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국 경계조사와 관련해 청국 측 관원의 별지답변(另低答辯)
□ 별지 답변(另低答辯주 371)
○ “우리들이 이미 백성을 위해 마땅히 구원지계(久遠之計)를 모의해야 한다는 가르침주 372을 감히 잘 지켜서 마음속에 새겨 잊지 않는(服膺) 하지 않는 것과 그리고 일시 요행 등의 말은 너무 인정에 어그러지는 논의 입니다. 변계(辨界)는 나라에 있어 막중한 일인데 누가 감히 요행을 바랄 것입니까! 대등하거나 그 이하의 나라라도 오히려 감히 마음을 내지 못하는데 하물며 상국(上國)을 복종해 섬기는 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제시한 중에 ‘황상(皇上)이 (내)탕금(帑金)을 아까워하지 않고 귀국을 보호했다.’라고 한 말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비록 돈어목석(豚魚주 373木石)이라도 어찌 황은(皇恩)을 입지 않았으랴. 온 동토(東土)의 중생(含生주 374)과 뭇 짐승[戴毛之倫주 375]은 생생세세(生生世世)주 376 영원히(항상) 이 넓은 사랑을 칭송할 것이니 이것을 어찌 단지 붓과 종이로 다 쓰겠습니까!
○ 위엄있고 떳떳한 천조(天朝)가 어찌 이를 위하여 구차스럽게 옥신각신 다투겠는가?”라는 말씀에서 저희들은 매번 ‘옥신각신 다툰다[爭執]’ 등의 글자를 볼 때마다 모르는 사이에 땀이 발까지 흐릅니다. ‘강안의 변계를 밝히는[江岸辨界]’ 한 가지 일은 즉 황무지를 개간한 백성이 편안히 잘 살게 할 수 있는 방법주 377을 얻기를 바라는 것에 대한 걱정에 불과할 뿐이니 어찌 일찍이 한 오라기 털 만큼의 옥신 각신 다투려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의리로도 감히 할수 없는 것이요 이치로도 감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 명을 받들어 살펴 조사할(審勘) 것은 오로지 비(碑)주 378는 어느 땅에 있고 퇴(堆)주 379는 어느 곳으로 있고 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는 지를 가리켜 증명하기 위함입니다.주 380 한번 자세히 알려서 우리나라가 말을 꾸미고 교활하다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것 뿐이고 아울러 한발자국도 땅을 넓히는데 있지 않습니다. 이 고충을 양해하면 다행이겠습니다. 이것은 진심을 다하고 솔직하고 사심없는주 381 말입니다.
○ 하루 이틀 쉼도 고달픈데, 가르침은 매우 마음속 깊이 고맙게 느낍니다. 다만 의리(義)는 아주 중하고 명을 받듦에 개인의 사정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가르치심에서 ‘두만(豆滿)·도문(圖們) 두 강의 이름이 있고 없음’에 대한 것은 두만(豆滿)을 조사하면 또한 백산(白山 : 백두산) 근처 산에서 발원(發源)하고 있으며 곧 우리나라 내지(內地) 강 이름이 두만(豆滿)이란 것은 우리나라(敝邦)의 방언(方言)입니다. 이에 이곳에서 가릴 것은 토문(土們)인데 상국인(上國人)은 매양 토문(土們)과 도문(圖們)은 혼동해서 말씀하시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뜹니다. 그리고 토문(土們)이란 이름은 본래 그 뜻이 있습니다. 오라총관(烏喇總管)이 세운 비에 이르기를, ‘동쪽은 토문(土們)이 된다’주 382라고 하였습니다. 동변수원(東邊水源)을 따라서 내려가면 이어서 토벽(土壁)이 문과 같은 곳이 있습니다. 까닭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지 이 물을 토문강(土們江)으로 생각하고 지금까지 서로 전해왔습니다. 만약 두만(豆滿)을 토문(土們)이라고 하면 동쪽을 토문이 된다는 말과 부합되지 않고, 그 발원이 멀어져서 비(碑)·퇴(堆)와 관련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비석의 경계(碑界)를 살펴본 후에 공정한 눈과 의론이 있게 될 것입니다. 만음(滿音 : 만주어 발음)에 토문(土們)은 만자(萬字)라고 한다는 데에 이르러서도 이것은 실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평소 잘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억지로 이해되지 않습니다.주 383
