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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보는 독도

울릉도의 수토 결과에 관해 강원도 관찰사 심진현이 장계하다

  • 저필자
    장순순(전북대학교 교수)
  • 날짜
    1794년 6월 3일(음)
  • 출전
사료해설
울릉도 수토 결과에 대해서 강원도 관찰사 심진현이 올린 보고이다. 수토관(搜討官) 월송만호(越松萬戶) 한창국(韓昌國)이 1794년 4월 21일에 출발하여 5월 8일에 돌아왔다. 한창국은 울릉도 서쪽 황토구미진(黃土丘尾津)에 배를 대고 산을 올라 울릉도 일대를 살펴보고 가지도(可支島)에도 갔다. 가지도는 독도의 다른 이름(異稱)이다. 한창국이 독도에 갔을 때 네댓 마리의 가지어(可之漁; 강치)가 놀라서 뛰쳐나와 포를 쏘아 두 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또한 정기적으로 파견되는 수토관들이 향목정의 향나무를 베어갔기 때문에 점차 희소해졌다고 보고하고, 국왕에게 향나무를 비롯한 토산물을 바쳤다. 18세기 말에도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정기적인 수토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사료이다.
원문
○江原道觀察使沈晋賢狀啓言:
鬱陵島搜討, 間二年, 使邊將輪回擧行, 已有定式, 故搜討官越松萬戶韓昌國處, 發關分付矣。 該萬戶牒呈: “四月二十一日, 幸得順風, 糧饌雜物分, 載四隻船, 與倭學李福祥及上下員役、格軍八十名, 同日未時量, 到于大洋中, 則酉時, 北風猝起, 雲霧四塞, 驟雨霹靂, 一時齊發, 四船各自分散, 莫知所向。 萬戶收拾精神, 戎服禱海, 多散糧米, 以餽海神後, 使格軍輩, 擧火應之, 則二隻船擧火而應, 一隻船漠然無火矣。 二十二日寅時, 怒濤漸息, 只見遠海之中, 二隻船帆自南而來。 格軍輩擧手指東曰: ‘彼雲霧中隱隱如雲者, 疑是島中上峰也。’ 萬戶詳細遠望, 則果是島形也。 親自擊皷, 激勵格軍, 卽爲到泊於島之西面黃土丘尾津。 登山看審, 則自谷至中峰三十餘里, 而山形重疊, 谷水成川, 其中有可作水田六十餘石下種之地。 谷則狹窄, 有瀑布, 而左爲黃土丘尾窟, 右爲屛風石。 其上又有香木亭, 故斫取香木, 而以間年斫取之故, 漸就稀少。 二十四日到桶丘尾津, 則谷形如桶, 前有一巖在海中, 與島相距可爲五十步, 而高近數十丈, 周回皆是絶壁。 谷口巖石層層, 僅僅攀登而見之, 則山高谷深, 樹木參天, 雜草茂密, 通涉無路。 二十五日到長作地浦, 谷口果有竹田, 非但稀踈, 擧皆體小。 其中擇其稍大者斫取後, 仍向東南楮田洞, 則自洞口至中峰爲數十里許, 而洞裏廣闊基址, 顯有三處, 可作水田數十石下種之地。 前有三島, 在北曰防牌島, 在中曰竹島, 在東曰瓮島。 三島相距, 不過百餘步, 島之周回, 各爲數十把, 險巖嵂屼, 難以登覽, 仍爲止宿。 二十六日轉向可支島, 四五箇可支魚, 驚駭躍出, 形若水牛。 砲手齊放, 捉得二首, 而丘尾津山形, 最爲奇異, 入谷數里, 則昔日人家遺址, 宛然尙存。 左右山谷, 甚爲幽深, 難於登陟。 仍遍看竹巖、帿布巖、孔巖、錐山等諸處, 行到桶丘尾, 禱山祭海, 待風留住。 蓋島周回, 摠爲論之, 則南北七八十里許, 東西五六十里許。 環海則皆是層巖絶壁, 四方山谷, 則間有昔日人居之土址, 而田土可墾處, 合爲數百石下種之地。 樹木則香、栢、蘗、檜、桑、榛, 雜草則靑芹、葵、艾、苧、楮。 其餘異樹奇草, 不知名, 難以盡記。 羽蟲則雁、鷹、鷗、鷺, 毛蟲則貓、鼠, 海産則藿、鰒而已。 三十日發船, 初八日還鎭。 島中所産可支魚皮二令、篁竹三箇、紫檀香二吐莫、石間朱五升、圖形一本, 監封上使” 云。 幷上送于備邊司。
번역문
강원도 관찰사 심진현(沈晉賢)이 장계하였다.
