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왕 여경(餘慶)이 올린 표문(表文)
연흥 2년(472) 그 왕 여경주 001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표문주 002
번역주 002)
을 올려 아뢰었다.주 003 표문 : 개로왕 18년(472) 백제가 북위에 보낸 표문과 478년 왜왕 무(武)가 남송 순제(順帝)에게 보낸 표문에 나오는 어구와 동일한 표현이 648년에 편찬된 『진서』에서 다수(136개) 확인되는 것에 착안하여 표문의 原典과 표문의 찬자에 대해 고찰한 연구가 있다. 진대부터 남북조시대에는 사학이 융성해서 적어도 5세기 중반까지는 『진서』의 원본 같은 것이 이미 완성·유포되어 있었거나, 후에 『진서』를 구성하게 된 복수의 진대에 관한 사서류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서 백제의 상표문과 왜의 상표문이 『진서』의 원본의 용어를 주된 전거로 해서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두 상표문은 동일인이 기초했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한자만이 아니라 漢籍에도 밝고 예민한 정치감각과 국제감각을 갖췄을 중국계 망명인 내지 유학승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며, 472년 북위의 상표문을 기초했던 이 백제의 관인은 475년 한성 함락 후 왜국으로 망명해서 왜왕 무에게 등용되어 왜의 상표문을 기초했을 것으로 추정한다(內田淸, 1996).
번역주 003)
“신이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는데, 승냥이와 이리주 004가 길을 막으니, 비록 대대로 영험한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으로서의 예를 받들주 005 방법이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궁궐주 006을 바라보면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끝닿는 데가 없을 지경입니다. 서늘한 바람이 가볍게 부는 이때에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하늘의 아름다운 도리에 잘 조화하시는지라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주 007·부마도위주 008·불사후주 009·장사 여례주 010와 용양장군주 011·대방태수주 012·사마 장무주 013 등을 보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터를 찾아 헤매며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겨서 만 분의 일의 정성이라도 바치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하늘의 신과 땅의 신주 014이 감응을 드리우고 황제의 영험이 크게 덮어주셔서 천자의 궁궐에 도달하여 신의 뜻을 펼쳐 드러낼 수 있다면, 비록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주 015고 해도 영원토록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위서』와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25 百濟本紀3 개로왕 18년조에 실려 있다. 북위에 표문을 보내기 전까지 백제는 동진, 송나라 등 남조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는데, 472년 갑자기 북위와 교섭을 하고 있어 이례적인 일로 보고 있다. 471년을 끝으로 송과의 관계가 한동안 중단된 것이 백제가 북위에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개로왕이 북위에 접근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466년 북위 顯祖의 후궁을 맞이하는 문제로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던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북위의 문명태후(文明太后)가 고구려에게 현조의 후궁을 요구했으나, 북위와 통혼을 했던 북량이 북위에게 멸망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고구려는 북위가 동쪽으로 세력을 뻗어올 의도를 간파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였는데(노태돈, 2005), 백제가 이러한 상황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실력자인 문명태후가 장수왕에게 주살당한 풍홍(馮弘)의 손녀이기 때문에 고구려에 대해 사적 원한을 품었다고 판단한 백제가 이를 이용하려 했다고 보는 견해(徐榮敎, 2004)도 있다. 당시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혼사 문제로 틈이 벌어지고, 송과의 교섭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과감하게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에 필요한 원병을 요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가 북위와 교섭을 한 목적은 북위와 고구려 사이의 외교관계를 차단하고, 북위와 백제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고구려 정벌을 주장하는 내용은 왜왕 무(武)가 478년 송나라 순제(順帝)에게 보낸 표문에도 보인다(『송서』 97 왜국조). 따라서 『위서』에 수록된 표문과 조서의 내용은 백제와 고구려가 북조와 남조를 상대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는 점, 고구려가 동아시아 정세에서 다자간 세력균형의 한 축이었다는 점, 또 실제로 북위가 조서에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는 점, 북위 사신의 조서가 백제에 도달하지 못한 점 등을 모두 고려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개로왕이 북위에 접근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466년 북위 顯祖의 후궁을 맞이하는 문제로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던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북위의 문명태후(文明太后)가 고구려에게 현조의 후궁을 요구했으나, 북위와 통혼을 했던 북량이 북위에게 멸망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고구려는 북위가 동쪽으로 세력을 뻗어올 의도를 간파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였는데(노태돈, 2005), 백제가 이러한 상황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실력자인 문명태후가 장수왕에게 주살당한 풍홍(馮弘)의 손녀이기 때문에 고구려에 대해 사적 원한을 품었다고 판단한 백제가 이를 이용하려 했다고 보는 견해(徐榮敎, 2004)도 있다. 