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스탄의 암각화 연구사
5. 키르기스스탄의 암각화 연구사
키르기스스탄은 바위그림이 많은 지역들 중 하나이다. 바위그림들은 이 지역 고대 주민들의 세계관과 신화 그리고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바위그림의 발견과 연구는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으이스이크-쿨 바위그림에 관한 첫 번째 발간물과 관련이 있다(Gulyaev, 1853, pp. 22~25). 남부 키르기스스탄 바위그림에 관한 최초 자료는 카자흐 일등 대위였던 N. A. 나슬레도프가 1878년에 손으로 쓴 일기이다. 여기에는 오쉬 시 지역의 아라반 다반 말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Mason, 1948, p. 131).
이후 바위그림 연구는 투르케스탄 고고학 동호회 결성과 관련이 있다. V. A. 칼라우르는 1896~1899년에 탈라스 상류 지역에서의 룬문자 조사 기간 중 치임-타쉬와 테레크-사이에서 바위그림을 기록하였다(Kallaur, 1899, pp. 265~270 : Kallaur, 1897, pp. 1~7).
20세기 초에는 키르기스스탄을 포함한 내륙 아시아 고대와 중세 유적에 대한 흥미가 커졌다. 학술 발간물에는 학술과 전쟁-정찰, 외교적인 목적 등으로 키르기스스탄을 방문한 여행객들이 발견한 바위그림에 대한 간략 정보들이 실렸다. 1902년에는 전투 지형학자이자 화가인 N. G. 흘루도프가 페르가나 산맥에서 사이말르이-타쉬 바위그림이라고 하는 독특한 유적을 발견하였다(Khludov, 1902, pp. 41~42).
이후 바위그림 연구는 투르케스탄 고고학 동호회 결성과 관련이 있다. V. A. 칼라우르는 1896~1899년에 탈라스 상류 지역에서의 룬문자 조사 기간 중 치임-타쉬와 테레크-사이에서 바위그림을 기록하였다(Kallaur, 1899, pp. 265~270 : Kallaur, 1897, pp. 1~7).
20세기 초에는 키르기스스탄을 포함한 내륙 아시아 고대와 중세 유적에 대한 흥미가 커졌다. 학술 발간물에는 학술과 전쟁-정찰, 외교적인 목적 등으로 키르기스스탄을 방문한 여행객들이 발견한 바위그림에 대한 간략 정보들이 실렸다. 1902년에는 전투 지형학자이자 화가인 N. G. 흘루도프가 페르가나 산맥에서 사이말르이-타쉬 바위그림이라고 하는 독특한 유적을 발견하였다(Khludov, 1902, pp. 41~42).
사이말르이-타쉬의 발견은 20세기 초에 건설하기 시작한 나린-안디잔 우정국 도로 개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사이말르이-타쉬 암각화는 매우 흥미로운 선사 예술 작품이었다. N. G. 흘루도프의 소개 이후, 투르케스탄 고고학 동호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회원들 중 한 명이었던 장군 N. T. 포스라프스키가 사이말르이-타쉬로 갔다. 그는 새로운 바위그림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는 이 그림들을 선사시대 사람들의 거주지라 여겼다(Poslavski, 1902, p. 46).
1939년에는 M. E. 마송이 볼쇼이 페르가나 수로 건설현장에 고고학적 감독단과 함께 아라반과 아이으이르마츠-토 바위그림을 살펴보았으며, 그것들을 기술하였다. 그들은 아라반과 아이으이르마츠-토의 말 그림들에 관한 소논문에서 연대 문제를 세세하게 살폈으며, 그 그림들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두 그룹의 말 그림은 양식적 특징상 기원전 1천 년기와 1천 년기의 후반에 해당한다(Masson, 1940, p. 131 : Masson, 1948, pp. 129~135).
1920~1930년 사이 키르기스스탄에서는 고고학적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치적 상황의 긴장감이 아마도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하는 커다란 역사적 비극이 발생하여 바위그림이라고 하는 선사 문화는 잊혀지고 연구하지 않은 상태로 남았다.
