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 2년에서 가정 3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방물을 바치니 조정에서 하사품을 내린 등의 설명
선덕 2년(1427)에 낙타·말·방물을 바치니,주 001 그 사신 아력(阿力)
주 002에게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를 제수하고 고명·관대를 하사하였다.주 003 이후에 오랫동안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성화 19년(1483)에 흑루(黑婁)
주 004·살마아한·파단사(把丹沙)
주 005 등 여러 나라와 함께 사자를 바치니, 조서를 내려 더 많은 상을 내려주었다. 홍치 5년(1492)에 합밀의 충순왕 섬파(陝巴, 재위 1492~1493, 1497~1505)주 006가 봉호(封號)를 승계 받고 귀국하여 경계를 이웃하고 있는 야먀극력(野乜克力)
주 007
각주 007)
의 추장과 혼인관계를 맺었다.주 008 실랄사 추장은 그가 가난함을 염려하여, 인접국인 역불랄인의 추장과 함께 평장(平章)주 009
쇄화복태(鎖和卜台)·지원(知院)주 485
만가(滿可)를 거느리고 각자 [조정에] 사람을 파견하여 재물을 내려 주어 성혼(成婚)에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의논하여 이를 의롭다 여겨 두터이 섬파에게 하사품을 내리고, 아울러 두 나라 및 그 평장·지원에게 채폐를 하사하였다.주 011 가정 3년(1524)에 근방(近傍)의 32부(部)와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말과 방물을 바쳤다. 그 사신들은 각기 망의(蟒衣)주 012·슬란(膝襴)주 013·자기·포백을 청하였다. 천자는 거절할 수 없어, [실정을] 헤아려 [그들에게] 주었다.주 014 이로부터 조공사신 역시 이르지 않았다.野乜克力: 乜克力으로도 불리며, 蒙古 옛 부족의 명칭이다. Merkin 혹은 Meki部를 가리킨다. 혹자는 突厥族의 후예라고도 하는데, 明 中期 그 부족의 首領 중 한 명인 癿加思蘭이 300~400명의 部族人을 이끌고 土魯番 지역으로 들어가 유목을 하였으며, 이후 天順 연간(1457~1464)에는 哈密城 밖 巴里坤 일대로 이주하였다. 그러다 成化 연간(1465~1487) 초에 동부 蒙古 河套地方을 점거하여 成化 11년(1475)에 元의 후예인 滿都魯를 可汗으로 세우고, 癿加思蘭은 太師가 되었는데, 부족의 수가 數萬으로 늘어났다. 이후 癿加思蘭은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亦思馬因과 亦不剌이 서로 이어 太師가 되었지만 達延(Dayan)汗이 즉위한 이후 俺答(Altan)칸에 이르는 동안 이들 부족은 점차 韃靼(Tatar)에게 흡수되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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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野乜克力: 乜克力으로도 불리며, 蒙古 옛 부족의 명칭이다. Merkin 혹은 Meki部를 가리킨다. 혹자는 突厥族의 후예라고도 하는데, 明 中期 그 부족의 首領 중 한 명인 癿加思蘭이 300~400명의 部族人을 이끌고 土魯番 지역으로 들어가 유목을 하였으며, 이후 天順 연간(1457~1464)에는 哈密城 밖 巴里坤 일대로 이주하였다. 그러다 成化 연간(1465~1487) 초에 동부 蒙古 河套地方을 점거하여 成化 11년(1475)에 元의 후예인 滿都魯를 可汗으로 세우고, 癿加思蘭은 太師가 되었는데, 부족의 수가 數萬으로 늘어났다. 이후 癿加思蘭은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亦思馬因과 亦不剌이 서로 이어 太師가 되었지만 達延(Dayan)汗이 즉위한 이후 俺答(Altan)칸에 이르는 동안 이들 부족은 점차 韃靼(Tatar)에게 흡수되었다.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485)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색인어
- 이름
- 아력(阿力), 섬파, 陝巴, 쇄화복태(鎖和卜台), 만가(滿可), 섬파
- 지명
- 흑루(黑婁), 살마아한, 파단사(把丹沙), 합밀, 야먀극력(野乜克力), 역불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