당시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혼사 문제로 틈이 벌어지고, 송과의 교섭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과감하게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에 필요한 원병을 요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가 북위와 교섭을 한 목적은 북위와 고구려 사이의 외교관계를 차단하고, 북위와 백제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고구려 정벌을 주장하는 내용은 왜왕 무(武)가 478년 송나라 순제(順帝)에게 보낸 표문에도 보인다(『송서』 97 왜국조). 따라서 『위서』에 수록된 표문과 조서의 내용은 백제와 고구려가 북조와 남조를 상대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는 점, 고구려가 동아시아 정세에서 다자간 세력균형의 한 축이었다는 점, 또 실제로 북위가 조서에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는 점, 북위 사신의 조서가 백제에 도달하지 못한 점 등을 모두 고려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 아뢰었다. “신은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주 016
번역주 016)
선대에는 예전의 우의를 돈독하게 유지하였으나 그 할아버지인 쇠주 017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볍게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신의 할아버지인 수주 018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재빠르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이 잠시 오가다가 쇠의 머리를 베어 매달았습니다.주 019 이로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을 넘보지 못하였습니다. 풍씨의 운수가 다하여주 020 남은 무리들이 [고구려로] 도망해오자주 021 臣與高句麗源出夫餘 : 중국계 사서에서 백제 왕족 부여기원설이 전승되는 시발점이 되는 기사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백제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후 『주서』 및 『신당서』에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라 하여 고구려에 대한 언급은 빠지고 백제의 원류가 부여계와 직결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이현혜, 1991). 이와 함께 성왕의 아들 餘昌이 고구려 장수와 대전하기 전 “성은 [고구려 왕실과] 같다.”고 한 기사에 대해서도 백제와 적대관계에 있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계임을 강조하여 고구려와 비견하려는 의식의 소산이라고 보아왔다(노중국, 1997). 부여출자설이 강조되는 시기는 고구려와 외교·군사적인 대결을 치열하게 전개한 시기였다(朴燦圭, 2003)는 지적도 있다.
번역주 021)
추악한 무리들이 점점 번성해져서주 022 마침내 [우리는]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병화가 이어진 지 30여 년에 재물이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주 023 餘燼奔竄 : 436년 5월 북위의 太武帝가 북연의 수도인 용성을 포위하자 북연왕 풍홍은 고구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장수왕이 葛盧孟光이 이끄는 군대를 보내주어 몸만 겨우 구출되었다. 그러나 풍홍은 고구려가 자신을 臣屬人으로 취급하는 것에 반발하여 송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자 북연의 재기를 바라지 않던 고구려 장수왕은 신속하게 풍홍을 제거하였다. 혼란의 와중에 많은 북연인들이 고구려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러한 정황을 표현한 문구이다. 북연인의 일부는 송으로 망명하였고, 일부는 백제에도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번역주 023)
만약 천자의 자비와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曲矜)이 멀리까지 예외 없이 미친다면 속히 한 명의 장수를 보내 신의 나라를 구해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미천한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 척의 땅과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북연의 풍홍이 망명하면서 고구려의 군사력이 강화되자 장수왕은 평양 천도를 추진하면서 일시적으로 중단하였던 남진정책을 다시 추진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정책 재개는 백제에게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하여 비유왕이 왜·신라·송과의 외교를 추진하는 한편 북위와 교섭을 시도했다고 보기도 한다. 여기에 나오는 “構怨連禍 三十餘年”과 뒤에 나오는 “去庚辰年後”의 경진년이 440년 (비유왕 14)에 해당하기 때문에 두 기사를 근거로 경진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북위가 백제에 사신을 보냈고, 그에 앞서 백제가 북위에 먼저 사신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438년 북연의 멸망으로 화북 지역에서의 정세가 급변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경진년에 북위에 사신을 파견했고, 고구려는 북위가 백제와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백제에 대한 압력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440년부터 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낸 472년까지 30여 년이 되므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원한 관계가 30여 년이나 계속되었다고 보았다(노중국, 2005).