○ 요즈음 방정(方正)한 사람과 공론(公論)을 부지런히 찾지않은 것은 아니나 여러번 다 강희(康熙) 성조(聖祖) 때 세운 비가 원래부터 있었다고 칭하였습니다.주 384 이제 이 굶주린 백성은 강변의 한 언덕도 경작할 수 없으니 원통하고 괴롭고 원통하고 괴로워 소장(狀)을 갖고 가서 귀국의 독리(督理)에 호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안이 이미 옮겨가서 지방관(地方官)이 먼저 죄인의 목에 칼을 씌워 옥에 가두었습니다.주 385 이에 대한 일반 백성의 풍습이 아주 무례하니 매우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 비(碑)는 증거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가르침은 매우 두려워서 감히 답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원래 강희 성조(康熙聖祖)주 386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비를 세운 것입니다. 그 존경과 믿음이 마땅히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귀 승판처(承辦處)주 387 문서(文字)에서는 매양 믿기 어렵다는 것 같이 귀결되니 그 사체(事體)에 있어 이처럼 글을 짓는 것은 부당하지 않을까 합니다.주 388
○ 해란하(海蘭河)는 하반령(下畔嶺) 밑에서 발원하는데, 이를 분계강(分界江)주 389
○ ‘변문(邊門)을 먼저 심감(審勘)해야 한다’는 말씀도 또한 이와 같이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나라가 호소하는 것은 즉 유민(流民)을 안정시키는 계획에 연유하는 것입니다. 구비(舊碑)주 390를 명확하게 밝히자는데 불과한데 거짓으로 속이는 죄로 돌리니 비계를 실제로 조사하지 않을 수도 없을 뿐입니다. 어찌 다른 길이 있겠습니까!
○ ‘귀 함경도에는 다만 혼춘(琿春)과 아울러 돈화(敦化)라는 글자 모양도 없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이것은 틀림없이 그 큰 관서를 들어서 말한 것입니다. 밝게 빛나는 임금의 말씀(上諭)에 누가 감히 보태거나 덜어내겠습니까? 공평한 마음(平心)으로 일을 논하고 서로 믿는 데((相孚)주 391)에 힘쓸 뿐입니다. 반드시 문자로서 조검(照檢 : 문서와 장부 따위에 대조해서 검사함)하는 실수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심각한 논의를 만드는 것은 다시 바라건대 사정을 헤아려 양해해주십시오.
○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의 주장(奏章)에 도문강(圖們江)으로 길림(吉林)과 조선(朝鮮)의 경계(界)를 삼는다고 갖추어 실려 있고 흠정황조통전방문(欽定皇朝通典防門)과 흠정황조사예고(欽定皇朝四裔考)에 이르러서도 각각 확실한 증거로 쓰여 있으니 우리나라(敝邦)는 더욱 송구스러워 땀이 날 지경인데 다시 어찌 감히 항변(抗辯)하겠습니까?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당초에 비(碑)·퇴(堆)는 저희 나라가 제멋대로 세우고 설치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다만 원망과 두려움(㤹畏)만 품고서 가리켜 알림(指告)이 없다면 어찌 작은 나라(小邦)가 지성으로 큰 나라를 섬기는(事大) 뜻이겠습니까?