그리고 전쟁 후, 1946년 여름에서야 겨우 B. M. 지마가 소비에트 고고학자들 중에서 최초로 사이말르이-타쉬를 조사를 하였다. 1948~1950년에 그는 키르기스스탄 바위그림에 관한 일련의 학술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것들은 「키르기스스탄의 바위그림」이라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 기초 자료가 되었다. 이것은 키르기스스탄 암각화에 대한 최초의 연구물이었으며(Zima, 1948, pp. 45~54 : Zima, 1951, pp. 54~61), 여기에는 심도있는 방법론과 고고학적 방법론이 부재하였음에도 학술적으로 흥미로운 점을 제시하고 있다. B. M. 지마의 공헌은 무엇보다도 그가 이 흥미로운 선사시대 바위그림 유적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다시금 불러일으켰다는 데 있다.
이후 암각화 연구는 A. N. 베른쉬탐을 단장으로 하는 텐샨-알라이 고고학 조사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사이말르이-타쉬 유적을 전체적으로 조사한 최초의 전문적인 고고학자였다.
저자는 수많은 특징들과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유사성을 토대로 하여 최초로 학술적인 분류 방법과 유적의 양식과 주제의 순차적 연대 결정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유적지의 그림들을 연대에 따라 크게 네 그룹으로 구분하였다. 사크 이전(B.C. 2천 년~1천 년), 사크(B.C. 8~1세기), 흉노시대(B.C. 2세기~A.D. 2세기), 투르크(2~8세기) 등 네 시기로 구분하였으며, 몇몇 그림들은 이 시기들보다 더 늦은 시기의 것으로 분류하였다.
그들은 암각화의 기능에 관한 학설들을 제기하였으며, 또한 유용한 문화사적 해석을 다수 내놓았다(Bernstam, 1952, pp. 50~68). 이것은 학문적으로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처음 이루어진 시대 구분 작업이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A. N. 베른쉬탐의 연대 결정법을 현재까지도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다른 유적을 연구할 때도 적용하고 있다.
1961년 Yu. A. 자드네프로스키는 아이르이마츠이-토의 수로트투우-타쉬 경계 지역에서 그림 34개를 조사하고 기록했다. 그는 아라반과 아이르이마츠이-토 말의 형상들은 양식적 특징상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언급하면서 기원전으로 연대를 추정하는 중국의 기와에 그려진 그림들 같은 다른 영역의 예술 유물들에서 유사그림들을 찾을 것을 제안하였다. 1960년 그들은 고고학 유적들과 함께 카라-드좌르, 카라쿨드좌, 착 지역의 암각화 자료들을 발표하였다(Zadneprovsky, 1960, pp. 148~167).
1968년 여름부터 5년 동안 이뤄진 현장 조사 기간 동안, G. A. 아가포노바는 사이말르이-타쉬에서 집중적으로 고고학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녀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史料)인 사이말르이-타쉬와 고대 텐샨의 다른 암각화를 조사했고, 이것들을 통해 청동기와 철기시대의 문화발달 수준과 종족의 이데올로기적 관념을 조명해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논문에는 통계학적 성격의 유용한 자료들과 흥미로운 해석들이 많이 실려 있다.
1950~1980년 키르기스스탄의 암각화에 대한 몇 가지 연구물들이 발행되었다. 이 시기에는 키르기스스탄 전역에서 조사를 한 고고학자들뿐만 아니라 지역학자, 중등학교 교사들도 새로운 암각화를 발견하였다.
