰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前漢에서 본래 郡尉라고 부르다가 景帝 2년(기원전 155)에 郡守를 郡太守로 개칭하면서 군위를 도위로 고쳤다. 도위는 태수를 보좌하고, 군의 군사 및 경찰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官秩은 比二千石이었다. 통상 군의 경우, 1명이 정원이었지만, 변경군에는 1군에 복수의 도위를 두기도 하였다. 그 경우는 西部都尉, 中部都尉 등으로 불렀는데, 기원전 82년에 낙랑군에 東部都尉와 南部都尉를 두어서 領東 7현과 옛 진번 지역을 관할하기도 하였다. 副官에 丞이 있었다. 후한 광무제 건무 6년(30)에 변경을 제외하고 도위를 폐지하고, 태수가 그 직무를 겸임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임시로 도위를 설치하였다. 전한에는 關所에 설치한 關都尉, 변경 군에 농사를 관장한 農都尉, 屬國을 관장한 속국도위를 두었지만, 후한에서는 이 가운데 속국도위만을 남겨두었다. 그러면서 이와는 별도로 騎都尉, 奉車都尉 등 일부의 무관에 도위란 명칭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 위나라에서도 군태수 밑에 군사와 경찰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군도위를 두었고, 이 밖에 將兵都尉, 撫軍都尉, 積弩都尉(후에 典弩都尉로 개칭), 典鎧都尉 등도 설치하였음이 확인된다(兪鹿年 編著, 1992, 『中國官制大辭典』, 黑龍江人民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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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장주 072
번역주 072)
백장: 戰國時代 魏나라에서 군사 5인을 伍, 10인을 什, 50인을 屬, 100인을 閭로 삼고, 그것의 책임자를 伯長이라고 불렀다. 경북 상주에서 ‘魏率善韓伯長’ 銅印이, 옛 경북 영일군 신광면 마조리(현재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흥곡리)에서 ‘晉率善穢伯長’ 동인이 발견되었다. 일반적으로 백장은 國邑의 臣智보다 서열이 낮은 읍락의 渠帥들에게 수여한 관작으로 이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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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다. [조선의] 후(侯)인 준왕주 073
번역주 073)
준왕: 고조선 否王의 아들로 망명한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로 임명하고 서쪽 경계에 머물게 했다. 중국 유이민이 많아지고 진한교체기에 수복한 서쪽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였으나 결국 위만에게 속아 나라를 빼앗긴다. 기자동래설이 시대가 내려오면서 한층 강화되어 『三國志』, 「한전」에는 고조선의 왕을 기자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三國志』 예전에는 기자 이후 준왕까지 40여 대가 지났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본래 기자와는 무관하게 준왕 이전 고조선 왕실의 일정한 계보가 내려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原註〕 淮는 당연히 準으로 표기하여야 한다. 앞의 濊國傳의 注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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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함부로 왕을 칭하였는데, 연나라에서 망명한 사람 위만주 074
번역주 074)
위만: 『삼국지』, 「한전」에서 『魏略』을 인용하여 “한나라 시기에 이르러 盧綰을 燕王으로 삼았고, 조선과 연은 浿水를 경계로 하였다.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감에 미쳐서 연나라 사람 衛滿이 망명하여 오랑캐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준왕을 설득하여 서쪽 경계에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중국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조선의 제후국[藩屛]이 되었다. 준이 그를 신뢰하고 총애하여 博士로 삼고, 圭를 하사하였으며, 1백 리의 땅을 封해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만이 망명한 사람들을 꾀여서 무리가 점점 많아졌다. 이에 사람을 보내서 준에게 거짓으로 아뢰기를, ‘한나라 군대가 10道로 나누어 이르니, 들어가서 宿衛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돌아와 준왕을 공격하였다. 준이 만과 서로 싸웠으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고 언급한 다음, “준왕은 좌우의 宮人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서 韓의 땅에 거처하였고, 스스로 韓王이라고 불렀다.”라고 기술하였다.
滿은 중국의 여러 문헌에서 姓이 衛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는 연나라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三上次男은 위만이 燕人이라는 중국 사서의 기록을 중시하여 위만조선을 중국 이주민이 외지에 수립한 식민지정권으로 보았다(三上次男, 1954). 이에 대하여 그가 중국에서 망명할 때, 상투머리[魋結]를 하였고, 또 蠻夷服을 입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 아니라 연 지역에 살던 조선인 계통의 사람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54)도 제기되었다. 한편 북한 학계에서는 만을 고조선의 변방토호세력이었다고 본다. 그들에 따르면, 衛滿의 衛는 중국인이 위만이 중국인이었던 것처럼 꾸미기 위하여 중국의 衛나라 명칭을 앞에다 붙인 것인데, 『史記』와 『漢書』에 滿이라고만 나오지만, 『三國志』 所引 魏略이나 『後漢書』, 「東夷列傳」에 衛滿으로 나오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위만이 정권을 장악한 후 중국식 관제를 도입하지 않았고, 또 고조선의 수도인 王險城에 그대로 도읍을 정하였다는 사실을 위만이 고조선 사람이라는 근거로 제시하였다(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1979). 일부 학자는 상투머리, 즉 魋結은 반드시 조선인만의 풍속이 아니고 南越이나 중국에도 그러한 풍속이 있었으며, 만이복도 반드시 조선의 의복을 뜻한다고 보기 힘들다고 반박하면서 위만을 조선인 계통으로 보는 견해를 비판(김한규, 1980)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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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공격을 받아 빼앗겼다주 075
번역주 075)
〔原註〕 丁謙이 말하기를, “箕淮는 馬韓에서 왕 노릇하였다.”고 하였다. 朝鮮史에 의거하여 말하면, 衛滿의 핍박을 피해 무리를 이끌고 金馬郡을 빼앗아 그곳에서 거주하며 스스로 武康王이라 칭했다고 한다. 金馬는 곧 本傳에서 말한 (辰)王이 다스렸다는 月支國이며, 지금의 전라도 익산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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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주 076
번역주 076)
위략: 『魏略』은 晉代 초에 魚豢이 지은 책으로서 『三國志』, 「위서」, 「동이전」의 저본이 되었다. 진수가 『三國志』를 편찬한 이후 배송지는 『魏略』을 많이 인용하여 보완했다. 『魏略』의 인용 사례는 항목별로 1~2건인데 韓傳은 5건으로 양도 많아 이례적으로 『魏略』의 의존도가 높다(주보돈, 2013). 진수는 韓傳에서 『魏略』의 내용을 상당 부분 누락하고 내용을 변개한 점이 확인된다(윤용구, 1998). 韓傳에 인용된 『魏略』의 고조선 관련 기사는 고조선과 연의 대립이나 만왕의 고조선 찬탈 등 『史記』와 『漢書』에는 나오지 않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낭중이라는 낮은 관직을 지낸 어환이 새로운 자료를 입수할 가능성은 낮기 때문에 ‘조선후’ 기사는 어환이 『魏略』 이전에 편찬된 다른 사서의 고조선 기사를 참고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에 참고한 문헌은 구체적으로 『東觀漢記』를 지목하기도 한다(오강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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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에 기자주 077
번역주 077)
기자: 箕子는 중국 商나라 紂王代의 賢人으로서 왕의 無道를 간언하였다가 감옥에 갇혔으나 周 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풀어주었다고 알려졌다. 그가 武王에게 유교통치의 근간인 洪范九疇를 바쳤다고 전하고 있다. 漢代 이후의 史書에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箕子東來說이 기술되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에 기술된 내용도 그 가운데 하나다. 현재 기자동래설은 부정되고 있다(『사기』, 「조선열전」 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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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후손인 조선 후가, 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고 칭하고주 078
번역주 078)
연나라가 ~ 칭하고: 易王代(기원전 332~기원전 321)에 연나라에서 王을 칭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대륙정세는 전국 7웅이 상호 각축전을 벌이는 가운데, 고조선은 중원제국과 치열한 항쟁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여기서 주 왕실을 받들기 위해 연을 치려고 했다는 것은 화이관에 의한 후대의 사료적 윤색이지만 고조선이 연과 각축할 정도의 세력이었고 주왕실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서영수,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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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으로 땅을 뺏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조선 후도 또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 군대를] 맞아서 공격하여 주나라 왕실을 높이려고 하였다. 그 대부 예주 079
번역주 079)
대부 예: 본래 大夫는 중국 周나라의 관등명으로서 그 밑에 士라는 하급관리가 있고, 위로는 장관 이상에게 부여하던 卿이라는 관등이 있었다. 진한대 이후의 대부는 상앙의 변법에서 창건한 22등작제의 제5급을 말하는 것이고, 당대에 대부는 천자의 비서장으로서 국가가 논의해야 할 중요한 문제를 취급하였다. 고조선의 대부는 진한대의 대부와 성격이 비슷한 존재로서 이해되며, 구체적으로 왕의 측근으로서 나라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왕에게 직접 충고할 수 있는 직위로 판단된다. 고조선에서 대부라는 직위를 역임한 禮는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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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간언하므로 그만두었다. 그리고 예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중지하고주 080
번역주 080)
〔原註〕 毛本에서는 아래의 ‘燕’字를 ‘以’字로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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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공하지 않았다주 081
번역주 081)
옛날에 기자의 후손 ~ 침공하지 않았다: 고조선은 기원전 323년 무렵에 연의 침략 계획에 대해 스스로 ‘왕호’를 칭하면서 전쟁도 불사하는 강경 조치로 대응한다. 당시 고조선의 정치·군사적 역량이 연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대부 예의 중재로 전쟁을 하지 않지만 그로부터 불과 50년이 지나지 않은 기원전 2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고조선은 연의 진개의 침공을 받고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기게 된다(박대재, 2006).