또 아뢰었다. “지금 연(璉)주 024은 죄가 있어 나라가 스스로 으깨어지고, 대신과 힘센 귀족들을 살육하기를 그치지 않아주 025 죄가 차고 악이 쌓였으며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적기요, 손을 써야 할 때입니다. 또 풍씨 일족주 026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이 있고,주 027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주 028 천자의 위엄을 한번 떨친다면 정벌은 있을지언정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주 029 신은 비록 명민하지 못하나 뜻을 다하고 힘을 다 바쳐 마땅히 예하의 군대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과 속임수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주 030가 번국으로서 낮추어 썼던 말을 본받으면서 속으로는 흉악한 재앙과 저돌적인 소행을 품어, 혹은 남쪽으로 유씨주 031와 내통하고, 북쪽으로는 연연주 032과 맹약하여 서로 입술과 이처럼 의지하면서 왕의 영토를 침범하고자 모의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임금(唐堯)주 033은 지극한 성인이었지만 단수주 034에서 [묘족을] 징벌하였고, 맹상군주 035은 어진 사람으로 일컬어졌지만 길에서 욕하는 말을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졸졸 흐르는 물도 마땅히 빨리 막아야 하는데, 지금 만약 [고구려를] 취하지 않으면 장차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 번역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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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2)
표문 : 개로왕 18년(472) 백제가 북위에 보낸 표문과 478년 왜왕 무(武)가 남송 순제(順帝)에게 보낸 표문에 나오는 어구와 동일한 표현이 648년에 편찬된 『진서』에서 다수(136개) 확인되는 것에 착안하여 표문의 原典과 표문의 찬자에 대해 고찰한 연구가 있다. 진대부터 남북조시대에는 사학이 융성해서 적어도 5세기 중반까지는 『진서』의 원본 같은 것이 이미 완성·유포되어 있었거나, 후에 『진서』를 구성하게 된 복수의 진대에 관한 사서류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서 백제의 상표문과 왜의 상표문이 『진서』의 원본의 용어를 주된 전거로 해서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두 상표문은 동일인이 기초했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한자만이 아니라 漢籍에도 밝고 예민한 정치감각과 국제감각을 갖췄을 중국계 망명인 내지 유학승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며, 472년 북위의 상표문을 기초했던 이 백제의 관인은 475년 한성 함락 후 왜국으로 망명해서 왜왕 무에게 등용되어 왜의 상표문을 기초했을 것으로 추정한다(內田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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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3)
『위서』와 동일한 내용이 『삼국사기』 권25 百濟本紀3 개로왕 18년조에 실려 있다. 북위에 표문을 보내기 전까지 백제는 동진, 송나라 등 남조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는데, 472년 갑자기 북위와 교섭을 하고 있어 이례적인 일로 보고 있다. 471년을 끝으로 송과의 관계가 한동안 중단된 것이 백제가 북위에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개로왕이 북위에 접근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466년 북위 顯祖의 후궁을 맞이하는 문제로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던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북위의 문명태후(文明太后)가 고구려에게 현조의 후궁을 요구했으나, 북위와 통혼을 했던 북량이 북위에게 멸망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고구려는 북위가 동쪽으로 세력을 뻗어올 의도를 간파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였는데(노태돈, 2005), 백제가 이러한 상황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실력자인 문명태후가 장수왕에게 주살당한 풍홍(馮弘)의 손녀이기 때문에 고구려에 대해 사적 원한을 품었다고 판단한 백제가 이를 이용하려 했다고 보는 견해(徐榮敎, 2004)도 있다. 당시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혼사 문제로 틈이 벌어지고, 송과의 교섭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과감하게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에 필요한 원병을 요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가 북위와 교섭을 한 목적은 북위와 고구려 사이의 외교관계를 차단하고, 북위와 백제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고구려 정벌을 주장하는 내용은 왜왕 무(武)가 478년 송나라 순제(順帝)에게 보낸 표문에도 보인다(『송서』 97 왜국조). 