1953~1955년 지역학자 N. D. 체르카소프는 으이스이크-쿨과 텐샨 지역에서 암각화 조사를 실시했다. 1950년 그는 쿤게이 알라 토 산기슭의 촉 탈 지역 마을과 코룸드이 지역 마을 사이에서 많은 바위그림들을 발견했다(Cherkasov, 1960, p. 12). 그는 촐폰-아타에서 매우 흥미로운 바위그림 수백 개를 투명지에 채록하였는데, 이 바위그림들 중 몇몇은 1959년에 시작한 촐폰-아타 시의 공항 건설로 유실했다. 이때 춤추는 전사 또는 샤먼이 그려진 거대한 장면도 사라졌다. 그 그림을 직접 본 조사 참가자였던 N. D. 체르카소프는 7개의 반인반수의 형상이 거대한 표석(2×5m)에 그려져 있었는데, 이들 각각의 형상은 1~1.2미터 정도의 높이였다고 증언한다. 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유사한 장면이 오르노크 유적지에 보존되어 있다(Nurmametov, 2004, p. 148). 그러나 유적들의 문서화 작업은 사진 촬영과 돌에 그려진 암각화를 각각 채록하는 데 그쳤다.
1963년 프룬즈 시 중학교 교사이자 역사가인 Y. N. 골렌두힌은 사이말르이-타쉬의 그림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는 지역학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키르기스스탄 암각화의 보급과 연구에 힘썼다(Golenduhin, 1971). 한편 1960년 상반기 출판물 중에서 수학적 방법으로 암각화를 연구한 N. L. 포돌스키의 논문들이 흥미를 끄는데, 그는 최초로 수학적 통계를 적용하여 사이말르이-타쉬 바위그림의 유형을 분류하였다(Podolsky, 1966, pp. 15~20). 지역 학자이자 교사인 V. M. 가포넨코도 많은 암각화를 새롭게 발견하였다.
1956~1962년 그들은 탈라스 분지 곳곳, 즉 테케 타시 계곡(초노르 강의 지류), 카라콜 계곡, 쿠르간 타쉬 계곡, 테렉 계곡, 쿠란(켄콜의 지류) 계곡, 우르 마랄(잘트이락 타쉬) 계곡, 쿠간드이 계곡, 쿠르쿠로 수 계곡에서 바위그림을 발견했다(Gaponenko, 1963, pp. 101~110). V. M. 가포넨코는 탈라스 계곡의 암각화를 사크 이전(B.C. 2~1세기), 사크 우순(B.C. 8~1세기), 그리고 투르크 시대(B.C. 6~8세기)의 세 시기로 나누었다.
1974~1985년 지리 교사인 R. Ya 르사코바의 지도 아래 탈라스 제2학교 ‘이스카첼’ 동아리의 지역 역사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 탐사를 하였다. 이렇게 탈라스 분지를 탐사함으로써 암각화 유적지 수가 증가하였다. 조사 결과로 유적지 위치와 경로 지도를 만들었으며, 더 흥미를 끄는 형상들을 사진으로 기록하였고,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Rusakova, 1982, pp. 47~50).
물론 이런 모든 자료들은 후에 키르기스스탄 고대 종족의 조형예술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70년대에는 D. F. 빈니크와 G. A. 포마스키나가 프리으이스이크-쿨의 바위그림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탐치 지역의 마을들과 촐폰-아타 지역의 마을들 사이에 있는 일련의 거대한 암각화 군을 구분하였다(Vinnik, Pomaskina, 1975, pp. 87~102).
1939년에는 M. E. 마송이 볼쇼이 페르가나 수로 건설현장에 고고학적 감독단과 함께 아라반과 아이으이르마츠-토 바위그림을 살펴보았으며, 그것들을 기술하였다. 그들은 아라반과 아이으이르마츠-토의 말 그림들에 관한 소논문에서 연대 문제를 세세하게 살폈으며, 그 그림들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두 그룹의 말 그림은 양식적 특징상 기원전 1천 년기와 1천 년기의 후반에 해당한다(Masson, 1940, p. 131 : Masson, 1948, pp. 129~135).
1920~1930년 사이 키르기스스탄에서는 고고학적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치적 상황의 긴장감이 아마도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하는 커다란 역사적 비극이 발생하여 바위그림이라고 하는 선사 문화는 잊혀지고 연구하지 않은 상태로 남았다.