〔原註〕 攻은 혹시 ‘改’로 고쳐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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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에 [조선 후의]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이 장군 진개주 082
번역주 082)
진개: 진개는 전국시대 연나라 昭王(기원전 311~기원전 279) 때의 장군으로서 東胡에 인질로 가서 있다가 돌아와 동호를 정벌하여 5군을 설치한다. 『史記』, 「조선열전」이나 『鹽鐵論』은 고조선과 연의 전쟁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당시 연의 장군이 누구였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 진개가 동호만이 아니라 조선도 공격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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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파견하여 그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주 083
번역주 083)
연이 장군 진개를 ~ 빼앗고: 연나라가 조선 서방 2천여 리를 빼앗은 기록에 대해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위략 자체를 신뢰하지 않거나(김정배, 2010; 송호정, 2003), 동호와 고조선이 빼앗긴 지역의 합이라는 견해(이병도, 1976; 노태돈, 1990; 서영수, 1988; 박대재, 2006), 실제 거리라기보다는 많은 땅을 침략하였다는 뜻이라는 견해(윤내현, 1986)도 있다. 『魏略』은 조선후국이 연이 바로 이웃한 국가로 나오는데, 양국은 상호 침범할 수 있을 정도로 이웃하고 있어야 『魏略』의 서술은 합리적이 된다. 최근에는 요서의 조선후국과 요동의 준왕조선을 별개로 파악하여 ‘2천여 리’는 요서·요동을 포괄한 영역으로 보는 견해(오현수, 2015)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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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번한주 084
번역주 084)
만번한: 滿番汗은 연의 동방 진출 당시의 지명이 아니라 漢나라의 요동 식민이 본격화된 후대의 지명이다. 滿潘汗은 前漢代 요동군의 속현인 文縣과 番汗縣의 連稱으로 오늘날 요동 海成縣 및 蓋平 일대로 비정된다(서영수, 1988; 노태돈, 1990). 문현이 요동의 千山山脈 서남쪽의 지명인 것으로 보아 번한현도 이와 관련된 지명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결국 고조선은 연에게 패하여 千山에 이르는 서쪽 땅 1천 리를 상실하였으나, 요동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유일한 자연계선인 천산산맥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서영수, 1988). 한편 만번한 지역을 한때 고조선의 중심지였다고 보기도 한다(노태돈, 1990). 혹은 이 지역이 중심지는 아니지만 齊와 조선의 주요 해상 연결 거점으로 연이 齊의 잔여 세력과 조선이 연결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공격했다는 견해(박대재, 2006)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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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경계로 삼았으니주 085
번역주 085)
〔原註〕 趙一淸이 말하기를, “潘韓은 잘못이다. 兩漢志(『한서』의 「지리지」와 『후한서』의 「군국지」)에서는 함께 番汗으로 표기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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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조선이 쇠약해졌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모두 병합함에 미쳐서 몽염주 086
번역주 086)
몽염: 몽염(?~기원전 209)은 武의 아들로서 기원전 221년에 秦나라가 齊나라를 멸망시킬 때에 큰 공을 세웠다. 기원전 215년 흉노 정벌 때에 활약이 컸고, 그 다음해에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始皇帝 사망 후 환관 趙高와 丞相 李斯의 흉계로 감옥에 갇히게 되자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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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만리]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조선 왕 부(否)주 087
번역주 087)
부: 준왕 이전의 고조선 왕으로 否가 왕위에 있을 때 중원에는 秦이라는 통일제국이 존재했다. 否王은 진의 습격을 두려워하여 복속할 것을 약속하였다고 하는데 조선이 중원의 통일제국 진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끝내 朝會에 응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보아 당시 고조선의 국력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秦도 이러한 고조선에 대하여 더 이상의 침략을 포기하고 고조선으로부터 새로 빼앗은 땅에 『史記』의 표현대로 이중의 요새를 쌓아 고조선의 반격에 대비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서영수,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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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왕에 올랐는데, 진(秦)나라가 쳐들어올까 두려워하여 정략적으로 진에 예속하였지만, 직접 조회하지는 않았다. 부가 죽자, 그의 아들 준이 왕에 올랐다. 20여 년이 지나서 진승주 088
번역주 088)
진승: 陳勝은 秦의 陽城人으로 字는 涉이다. 기원전 209년(秦 2世 皇帝 元年) 吳廣과 함께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陳에서 왕을 칭하고 국호를 張楚라고 하였으나 6개월 만에 秦에게 진압되었다. 진승과 오광의 난을 계기로 각지에서 군웅들이 반란을 일으켜 秦王朝는 급격하게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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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항우주 089
번역주 089)
항우: 중국 진나라 말기에 劉邦과 천하를 놓고 다툰 무장이다. 이름은 籍이고, 羽는 字이다. 기원전 209년에 陳勝·吳廣의 난으로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숙부 項梁과 함께 봉기하였다. 진왕 子嬰을 죽이고 도성인 咸陽을 불사른 뒤에 彭城에 도읍을 정하고 西楚의 覇王이라고 칭하였다. 후에 垓下에서 유방에게 패배하여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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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반란을 일으켜 천하가 어지러워졌다. 연과 제, 조의 백성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차츰 도망하여 준에게 갔다. 준왕이 이에 그들을 서쪽 지방에 거주케 하였다. 한나라 시기에 이르러 노관을 연왕으로 삼아서 조선과 연은 패수주 090
번역주 090)
패수: 浿水는 고조선과 漢나라의 경계선이 되는 강으로 한반도설(압록강, 청천강), 요동설(요하, 혼하), 요서설(대릉하, 난하)등이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浿水는 『염철론』에서 秦과 고조선의 경계로 언급되는 沛水와 같은 강인데 문헌의 성립연대에 따라 표기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패수의 지명이 바뀐 이유는 물론 고조선의 후퇴로 패수의 명칭이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염철론』과 『漢書』, 「地理志」에서 보듯이 전한 말기부터는 요동의 浿水를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 중심지에 가까운 조선계 지명인 浿水와 구별하기 위해 沛水(『염철론』; 『한서』), 또는 溴水(『위략』)로 고쳐서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沛水가 만번한에 인접한 요동 지역의 강이고 조선이 진의 요동외요를 공략한 뒤 후퇴한 한제국과 浿水를 경계로 하였으므로 문제의 浿水 또한 만번한이나 진의 요동외요의 위치로 보아 소요수와 태자하가 만나는 小遼水 본류, 즉 오늘날의 渾河 하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서영수, 2008). 『사기』, 「조선열전」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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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경계로 하였다주 091
번역주 091)
〔原註〕 趙一淸이 말하기를, “漢書 地理志 樂浪郡 浿水縣條에서 물(패수)이 서쪽으로 흘러 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패수는) 지금의 大同江이다. ‘溴’字는 오기이며 아래에서도 같다. (盧)弼이 보건대, 漢書 지리지에 이르기를, ‘패수에 이르러 경계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패수의 해석은 고구려전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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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감에 미쳐서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오랑캐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준왕을 설득하여 서쪽 경계에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중국에서 망명한 사람들이주 092
번역주 092)
〔原註〕 何焯이 말하기를, ‘故’字는 마땅히 ‘收’字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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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후국이 되었다. 준이 그를 신뢰하고 총애하여 박사주 093
번역주 093)
박사: 본래 고대 중국에서 學識이 博通한 자를 博士로 임명하여 교육이나 학문을 맡겼다. 그러나 위만이 학식이 박통하여 박사를 수여한 것인지, 아니면 고조선의 어떤 고유의 관직인 박사를 수여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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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삼고, 규주 094
번역주 094)
규: 圭는 고대에 諸侯가 朝會·會同할 때, 손에 쥐는 위가 둥글고 아래가 모진 길쭉한 모양의 玉이다. 통상 천자가 제후를 封할 때 사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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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하사하였으며, 1백 리의 땅을 봉해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만이 망명한 사람들을 꾀여서주 095
번역주 095)
〔原註〕 ‘亡’字 아래에 한 글자가 빠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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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가 점점 많아졌다. 이에 사람을 보내서 준에게 거짓으로 아뢰기를 “한나라 군대가 10도로 나누어 이르니, 들어가서 숙위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돌아와 준왕을 공격하였다. 준이 만과 서로 싸웠으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주 096
번역주 096)
〔原註〕 盧弼이 보건대, 『魏略』이 이르는 바는 史記나 漢書의 朝鮮傳과 대체로 같으나 비교적 더 상세하여 가히 『사기』나 『한서』, 「조선전」의 빠진 부분을 보완해준다. 丁謙이 말하기를, “朝鮮史에서 서로 전하기로는 그 나라(조선)는 檀君으로부터 비롯되어 1,048년을 전하였고, 주나라 초에 이르러 箕子가 이를 대신해 흥하여 40世를 전하다가 燕人 衛滿에게 습격을 받아 (위만이) 그 땅을 점거하였다.”고 하였다. 班固의 『漢書』는 한나라 때의 일을 기록하였으니, 이 때문에 (조선이) 위만에서 시작된 것으로 가탁하였다. 眞番은 본래 조선에 부속된 番部로 七國(전국 7웅 시대) 때 연나라의 침략을 받았으며, 武帝가 조선을 격파하고는, 이를 고쳐 眞番(郡)으로 삼았다. (진번군의) 치소는 霅縣이었으니 지금의 奉天 興京廳(지금의 신빈현)의 변경 바깥에 있었고 동남쪽으로 압록강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浿水에는 둘이 있었다. 『(新)唐書』, 「高麗傳」에서 “(고구려 왕성인 평양성은) 남쪽으로 浿水에 연해 있다.”고 한 것은 大同江을 가리키고, 이 (東夷)傳의 浿水는 모두 압록강을 가리키나, 지금 상고하는 자들이 다만 대동강이 패수라는 것만 알 뿐 압록강 또한 패수의 이름이란 것을 알지 못하였다. 대개 대동강은 평양의 남쪽에 있고 위만이 도읍한 王險城이 곧 평양이다. (그러나) 위만이 패수를 건넌 뒤에 이곳에 거처했으므로 즉 (패)수는 평양의 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증거이다. (한 무제 때) 涉何가 (조선왕) 右渠를 훈계하고 (한나라) 조정으로 돌아갈 때에 반드시 浿水를 지났으니, 이것이 두 번째 증거이다. 左將軍(筍彘)이 (조선의) 浿水西軍을 격파하고 바야흐로 王險(城)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증거이다. 右渠의 太子가 (조정으로) 들어가 천자에게 사죄하려 하여 浿水에 도착한 뒤에 사람들을 이끌고 되돌아갔으니, 이것이 네 번째 증거이다. 이를 보건대 (東夷)傳 중의 浿水는 모두 압록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臨屯 또한 (조선의) 番部였다가 뒤에 (臨屯)郡이 되었는데 그 치소는 東暆(縣)로 지금의 조선 강원도 江陵府의 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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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왕은] 좌우의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서 한(韓)의 땅에 거처하였고주 097
번역주 097)
한의 땅에 거처하였고: 준왕의 南來地域에 대하여 조선시대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전북 익산시 금마면 일대로 보았고, 현재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이다(김정배, 1976; 송호정, 2015). 이 밖에 그 지역을 경기도 광주시 경안 일대(이병도, 1976)나 충남 천안시 직산면으로 추정하는 견해(천관우, 1976)도 있다. 『잠부론』에서는 韓西가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겨 海中으로 옮겨갔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韓地’에 거했다고 나오며 『後漢書』에서는 준왕이 오기 이전에 이미 마한이 존재했다고 한다. 즉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이 무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들어와 마한을 공략하고 자립하여 한왕이 되었다는 『後漢書』의 기록에 의하면 마한이라는 유력한 정치세력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준왕이 거느린 무리가 수천 명이라고 한 것은 일견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三國志』에 준왕이 위만의 급습으로 말미암아 화급하게 좌우궁인만을 거느리고 남쪽의 한족 거주지로 도망하여 왔다고 전하는데, 이곳에는 아직 뚜렷한 정치체가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통솔해온 무리가 소수였음에도 자연스레 한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두 사서가 똑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어 어느 쪽을 취하느냐에 따라 삼한 전체상은 확연히 달라진다(주보돈, 2013). 우거왕 당시 辰國의 존재가 확실히 등장하고 이후 韓이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여기서 ‘韓地’라고 한 것은 전한 이후의 지리정보에 의한 追記라고 볼 수 있다(박대재, 2005). 반면 준왕 이전에 이미 마한이 존재했다고 보고 늦어도 마한은 진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3세기 말경에 성립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마한의 영역은 이후 어느 시기에 충청, 전라도 지역을 포괄하게 되었고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경기 지역에 성립되었던 辰國이 위만조선 멸망 전후에 파생한 유이민 집단에 의해 해체되면서 마한의 세력이 한강 유역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노중국, 1987). 근래에는 문헌상 준왕의 망명 지역이 막연한 ‘海中’에서 후대에 ‘韓地’로 구체화되어 가기 때문에 실제 준왕이 南遷하였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박대재, 2011; 전진국, 2012; 노태돈, 2015). 한편,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2세기 서남부 지역에서 출현한 초기철기가 준왕집단의 망명과 같은 단기적인 주민이동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요동·서북한 지역과의 장기적인 교류에 의한 문화전파로 보아야 할지는 과제로 남는다(박대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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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한왕이라고 불렀다.