따라서 『위서』에 수록된 표문과 조서의 내용은 백제와 고구려가 북조와 남조를 상대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는 점, 고구려가 동아시아 정세에서 다자간 세력균형의 한 축이었다는 점, 또 실제로 북위가 조서에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는 점, 북위 사신의 조서가 백제에 도달하지 못한 점 등을 모두 고려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다. - 번역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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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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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주 014)
- 번역주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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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16)
臣與高句麗源出夫餘 : 중국계 사서에서 백제 왕족 부여기원설이 전승되는 시발점이 되는 기사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백제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후 『주서』 및 『신당서』에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라 하여 고구려에 대한 언급은 빠지고 백제의 원류가 부여계와 직결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이현혜, 1991). 이와 함께 성왕의 아들 餘昌이 고구려 장수와 대전하기 전 “성은 [고구려 왕실과] 같다.”고 한 기사에 대해서도 백제와 적대관계에 있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계임을 강조하여 고구려와 비견하려는 의식의 소산이라고 보아왔다(노중국, 1997). 부여출자설이 강조되는 시기는 고구려와 외교·군사적인 대결을 치열하게 전개한 시기였다(朴燦圭, 2003)는 지적도 있다.
- 번역주 017)
- 번역주 018)
- 번역주 019)
- 번역주 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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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21)
餘燼奔竄 : 436년 5월 북위의 太武帝가 북연의 수도인 용성을 포위하자 북연왕 풍홍은 고구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장수왕이 葛盧孟光이 이끄는 군대를 보내주어 몸만 겨우 구출되었다. 그러나 풍홍은 고구려가 자신을 臣屬人으로 취급하는 것에 반발하여 송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자 북연의 재기를 바라지 않던 고구려 장수왕은 신속하게 풍홍을 제거하였다. 혼란의 와중에 많은 북연인들이 고구려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러한 정황을 표현한 문구이다. 북연인의 일부는 송으로 망명하였고, 일부는 백제에도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 번역주 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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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23)
북연의 풍홍이 망명하면서 고구려의 군사력이 강화되자 장수왕은 평양 천도를 추진하면서 일시적으로 중단하였던 남진정책을 다시 추진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정책 재개는 백제에게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하여 비유왕이 왜·신라·송과의 외교를 추진하는 한편 북위와 교섭을 시도했다고 보기도 한다. 여기에 나오는 “構怨連禍 三十餘年”과 뒤에 나오는 “去庚辰年後”의 경진년이 440년 (비유왕 14)에 해당하기 때문에 두 기사를 근거로 경진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북위가 백제에 사신을 보냈고, 그에 앞서 백제가 북위에 먼저 사신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438년 북연의 멸망으로 화북 지역에서의 정세가 급변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경진년에 북위에 사신을 파견했고, 고구려는 북위가 백제와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백제에 대한 압력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440년부터 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낸 472년까지 30여 년이 되므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원한 관계가 30여 년이나 계속되었다고 보았다(노중국, 2005).
- 번역주 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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