그리고 전쟁 후, 1946년 여름에서야 겨우 B. M. 지마가 소비에트 고고학자들 중에서 최초로 사이말르이-타쉬를 조사를 하였다. 1948~1950년에 그는 키르기스스탄 바위그림에 관한 일련의 학술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것들은 「키르기스스탄의 바위그림」이라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 기초 자료가 되었다. 이것은 키르기스스탄 암각화에 대한 최초의 연구물이었으며(Zima, 1948, pp. 45~54 : Zima, 1951, pp. 54~61), 여기에는 심도있는 방법론과 고고학적 방법론이 부재하였음에도 학술적으로 흥미로운 점을 제시하고 있다. B. M. 지마의 공헌은 무엇보다도 그가 이 흥미로운 선사시대 바위그림 유적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다시금 불러일으켰다는 데 있다.
이후 암각화 연구는 A. N. 베른쉬탐을 단장으로 하는 텐샨-알라이 고고학 조사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사이말르이-타쉬 유적을 전체적으로 조사한 최초의 전문적인 고고학자였다.
저자는 수많은 특징들과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유사성을 토대로 하여 최초로 학술적인 분류 방법과 유적의 양식과 주제의 순차적 연대 결정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유적지의 그림들을 연대에 따라 크게 네 그룹으로 구분하였다. 사크 이전(B.C. 2천 년~1천 년), 사크(B.C. 8~1세기), 흉노시대(B.C. 2세기~A.D. 2세기), 투르크(2~8세기) 등 네 시기로 구분하였으며, 몇몇 그림들은 이 시기들보다 더 늦은 시기의 것으로 분류하였다.
그들은 암각화의 기능에 관한 학설들을 제기하였으며, 또한 유용한 문화사적 해석을 다수 내놓았다(Bernstam, 1952, pp. 50~68). 이것은 학문적으로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처음 이루어진 시대 구분 작업이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A. N. 베른쉬탐의 연대 결정법을 현재까지도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다른 유적을 연구할 때도 적용하고 있다.
1961년 Yu. A. 자드네프로스키는 아이르이마츠이-토의 수로트투우-타쉬 경계 지역에서 그림 34개를 조사하고 기록했다. 그는 아라반과 아이르이마츠이-토 말의 형상들은 양식적 특징상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언급하면서 기원전으로 연대를 추정하는 중국의 기와에 그려진 그림들 같은 다른 영역의 예술 유물들에서 유사그림들을 찾을 것을 제안하였다. 1960년 그들은 고고학 유적들과 함께 카라-드좌르, 카라쿨드좌, 착 지역의 암각화 자료들을 발표하였다(Zadneprovsky, 1960, pp. 148~167).
1968년 여름부터 5년 동안 이뤄진 현장 조사 기간 동안, G. A. 아가포노바는 사이말르이-타쉬에서 집중적으로 고고학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녀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史料)인 사이말르이-타쉬와 고대 텐샨의 다른 암각화를 조사했고, 이것들을 통해 청동기와 철기시대의 문화발달 수준과 종족의 이데올로기적 관념을 조명해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논문에는 통계학적 성격의 유용한 자료들과 흥미로운 해석들이 많이 실려 있다.
1950~1980년 키르기스스탄의 암각화에 대한 몇 가지 연구물들이 발행되었다. 이 시기에는 키르기스스탄 전역에서 조사를 한 고고학자들뿐만 아니라 지역학자, 중등학교 교사들도 새로운 암각화를 발견하였다.