위략에 이르기를 “그의 아들 및 친척으로 나라에 머무른 자들은 이로 인하여 거짓으로 한씨(韓氏)주 098
번역주 098)
한씨: 종래에 이에 근거하여 준왕의 姓이 본래 韓氏였다고 주장한 견해가 있었다(이병도, 1976). 이 견해에 따르면, 『위략』의 찬자는 준왕이 箕子의 후예로서 箕氏를 칭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韓氏를 칭하였던 사실을, 준이 한 지역에 가서 韓王이라고 自號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인식한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준왕이 한씨라는 사실, 그리고 『詩經』 韓奕篇에 燕나라 근처에 예족과 맥족을 다스리는 韓侯가 존재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韓侯의 지배를 받던 종족집단들이 기원전 7세기경에 조선 지역으로 이동하여 단군조선을 대체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서영수, 1988). 이 밖에 최근에 낙랑 호족이었던 韓氏가 낙랑군 지배하에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유력한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정통성과 존엄성을 내세우려는 노력의 소산으로 준왕의 성이 한씨라고 부회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노태돈,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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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칭하였다. 준왕이 바다 건너 있으면서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그 후손이 끊어졌는데, 지금 한인(韓人) 가운데 아직도 그 제사를 받들고 있는 자가 있다주 099
번역주 099)
〔原註〕 丁謙이 말하기를, “東藩紀要에 조선왕 箕淮(準王)가 처음 마한에 나라를 세운 것은 한나라 惠帝 원년(기원전 194)의 일이고, 뒤에 百濟王 溫祚에게 멸망당한 것은 新나라 王莽 2년(10)의 일이니 나라를 전한 것을 헤아려보면 203년이다. 辰韓과 弁韓은 처음 어느 때에 세워졌는지 알 수 없으나 뒤에 모두 新羅王 赫居世에게 멸망되었으니, 이는 한나라 宣帝 五鳳 연간(기원전 57~기원전 54) 이후의 일이다. 이 三韓에 나라가 있었던 것은 모두 西漢(전한) 때의 일이며 東漢(후한) 초에는 三韓은 이미 망한 뒤이니, 어찌 (하물며) 曹魏를 논단하겠는가? 陳氏(陳壽)의 이 (『삼국지』, 「동이」)전은 晉나라 초에 저술되었으나 여전히 단지 삼한의 일만을 말하였을 뿐, 백제·신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니 어찌된 일인가? 내(盧弼)가 (「동이」)전의 글을 세밀히 살펴보고 朝鮮史를 참조해보건대, (위에서) “그 뒤 절멸되었다.”고 이른 것은 즉 百濟에게 멸망한 것이고 “韓人 중에 여전히 그의 제사를 받드는 이가 있다.”고 이른 것은 즉 『후한서』에서 “(준왕의 후손이 절멸된 뒤) 마한인이 다시 스스로 왕에 올랐다.”고 한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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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 시기에 낙랑군에 복속하여서 철마다 조공을 바치고 알현하였다주 100
번역주 100)
〔原註〕 범엽의 『후한서』, 「동이전」에서 “(후한) 建武 20년(44) 韓人 廉斯人인 蘇馬諟 등이 낙랑군으로 와서 조공을 바쳤다고 하니, 光武帝가 蘇馬諟를 漢나라의 廉斯邑君으로 봉하고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四時마다 朝謁하도록 했다.” 하였다. 章懷太子가 이를 注하여, 廉斯는 邑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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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략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처음에 우거주 101
번역주 101)
우거: 우거(?~기원전 108)는 만왕의 손자로서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이다. 만왕의 ‘만’과 마찬가지로 ‘우거’ 역시 ‘조선에서 임금을 존칭하던 고유어의 차자 표기’로 보인다(서영수,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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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격파되지 않았을 때에 조선상 역계경주 102
번역주 102)
조선상 역계경: 卿은 원래 족장적 지위에 있는 자가 정치에 참여함에 따라 주어진 명칭으로 주대 이래 大夫와 짝하는 귀족의 명칭이었다. 卿은 주로 國君을 보필하여 일반 국정을 통괄하였는데 대체로 그러한 의미에서 大夫와 구분되었다. 역계경의 경우 스스로의 領有가 있음을 특징으로 하는 주대의 卿의 의미에서 사용되어오던 것이 어느 시기인가부터 相官制가 도입되면서 진한 대에서와 같이 散秩된 상태로 전환되어간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광수, 1994). 相은 본래 고대 중국에서 비롯된 관직으로 秦漢代에는 황제하의 丞相이 국무를 총괄하는 百官의 장이었다. 고조선의 相은 바로 漢의 영향을 받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조선의 相을 중앙 관직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대체로 임명을 받은 관료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독자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정치집단의 首長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朝鮮相은 조선국을 구성하는 중심부인 조선 지역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복수의 조선상이 사료에 나타난다. 이와 달리 사료상에 尼谿相이 보이는데, 이는 니계 지역을 관장하는 수장으로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조선의 상들은 주요 정책의 결정에 참여하였고 왕은 회의체를 통해 상들을 통제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역계경이 대한정책을 둘러싸고 왕과 대립을 보였던 것도 그러한 과정에서 비롯되었으며, 조선상 노인 등이 함께 모의하여 한에 투항한 것도 평시에 운영되던 회의체적인 요소가 적용되었다는 것이다(노태돈,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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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언하였으나, 우거가 받아들이지 않자, 동쪽으로 진국(辰國)주 103
번역주 103)
진국: 『後漢書』, 「동이열전」 한조의 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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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갔다주 104
번역주 104)
〔原註〕 漢書에서 “(한 무제) 元封 3년(기원전 108) 여름에, 尼谿相 參이 사람을 시켜 朝鮮王 右渠를 죽이게 하고 와서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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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에 백성으로 그를 따라 나간 사람들이 2천여 호였다주 105
번역주 105)
이때에 백성으로 ~ 2천여 호였다: 역계경이 진국으로 갔다는 이 기사는 『위략』 내에서 韓에 관한 역사라기보다는 고조선에 대한 역사서술이라 할 수 있다(전진국, 2012). 역계경이 동으로 진국에 갔다는 사실에서 진국은 고조선의 동방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2천여 호가 역계경과 함께 하였다고 하므로 마한의 소국이 수천 호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역계경 집단은 진국에 속하는 1국이 되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성한, 2014). 이 기록에 근거하여 고조선의 관직인 相을 일정한 정치집단의 수장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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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역시 조선·진번[貢蕃]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주 106
번역주 106)
〔原註〕 貢은 아마도 眞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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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망주 107
번역주 107)
왕망: 중국 新나라의 황제이다. 前漢의 平帝를 독살하고 5년에 천자의 자리에 올랐으며, 이어 9년에 나라 이름을 新이라 고쳐 불렀으나, 그가 劉玄의 군사에 죽임을 당하게 되면서 23년에 신도 멸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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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지황 연간(20~23)에 이르러 염사치주 108
번역주 108)
염사치: 廉斯는 邑名이고, 鑡는 그 거수를 칭하는 용어로 추정된다. 일부는 ‘착(鑡)’으로 독음하여 廉斯鑡 자체를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廉斯鑡는 최근 글자 음 그대로 염사착으로 읽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통설대로 염사치로 읽도록 하겠다. 한편 『후한서』, 「한전」에 “建武 20년(44)에 韓의 염사 사람인 蘇馬諟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光武帝는 소마시를 漢廉斯邑君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朝謁하도록 하였다.”라는 내용이 전한다. 종래에 염사는 충남 아산시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고(이병도, 1976), 이 밖에 마한 지역으로 보는 견해(栗原朋信, 1978; 山尾幸久, 1982) 경남 김해의 구야국으로 보는 견해(정중환, 1973; 백승충, 1989), 마산·창원 방면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견해(西本昌弘, 1989; 연민수, 2003), 낙동강 하류 동안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새로운 견해(이부오, 2001)가 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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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진한의 우거수주 109
번역주 109)
우거수: 右渠帥는 左渠帥와 대칭되는 개념으로서 진한의 오른쪽에 있는 거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낙랑군이 진한을 크게 좌·우로 구분하여 파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윤선태, 2001). 한편 일부 학자는 진한의 오른쪽인 변한의 거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고(백승충, 1995), 혹은 진한 右渠의 帥(家臣)로 해석하는 견해(井上秀雄 外 譯註, 1974)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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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었는데,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고, 주민들이 풍요롭고 즐긴다는 소문을 듣고 망명하여 항복하고자 하였다. 그 읍락에서 나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 말이 한인(韓人)의 말이 아니었다. [염사치가 누구냐고] 묻자, 남자가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한(漢)나라 사람이며, [나의] 이름은 호래입니다. 우리들 1천 5백 인은 목재를 벌채하다가 한(韓)에게 공격받아 잡혀 모두 머리를 깎이고 노비가 된 지 3년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염사치가 말하였다. “나는 한나라의 낙랑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느냐?” 호래가 대답하기를,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염사치가 이로 인하여 호래를 데리고 함자현주 110
번역주 110)
함자현: 함자현은 진번군의 속현으로서 황해도 봉산군의 동남쪽인 서흥 일대로 추정된다(이병도,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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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갔다주 111
번역주 111)
〔原註〕 兩漢志(『한서』의 「지리지」와 『후한서』의 「군국지」)에 의하면, 樂浪郡의 含資(縣)이고, 삼국시대의 魏나라가 帶方郡의 (소속으로) 고쳤으며, 晉書 地理志에서는 帶方郡에 속하였다고 하였다. 一統志에 의하면, 그 옛 성이 지금의 조선 경기도 城 남쪽 경역에 있다고 한다. 官本考證에서, 辰鑡 중의 辰字와 來出 중의 來字는 모두 衍字로 짐작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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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이 군에 보고하니, 군이 즉시 염사치를 통역으로 삼아서 잠중주 112
번역주 112)
잠중: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황해도 해안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岑中을 낙랑군 통제하에 있었던 남한강 중·하류의 津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윤선태,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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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가서 호래와 더불어 항복하였던 무리를 거꾸로 빼앗았으나 천 명만을 얻었고, 그 5백 명은 이미 죽고 없었다. 염사치가 진한에 분명하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5백 인을 돌려보내라.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낙랑이 1만 명의 군사들을 보내, [그들이] 배를 타고 와서 너희들을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한이 이르기를, “5백 인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들은 마땅히 그에 대하여 보상하겠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진한인 1만 5천 인과 모한주 113
번역주 113)
모한: 牟韓은 대개 弁韓을 가리킨다고 보나,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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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베 1만 5천 필을 내주었다주 114
번역주 114)
이때에 진한이 진한인 1만 5천여 명과 변한포 1만 5천 필을 낙랑에게 배상하였다는 내용은 그대로 믿기 어렵고, 숫자가 과장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原註〕 毛本에서는 弁을 牟라고 썼으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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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사치는 그 값을 받아서 돌아왔다. 군이 염사치의 공덕과 의로움을 표창하여 관과 책주 115
번역주 115)
관과 책: 관과 책은 모두 관리들이 쓰던 의례용 모자를 일컫는다. 관은 일반적으로 비단으로 만들며, 등급에 따라 재질이나 색깔이 차이가 났고, 종류도 다양하였다. 한편 책은 앞부분이 모자 테보다 한 단 높고, 앞부분보다 더 높은 뒷부분이 두 가닥으로 갈라지면서 앞으로 구부러진 형태의 책과 뒤 운두가 뾰족하게 솟은 책의 두 종류가 있다. 전자는 주로 문관들이, 후자는 무관들이 착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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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지와 주택을 내려주었다. 그의 자손들이 여러 대를 지난 안제 연광 4년(125)에 이르러 그 [선조의] 공으로 부세를 면제받았다.”

  • 번역주 001)
    한: 삼한의 韓은 한국 민족을 중국인들이 지칭하였던 濊·貊·韓 가운데 하나인 韓을 가리킨다. 한은 주로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거처하였다고 알려졌다. 일부 학자는 이 한이라는 명칭이 기자조선에 대치된 韓氏 조선 때문에 생겨난 말이라고 주장하였고(이병도, 1976), 일부 학자는 중국인들이 한반도 남부의 주민집단이 殷에서 유래한 중국계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韓이라는 명칭을 고안해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이성규, 2003). 한편 일부 고고학자는 기원전 1천 년기 중후반경에 요동 지역의 주민집단이 상당한 규모를 갖추어 서북한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 전이되었고, 이들 가운데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거처한 주민집단을 예맥과 구별하여 韓이라고 불렀다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하였다(이청규, 2011). 고조선의 準王이 衛滿에게 쫓겨 한 지역으로 가서 韓王이 되었다는 내용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전하는 것으로 보건대, 기원전 2세기 초반경에 이미 韓이라는 명칭이 존재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고조선 멸망 이후에 마한과 진한, 변한의 분립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만 현재 마한과 진한·변한이 종족적·지역적 차이에 따른 구분인지, 아니면 정치체의 차이를 반영한 것인지에 대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대방: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建安 연간(196~220)에 公孫康이 屯有縣 이남의 변방[荒地]을 帶方郡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대체로 204~207년 사이에 대방군을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후한 말기에 중국 군현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韓·濊가 강성해지면서 낙랑군의 지배인구가 격감하였고, 삼한과 예에 대한 통제가 매우 어려웠다. 이에 公孫康은 낙랑군을 나누어 대방군을 설치하고, 거기에 태수를 파견하여 군현을 재정비한 다음, 한과 예 세력을 강력하게 통제하려고 의도하였다. 대방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사군의 위치 문제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 낙랑군 등이 한반도 내에 위치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방군은 황해도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이병도, 1976; 권오중, 2011). 반면에 한사군이 한반도 바깥에 위치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방군의 위치 역시 요동에 위치하였다고 파악하였다(리지린, 1964). 현재 학계에서는 전자의 견해를 수용하여 대방군의 치소를 옛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 부근으로 이해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광개토왕릉비에 永樂 14년(404)에 왜가 帶方을 침략하자, 고구려군이 이를 물리쳤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것은 대방군이 황해도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보완해주는 유력한 증거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본래 낙랑군 25현 가운데 대방현이 존재하였고, 낙랑군 남부도위 소관의 7현을 관장하였다고 알려졌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314년(미천왕 15)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고 전하는데, 이때 고구려가 대방군을 고구려의 영토에 병합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3)
    마한: 진한, 변한과 함께 삼한의 하나를 구성하며, 현재의 한반도 서남부 지역인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위치한 54개의 소국을 총칭하는 명칭이다. 마한의 성립 시기에 관하여 기원전 3세기 말경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하기 이전에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辰國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한의 성립 시기를 기원전 108년 이전으로 소급하기는 곤란하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진한의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옛 流亡民들이 秦의 부역을 피하여 韓國으로 오자,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갈라 주었다.”라고 전한다. 진의 부역을 피하여 이주한 유이민들이 마한의 동쪽, 즉 오늘날 영남 지역에 정착함으로써 진한이 성립되었음을 알려준다. 유이민 가운데 漢人이 포함된 고조선유민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위의 기록에서 진한과 변한 성립 이전 시기에 충청과 호남 지역을 망라하여 마한이 이미 존재한 것처럼 밝혔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서 인용한 『魏略』에는 “(우거왕 때에) 朝鮮相 歷谿卿이 右渠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辰國으로 갔다.”고 전한다. 이에서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 전후 사이에 진국이 해체되고, 한강 이남 서부 지역의 한의 땅에서 50여 小國이 등장하였으며, 그들을 아울러서 마한이라고 불렀다고 추론할 수 있다. 진국에서 삼한으로의 전환 과정, 그것은 바로 진국의 중심을 이룬 어떤 정치체가 마한의 목지국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韓의 땅에서 소국을 단위로 정치적 통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움직임을 사서에서 전혀 찾을 수 없다. 현재 삼한 70여 국의 성립과정을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중·남부 지역의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를 활용하는 것뿐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방법론에 의거하여 삼한 소국 문제에 접근하였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기 어렵다.