○ 삼가 조사해보니, 분수령(分水嶺)이라는 것은 압록강과 토문강을 동쪽과 서쪽으로 물이 나뉘는 곳입니다. 비석주 392은 분수령 위(嶺上)에 있어 좌우로 멀리 보면 도랑(溝瀆)이 완연하고 동쪽 도랑(東溝)로부터 아래에 석퇴(石堆)·토퇴(土堆)가 있는데 두만강 발원처(發源處)와는 서로 떨어져있기가 동떨어지게 멀고 중간에 가로막힌 산등성이와 산줄기(岡嶺)가 백 여리 땅이 된즉 우리나라(敝邦)의 백성이 두만강으로 계한(界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어찌 근거가 없다고 하겠습니까?주 393 또한 종성(鍾城) 월변(越邊)에 물이 있는데 이름하여 분계강(分界江)이라고 하고 령(嶺)이 있는데 고려령(高麗嶺)이라고 한다. 상국(上國)은 강북(江北) 변리(邊裡)라 이르고 잡포(卡鋪)를 그 안에 설치하였습니다. 그래서 분계강을 조선(朝鮮)과 길림(吉林) 경계(界限)라고 이르고 전적으로 황폐하게 버려두고 일찍이 시비를 가리지(講理) 않았습니다.주 394
또한 살펴보건대, 종성(鍾城) 월변(越邊) 90리 모자산(帽子山) 아래에 발가토(孛加土)라는 땅 이름이 있습니다. 매양 개시(開市)주 395후에 상국인은 장사 물품[商貨什物]을 조선인민(人民)으로 하여금 운반하게 하고는 발가토에 이르러서는 이르기를, ‘이곳은 너희 나라 경계(界限)이다.’라고 하고는 혹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상국(上國) 관리는 매양 기(旗)를 세워 경계를 표시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조선백성은 다만 조선의 경계로 생각하고 감히 늙은이나 어린애까지 노고를 사양하지 않고 등에 지고 어깨에 메고 고되게 운반하는 일을 한 것이주 396 240년인데 정지된 것이 이제 4년입니다. 양계(兩界) 상민(商民)을 방문해서 물어보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원컨대 각하(閣下)는 이같은 정형(情形)을 곰곰이 잘 생각하고 두루 살피고 사정을 하소연하는 것을(原情) 자세히 조사해서 소방(小邦)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에 근심이 없게 하고 우리 황상(皇上)의 더없이 인자한 정사를 법받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 “우리들이 이미 백성을 위해 마땅히 구원지계(久遠之計)를 모의해야 한다는 가르침주 372을 감히 잘 지켜서 마음속에 새겨 잊지 않는(服膺) 하지 않는 것과 그리고 일시 요행 등의 말은 너무 인정에 어그러지는 논의 입니다. 변계(辨界)는 나라에 있어 막중한 일인데 누가 감히 요행을 바랄 것입니까! 대등하거나 그 이하의 나라라도 오히려 감히 마음을 내지 못하는데 하물며 상국(上國)을 복종해 섬기는 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제시한 중에 ‘황상(皇上)이 (내)탕금(帑金)을 아까워하지 않고 귀국을 보호했다.’라고 한 말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비록 돈어목석(豚魚주 373木石)이라도 어찌 황은(皇恩)을 입지 않았으랴. 온 동토(東土)의 중생(含生주 374)과 뭇 짐승[戴毛之倫주 375]은 생생세세(生生世世)주 376 영원히(항상) 이 넓은 사랑을 칭송할 것이니 이것을 어찌 단지 붓과 종이로 다 쓰겠습니까!
○ 위엄있고 떳떳한 천조(天朝)가 어찌 이를 위하여 구차스럽게 옥신각신 다투겠는가?”라는 말씀에서 저희들은 매번 ‘옥신각신 다툰다[爭執]’ 등의 글자를 볼 때마다 모르는 사이에 땀이 발까지 흐릅니다. ‘강안의 변계를 밝히는[江岸辨界]’ 한 가지 일은 즉 황무지를 개간한 백성이 편안히 잘 살게 할 수 있는 방법주 377을 얻기를 바라는 것에 대한 걱정에 불과할 뿐이니 어찌 일찍이 한 오라기 털 만큼의 옥신 각신 다투려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의리로도 감히 할수 없는 것이요 이치로도 감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 명을 받들어 살펴 조사할(審勘) 것은 오로지 비(碑)주 378는 어느 땅에 있고 퇴(堆)주 379는 어느 곳으로 있고 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는 지를 가리켜 증명하기 위함입니다.주 380 한번 자세히 알려서 우리나라가 말을 꾸미고 교활하다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것 뿐이고 아울러 한발자국도 땅을 넓히는데 있지 않습니다. 이 고충을 양해하면 다행이겠습니다. 이것은 진심을 다하고 솔직하고 사심없는주 381 말입니다.