1953~1955년 지역학자 N. D. 체르카소프는 으이스이크-쿨과 텐샨 지역에서 암각화 조사를 실시했다. 1950년 그는 쿤게이 알라 토 산기슭의 촉 탈 지역 마을과 코룸드이 지역 마을 사이에서 많은 바위그림들을 발견했다(Cherkasov, 1960, p. 12). 그는 촐폰-아타에서 매우 흥미로운 바위그림 수백 개를 투명지에 채록하였는데, 이 바위그림들 중 몇몇은 1959년에 시작한 촐폰-아타 시의 공항 건설로 유실했다. 이때 춤추는 전사 또는 샤먼이 그려진 거대한 장면도 사라졌다. 그 그림을 직접 본 조사 참가자였던 N. D. 체르카소프는 7개의 반인반수의 형상이 거대한 표석(2×5m)에 그려져 있었는데, 이들 각각의 형상은 1~1.2미터 정도의 높이였다고 증언한다. 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유사한 장면이 오르노크 유적지에 보존되어 있다(Nurmametov, 2004, p. 148). 그러나 유적들의 문서화 작업은 사진 촬영과 돌에 그려진 암각화를 각각 채록하는 데 그쳤다.
1963년 프룬즈 시 중학교 교사이자 역사가인 Y. N. 골렌두힌은 사이말르이-타쉬의 그림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는 지역학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키르기스스탄 암각화의 보급과 연구에 힘썼다(Golenduhin, 1971). 한편 1960년 상반기 출판물 중에서 수학적 방법으로 암각화를 연구한 N. L. 포돌스키의 논문들이 흥미를 끄는데, 그는 최초로 수학적 통계를 적용하여 사이말르이-타쉬 바위그림의 유형을 분류하였다(Podolsky, 1966, pp. 15~20). 지역 학자이자 교사인 V. M. 가포넨코도 많은 암각화를 새롭게 발견하였다.
1956~1962년 그들은 탈라스 분지 곳곳, 즉 테케 타시 계곡(초노르 강의 지류), 카라콜 계곡, 쿠르간 타쉬 계곡, 테렉 계곡, 쿠란(켄콜의 지류) 계곡, 우르 마랄(잘트이락 타쉬) 계곡, 쿠간드이 계곡, 쿠르쿠로 수 계곡에서 바위그림을 발견했다(Gaponenko, 1963, pp. 101~110). V. M. 가포넨코는 탈라스 계곡의 암각화를 사크 이전(B.C. 2~1세기), 사크 우순(B.C. 8~1세기), 그리고 투르크 시대(B.C. 6~8세기)의 세 시기로 나누었다.
1974~1985년 지리 교사인 R. Ya 르사코바의 지도 아래 탈라스 제2학교 ‘이스카첼’ 동아리의 지역 역사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 탐사를 하였다. 이렇게 탈라스 분지를 탐사함으로써 암각화 유적지 수가 증가하였다. 조사 결과로 유적지 위치와 경로 지도를 만들었으며, 더 흥미를 끄는 형상들을 사진으로 기록하였고,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Rusakova, 1982, pp. 47~50).
물론 이런 모든 자료들은 후에 키르기스스탄 고대 종족의 조형예술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70년대에는 D. F. 빈니크와 G. A. 포마스키나가 프리으이스이크-쿨의 바위그림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탐치 지역의 마을들과 촐폰-아타 지역의 마을들 사이에 있는 일련의 거대한 암각화 군을 구분하였다(Vinnik, Pomaskina, 1975, pp. 87~102).
1980년 Ya. A. 쉐르는 중부와 중앙아시아의 바위그림 유적지 자료를 최초로 공개한 책을 출간하였다. 그는 몇 가지 이론적인 문제와 암각화 예술의 의미론적 해석에 대한 문제들에 대한 답을 내고자 시도하였다(Sher, 1980).
1980~1990년대에 키르기스스탄 암각화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었다. 1986~1987년에는 케메로프 대학교와 소연방 카자흐 과학아카데미 고고학 연구소가 공동으로 잘트이라크 타쉬(우르 마랄) 유적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잘트이라크 타쉬의 모든 형상들은 문서화되었다(Sher, Miklashevich, Samashev, Sovetova, 1987 ; Sher, Sovetova, Miklashevich , 1995, pp. 83~85).