    마한의 해체 시기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었다. 현재 근초고왕 대에 백제가 마한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였다고 이해한 견해가 학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이병도, 1976; 이현혜, 1984; 노중국, 1987; 천관우, 1991). 반면에 근래에 일부 학자는 5세기 후반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옹관묘를 광범하게 조영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그 이후 시기에 백제가 마한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를 제기하여 주목을 받았다. 이 견해에 따르면, 근초고왕 대에 백제가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을 정복하여 복속시키고, 웅진 천도 이후에 백제가 영산강 유역을 백제의 직접적인 영토로 편제하였다고 한다(임영진, 1995; 권오영, 1996; 강봉룡, 1997; 김영심, 1997). 한편 일부 고고학자는 옹관묘의 소멸과 백제 중앙의 묘제인 횡혈식석실분의 전파에 주목하여 6세기대에 백제가 영산강 유역을 직접적인 영역으로 편제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즉 백제의 중앙 문화가 영산강 유역에 확실하게 침투한 시기가 마한의 멸망 시기이며,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복암리 3호분에서 발견된 금동신발의 사용자를 마한을 대표하는 지배자로 볼 수 있고, 백제가 6세기대에 이들 지역을 영역으로 편제하면서 횡혈식석실분이 널리 조영되었다는 것이다(박순발, 1998; 김낙중, 2011; 서현주, 2014).바로가기
  • 번역주 004)
    진한: 마한·변한과 함께 삼한의 하나를 구성하며, 현재의 한반도 동남부 지역인 낙동강 동안의 경상도 지역에 위치한 12개의 소국을 총칭하는 명칭이다. 본서 진한조에,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그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옛 유망인[亡人]들이 秦의 賦役을 피하여 韓國으로 오자, 馬韓이 그 동쪽 경계의 땅을 갈라 주었다.’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이것은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 이미 마한의 소국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영남 지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녔다. 秦은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였다가 기원전 207년에 멸망하였고, 우거왕이 고조선의 왕으로 재위할 무렵에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마한이 아니라 분명하게 진국이 존재하였다. 따라서 진나라의 부역을 피하여 중국 사람들이 한국으로 유망하였다고 전하는 기록의 내용을 그대로 수긍하기 어렵다. 아마도 중국인들이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 마한이 성립된 이후에 고조선 유민과 영남 지역으로 이주한 사실을 그들이 마치 진의 부역을 피하여 유망하였다고 附會하여 중국 사서에 기록하였다고 짐작된다. 본서에서 인용한 『위략』에 王莽의 地皇 연간(20~23)에 이르러 진한의 右渠帥인 廉斯鑡가 낙랑군에 망명하려고 가다가 漢人인 戶來를 만났고, 낙랑군이 그로부터 목재를 벌채하다가 韓人에게 공격받아 노비가 된 漢人 1,500명 가운데 3년 만에 500명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진한을 위협하자, 진한이 그 대가로 辰韓人 1만 5천 인과 牟韓(弁韓) 布 1만 5천 필을 내주었다고 전한다. 이에 따른다면, 진한과 변한이 지황 연간 이전에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진한 소국은 처음에 6개였다가 후에 12개로 늘어났다고 전하는데,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진한 소국 가운데 사로국왕으로 추정되는 진한왕이 3세기 후반에 진한 지역을 대표하여 西晉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보건대, 사로국이 3세기 후반에 진한의 맹주국으로 부상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대체로 진한 소국은 5~6세기 초반의 마립간 시기에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이현혜, 1984; 권오영, 1996; 주보돈, 2002).바로가기
  • 번역주 005)
    변한: 마한, 진한과 함께 삼한의 하나를 구성하며, 현재의 한반도 동남부 지역인 낙동강 서안의 경남 지역에 위치한 12개의 소국을 총칭하는 명칭이다. 변진(弁辰)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변한은 진한과 마찬가지로 地皇 연간(20~23) 이전에 북방에서 이주한 유이민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변한 소국은 대체로 가야 소국과 연결되었고, 그 가운데 弁辰狗邪國(경남 김해)이 후에 금관가야로 불리면서 전기가야연맹을 이끌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후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5세기에 고령의 대가야가 세력을 크게 신장시켜 후기가야연맹을 주도하다가 562년에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백승충, 1995; 김태식, 2002; 주보돈, 2002; 박대재, 2006; 백승옥, 2010). 바로가기
  • 번역주 006)
    진국: 『後漢書』, 「동이열전」 한조의 주 참조.
    〔原註〕 趙一淸이 말하기를, “弁韓을 『後漢書』에서는 弁辰으로 표기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弁辰은 별개의 다른 나라이므로 여기서는 당연히 弁韓으로 기술하여야 하고, 三韓의 숫자에도 당연히 맞으니, 내(盧弼)가 보기에는 范氏(범엽)가 틀린 것 같다. 王會汾이 말하기를, “晉書와 梁書의 두 책에서는 모두 弁韓으로 기술하였다.”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기를, “三韓에서는 馬韓이 가장 컸는데, 그 땅은 충청, 전라의 2道와 경상도의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辰韓과 弁韓은 오직 경주 일대뿐이었다. 朝鮮史에서 비록 삼한이 分立했다고 언급하였으나 실제로 진한, 변한 두 나라는 마한의 지배를 받았고 그 형세가 (마한과) 서로 필적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였다. 盧弼(三國志集解 著者)이 보건대, 『漢書』, 「朝鮮傳」에서 “眞番, 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해도 조선이 이를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였고, 顔師古가 (이를) 注하여 “辰은 辰韓의 나라를 일컫는다.”고 하였다. 『後漢書』 光武帝紀에서, “建武 20년(44) 가을에 東夷 韓國人이 무리를 이끌고 樂浪(郡)으로 와서 內附하였다.”고 하였고, 章懷太子(李賢)가 이를 注하여 “東夷에 辰韓, 弁韓, 馬韓이 있어 이를 일컬어 三韓國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梁書(新羅傳)에서는 “辰韓에는 처음 6國이 있었으나 점차 나뉘어 12국이 되었는데, 新羅는 그중 하나였다.”라고 하였고, (百濟傳에서는) “馬韓에는 54國이 있었는데, 백제는 그중 하나였다.”라고 하였다. 舊唐書에서는, “百濟國은 馬韓의 옛 땅이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양잠을 할 줄 알았고 면포를 짰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실을 만드는데 필요한 방추차가 출토되고 있지만, 언제부터 누에를 쳐 잠사를 뽑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삼한 시기에는 기록에서와 같이 누에를 쳐 면포를 생산하였고, 실물자료도 광주 신창동유적에서 확인되었다. 신창동유적에서 출토된 직물은 칠기용기 내부에 부착된 1점과 현장에서 수습한 2점이다(조현종, 2013). 바로가기
  • 번역주 008)
    성곽은 없다: 이 기사는 돌로 쌓은 성곽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당시에 방어를 위하여 土城을 쌓거나 취락 주위에 環濠를 두르거나 木柵을 세웠음이 확인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원양국: 경기도 화성시 남양면 일대(이병도, 1976) 또는 경기도 파주나 연천 방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모수국: 광개토왕릉비에서 고구려가 정복하였다고 전하는 牟水城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추정된다. 종래에 경기도 수원시 일대(이병도, 1976)나 경기도 양주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하였으나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상외국: 경기도 수원시 장안 지역, 화성시 우정면 일대(이병도, 1976)나 경기도 파주·연천 방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12)
    소석색국: 大石索國이 존재한 것으로 보아, 석색국이 대, 소로 분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9 경기도 남양도호부 고적조에 부 33리 되는 곳에 石山城이 있다고 전하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18년조에 전하는 북위에 보낸 國書 가운데 “지난 庚辰年 후에 우리나라(백제) 서쪽 경계의 小石山北國 바다 가운데서 시체 10여 개를 발견하고 습득하였는데, 살펴보니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두 기록에 보이는 석산성, 소석산이 바로 대·소색국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되며, 이를 통하여 두 나라가 경기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종래에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여 소색국을 경기도 서해의 어떤 섬으로 비정한 견해(이병도, 1976)가 제기되었다. 반면에 이것을 구체적으로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천관우, 1989)도 제출되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3)
    대석색국: 소색국과 인접하거나(이병도, 1976) 또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14)
    우휴모탁국: 우휴의 半切은 主(Ju)와 통하는 점, 모탁은 水堤의 뜻인 점 등을 주목하여 우휴모탁국을 고구려의 主夫吐郡(경기도 부천시와 인천광역시 부평구), 즉 長堤郡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이 밖에 우휴를 牛首 또는 牛頭와 연결시켜 우휴모탁국을 강원도 춘천시로 비정하는 견해(천관우, 1989), 백제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優台와 연결시켜 경기도 개풍·파주·김포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김기섭, 1993)가 제기되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5)
    신분고국: 신분고국은 百衲本[남송 紹興本]을 비롯하여 소흥본·소희본·촉각소자본 등에 의거한 표기이다. 한편 남감본·급고각본·무영전본 등에서는 신분활국(臣濆活國)이라 표기하였고, 『翰苑』 所引 魏略에서는 臣濆沾國이라고 표기하였다. 신분고국 다음에 伯濟國이 보이고 있어, 일반적으로 전자는 후자보다 더 북쪽에 위치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 종래에 이에 근거하여 신분고국을 경기도 가평군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천관우, 1989). 이와 더불어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이나 경기도 가평 지역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고(이병도, 1976), 근래에 파주시 육계토성을 신분고국의 중심지로 추정한 견해가 제출되기도 하였다(정재윤, 2001).
    〔原註〕 北宋本에서는 活을 沽라고 표기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6)
    백제국(伯濟國): 후대의 百濟이다. 백제국의 중심지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지만, 근래에 서울시 송파구에 위치한 풍납토성을 백제국의 왕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널리 수용되고 있다. 부여족의 일파인 온조계 집단이 한강 유역인 하북위례성을 중심으로 소국을 형성하여 十濟라고 불렀고, 초고왕 대에 온조계 집단이 미추홀집단을 흡수하여 연맹체를 형성한 후에 수도를 하남위례성으로 옮기고, 국호를 십제에서 백제(伯濟 또는 百濟)로 바꾸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노중국, 1988). 이와 더불어 4세기 이후에 백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맹세력이 목지국과 영산강 유역 중심의 연맹세력을 압도하고 점차 집권적인 국가로 발전하면서 국호를 伯濟에서 百濟로 개칭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권오영, 1996).
    〔原註〕 伯濟國은 곧 百濟國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7)
    속로불사국: 『삼국사기』 지리지 한주조에 長堤郡의 영현인 戍城縣이 본래 고구려 首尒忽이라고 전하는데, 首尒와 戍는 ‘수리’, ‘술’의 借字로 速盧와 상통한다. 한편 한주조에 장제군의 영현인 分津縣이 본래 고구려 平准押縣이었다고 전하고, 고구려 한산주조에서 평준압현을 또는 別史波衣라고 부른다고 하였는데, 별사와 不斯는 통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종래에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속로불사국을 옛 경기도 통진 지역(현재의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월곶면 일대)으로 비정한 견해(이병도, 1976)가 제기되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8)
    일화국: 경기도 양평·지평 방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19)
    고탄자국: 경기도 양평·지평 방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20)
    고리국: 『삼국사기』 지리지 한주조에서 漢陽郡의 영현인 荒壤縣이 본래 고구려 骨衣奴縣이라고 전한다. 한편 광개토왕릉비에 고구려가 백제에게서 빼앗은 성 가운데 古利城이 보인다. 骨衣와 古利가 古離와 상통한다고 이해하여 고리국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하고 있다(이병도, 1976). 반면에 泝川郡의 영현인 黃驍縣이 본래 고구려 骨乃斤縣임을 주목하여 고리국을 경기도 여주시로 비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천관우, 1989).바로가기
  • 번역주 021)
    노람국: 경기도 이천시 음죽면 일대(이병도, 1976)나 경기도 이천시 율면·음죽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22)
    월지국: 『翰苑』에 인용된 『魏略』이나 『후한서』의 「동이열전」과 『通典』에는 目支國으로 표기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月은 目의 오자로 보고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月支國으로 이해하고 있기도 하다. 목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직산(이병도, 1976), 인천(천관우, 1989), 전북 익산(정약용; 한진서; 박찬규, 2010)으로 보는 해가 제기되었다. 근래에 마한 소국들을 포괄할 수 있는 중심 위치이면서도 중국과의 교류가 편리한 충남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체적으로 아산만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이현혜, 1997; 이도학, 1998)와 천안 청당동유적을 그 중심지로 이해하는 견해(권오영, 1996)가 제기되었다. 반면에 일부 학자는 초기에 목지국이 전북 익산에 위치하였다가 후에 충남 예산으로 옮겼다는 견해(김정배, 1985), 초기에 목지국이 천안 직산이나 평택, 성환 일대에 위치하였다가 근초고왕 대 이후에 전남 나주로 옮겼다는 견해(최몽룡, 1986)를 제기하기도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3)
    자리모로국: 경기도 이천시의 일부로서 노람국과 인접한 소국이라고 추정하거나(이병도, 1976) 또는 충남 서산시 지곡면 일대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24)
    소위건국: 당이 백제고지에 설치한 熊津都督府의 속현인 散昆縣의 ‘산곤’과 ‘소위건’의 음상사에 주목하여 소위건국을 충남 보령시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천관우, 1989).바로가기
  • 번역주 025)
    고원국: 충남 당진군 우강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나(천관우, 1989) 확실치 않다. 바로가기
  • 번역주 026)
    막로국: 막로국은 본서에 2번 나온다. 잘못 중복된 것인지, 아니면 본래 서로 다른 나라였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한원』 所引 위략에서는 莫盧卑離國이라고 하였다. 종래에 이를 근거로 막로국과 비리국을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천관우, 1989). 바로가기
  • 번역주 027)
    비리국: 卑離는 들판을 의미하는 夫里·伐·發·弗·火와 같은 뜻을 지닌 말로서 흔히 국읍명 끝에 붙는 것으로 알려졌다. 종래에 비리국은 卑卑離國의 脫誤로 이해한 다음, 신라의 옥구 군 澮尾縣의 본래 이름인 夫夫里縣의 ‘夫夫里’와 ‘卑卑離’의 음상사를 근거로 하여 비비리국을 전북 군산시 회현면 일대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한편 막로국과 서로 연결시켜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89).바로가기
  • 번역주 028)
    점리비국: 『한원』 所引 위략에서는 古卑離國이라고 표기하였다. 이를 수용하여 전북 고부군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이병도, 1976). 반면에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89).