○ 하루 이틀 쉼도 고달픈데, 가르침은 매우 마음속 깊이 고맙게 느낍니다. 다만 의리(義)는 아주 중하고 명을 받듦에 개인의 사정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가르치심에서 ‘두만(豆滿)·도문(圖們) 두 강의 이름이 있고 없음’에 대한 것은 두만(豆滿)을 조사하면 또한 백산(白山 : 백두산) 근처 산에서 발원(發源)하고 있으며 곧 우리나라 내지(內地) 강 이름이 두만(豆滿)이란 것은 우리나라(敝邦)의 방언(方言)입니다. 이에 이곳에서 가릴 것은 토문(土們)인데 상국인(上國人)은 매양 토문(土們)과 도문(圖們)은 혼동해서 말씀하시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뜹니다. 그리고 토문(土們)이란 이름은 본래 그 뜻이 있습니다. 오라총관(烏喇總管)이 세운 비에 이르기를, ‘동쪽은 토문(土們)이 된다’주 382라고 하였습니다. 동변수원(東邊水源)을 따라서 내려가면 이어서 토벽(土壁)이 문과 같은 곳이 있습니다. 까닭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지 이 물을 토문강(土們江)으로 생각하고 지금까지 서로 전해왔습니다. 만약 두만(豆滿)을 토문(土們)이라고 하면 동쪽을 토문이 된다는 말과 부합되지 않고, 그 발원이 멀어져서 비(碑)·퇴(堆)와 관련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비석의 경계(碑界)를 살펴본 후에 공정한 눈과 의론이 있게 될 것입니다. 만음(滿音 : 만주어 발음)에 토문(土們)은 만자(萬字)라고 한다는 데에 이르러서도 이것은 실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평소 잘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억지로 이해되지 않습니다.주 383
○ 요즈음 방정(方正)한 사람과 공론(公論)을 부지런히 찾지않은 것은 아니나 여러번 다 강희(康熙) 성조(聖祖) 때 세운 비가 원래부터 있었다고 칭하였습니다.주 384 이제 이 굶주린 백성은 강변의 한 언덕도 경작할 수 없으니 원통하고 괴롭고 원통하고 괴로워 소장(狀)을 갖고 가서 귀국의 독리(督理)에 호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안이 이미 옮겨가서 지방관(地方官)이 먼저 죄인의 목에 칼을 씌워 옥에 가두었습니다.주 385 이에 대한 일반 백성의 풍습이 아주 무례하니 매우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 비(碑)는 증거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가르침은 매우 두려워서 감히 답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원래 강희 성조(康熙聖祖)주 386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비를 세운 것입니다. 그 존경과 믿음이 마땅히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귀 승판처(承辦處)주 387 문서(文字)에서는 매양 믿기 어렵다는 것 같이 귀결되니 그 사체(事體)에 있어 이처럼 글을 짓는 것은 부당하지 않을까 합니다.주 388
○ 해란하(海蘭河)는 하반령(下畔嶺) 밑에서 발원하는데, 이를 분계강(分界江)주 389
편자주 389)
이라고 하고 아래로 흘러 두만강(豆滿江)과 합해집니다. 종성지부(鍾城知府)가 일시 필담(筆談)을 그릇되게 한 것을 어찌 족히 다시 논할 것이겠습니까! 원래 조선과 청의 경계지역은 분계강(分界江)이 아니고 그 이북지역까지 였다고 하는 주장도 있었다. 洪儀永, 『北關紀事』, 「關防事宜」, “숙종(肅宗) 임진(壬辰 : 1712) 목극등(穆克登)과 정계(定界)할 때 일을 맡은 신하가 그 일을 그르쳐서 우리나라가 앉아서 잃은 것이 분계강원(分界江源)이하 후춘강(厚春江) 합류처(合流處) 이상 6,7백리(길이가 대략 이같다는 것이며 넓이는 몇리인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천험의 땅이다. 이 이후로부터 완급(緩急)에 관방(關防)으로 방어할 만한 땅이 없다.” “肅廟壬辰 與穆克登定界時 執事之臣僨誤其事 吾國之坐失者 卽分界江以下 厚春江合流處以上 六七百里長約如是 而廣不知幾許里云-天險之地 自此以後 緩急無關防可禦之地”(강석화, 앞의 책, 257쪽 참조).
○ ‘변문(邊門)을 먼저 심감(審勘)해야 한다’는 말씀도 또한 이와 같이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나라가 호소하는 것은 즉 유민(流民)을 안정시키는 계획에 연유하는 것입니다. 구비(舊碑)주 390를 명확하게 밝히자는데 불과한데 거짓으로 속이는 죄로 돌리니 비계를 실제로 조사하지 않을 수도 없을 뿐입니다. 어찌 다른 길이 있겠습니까!