1988년과 1995년에는 E. A. 미크라쉐비치가 으이스이크-쿨 호안의 암각화들을 조사하였다. 그녀가 제시한 도식에 따르면, 으이스이크-쿨 호안의 암각화들은 다섯 개의 연대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1. 청동기시대, 2. 후기 청동기와 철기시대의 과도기, 3. 사크시대, 4. 우순시대, 5. 중세시대(Miklashevich, 1995, pp. 63~68)
1989~1990년에는 남부 키르기스스탄 고고학 분대가 학술연구 프로젝트국과 키르기스스탄 복원 협회의 요청에 의해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술라이만 토 암각화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암각화와 명문이 있는 122개의 암면을 발견하였으며, 그중에서 103개를 묘사하였고 23개를 채록하였다. 또한 고고학 유적지 뿐만 아니라 암각화, 성소 위치가 기록된 지도를 작성하였다(Amanbaeva, Delet, 1998 : Amanbaeva, Delet, 1999, pp. 6~14).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에 A. I. 마르티노프와 A. N. 마르야쉐프를 단장으로 하는 케메레보 국립 대학교와 아바이 기념 카자흐스탄 교육전문대학교가 사이말르이-타쉬에서 공동으로 조사를 하였다. 조사는 미칼렌트와 폴리에틸렌을 이용하는 새로운 방법과 사진과 비디오로 촬영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동시에 사용하며 진행되었다(Mart’inov 외, 1992).
2002년에는 말타예프의 지도하에 우즈겐 지역의 고고학 조사와 암각화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수우크-도보와 바이체체크 지역에서 거대한 그림 군집을 발견했다(Maltaev 외, 2002). 2005년에는 동일한 조사단이 채록을 위한 현장 조사를 실시했고, 수우크-도보와 바이체체크 암각화를 채록하였다. 조사 과정에서 그림이 그려진 700개 이상 다양한 크기의 암면을 채록하였다.
K. Sh. 타발지예프 통솔 하에 키르기스스탄 고고학 국립대학교의 고고학자들도 키르기스스탄의 바위그림 연구에 미약하게나마 기여하였다. 1998~2005년에 그들은 코크-사이, 베이료크 부라크 지역에서 룬 문자의 명문을 찾는 과정 중 코츠코르 분지의 동쪽에서 거대한 암각화 군집을 발견하였다(Tabaldiyev, Soltobaev, 2001, pp. 68~73). 세 곳에서 바위그림과 룬 문자가 같이 새겨져 있었는데, 룬 문자 명문으로 바위그림들의 연대를 좁힐 수 있다(Tabaldiyev, K. Belek, 2008, p. 8).
1991~2000년에는 키르기스스탄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고고학 분대가 K. I. 타쉬바예바의 지도하에 사이말르이-타쉬에서 10번의 현장탐험, 연구를 하였다(Tashbayeva, 2004, pp. 95~102). 조사단은 그림이 그려진 거의 모든 암면에 번호를 붙였고, 탁본을 하였으며, 암각화가 집중적으로 분포한 지역의 지형도를 제작하였다. 즉, 그들은 사이말르이-타쉬 I에서 그림이 그려진 바위 약 10개를 발견하고 그것들을 모두 채록하였다.
2002~2004년에는 K. I. 타쉬바예바의 지도하에 유네스코 CARAD 지역 프로젝트에 따라 촐폰-아타와 오르노크의 암각화들을 문서화하는 작업이 실시되었다. 이후 작업의 결과물을 발표하였지만, 만족할 만한 자료들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2003년 탈라스 분지의 잘트이락 타쉬의 유적지에서 K. I. 타쉬바예바와 A. P. 프란크포르트의 지휘 아래 국제적인 학술조사가 실시되었다. 학술조사에서 잘트이락 타쉬의 모든 형상을 채록했고, 가장 흥미로운 그림과 주제들을 탁본하였으며, 유적지를 도식화하여 기록하였다(Tashbaeva, 2004, pp. 102~103 ; Tashbaev, Frankfopt, 2005, pp. 12~19).