    〔原註〕 馮本에서는 卑를 甲이라고 표기하였으나 잘못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29)
    신흔국: 충남의 옛 진잠현(대전시 유성구 진잠동)이나(이병도, 1976) 온양 방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30)
    지침국: 당이 백제고지에 설치한 支潯州의 속현 支潯縣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종래에 이에 근거하여 지침국을 일반적으로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31)
    구로국: 『삼국사기』 지리지 웅주조에 任城郡의 영현인 靑正縣이 본래 백제 古良夫里縣이라고 전한다. ‘良’은 ‘라’로 독음되고, ‘부리’는 들을 가리킨다. 종래에 ‘구로’와 ‘고라’의 음이 비슷하다고 이해하여 구로국을 충남 청양군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하였다(이병도, 1976; 천관우, 1989).바로가기
  • 번역주 032)
    비미국: 충남 서천군의 일부나 서천군 비인면 일대에 위치한 소국(이병도, 1976)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33)
    감해비리국: 조선시대에 현재 충남 홍성군 금마면이 大甘介面이었다. ‘감해’와 ‘감개’의 음상사에 주목하여 종래에 감해비리국을 충남 홍성군으로 비정하였다(이병도, 1976). 이와 달리 충남 공주시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천관우, 1989).바로가기
  • 번역주 034)
    고포국: 충남 부여군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나(천관우, 1989)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35)
    치리국국: 충남 서산시 지곡면 일대(이병도, 1976)나 서천군 한산면 일대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36)
    염로국: 종래에 ‘冉’을 ‘甘’의 오기로 이해한 다음, 당이 백제고지에 설치한 魯山州의 州治인 노산현의 옛 이름이 甘勿阿인 점을 주목하여, 염로국을 전북 익산시 함열 일대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천관우, 1989).바로가기
  • 번역주 037)
    아림국: 『삼국사기』 지리지 웅주조에 西林郡이 백제 舌林郡이라고 전한다. 종래에 ‘舌林’과 ‘阿林’을 연결시켜 아림국을 충남 서천군 서천읍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하였다(那珂通世, 1915).바로가기
  • 번역주 038)
    사로국: 『삼국사기』 지리지 웅주조에 潔城郡의 영현인 新良縣이 본래 백제 沙尸良縣으로 전한다. 일반적으로 ‘尸’는 ‘ㄹ’ 받침을 나타내고, ‘良’이 ‘라’로 독음된다고 알려졌다(양주동, 1965). 따라서 ‘沙尸良’은 ‘살라’ 또는 ‘사라’로 독음이 가능하다. 한편 고구려의 5부의 명칭에 대하여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노(奴)’라고 표기하였음에 반하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나(那)’로 표기하였음이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盧’와 ‘羅’도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종래에 이와 같은 사실을 주목하여 사로국을 충남 홍성군 장곡면 일대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鮎貝房之進, 1931; 이병도, 1976). 이와는 달리 충남 논산시 은진면 방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89).바로가기
  • 번역주 039)
    내비리국: 비리(卑離)는 들(평야)을 가리키는 부리(夫里)를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종래에 백제 노사지현(奴斯只懸)과 내비리국을 연결시켜 대전시 유성구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천관우, 1989).바로가기
  • 번역주 040)
    감해국: 종래에 ‘感奚’를 ‘개’, ‘고마개’ 등으로 독음하고, 함열에 熊浦(곰개)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감해국을 전북 익산시 함열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한편 ‘감해’를 金馬渚 또는 당이 백제고지에 설치한 魯山州의 속현인 支牟縣의 본래 이름인 只馬馬知를 연결시켜 전북 익산시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89).바로가기
  • 번역주 041)
    만로국: 『삼국사기』 지리지 전주조에 臨陂郡의 영현인 沃溝縣이 본래 백제 馬西良縣이라고 전한다. 또한 당이 백제고지에 설치한 웅진도독부의 속현인 歸化縣이 본래 麻斯良이었다고 한다. 종래에 만로국을 마서량 및 마사량과 연결시켜 전북 군산시 옥구읍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천관우, 1989). 한편 西林郡의 영현인 藍浦縣의 본래 이름인 백제 寺浦縣의 ‘사포’에서 ‘寺’는 ‘마을’ 또는 ‘말’로 독음된다고 이해하여 만로국을 충남 보령시 남포면으로 비정한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6).바로가기
  • 번역주 042)
    벽비리국: 신라의 金堤郡이 본래 碧骨郡인 점에 주목하여 벽비리국을 전북 김제시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하거나(이병도, 1976; 천관우, 1989), 陵城郡의 영현인 富里縣이 본래 백제 波夫里縣이었던 사실을 근거로 하여 벽비리국을 전남 보성군 복내면 일대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이병도, 1976). 최근에 이도학은 내비리국을 나주 반남 지역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이도학, 2012).바로가기
  • 번역주 043)
    구사오단국: 『삼국사기』 지리지 무주조에 岬城郡의 영현인 珍原縣이 본래 백제 丘斯珍兮縣이라고 전한다. 『삼국사기』 지리지 명주조에 奈城郡의 영현인 子春縣이 본래 乙阿旦縣이었다고 전하고, 『鷄林類事』에서 ‘男兒曰丫妲’이라고 하였다. 男兒, 즉 아들을 고려시대에 ‘아달(아)’이라고 불렀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것을 주목하건대, 을아단현에서 ‘아단’은 ‘子’에 대응되고, 阿旦은 ‘아달(아)’로 읽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서 고대에 ‘旦’을 ‘달()’로 읽었음을 살필 수 있음은 물론이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 웅진도독부조에 分嵯州의 영현인 貴旦縣이 본래 仇斯珍兮이었다고 전하는데, 여기서 貴는 仇斯, 旦은 珍에 대응됨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고대에 ‘진(珍)’은 ‘돌’로 발음하였다. 『일본서기』 권제9 중애천황(仲哀天皇) 9년 겨울 10월조에 ‘微叱已知波珍干岐’가 나오는데, 파진간기를 고대 일본인들이 ‘はとりかんき’라고 읽었다고 전하고, 이를 통하여 珍을 ‘とり’, 즉 ‘돌’로 읽었음을 살필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백제조에서 임실군의 영현인 馬靈縣의 옛 이름 馬突을 다른 말로 馬珍이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珍을 突로 읽었음을 시사해주는 좋은 증거의 하나다. 이처럼 ‘旦’을 ‘달’로. ‘진’을 ‘돌’로 독음하였다고 할 때, 구사오단과 구사진혜는 그 음이 서로 비슷하였다고 보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종래에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여 구사오단국을 전남 장성군 진원면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한편 신라 전주(全州)의 영현인 金溝縣이 본래 백제 仇知只山縣인 사실을 주목하여 구사오단국을 전북 김제시 금구면 일대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천관우, 1989).
    〔原註〕 宋本에서는 臼를 라고 표기하였으니, 곧 匊字이다. 臼와 는 서로 다른 글자인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바로가기
  • 번역주 044)
    일리국: 『일본서기』 권9 神功皇后 攝政 49년 봄 3월조에 比利·辟中·布彌支·半古 4읍이 보이는데, 종래에 이 가운데 比利를 일리국과 연결시켜 그것을 전북 부안·태인 방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였다(천관우, 1989). 바로가기
  • 번역주 045)
    불미국: 종래에 불미국은 不彌知國의 오기로 이해한 다음, 당이 백제고지에 설치한 帶方州의 속현인 布賢縣이 본래 巴老彌였고, 파로미와 ‘發羅’가 통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불미국을 전남 나주시에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한편 『일본서기』 권9 神功皇后 섭정 49년 봄 3월조에 전하는 比利, 辟中, 布彌, 支半古 4邑 가운데 포미와 연결하여 불미국을 전남 나주나 전북 부안·태인 방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천관우, 1989).바로가기
  • 번역주 046)
    지반국: 『일본서기』 권9 神功皇后 섭정 49년 봄 3월조에 전하는 比利, 辟中, 布彌, 支半古 4邑 가운데 지반고와 연결하여 지반국을 전북 부안·태인 방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천관우, 1989).
    〔原註〕 宋本에서는 支를 犮이라고 표기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47)
    구소국: 古阜郡의 본래 이름인 古沙夫里郡과 『일본서기』 권9 神功皇后 섭정 49년 봄 3월조에 전하는 古四邑과 연결하여 구소국을 전북 정읍시 고부면·고사 방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였다(천관우, 1989).바로가기
  • 번역주 048)
    첩로국: 전북 정읍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나(천관우, 1989)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49)
    모리비리국: 신라 무주 武靈郡의 영현인 高敞縣의 본래 이름인 牟良夫里縣과 모로비리가 그 음이 서로 통한다. 따라서 모로비리국은 전북 고창에 위치한 소국으로 이해된다(이병도, 1976; 천관우, 1989; 신채호, 1925).바로가기
  • 번역주 050)
    신소도국: 종래에 신소도국에서 ‘臣’은 臣智의 ‘臣’과 마찬가지로 ‘大’의 뜻으로 이해하여 신소도국을 ‘대소도국’이라고 파악한 다음, 정치 지역에 있어 맹주국인 辰王의 目支國이 있듯이 蘇塗에도 종교적인 대소도에 해당한다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하였다(이병도, 1976). 이와 더불어 신라 웅주 富城郡의 영현인 蘇泰縣의 본래 이름이 省大兮縣인 점을 주목하여 신소도국을 충남 태안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전북 고창군 흥덕면 일대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천관우, 1989).바로가기
  • 번역주 051)
    막로국: 같은 이름이 두 번째 나온 것이다. 한편 이를 앞의 것과 분리하여 전남 영광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박찬규, 2013).
    〔原註〕 錢大昭가 말하기를, “莫盧國은 이미 앞 글에 보인다. 이것은 중복하여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52)
    고랍국: 『삼국사기』 지리지 전주조에 南原小京이 본래 백제 古龍郡으로 전한다. 종래에 ‘고랍’과 ‘고룡’의 음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고랍국을 전북 남원시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였다(이병도, 1976). 한편 신라 무주 岬城郡의 본래 이름인 武尸伊縣과 고랍국을 연결시켜 전남 장성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박찬규, 2013). 바로가기
  • 번역주 053)
    임소반국: 전북 군산시 옥구읍(이병도, 1976), 또는 전남 광주시 광산구 또는 나주시 방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 또는 나주시에 위치한 소국(박찬규, 2013)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54)
    신운신국: 본서에 辰王의 加優呼 가운데 ‘臣雲遣支報’가 보이는데, ‘신운’은 바로 신운신국을 가리킨다. 이로 보아 신운신국은 마한 소국 가운데 상당한 위상을 지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종래에 광주광역시 광산구 또는 전남 나주시 방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나주시에 위치한 소국(박찬규, 2013)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55)
    여래비리국: 신라 전주 德殷郡의 영현 礪良縣과 연결시켜 여래비리국을 전북 익산시 여산면 일대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거나(이병도), 또는 신라 무주 陵城郡의 본래 이름인 尒陵夫里郡과 연결하여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였으나(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박찬규, 2013)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56)
    초산도비리국: 종래에 초산도비리국을 ‘초산도’와 ‘비리국’의 2국으로 이해한 다음,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4 전라도 정읍현조에서 정읍을 ‘楚山’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하는 사실을 주목하여 초산도를 전북 정읍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한편 초산도비리국을 전남 진도군 군내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박찬규, 2013).바로가기
  • 번역주 057)
    일난국: 신라 영암군의 옛 이름 月奈郡과 연결하여 일난국을 전남 영암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나(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박찬규, 2013)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58)
    구해국: 『일본서기』 권9 神功皇后 섭정 49년 봄 3월조에 古奚津이 보인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7 전라도 강진군 고적조에 舊溪所가 현 남쪽 37리에 있다고 전한다. 종래에 ‘舊溪’와 ‘狗奚’ 및 ‘古奚’가 음이 비슷하다고 여겨 구해국을 전남 강진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76). 이와 달리 신라 무주 陽武郡 영현인 固安縣의 본래 이름인 古西伊縣을 구해국과 연결하여 전남 해남군 마산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박찬규, 2013).바로가기
  • 번역주 059)
    불운국: 충남 공주시 서부지방(이병도, 1976) 또는 전남 보성군 복내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 이영문, 2002)으로 추정하나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60)
    불사분야국: 『삼국사기』 지리지에 分嵯郡을 혹은 夫沙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불사분야국을 夫沙와 연결시켜 전남 순천시 낙안면에 위치한 소국(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또는 보성군과 고흥군 일대로 추정하기도 한다(박찬규, 2013).바로가기
  • 번역주 061)
    원지국: 신라 昇平郡의 영현인 海邑縣의 본래 이름인 猿村縣과 연결하여 원지국을 전남 여수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천관우, 1989; 이영문, 2002).바로가기
  • 번역주 062)
    건마국: 신라의 金馬郡과 백제 金馬渚의 ‘금마’와 ‘건마’가 상통한다고 보아, 건마국을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한다(이병도, 1976; 김정배, 1976; 노중국, 2001; 송호정, 2015). 이와 달리 신라 보성군의 영현인 馬邑縣의 본래 이름인 古馬彌知縣과 연결하여 건마국을 전남 장흥에 위치한 소국으로 비정한 견해도 있다(천관우, 1989).바로가기
  • 번역주 063)
    초리국: 신라 무주 分嶺郡의 영현인 忠烈縣의 본래 이름인 助助禮縣과 연결하여 초리국을 전남 고흥군 남양면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하기도 하나(천관우, 1989; 이영문, 2002)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64)
    무릇 50여 국이 있다: 본문에 언급된 소국은 55국이다. 이 가운데 莫盧國은 두 번 나오므로 실질적으로 54국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後漢書』, 「東夷列傳」에서는 54국이라고 하였다.