○ ‘귀 함경도에는 다만 혼춘(琿春)과 아울러 돈화(敦化)라는 글자 모양도 없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이것은 틀림없이 그 큰 관서를 들어서 말한 것입니다. 밝게 빛나는 임금의 말씀(上諭)에 누가 감히 보태거나 덜어내겠습니까? 공평한 마음(平心)으로 일을 논하고 서로 믿는 데((相孚)주 391)에 힘쓸 뿐입니다. 반드시 문자로서 조검(照檢 : 문서와 장부 따위에 대조해서 검사함)하는 실수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심각한 논의를 만드는 것은 다시 바라건대 사정을 헤아려 양해해주십시오.
○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의 주장(奏章)에 도문강(圖們江)으로 길림(吉林)과 조선(朝鮮)의 경계(界)를 삼는다고 갖추어 실려 있고 흠정황조통전방문(欽定皇朝通典防門)과 흠정황조사예고(欽定皇朝四裔考)에 이르러서도 각각 확실한 증거로 쓰여 있으니 우리나라(敝邦)는 더욱 송구스러워 땀이 날 지경인데 다시 어찌 감히 항변(抗辯)하겠습니까?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당초에 비(碑)·퇴(堆)는 저희 나라가 제멋대로 세우고 설치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다만 원망과 두려움(㤹畏)만 품고서 가리켜 알림(指告)이 없다면 어찌 작은 나라(小邦)가 지성으로 큰 나라를 섬기는(事大) 뜻이겠습니까?
○ 삼가 조사해보니, 분수령(分水嶺)이라는 것은 압록강과 토문강을 동쪽과 서쪽으로 물이 나뉘는 곳입니다. 비석주 392은 분수령 위(嶺上)에 있어 좌우로 멀리 보면 도랑(溝瀆)이 완연하고 동쪽 도랑(東溝)로부터 아래에 석퇴(石堆)·토퇴(土堆)가 있는데 두만강 발원처(發源處)와는 서로 떨어져있기가 동떨어지게 멀고 중간에 가로막힌 산등성이와 산줄기(岡嶺)가 백 여리 땅이 된즉 우리나라(敝邦)의 백성이 두만강으로 계한(界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어찌 근거가 없다고 하겠습니까?주 393 또한 종성(鍾城) 월변(越邊)에 물이 있는데 이름하여 분계강(分界江)이라고 하고 령(嶺)이 있는데 고려령(高麗嶺)이라고 한다. 상국(上國)은 강북(江北) 변리(邊裡)라 이르고 잡포(卡鋪)를 그 안에 설치하였습니다. 그래서 분계강을 조선(朝鮮)과 길림(吉林) 경계(界限)라고 이르고 전적으로 황폐하게 버려두고 일찍이 시비를 가리지(講理) 않았습니다.주 394
편자주 394)
이는 종성(鍾城) 주민들의 주장에서도 잘 들어난다. 『間島에 關한 鍾城郡鄕廳 報告書』. “조선국 종성(鍾城) 빈민(貧民) 등이 삼가 상국(上國 : 청) 파원대인(派員大人) 합하(閤下)에게 상서(上書)합니다. (중략) 대개 분계강(分界江) 이서(以西)는 상국(上國)의 금지(禁地 : 봉금한 지역)이고 분계강 이동(以東)은 우리나라(小邦)의 금지(禁地)가 됩니다. 모두 사람 사는 흔적이 없고 깊은 숲이 하늘을 가리는 지역입니다. 십수년부터 대국(大國 : 청)의 백성들이 몰래 금지(禁地)를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지금은 개간한 땅이 분계강 이동(以東)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小邦)의 백성들은 다 말하기를, ‘상국의 봉금한 지역의 땅을 오히려 개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봉금한 땅은 어찌 비워둔 채로 버려두겠습니까?’ 강 가까이 사는 백성들은 처음에는 갈라진 물길 사이에서 개간하였고 마침내는 산아래까지 이르렀고 왕왕 개간하고 파종했습니다.” “朝鮮國鍾城貧民等謹拜上書于上國派員大人閤下 (중략) 盖分界江以西爲上國禁地 分界江以東爲小邦禁地 竝無人煙黛色參天 自數十年來 大國之民 潛墾禁地 (중략) 今則墾及於分界以東 小邦之民含曰 上國禁地 尙且起耕 小邦禁地 何可空棄 沿江居民 始自岐流之間 終至山止之限 往往起墾播種.” 강석화, 앞의 책, 282쪽 주)91 참조.