2003년과 2009년에는 유네스코 ‘중앙아시아 바위그림 유적 공동연구를 위한 지역망(Central Asian Rock Art Database(CARAD)’이라는 유네스코의 프로젝트에서 키르기스스탄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의 고고학적 분대가 B. E. 아만바에바의 지휘 아래 이미 알려진 유적지 몇몇 곳을 조사하였으며, 오쉬와 탈라스 주에서 새로운 유적지를 발견했다. 이 조사 기간 동안 베이쉬크 마을부터 남쪽에 위치한 탈라스 산맥의 산기슭 지역과 우르-마랄 강의 분지 및 이 분지의 왼쪽 상류인 치이임 타쉬, 카라콜 투유그 토르 계곡(치이임 타쉬)과 우츠 차트 계곡이 있는 키르기스스탄의 알라 토 분지, 켄콜 강 지류들-오보, 테르스콜, 차츠이케이, ‘마나스 오르도’ 성지-카므이르든 벨리(켄 콜)에서 조사를 하였으며, 그곳에서 발견된 암각화들을 문서화하였다. 남부 키르기스스탄에는 술라이만 토, 아이르이마츠이-토(루로트투 타쉬), 케르메 토, 아르반 절벽(둘둘 아타), 치이이리 사이(사하바), 수크 도보, 바이 체체케이가 위치해 있다. 조사 결과 이곳에서 암각화가 있는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였으며, 암각화를 채록하였다. 또한 문서화 작업을 실시하였으며, 그림이 그려져 있는 암면이 발견된 유적지를 표기한 지형도를 작성하였다(Amanbaeva 외, 2006, pp. 257~267 : Amanbaeva 외, 2007, pp. 155~162 : Amanbaeva 외, 2009).
오늘날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새로운 암각화 유적지들이 발견되고 있다.
1980~1990년대에 키르기스스탄 암각화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었다. 1986~1987년에는 케메로프 대학교와 소연방 카자흐 과학아카데미 고고학 연구소가 공동으로 잘트이라크 타쉬(우르 마랄) 유적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잘트이라크 타쉬의 모든 형상들은 문서화되었다(Sher, Miklashevich, Samashev, Sovetova, 1987 ; Sher, Sovetova, Miklashevich , 1995, pp. 83~85).
1988년과 1995년에는 E. A. 미크라쉐비치가 으이스이크-쿨 호안의 암각화들을 조사하였다. 그녀가 제시한 도식에 따르면, 으이스이크-쿨 호안의 암각화들은 다섯 개의 연대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1. 청동기시대, 2. 후기 청동기와 철기시대의 과도기, 3. 사크시대, 4. 우순시대, 5. 중세시대(Miklashevich, 1995, pp. 63~68)
1989~1990년에는 남부 키르기스스탄 고고학 분대가 학술연구 프로젝트국과 키르기스스탄 복원 협회의 요청에 의해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술라이만 토 암각화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암각화와 명문이 있는 122개의 암면을 발견하였으며, 그중에서 103개를 묘사하였고 23개를 채록하였다. 또한 고고학 유적지 뿐만 아니라 암각화, 성소 위치가 기록된 지도를 작성하였다(Amanbaeva, Delet, 1998 : Amanbaeva, Delet, 1999, pp. 6~14).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에 A. I. 마르티노프와 A. N. 마르야쉐프를 단장으로 하는 케메레보 국립 대학교와 아바이 기념 카자흐스탄 교육전문대학교가 사이말르이-타쉬에서 공동으로 조사를 하였다. 조사는 미칼렌트와 폴리에틸렌을 이용하는 새로운 방법과 사진과 비디오로 촬영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동시에 사용하며 진행되었다(Mart’inov 외, 1992).
2002년에는 말타예프의 지도하에 우즈겐 지역의 고고학 조사와 암각화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수우크-도보와 바이체체크 지역에서 거대한 그림 군집을 발견했다(Maltaev 외, 2002). 2005년에는 동일한 조사단이 채록을 위한 현장 조사를 실시했고, 수우크-도보와 바이체체크 암각화를 채록하였다. 조사 과정에서 그림이 그려진 700개 이상 다양한 크기의 암면을 채록하였다.