    〔原註〕 범엽의 『후한서』에서는 “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개국이 있고, 그 북쪽은 樂浪, 남쪽은 倭와 잇닿아 있다.”고 이르렀다. 『滿洲源流考』 권2에서 “(살펴보건대) 三韓의 統名(총칭)은 辰國이고 한나라 초부터 이미 보인다. 뒤에 신라, 백제에 의해 겸병되었다. 그 78국의 이름은 魏志(『삼국지』, 「한전」)에 갖추어 실려 있는데, 監奚卑離, 內卑離, 辟卑離, 如來卑離와 같이 卑離 두 글자에 연계된 국명이 많다. 滿洲語로 이를 고찰해보면, 응당 (卑離는) 貝勒(베일러)의 轉音(음이 변한 것)으로 汗이 와전되어 韓이 된 것과 똑같으며, 三汗이 여러 貝勒을 統帥하니 체제에 있어 흡사하고 서로 부합한다. 馬韓에 이르러 또한 慕韓으로도 적고, 辰韓은 또한 秦韓으로도 적으며, 弁韓은 또한 弁辰이나 卞韓으로도 적는다. 尙書傳에서 扶餘馯이라 아울러 칭했고, 正義에서 馯은 즉 韓이라고 이르렀다. 당시의 다만 諧音(비슷한 음)일 뿐이고, 모두 漢語가 아니다. 范蔚宗(범엽)이 처음으로 ‘韓國’, ‘韓人’이라고 칭하였고, 魏志(『삼국지』, 「한전」)에서는 마침내 ‘韓地’, ‘韓王’이란 말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거짓으로 ‘韓氏’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弁韓도 삼한 중에 있었으나 그에 관해 기재한 바가 유독 적다. 史記 중의 眞番에 관한 (史記集解의) 注에서 ‘番의 음은 普와 寒의 반절’이라고 하였다. 遼東(郡)에 潘汗縣이 있었는데, 혹 (潘汗은) 弁韓의 轉音인 듯하나 역시 확정할 수 없다. 간혹 三韓이 高麗가 되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宋史 高麗傳에서 起因한 것 같으니, “(북송 휘종) 崇寧 연간(1102~1106) 뒤에 (고려가) 三韓通寶를 주조하였다.”는 글이 있고, 또한 遼史 外紀에 “遼나라 때에 항상 三韓國公을 고려의 封號로 삼았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삼한 땅이 모두 고려에 편입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고, 고려의 경역이 또한 삼한이 통할하던 곳(의 일부)에 속함은 알지 못하였으니, 당시에 假借해서 쓴 것을 매우 깊게 詳考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리고 요나라의 三韓縣에 이르러서는 고려의 俘戶(포로)를 취해 설치한 것으로, 그 옛 영역은 아니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65)
    〔原註〕 毛本에서는 小를 千이라고 썼으나 잘못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66)
    진왕: 종래에 『후한서』, 「한전」의 기록에 의거하여 진왕을 삼한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파악하였다(이병도, 1976). 즉 진왕은 목지국을 거점으로 하여 여러 소국과의 宗主·附庸 관계를 기본으로 하면서 소국들을 대표하여 중국 군현과의 외교 교섭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한편 여기에 나오는 진왕은 한강 유역에 정착한 백제국의 왕으로 보고, 변진조에 나오는 진왕은 신라왕으로 보는 견해(천관우, 1976; 문창로, 1997)도 있다. 대개 여기에 언급된 진왕은 마한연맹체의 장(長)이며, 그 치소(治所), 즉 목지국을 마한의 領導國으로 본다. 이 진왕을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진(辰) 지역(금강 중·하류 유역)을 통치하던 역사적 존재라고 한정하여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박대재, 2002). 이 밖에 진왕이 諸韓國首長의 상호관계를 조정하면서 대중국 교섭을 수행해나가는 대외적 대표로서 목지국의 신지와 동일한 장소를 치소로 하는 별도의 왕인데, 3세기 초에 요동의 公孫氏가 중국 대외교역에 정통한 마한인을 시켜서 진왕으로 임명하고 그 지위를 세습시킨 것이라고 보는 견해(武田幸男, 1995; 1996; 윤선태, 2001)도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67)
    신운견지보 안야축지 분신리아불례 구야진지렴: 종래에 이 부분에 나오는 臣雲遣支報는 마한 臣雲(新)國의 견지보[險側?], 安邪踧支는 弁辰安邪國의 축지[臣智?], 濆臣離兒不例는 마한 臣濆沽國[濆臣은 臣濆의 도치로 이해]의 불례[樊濊?], 狗邪秦支廉은 弁辰狗邪國의 진지[臣智?] 렴(廉은 인명?)으로’ 해석하였다(이병도, 1976). 여기서 종래에 논란이 분분하였던 문제는 더 우대하여 부른 호칭, 즉 加優呼의 주체에 관해서이다. 종래의 견해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진왕이 신지에게 혹 우호를 더 내린다고 해석하는 견해인데, 이 경우 긴 우호 전체를 하나로 보아 진왕이 목지국의 신지에게 내린 것으로 보는 견해(武田幸男, 1995; 1996), 진왕이 4국의 신지들에게 각 해당 우호를 더 내려준 것으로 보는 견해(노중국, 1990; 윤선태, 2001)로 나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4국의 신지들이 진왕에게 혹 해당 우호를 추가하여 준다고 해석하는 견해인데, 이는 4국의 신지들이 이 긴 우호를 진왕에게 추가하여 그를 진왕으로 추대하였다는 의미와 통한다(井上幹夫, 1978). 이 밖에 여타 제국의 신지 중 목지국의 진왕처럼 일반적인 신지 명칭에 만족하지 못하고 특별히 加優呼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권오영, 1996; 박대재, 2002). 이 기사의 성격에 대한 견해로는, 진왕이 중국과 교역할 때 실질적으로 각 소국들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마한과 변한 제국 가운데 이들 대국의 신지들의 칭호를 연명해야 했는데, 『삼국지』의 찬자가 이를 ‘우호’로 착각한 것이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바로가기
  • 번역주 068)
    위솔선읍군: 漢은 변방의 모든 세력에 대하여 그 규모에 따라 王·侯·邑君·邑長 등의 관작을 수여하였다. 동옥저전과 예전에 領東 7현의 渠帥를 侯로 삼았다고 전하는데, 실제로 不耐濊侯의 존재가 확인된다. 평양 정백동 1호분에서 출토된 인장에 새겨진 ‘夫租薉君’은 부조 지역의 지배자에게 읍군이란 관작을 수여하였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삼한에도 廉斯地域의 거수인 蘇馬諟에게 ‘漢廉斯邑君’을 사여한 사실 및 景初 연간(237~239)에 위나라가 여러 韓國의 신지들에게 邑君의 印綬를, 그 다음의 지배자에게는 邑長의 인수를 더하여 주었음이 확인된다. 결국 魏率善邑君은 위나라가 마한의 신지들에게 수여한 관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率善’은 ‘선하게 따른다’는 의미이고, ‘歸義’와 동일한 뜻으로서 이민족이 중국의 德에 歸服한다는 것을 이른다.바로가기
  • 번역주 069)
    귀의후: 『後漢書』, 「百官志」에 四夷國王·率衆王·歸義侯·邑君·邑長이 있고, 이들은 각기 부관인 丞을 두었다고 전한다. 귀의라는 말은 한대(漢代)에 처음 사용하였는데, 모두 蠻夷, 즉 한에 歸順한 이민족의 지배자에게만 수여한 것이다. 이들 이민족의 지배자에게 그들의 세력기반 규모에 따라 국왕, 솔중왕, 귀의후, 읍군, 읍장이란 칭호를 내려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漢委奴王’, ‘晉帰義氐侯’, ‘晉烏丸帰義侯’, ‘晉鮮卑帰義侯’ 등의 인장이 발견되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70)
    중랑장: 중랑장은 秦代에 처음 설치한 관직으로 郎中領의 屬官이었다. 三署郞을 거느리고 宿衛하면서 宮殿과 後宮의 門戶를 지키는 일을 담당하였다. 前漢에서도 역시 진의 제도를 계승하여 이 관직을 설치하였는데, 光祿勳이 이들을 관할하였다. 후한은 동·서·남·북 등 4중랑장을 더 설치하였다. 또 虎賁中郞將과 羽林中郞將 등이 있었다. 그 밖에도 ‘使匈奴中郞將’과 같이 임시로 설치된 중랑장이 있었는데, 이들을 雜中郞將이라고 하였고, 率善中郞將도 그중 하나이다. 秩祿은 比二千石이고, 그 지위는 將軍 다음이었다. 魏晉王朝 이후에는 지방에서 각각 스스로 官署와 官號를 설치하였는데, 중랑장이란 관호가 가장 많았다. 隋代에는 ‘中’자를 避諱하여 낭장으로 줄였다. 唐代에 다시 중랑장을 설치하고, 이들을 諸衛의 대장군과 장군에 예속시켰다(兪鹿年 編著, 1992, 『中國官制大辭典』, 黑龍江人民出版社). 바로가기
  • 번역주 071)
    도위: 漢代의 관직명으로서 주로 郡의 군사 및 경찰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前漢에서 본래 郡尉라고 부르다가 景帝 2년(기원전 155)에 郡守를 郡太守로 개칭하면서 군위를 도위로 고쳤다. 도위는 태수를 보좌하고, 군의 군사 및 경찰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官秩은 比二千石이었다. 통상 군의 경우, 1명이 정원이었지만, 변경군에는 1군에 복수의 도위를 두기도 하였다. 그 경우는 西部都尉, 中部都尉 등으로 불렀는데, 기원전 82년에 낙랑군에 東部都尉와 南部都尉를 두어서 領東 7현과 옛 진번 지역을 관할하기도 하였다. 副官에 丞이 있었다. 후한 광무제 건무 6년(30)에 변경을 제외하고 도위를 폐지하고, 태수가 그 직무를 겸임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임시로 도위를 설치하였다. 전한에는 關所에 설치한 關都尉, 변경 군에 농사를 관장한 農都尉, 屬國을 관장한 속국도위를 두었지만, 후한에서는 이 가운데 속국도위만을 남겨두었다. 그러면서 이와는 별도로 騎都尉, 奉車都尉 등 일부의 무관에 도위란 명칭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 위나라에서도 군태수 밑에 군사와 경찰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군도위를 두었고, 이 밖에 將兵都尉, 撫軍都尉, 積弩都尉(후에 典弩都尉로 개칭), 典鎧都尉 등도 설치하였음이 확인된다(兪鹿年 編著, 1992, 『中國官制大辭典』, 黑龍江人民出版社).바로가기
  • 번역주 072)
    백장: 戰國時代 魏나라에서 군사 5인을 伍, 10인을 什, 50인을 屬, 100인을 閭로 삼고, 그것의 책임자를 伯長이라고 불렀다. 경북 상주에서 ‘魏率善韓伯長’ 銅印이, 옛 경북 영일군 신광면 마조리(현재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흥곡리)에서 ‘晉率善穢伯長’ 동인이 발견되었다. 일반적으로 백장은 國邑의 臣智보다 서열이 낮은 읍락의 渠帥들에게 수여한 관작으로 이해되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73)
    준왕: 고조선 否王의 아들로 망명한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로 임명하고 서쪽 경계에 머물게 했다. 중국 유이민이 많아지고 진한교체기에 수복한 서쪽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였으나 결국 위만에게 속아 나라를 빼앗긴다. 기자동래설이 시대가 내려오면서 한층 강화되어 『三國志』, 「한전」에는 고조선의 왕을 기자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三國志』 예전에는 기자 이후 준왕까지 40여 대가 지났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본래 기자와는 무관하게 준왕 이전 고조선 왕실의 일정한 계보가 내려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原註〕 淮는 당연히 準으로 표기하여야 한다. 앞의 濊國傳의 注에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74)
    위만: 『삼국지』, 「한전」에서 『魏略』을 인용하여 “한나라 시기에 이르러 盧綰을 燕王으로 삼았고, 조선과 연은 浿水를 경계로 하였다.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감에 미쳐서 연나라 사람 衛滿이 망명하여 오랑캐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준왕을 설득하여 서쪽 경계에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중국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조선의 제후국[藩屛]이 되었다. 준이 그를 신뢰하고 총애하여 博士로 삼고, 圭를 하사하였으며, 1백 리의 땅을 封해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만이 망명한 사람들을 꾀여서 무리가 점점 많아졌다. 이에 사람을 보내서 준에게 거짓으로 아뢰기를, ‘한나라 군대가 10道로 나누어 이르니, 들어가서 宿衛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돌아와 준왕을 공격하였다. 준이 만과 서로 싸웠으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고 언급한 다음, “준왕은 좌우의 宮人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서 韓의 땅에 거처하였고, 스스로 韓王이라고 불렀다.”라고 기술하였다.
