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임진왜란이 끝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장악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에서 반대파를 물리치고 1603년 에도 막부를 수립하였다. 새로운 일본의 지배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권위를 높여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고, 조선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조선에서 통신사가 다시 파견되기를 바랐다.
당시 침략을 당했던 조선에서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을 다시 데려와야 하는 큰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전후 복구도 완전히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과 계속 적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결국 도쿠가와 막부가 국교 재개를 요청하자 조선은 사명 대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의 의사를 확인하려 하였다.
사명대사는 탐적사로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을 짓고 1,50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다. 에도 막부의 의사를 확인한 조선은 1607년 회답사를 파견하여 국교를 재개하고, 1609년에는 비록 임진왜란 이전보다는 축소되기는 하였으나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무역을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부산포에는 다시 왜관이 설치될 수 있었다.
에도 막부는 쇼군이 바뀔 때마다 통신사의 파견을 요구하였다. 통신사는 정사와 부사를 비롯하여 수백여 명의 사절단으로 구성되었으며, 단순한 외교 사절을 넘어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일본에서는 통신사가 올 때마다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여 국빈으로 대접하였다. 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19세기 초까지 모두 12회 파견되었다. 통신사는 전란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하는 한·일 양국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당시 침략을 당했던 조선에서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을 다시 데려와야 하는 큰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전후 복구도 완전히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과 계속 적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결국 도쿠가와 막부가 국교 재개를 요청하자 조선은 사명 대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의 의사를 확인하려 하였다.
사명대사는 탐적사로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을 짓고 1,50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다. 에도 막부의 의사를 확인한 조선은 1607년 회답사를 파견하여 국교를 재개하고, 1609년에는 비록 임진왜란 이전보다는 축소되기는 하였으나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무역을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부산포에는 다시 왜관이 설치될 수 있었다.
에도 막부는 쇼군이 바뀔 때마다 통신사의 파견을 요구하였다. 통신사는 정사와 부사를 비롯하여 수백여 명의 사절단으로 구성되었으며, 단순한 외교 사절을 넘어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일본에서는 통신사가 올 때마다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여 국빈으로 대접하였다. 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19세기 초까지 모두 12회 파견되었다. 통신사는 전란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하는 한·일 양국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