“울릉도의 수토(搜討)를 2년에 한 번씩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돌아가며 거행하기로 이미 정식(定式)을 삼고 있기 때문에, 수토관 월송 만호(越松萬戶) 한창국(韓昌國)에게 관문을 띄워 분부하였습니다. 월송 만호의 첩정(牒呈)에 ‘4월 21일 다행히도 순풍을 얻어서 식량과 반찬거리를 4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왜학(倭學) 이복상(李福祥) 및 상하 원역(員役)과 격군(格軍) 80명을 거느리고 같은 날 미시(未時)쯤에 출선하여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렀는데, 유시(酉時)에 갑자기 북풍이 일며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게 끼고, 우뢰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일시에 출발한 4척의 배가 뿔뿔이 흩어져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만호가 정신을 차려 군복을 입고 바다에 기원한 다음 많은 식량을 물에 뿌려 해신(海神)을 먹인 뒤에 격군들을 시켜 횃불을 들어 호응케 했더니, 두 척의 배는 횃불을 들어서 대답하고 한 척의 배는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22일 인시(寅時)에 거센 파도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바다 멀리서 두 척의 배 돛이 남쪽에 오고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있던 참에 격군들이 동쪽을 가리키며 ‘저기 안개 속으로 은은히 구름처럼 보이는 것이 아마 섬 안의 높은 산봉우리일 것이다.’ 하기에, 만호가 자세히 바라보니 과연 그것은 섬의 형태였습니다. 직접 북을 치며 격군을 격려하여 곧장 섬의 서쪽 황토구미진(黃土丘尾津)에 정박하여 산으로 올라가서 살펴보니, 계곡에서 중봉(中峰)까지의 30여 리에는 산세가 중첩되면서 계곡의 물이 내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논 60여 섬지기의 땅이 있고, 골짜기는 아주 좁고 폭포가 있었습니다. 그 왼편은 황토구미굴(黃土丘尾窟)이 있고 오른편은 병풍석(屛風石)이 있으며 또 그 위에는 향목정(香木亭)이 있는데, 예전에 한 해 걸러씩 향나무를 베어 갔던 까닭에 향나무가 점차 듬성듬성해지고 있습니다.
24일에 통구미진(桶丘尾津)에 도착하니 계곡의 모양새가 마치 나무통과 같고 그 앞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바닷속에 있는 그 바위는 섬과의 거리가 50보(步)쯤 되고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며, 주위는 사면이 모두 절벽이었습니다. 계곡 어귀에는 암석이 층층이 쌓여 있는데, 근근이 기어올라가 보니 산은 높고 골은 깊은데다 수목은 하늘에 맞닿아 있고 잡초는 무성하여 길을 헤치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25일에 장작지포(長作地浦)의 계곡 어귀에 도착해보니 과연 대밭이 있는데, 대나무가 듬성듬성할 뿐만 아니라 거의가 작달막하였습니다. 그중에서 조금 큰 것들만 베어낸 뒤에, 이어 동남쪽 저전동(楮田洞)으로 가보니 골짜기 어귀에서 중봉에 이르기까지 수십 리 사이에 세 곳의 널찍한 터전이 있어 수십 섬지기의 땅이었습니다. 또 그 앞에 세 개의 섬이 있는데, 북쪽의 것은 방패도(防牌島), 가운데의 것은 죽도(竹島), 동쪽의 것은 옹도(瓮島)이며, 세 섬 사이의 거리는 1백여 보(步)에 불과하고 섬의 둘레는 각각 수십 파(把)씩 되는데, 험한 바위들이 하도 쭈뼛쭈뼛하여 올라가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거기서 자고 26일에 가지도(可支島)로 가니, 네댓 마리의 가지어(可支魚)가 놀라서 뛰쳐나오는데, 모양은 무소와 같았고, 포수들이 일제히 포를 쏘아 두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구미진(丘尾津)의 산세가 가장 기이한데, 계곡으로 십여 리를 들어가니 옛날 인가의 터전이 여태까지 완연히 남아 있고, 좌우의 산곡이 매우 깊숙하여 올라가기는 어려웠습니다. 이어 죽암(竹巖)·후포암(帿布巖)·공암(孔巖)·추산(錐山) 등의 여러 곳을 둘려보고 나서 통구미(桶丘尾)로 가서 산과 바다에 고사를 지낸 다음, 바람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대저 섬의 둘레를 총괄하여 논한다면 남북이 70, 80리 남짓에 동서가 50, 60리 남짓하고 사면이 모두 층암 절벽이며, 사방의 산곡에 이따금씩 옛날 사람이 살던 집터가 있고 전지로 개간할 만한 곳은 도합 수백 섬지기쯤 되었으며, 수목으로는 향나무·잣나무·황벽나무·노송나무·뽕나무·개암나무, 잡초로는 미나리·아욱·쑥·모시풀·닥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그 밖에도 이상한 나무들과 풀은 이름을 몰라서 다 기록하기 어려웠습니다. 우충(羽虫)으로는 기러기·매·갈매기·백로가 있고, 모충(毛虫)으로는 고양이·쥐가 있으며, 해산물로는 미역과 전복뿐이었습니다.
30일에 배를 타고 출발하여 새달 8일에 본진으로 돌아왔습니다. 섬 안의 산물인 가지어 가죽 2벌, 황죽(篁竹) 3개, 자단향(紫檀香) 2토막, 석간주(石間朱) 5되, 도형(圖形) 1벌을 감봉(監封)하여 올립니다.’ 하였으므로, 함께 비변사로 올려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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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의 수토 결과에 관해 강원도 관찰사 심진현이 장계하다 자료번호 : sd.d_0149_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