    滿은 중국의 여러 문헌에서 姓이 衛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는 연나라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三上次男은 위만이 燕人이라는 중국 사서의 기록을 중시하여 위만조선을 중국 이주민이 외지에 수립한 식민지정권으로 보았다(三上次男, 1954). 이에 대하여 그가 중국에서 망명할 때, 상투머리[魋結]를 하였고, 또 蠻夷服을 입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 아니라 연 지역에 살던 조선인 계통의 사람으로 보는 견해(이병도, 1954)도 제기되었다. 한편 북한 학계에서는 만을 고조선의 변방토호세력이었다고 본다. 그들에 따르면, 衛滿의 衛는 중국인이 위만이 중국인이었던 것처럼 꾸미기 위하여 중국의 衛나라 명칭을 앞에다 붙인 것인데, 『史記』와 『漢書』에 滿이라고만 나오지만, 『三國志』 所引 魏略이나 『後漢書』, 「東夷列傳」에 衛滿으로 나오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위만이 정권을 장악한 후 중국식 관제를 도입하지 않았고, 또 고조선의 수도인 王險城에 그대로 도읍을 정하였다는 사실을 위만이 고조선 사람이라는 근거로 제시하였다(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1979). 일부 학자는 상투머리, 즉 魋結은 반드시 조선인만의 풍속이 아니고 南越이나 중국에도 그러한 풍속이 있었으며, 만이복도 반드시 조선의 의복을 뜻한다고 보기 힘들다고 반박하면서 위만을 조선인 계통으로 보는 견해를 비판(김한규, 1980)하기도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75)
    〔原註〕 丁謙이 말하기를, “箕淮는 馬韓에서 왕 노릇하였다.”고 하였다. 朝鮮史에 의거하여 말하면, 衛滿의 핍박을 피해 무리를 이끌고 金馬郡을 빼앗아 그곳에서 거주하며 스스로 武康王이라 칭했다고 한다. 金馬는 곧 本傳에서 말한 (辰)王이 다스렸다는 月支國이며, 지금의 전라도 익산군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76)
    위략: 『魏略』은 晉代 초에 魚豢이 지은 책으로서 『三國志』, 「위서」, 「동이전」의 저본이 되었다. 진수가 『三國志』를 편찬한 이후 배송지는 『魏略』을 많이 인용하여 보완했다. 『魏略』의 인용 사례는 항목별로 1~2건인데 韓傳은 5건으로 양도 많아 이례적으로 『魏略』의 의존도가 높다(주보돈, 2013). 진수는 韓傳에서 『魏略』의 내용을 상당 부분 누락하고 내용을 변개한 점이 확인된다(윤용구, 1998). 韓傳에 인용된 『魏略』의 고조선 관련 기사는 고조선과 연의 대립이나 만왕의 고조선 찬탈 등 『史記』와 『漢書』에는 나오지 않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낭중이라는 낮은 관직을 지낸 어환이 새로운 자료를 입수할 가능성은 낮기 때문에 ‘조선후’ 기사는 어환이 『魏略』 이전에 편찬된 다른 사서의 고조선 기사를 참고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에 참고한 문헌은 구체적으로 『東觀漢記』를 지목하기도 한다(오강원, 2012). 바로가기
  • 번역주 077)
    기자: 箕子는 중국 商나라 紂王代의 賢人으로서 왕의 無道를 간언하였다가 감옥에 갇혔으나 周 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풀어주었다고 알려졌다. 그가 武王에게 유교통치의 근간인 洪范九疇를 바쳤다고 전하고 있다. 漢代 이후의 史書에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箕子東來說이 기술되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에 기술된 내용도 그 가운데 하나다. 현재 기자동래설은 부정되고 있다(『사기』, 「조선열전」 주 참조). 바로가기
  • 번역주 078)
    연나라가 ~ 칭하고: 易王代(기원전 332~기원전 321)에 연나라에서 王을 칭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대륙정세는 전국 7웅이 상호 각축전을 벌이는 가운데, 고조선은 중원제국과 치열한 항쟁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여기서 주 왕실을 받들기 위해 연을 치려고 했다는 것은 화이관에 의한 후대의 사료적 윤색이지만 고조선이 연과 각축할 정도의 세력이었고 주왕실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서영수, 1999). 바로가기
  • 번역주 079)
    대부 예: 본래 大夫는 중국 周나라의 관등명으로서 그 밑에 士라는 하급관리가 있고, 위로는 장관 이상에게 부여하던 卿이라는 관등이 있었다. 진한대 이후의 대부는 상앙의 변법에서 창건한 22등작제의 제5급을 말하는 것이고, 당대에 대부는 천자의 비서장으로서 국가가 논의해야 할 중요한 문제를 취급하였다. 고조선의 대부는 진한대의 대부와 성격이 비슷한 존재로서 이해되며, 구체적으로 왕의 측근으로서 나라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왕에게 직접 충고할 수 있는 직위로 판단된다. 고조선에서 대부라는 직위를 역임한 禮는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바로가기
  • 번역주 080)
    〔原註〕 毛本에서는 아래의 ‘燕’字를 ‘以’字로 표기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81)
    옛날에 기자의 후손 ~ 침공하지 않았다: 고조선은 기원전 323년 무렵에 연의 침략 계획에 대해 스스로 ‘왕호’를 칭하면서 전쟁도 불사하는 강경 조치로 대응한다. 당시 고조선의 정치·군사적 역량이 연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대부 예의 중재로 전쟁을 하지 않지만 그로부터 불과 50년이 지나지 않은 기원전 2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고조선은 연의 진개의 침공을 받고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기게 된다(박대재, 2006).
    〔原註〕 攻은 혹시 ‘改’로 고쳐야 하지 않을까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82)
    진개: 진개는 전국시대 연나라 昭王(기원전 311~기원전 279) 때의 장군으로서 東胡에 인질로 가서 있다가 돌아와 동호를 정벌하여 5군을 설치한다. 『史記』, 「조선열전」이나 『鹽鐵論』은 고조선과 연의 전쟁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당시 연의 장군이 누구였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 진개가 동호만이 아니라 조선도 공격했음을 알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83)
    연이 장군 진개를 ~ 빼앗고: 연나라가 조선 서방 2천여 리를 빼앗은 기록에 대해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위략 자체를 신뢰하지 않거나(김정배, 2010; 송호정, 2003), 동호와 고조선이 빼앗긴 지역의 합이라는 견해(이병도, 1976; 노태돈, 1990; 서영수, 1988; 박대재, 2006), 실제 거리라기보다는 많은 땅을 침략하였다는 뜻이라는 견해(윤내현, 1986)도 있다. 『魏略』은 조선후국이 연이 바로 이웃한 국가로 나오는데, 양국은 상호 침범할 수 있을 정도로 이웃하고 있어야 『魏略』의 서술은 합리적이 된다. 최근에는 요서의 조선후국과 요동의 준왕조선을 별개로 파악하여 ‘2천여 리’는 요서·요동을 포괄한 영역으로 보는 견해(오현수, 2015)도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84)
    만번한: 滿番汗은 연의 동방 진출 당시의 지명이 아니라 漢나라의 요동 식민이 본격화된 후대의 지명이다. 滿潘汗은 前漢代 요동군의 속현인 文縣과 番汗縣의 連稱으로 오늘날 요동 海成縣 및 蓋平 일대로 비정된다(서영수, 1988; 노태돈, 1990). 문현이 요동의 千山山脈 서남쪽의 지명인 것으로 보아 번한현도 이와 관련된 지명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결국 고조선은 연에게 패하여 千山에 이르는 서쪽 땅 1천 리를 상실하였으나, 요동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유일한 자연계선인 천산산맥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서영수, 1988). 한편 만번한 지역을 한때 고조선의 중심지였다고 보기도 한다(노태돈, 1990). 혹은 이 지역이 중심지는 아니지만 齊와 조선의 주요 해상 연결 거점으로 연이 齊의 잔여 세력과 조선이 연결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공격했다는 견해(박대재, 2006)도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85)
    〔原註〕 趙一淸이 말하기를, “潘韓은 잘못이다. 兩漢志(『한서』의 「지리지」와 『후한서』의 「군국지」)에서는 함께 番汗으로 표기하였다.”고 하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86)
    몽염: 몽염(?~기원전 209)은 武의 아들로서 기원전 221년에 秦나라가 齊나라를 멸망시킬 때에 큰 공을 세웠다. 기원전 215년 흉노 정벌 때에 활약이 컸고, 그 다음해에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始皇帝 사망 후 환관 趙高와 丞相 李斯의 흉계로 감옥에 갇히게 되자 자살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87)
    부: 준왕 이전의 고조선 왕으로 否가 왕위에 있을 때 중원에는 秦이라는 통일제국이 존재했다. 否王은 진의 습격을 두려워하여 복속할 것을 약속하였다고 하는데 조선이 중원의 통일제국 진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끝내 朝會에 응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보아 당시 고조선의 국력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秦도 이러한 고조선에 대하여 더 이상의 침략을 포기하고 고조선으로부터 새로 빼앗은 땅에 『史記』의 표현대로 이중의 요새를 쌓아 고조선의 반격에 대비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서영수, 1999). 바로가기
  • 번역주 088)
    진승: 陳勝은 秦의 陽城人으로 字는 涉이다. 기원전 209년(秦 2世 皇帝 元年) 吳廣과 함께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陳에서 왕을 칭하고 국호를 張楚라고 하였으나 6개월 만에 秦에게 진압되었다. 진승과 오광의 난을 계기로 각지에서 군웅들이 반란을 일으켜 秦王朝는 급격하게 몰락하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89)
    항우: 중국 진나라 말기에 劉邦과 천하를 놓고 다툰 무장이다. 이름은 籍이고, 羽는 字이다. 기원전 209년에 陳勝·吳廣의 난으로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숙부 項梁과 함께 봉기하였다. 진왕 子嬰을 죽이고 도성인 咸陽을 불사른 뒤에 彭城에 도읍을 정하고 西楚의 覇王이라고 칭하였다. 후에 垓下에서 유방에게 패배하여 자살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90)
    패수: 浿水는 고조선과 漢나라의 경계선이 되는 강으로 한반도설(압록강, 청천강), 요동설(요하, 혼하), 요서설(대릉하, 난하)등이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浿水는 『염철론』에서 秦과 고조선의 경계로 언급되는 沛水와 같은 강인데 문헌의 성립연대에 따라 표기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패수의 지명이 바뀐 이유는 물론 고조선의 후퇴로 패수의 명칭이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염철론』과 『漢書』, 「地理志」에서 보듯이 전한 말기부터는 요동의 浿水를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 중심지에 가까운 조선계 지명인 浿水와 구별하기 위해 沛水(『염철론』; 『한서』), 또는 溴水(『위략』)로 고쳐서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沛水가 만번한에 인접한 요동 지역의 강이고 조선이 진의 요동외요를 공략한 뒤 후퇴한 한제국과 浿水를 경계로 하였으므로 문제의 浿水 또한 만번한이나 진의 요동외요의 위치로 보아 소요수와 태자하가 만나는 小遼水 본류, 즉 오늘날의 渾河 하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서영수, 2008). 『사기』, 「조선열전」 주석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91)
    〔原註〕 趙一淸이 말하기를, “漢書 地理志 樂浪郡 浿水縣條에서 물(패수)이 서쪽으로 흘러 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패수는) 지금의 大同江이다. ‘溴’字는 오기이며 아래에서도 같다. (盧)弼이 보건대, 漢書 지리지에 이르기를, ‘패수에 이르러 경계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패수의 해석은 고구려전에 보인다.” 바로가기
  • 번역주 092)
    〔原註〕 何焯이 말하기를, ‘故’字는 마땅히 ‘收’字로 고쳐야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93)
    박사: 본래 고대 중국에서 學識이 博通한 자를 博士로 임명하여 교육이나 학문을 맡겼다. 그러나 위만이 학식이 박통하여 박사를 수여한 것인지, 아니면 고조선의 어떤 고유의 관직인 박사를 수여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094)
    규: 圭는 고대에 諸侯가 朝會·會同할 때, 손에 쥐는 위가 둥글고 아래가 모진 길쭉한 모양의 玉이다. 통상 천자가 제후를 封할 때 사여한다. 바로가기
  • 번역주 095)
    〔原註〕 ‘亡’字 아래에 한 글자가 빠진 듯하다.바로가기
  • 번역주 096)
    〔原註〕 盧弼이 보건대, 『魏略』이 이르는 바는 史記나 漢書의 朝鮮傳과 대체로 같으나 비교적 더 상세하여 가히 『사기』나 『한서』, 「조선전」의 빠진 부분을 보완해준다. 丁謙이 말하기를, “朝鮮史에서 서로 전하기로는 그 나라(조선)는 檀君으로부터 비롯되어 1,048년을 전하였고, 주나라 초에 이르러 箕子가 이를 대신해 흥하여 40世를 전하다가 燕人 衛滿에게 습격을 받아 (위만이) 그 땅을 점거하였다.”고 하였다. 班固의 『漢書』는 한나라 때의 일을 기록하였으니, 이 때문에 (조선이) 위만에서 시작된 것으로 가탁하였다. 眞番은 본래 조선에 부속된 番部로 七國(전국 7웅 시대) 때 연나라의 침략을 받았으며, 武帝가 조선을 격파하고는, 이를 고쳐 眞番(郡)으로 삼았다. (진번군의) 치소는 霅縣이었으니 지금의 奉天 興京廳(지금의 신빈현)의 변경 바깥에 있었고 동남쪽으로 압록강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浿水에는 둘이 있었다. 『(新)唐書』, 「高麗傳」에서 “(고구려 왕성인 평양성은) 남쪽으로 浿水에 연해 있다.”고 한 것은 大同江을 가리키고, 이 (東夷)傳의 浿水는 모두 압록강을 가리키나, 지금 상고하는 자들이 다만 대동강이 패수라는 것만 알 뿐 압록강 또한 패수의 이름이란 것을 알지 못하였다. 대개 대동강은 평양의 남쪽에 있고 위만이 도읍한 王險城이 곧 평양이다. (그러나) 위만이 패수를 건넌 뒤에 이곳에 거처했으므로 즉 (패)수는 평양의 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증거이다. (한 무제 때) 涉何가 (조선왕) 右渠를 훈계하고 (한나라) 조정으로 돌아갈 때에 반드시 浿水를 지났으니, 이것이 두 번째 증거이다. 左將軍(筍彘)이 (조선의) 浿水西軍을 격파하고 바야흐로 王險(城)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증거이다. 右渠의 太子가 (조정으로) 들어가 천자에게 사죄하려 하여 浿水에 도착한 뒤에 사람들을 이끌고 되돌아갔으니, 이것이 네 번째 증거이다. 이를 보건대 (東夷)傳 중의 浿水는 모두 압록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臨屯 또한 (조선의) 番部였다가 뒤에 (臨屯)郡이 되었는데 그 치소는 東暆(縣)로 지금의 조선 강원도 江陵府의 城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97)