K. Sh. 타발지예프 통솔 하에 키르기스스탄 고고학 국립대학교의 고고학자들도 키르기스스탄의 바위그림 연구에 미약하게나마 기여하였다. 1998~2005년에 그들은 코크-사이, 베이료크 부라크 지역에서 룬 문자의 명문을 찾는 과정 중 코츠코르 분지의 동쪽에서 거대한 암각화 군집을 발견하였다(Tabaldiyev, Soltobaev, 2001, pp. 68~73). 세 곳에서 바위그림과 룬 문자가 같이 새겨져 있었는데, 룬 문자 명문으로 바위그림들의 연대를 좁힐 수 있다(Tabaldiyev, K. Belek, 2008, p. 8).
1991~2000년에는 키르기스스탄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고고학 분대가 K. I. 타쉬바예바의 지도하에 사이말르이-타쉬에서 10번의 현장탐험, 연구를 하였다(Tashbayeva, 2004, pp. 95~102). 조사단은 그림이 그려진 거의 모든 암면에 번호를 붙였고, 탁본을 하였으며, 암각화가 집중적으로 분포한 지역의 지형도를 제작하였다. 즉, 그들은 사이말르이-타쉬 I에서 그림이 그려진 바위 약 10개를 발견하고 그것들을 모두 채록하였다.
2002~2004년에는 K. I. 타쉬바예바의 지도하에 유네스코 CARAD 지역 프로젝트에 따라 촐폰-아타와 오르노크의 암각화들을 문서화하는 작업이 실시되었다. 이후 작업의 결과물을 발표하였지만, 만족할 만한 자료들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2003년 탈라스 분지의 잘트이락 타쉬의 유적지에서 K. I. 타쉬바예바와 A. P. 프란크포르트의 지휘 아래 국제적인 학술조사가 실시되었다. 학술조사에서 잘트이락 타쉬의 모든 형상을 채록했고, 가장 흥미로운 그림과 주제들을 탁본하였으며, 유적지를 도식화하여 기록하였다(Tashbaeva, 2004, pp. 102~103 ; Tashbaev, Frankfopt, 2005, pp. 12~19).
2003년과 2009년에는 유네스코 ‘중앙아시아 바위그림 유적 공동연구를 위한 지역망(Central Asian Rock Art Database(CARAD)’이라는 유네스코의 프로젝트에서 키르기스스탄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의 고고학적 분대가 B. E. 아만바에바의 지휘 아래 이미 알려진 유적지 몇몇 곳을 조사하였으며, 오쉬와 탈라스 주에서 새로운 유적지를 발견했다. 이 조사 기간 동안 베이쉬크 마을부터 남쪽에 위치한 탈라스 산맥의 산기슭 지역과 우르-마랄 강의 분지 및 이 분지의 왼쪽 상류인 치이임 타쉬, 카라콜 투유그 토르 계곡(치이임 타쉬)과 우츠 차트 계곡이 있는 키르기스스탄의 알라 토 분지, 켄콜 강 지류들-오보, 테르스콜, 차츠이케이, ‘마나스 오르도’ 성지-카므이르든 벨리(켄 콜)에서 조사를 하였으며, 그곳에서 발견된 암각화들을 문서화하였다. 남부 키르기스스탄에는 술라이만 토, 아이르이마츠이-토(루로트투 타쉬), 케르메 토, 아르반 절벽(둘둘 아타), 치이이리 사이(사하바), 수크 도보, 바이 체체케이가 위치해 있다. 조사 결과 이곳에서 암각화가 있는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였으며, 암각화를 채록하였다. 또한 문서화 작업을 실시하였으며, 그림이 그려져 있는 암면이 발견된 유적지를 표기한 지형도를 작성하였다(Amanbaeva 외, 2006, pp. 257~267 : Amanbaeva 외, 2007, pp. 155~162 : Amanbaeva 외, 2009).
오늘날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새로운 암각화 유적지들이 발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