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사키의 숙박 때 물목과 숙소
一. 13일 밤, 칠오삼선(七五三膳)주 001의 [상차림] 준비, [밥상은] 목구(木具)주 002 상이며, 칙사 3인은 삼방(三方)주 003 상이다. 김첨지·박첨지 두 사람은 다리가 달린 목구 상이다.
一. 14일부터 식료 마련을 위해 쌀을 보냈다.
一. 칙사 3인은 1일에 1인분 1석(石)씩
一. 김첨지·박첨지 2인은 1인분에 5두(斗)씩
一. 상관 30인은 1일에 1인분 3두씩
一. 중관 155인은 1일에 1인분 1두 5승(升)씩
이 밖에 차·땔감은 별도로 내주었다.
一. 하인 206인은 1일 1인분 5승씩
이 밖에 땔감은 별도로 내주었다.
一. 덴즈이지(天瑞寺)에서 칙사 3인이 자리를 같이하여 앉았고, 다음으로 상관·중관들이 거했다.
一. 소켄지(摠見寺)에서 김첨지·박첨지 2인은 상좌(上座)에 거했다. 그 다음으로 중관들이 거했다.
一. 아랫사람들의 식사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복도와 부엌에 거했다.
一. 위의 2개 절 외에 작은 절 2군데 신주지(眞珠寺), 도쿠젠지(德善寺)를 아랫사람들의 숙소로 썼다.
一. 고린안(興臨庵)에는 쓰시마(對州)주 004
각주 004)
[번주가] 묵었다.소 요시토시(宗義智): 소 마사모리(宗將盛)의 넷째(혹은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1579년(혹은 1580) 소케(宗家) 제17대 당주 소 요시시게(宗義調)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계승했다. 1587년 은거(隱居)했던 양부(養父)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하여 요시토시는 가독을 요시시게에게 반납하였는데 이것은 같은 해 히데요시(秀吉)의 규슈(九州) 정벌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요시토시는 요시시게와 함께 히데요시에게 복종하여 쓰시마 일국(一國)을 안도(安堵)받았다. 1588년 요시시게의 사후 다시 당주가 되어 임진왜란 시에는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번대(一番隊)에 소속되어 5,000명의 병력으로 최선봉에서 싸웠다. 히데요시 사망 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ケ原の戦い)에서는 서군(西軍)에 가담했으나,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용서를 받고 소령(所領)을 안도받아 쓰시마 후추번(對馬府中藩)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요시토시는 1609년 조선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는 데 성공, 이후 조선통교는 쓰시마번이 전담하게 되었다. 요시토시의 법호(法號)는 만송원(萬松院)이다.
一. 주코인(聚光院)에는 야나가와 부젠노카미(柳川豊前守)주 005가 묵었다.
一. 다이센인(大仙院)에는 소(蘇) 장로(長老)주 006
각주 006)
가 묵었다.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1537~1611): 쓰시마의 외교승. 에이로쿠 연간(1558~1570)에 하카타(博多) 쇼후쿠지(聖福寺)의 주지가 되고, 교토 도후쿠지(東福寺)의 주지로 지내다가 1580년 쓰시마 도주 소 요시시게(宗義調)의 초대로 쓰시마에 건너갔다. 암자 이테이안(以酊庵)을 창건해 그곳에 기거했으며,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제1군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휘하에서 참모의 신분으로 종군했다. 이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과의 화해교섭에 임했다. 에도 막부가 들어선 후, 1609년에 기유약조(己酉約条約)를 성립시키는 등 조선 외교 관련 직무를 담당했다. 1604년 일본의 국정탐색을 위해 쓰시마에 파견된 조선의 손문욱(孫文彧)과 유정(惟政)을, 이듬해 소 요시토시·야나가와 시게노부와 함께 동반하고 교토로 가, 3월 후시미(伏見)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와 접견을 성사시켰다. 그 공을 인정하여 막부는 쓰시마 번주에게 조선관계를 담당할 것을 명하였다.
一. 뇨이안(如意庵)은 이데 야로쿠자에몬(井手彌六左衛門)주 007이 묵었다.
一. 몬젠마치야(門前町屋)주 008에는 쓰시마노카미(對馬守)주 009님의 우마노리(馬乘)주 010·철포(鐵砲)·하인들이 묵었다.
一. 24일 밤 칙사를 접대하였고, 칙사는 칠오삼선(七五三膳)의 상차림이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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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소 요시토시(宗義智): 소 마사모리(宗將盛)의 넷째(혹은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1579년(혹은 1580) 소케(宗家) 제17대 당주 소 요시시게(宗義調)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계승했다. 1587년 은거(隱居)했던 양부(養父)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하여 요시토시는 가독을 요시시게에게 반납하였는데 이것은 같은 해 히데요시(秀吉)의 규슈(九州) 정벌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요시토시는 요시시게와 함께 히데요시에게 복종하여 쓰시마 일국(一國)을 안도(安堵)받았다. 1588년 요시시게의 사후 다시 당주가 되어 임진왜란 시에는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번대(一番隊)에 소속되어 5,000명의 병력으로 최선봉에서 싸웠다. 히데요시 사망 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ケ原の戦い)에서는 서군(西軍)에 가담했으나,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용서를 받고 소령(所領)을 안도받아 쓰시마 후추번(對馬府中藩)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요시토시는 1609년 조선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는 데 성공, 이후 조선통교는 쓰시마번이 전담하게 되었다. 요시토시의 법호(法號)는 만송원(萬松院)이다.
-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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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1537~1611): 쓰시마의 외교승. 에이로쿠 연간(1558~1570)에 하카타(博多) 쇼후쿠지(聖福寺)의 주지가 되고, 교토 도후쿠지(東福寺)의 주지로 지내다가 1580년 쓰시마 도주 소 요시시게(宗義調)의 초대로 쓰시마에 건너갔다. 암자 이테이안(以酊庵)을 창건해 그곳에 기거했으며,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제1군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휘하에서 참모의 신분으로 종군했다. 이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과의 화해교섭에 임했다. 에도 막부가 들어선 후, 1609년에 기유약조(己酉約条約)를 성립시키는 등 조선 외교 관련 직무를 담당했다. 1604년 일본의 국정탐색을 위해 쓰시마에 파견된 조선의 손문욱(孫文彧)과 유정(惟政)을, 이듬해 소 요시토시·야나가와 시게노부와 함께 동반하고 교토로 가, 3월 후시미(伏見)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와 접견을 성사시켰다. 그 공을 인정하여 막부는 쓰시마 번주에게 조선관계를 담당할 것을 명하였다.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