    한의 땅에 거처하였고: 준왕의 南來地域에 대하여 조선시대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전북 익산시 금마면 일대로 보았고, 현재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이다(김정배, 1976; 송호정, 2015). 이 밖에 그 지역을 경기도 광주시 경안 일대(이병도, 1976)나 충남 천안시 직산면으로 추정하는 견해(천관우, 1976)도 있다. 『잠부론』에서는 韓西가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겨 海中으로 옮겨갔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韓地’에 거했다고 나오며 『後漢書』에서는 준왕이 오기 이전에 이미 마한이 존재했다고 한다. 즉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이 무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들어와 마한을 공략하고 자립하여 한왕이 되었다는 『後漢書』의 기록에 의하면 마한이라는 유력한 정치세력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준왕이 거느린 무리가 수천 명이라고 한 것은 일견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三國志』에 준왕이 위만의 급습으로 말미암아 화급하게 좌우궁인만을 거느리고 남쪽의 한족 거주지로 도망하여 왔다고 전하는데, 이곳에는 아직 뚜렷한 정치체가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통솔해온 무리가 소수였음에도 자연스레 한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두 사서가 똑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어 어느 쪽을 취하느냐에 따라 삼한 전체상은 확연히 달라진다(주보돈, 2013). 우거왕 당시 辰國의 존재가 확실히 등장하고 이후 韓이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여기서 ‘韓地’라고 한 것은 전한 이후의 지리정보에 의한 追記라고 볼 수 있다(박대재, 2005). 반면 준왕 이전에 이미 마한이 존재했다고 보고 늦어도 마한은 진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3세기 말경에 성립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마한의 영역은 이후 어느 시기에 충청, 전라도 지역을 포괄하게 되었고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경기 지역에 성립되었던 辰國이 위만조선 멸망 전후에 파생한 유이민 집단에 의해 해체되면서 마한의 세력이 한강 유역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노중국, 1987). 근래에는 문헌상 준왕의 망명 지역이 막연한 ‘海中’에서 후대에 ‘韓地’로 구체화되어 가기 때문에 실제 준왕이 南遷하였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박대재, 2011; 전진국, 2012; 노태돈, 2015). 한편,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2세기 서남부 지역에서 출현한 초기철기가 준왕집단의 망명과 같은 단기적인 주민이동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요동·서북한 지역과의 장기적인 교류에 의한 문화전파로 보아야 할지는 과제로 남는다(박대재, 2005). 바로가기
  • 번역주 098)
    한씨: 종래에 이에 근거하여 준왕의 姓이 본래 韓氏였다고 주장한 견해가 있었다(이병도, 1976). 이 견해에 따르면, 『위략』의 찬자는 준왕이 箕子의 후예로서 箕氏를 칭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韓氏를 칭하였던 사실을, 준이 한 지역에 가서 韓王이라고 自號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인식한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준왕이 한씨라는 사실, 그리고 『詩經』 韓奕篇에 燕나라 근처에 예족과 맥족을 다스리는 韓侯가 존재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韓侯의 지배를 받던 종족집단들이 기원전 7세기경에 조선 지역으로 이동하여 단군조선을 대체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서영수, 1988). 이 밖에 최근에 낙랑 호족이었던 韓氏가 낙랑군 지배하에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유력한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정통성과 존엄성을 내세우려는 노력의 소산으로 준왕의 성이 한씨라고 부회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노태돈, 2015). 바로가기
  • 번역주 099)
    〔原註〕 丁謙이 말하기를, “東藩紀要에 조선왕 箕淮(準王)가 처음 마한에 나라를 세운 것은 한나라 惠帝 원년(기원전 194)의 일이고, 뒤에 百濟王 溫祚에게 멸망당한 것은 新나라 王莽 2년(10)의 일이니 나라를 전한 것을 헤아려보면 203년이다. 辰韓과 弁韓은 처음 어느 때에 세워졌는지 알 수 없으나 뒤에 모두 新羅王 赫居世에게 멸망되었으니, 이는 한나라 宣帝 五鳳 연간(기원전 57~기원전 54) 이후의 일이다. 이 三韓에 나라가 있었던 것은 모두 西漢(전한) 때의 일이며 東漢(후한) 초에는 三韓은 이미 망한 뒤이니, 어찌 (하물며) 曹魏를 논단하겠는가? 陳氏(陳壽)의 이 (『삼국지』, 「동이」)전은 晉나라 초에 저술되었으나 여전히 단지 삼한의 일만을 말하였을 뿐, 백제·신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니 어찌된 일인가? 내(盧弼)가 (「동이」)전의 글을 세밀히 살펴보고 朝鮮史를 참조해보건대, (위에서) “그 뒤 절멸되었다.”고 이른 것은 즉 百濟에게 멸망한 것이고 “韓人 중에 여전히 그의 제사를 받드는 이가 있다.”고 이른 것은 즉 『후한서』에서 “(준왕의 후손이 절멸된 뒤) 마한인이 다시 스스로 왕에 올랐다.”고 한 것을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100)
    〔原註〕 범엽의 『후한서』, 「동이전」에서 “(후한) 建武 20년(44) 韓人 廉斯人인 蘇馬諟 등이 낙랑군으로 와서 조공을 바쳤다고 하니, 光武帝가 蘇馬諟를 漢나라의 廉斯邑君으로 봉하고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四時마다 朝謁하도록 했다.” 하였다. 章懷太子가 이를 注하여, 廉斯는 邑의 이름이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101)
    우거: 우거(?~기원전 108)는 만왕의 손자로서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이다. 만왕의 ‘만’과 마찬가지로 ‘우거’ 역시 ‘조선에서 임금을 존칭하던 고유어의 차자 표기’로 보인다(서영수, 1996).바로가기
  • 번역주 102)
    조선상 역계경: 卿은 원래 족장적 지위에 있는 자가 정치에 참여함에 따라 주어진 명칭으로 주대 이래 大夫와 짝하는 귀족의 명칭이었다. 卿은 주로 國君을 보필하여 일반 국정을 통괄하였는데 대체로 그러한 의미에서 大夫와 구분되었다. 역계경의 경우 스스로의 領有가 있음을 특징으로 하는 주대의 卿의 의미에서 사용되어오던 것이 어느 시기인가부터 相官制가 도입되면서 진한 대에서와 같이 散秩된 상태로 전환되어간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광수, 1994). 相은 본래 고대 중국에서 비롯된 관직으로 秦漢代에는 황제하의 丞相이 국무를 총괄하는 百官의 장이었다. 고조선의 相은 바로 漢의 영향을 받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조선의 相을 중앙 관직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대체로 임명을 받은 관료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독자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정치집단의 首長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朝鮮相은 조선국을 구성하는 중심부인 조선 지역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복수의 조선상이 사료에 나타난다. 이와 달리 사료상에 尼谿相이 보이는데, 이는 니계 지역을 관장하는 수장으로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조선의 상들은 주요 정책의 결정에 참여하였고 왕은 회의체를 통해 상들을 통제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역계경이 대한정책을 둘러싸고 왕과 대립을 보였던 것도 그러한 과정에서 비롯되었으며, 조선상 노인 등이 함께 모의하여 한에 투항한 것도 평시에 운영되던 회의체적인 요소가 적용되었다는 것이다(노태돈, 2000). 바로가기
  • 번역주 103)
    진국: 『後漢書』, 「동이열전」 한조의 주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104)
    〔原註〕 漢書에서 “(한 무제) 元封 3년(기원전 108) 여름에, 尼谿相 參이 사람을 시켜 朝鮮王 右渠를 죽이게 하고 와서 항복하였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105)
    이때에 백성으로 ~ 2천여 호였다: 역계경이 진국으로 갔다는 이 기사는 『위략』 내에서 韓에 관한 역사라기보다는 고조선에 대한 역사서술이라 할 수 있다(전진국, 2012). 역계경이 동으로 진국에 갔다는 사실에서 진국은 고조선의 동방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2천여 호가 역계경과 함께 하였다고 하므로 마한의 소국이 수천 호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역계경 집단은 진국에 속하는 1국이 되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성한, 2014). 이 기록에 근거하여 고조선의 관직인 相을 일정한 정치집단의 수장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106)
    〔原註〕 貢은 아마도 眞이 아닌가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107)
    왕망: 중국 新나라의 황제이다. 前漢의 平帝를 독살하고 5년에 천자의 자리에 올랐으며, 이어 9년에 나라 이름을 新이라 고쳐 불렀으나, 그가 劉玄의 군사에 죽임을 당하게 되면서 23년에 신도 멸망하게 되었다. 바로가기
  • 번역주 108)
    염사치: 廉斯는 邑名이고, 鑡는 그 거수를 칭하는 용어로 추정된다. 일부는 ‘착(鑡)’으로 독음하여 廉斯鑡 자체를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廉斯鑡는 최근 글자 음 그대로 염사착으로 읽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통설대로 염사치로 읽도록 하겠다. 한편 『후한서』, 「한전」에 “建武 20년(44)에 韓의 염사 사람인 蘇馬諟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光武帝는 소마시를 漢廉斯邑君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朝謁하도록 하였다.”라는 내용이 전한다. 종래에 염사는 충남 아산시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고(이병도, 1976), 이 밖에 마한 지역으로 보는 견해(栗原朋信, 1978; 山尾幸久, 1982) 경남 김해의 구야국으로 보는 견해(정중환, 1973; 백승충, 1989), 마산·창원 방면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견해(西本昌弘, 1989; 연민수, 2003), 낙동강 하류 동안 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새로운 견해(이부오, 2001)가 제출되었다. 바로가기
  • 번역주 109)
    우거수: 右渠帥는 左渠帥와 대칭되는 개념으로서 진한의 오른쪽에 있는 거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낙랑군이 진한을 크게 좌·우로 구분하여 파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윤선태, 2001). 한편 일부 학자는 진한의 오른쪽인 변한의 거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고(백승충, 1995), 혹은 진한 右渠의 帥(家臣)로 해석하는 견해(井上秀雄 外 譯註, 1974)도 있다. 바로가기
  • 번역주 110)
    함자현: 함자현은 진번군의 속현으로서 황해도 봉산군의 동남쪽인 서흥 일대로 추정된다(이병도, 1976).바로가기
  • 번역주 111)
    〔原註〕 兩漢志(『한서』의 「지리지」와 『후한서』의 「군국지」)에 의하면, 樂浪郡의 含資(縣)이고, 삼국시대의 魏나라가 帶方郡의 (소속으로) 고쳤으며, 晉書 地理志에서는 帶方郡에 속하였다고 하였다. 一統志에 의하면, 그 옛 성이 지금의 조선 경기도 城 남쪽 경역에 있다고 한다. 官本考證에서, 辰鑡 중의 辰字와 來出 중의 來字는 모두 衍字로 짐작된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112)
    잠중: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황해도 해안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岑中을 낙랑군 통제하에 있었던 남한강 중·하류의 津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윤선태, 2001).바로가기
  • 번역주 113)
    모한: 牟韓은 대개 弁韓을 가리킨다고 보나, 분명치 않다.바로가기
  • 번역주 114)
    이때에 진한이 진한인 1만 5천여 명과 변한포 1만 5천 필을 낙랑에게 배상하였다는 내용은 그대로 믿기 어렵고, 숫자가 과장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原註〕 毛本에서는 弁을 牟라고 썼으나 잘못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115)
    관과 책: 관과 책은 모두 관리들이 쓰던 의례용 모자를 일컫는다. 관은 일반적으로 비단으로 만들며, 등급에 따라 재질이나 색깔이 차이가 났고, 종류도 다양하였다. 한편 책은 앞부분이 모자 테보다 한 단 높고, 앞부분보다 더 높은 뒷부분이 두 가닥으로 갈라지면서 앞으로 구부러진 형태의 책과 뒤 운두가 뾰족하게 솟은 책의 두 종류가 있다. 전자는 주로 문관들이, 후자는 무관들이 착용하였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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