또한 살펴보건대, 종성(鍾城) 월변(越邊) 90리 모자산(帽子山) 아래에 발가토(孛加土)라는 땅 이름이 있습니다. 매양 개시(開市)주 395후에 상국인은 장사 물품[商貨什物]을 조선인민(人民)으로 하여금 운반하게 하고는 발가토에 이르러서는 이르기를, ‘이곳은 너희 나라 경계(界限)이다.’라고 하고는 혹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상국(上國) 관리는 매양 기(旗)를 세워 경계를 표시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조선백성은 다만 조선의 경계로 생각하고 감히 늙은이나 어린애까지 노고를 사양하지 않고 등에 지고 어깨에 메고 고되게 운반하는 일을 한 것이주 396 240년인데 정지된 것이 이제 4년입니다. 양계(兩界) 상민(商民)을 방문해서 물어보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원컨대 각하(閣下)는 이같은 정형(情形)을 곰곰이 잘 생각하고 두루 살피고 사정을 하소연하는 것을(原情) 자세히 조사해서 소방(小邦)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에 근심이 없게 하고 우리 황상(皇上)의 더없이 인자한 정사를 법받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 편자주 371)
- 편자주 372)
- 편자주 373)
- 편자주 374)
- 편자주 375)
- 편자주 376)
- 편자주 377)
- 편자주 378)
- 편자주 379)
- 편자주 380)
- 편자주 381)
- 편자주 382)
- 편자주 383)
- 편자주 384)
- 편자주 385)
- 편자주 386)
- 편자주 387)
- 편자주 388)
-
편자주 389)
원래 조선과 청의 경계지역은 분계강(分界江)이 아니고 그 이북지역까지 였다고 하는 주장도 있었다. 洪儀永, 『北關紀事』, 「關防事宜」, “숙종(肅宗) 임진(壬辰 : 1712) 목극등(穆克登)과 정계(定界)할 때 일을 맡은 신하가 그 일을 그르쳐서 우리나라가 앉아서 잃은 것이 분계강원(分界江源)이하 후춘강(厚春江) 합류처(合流處) 이상 6,7백리(길이가 대략 이같다는 것이며 넓이는 몇리인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천험의 땅이다. 이 이후로부터 완급(緩急)에 관방(關防)으로 방어할 만한 땅이 없다.” “肅廟壬辰 與穆克登定界時 執事之臣僨誤其事 吾國之坐失者 卽分界江以下 厚春江合流處以上 六七百里長約如是 而廣不知幾許里云-天險之地 自此以後 緩急無關防可禦之地”(강석화, 앞의 책, 257쪽 참조).
- 편자주 390)
- 편자주 391)
- 편자주 392)
- 편자주 393)
-
편자주 394)
이는 종성(鍾城) 주민들의 주장에서도 잘 들어난다. 『間島에 關한 鍾城郡鄕廳 報告書』. “조선국 종성(鍾城) 빈민(貧民) 등이 삼가 상국(上國 : 청) 파원대인(派員大人) 합하(閤下)에게 상서(上書)합니다. (중략) 대개 분계강(分界江) 이서(以西)는 상국(上國)의 금지(禁地 : 봉금한 지역)이고 분계강 이동(以東)은 우리나라(小邦)의 금지(禁地)가 됩니다. 모두 사람 사는 흔적이 없고 깊은 숲이 하늘을 가리는 지역입니다. 십수년부터 대국(大國 : 청)의 백성들이 몰래 금지(禁地)를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지금은 개간한 땅이 분계강 이동(以東)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小邦)의 백성들은 다 말하기를, ‘상국의 봉금한 지역의 땅을 오히려 개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봉금한 땅은 어찌 비워둔 채로 버려두겠습니까?’ 강 가까이 사는 백성들은 처음에는 갈라진 물길 사이에서 개간하였고 마침내는 산아래까지 이르렀고 왕왕 개간하고 파종했습니다.” “朝鮮國鍾城貧民等謹拜上書于上國派員大人閤下 (중략) 盖分界江以西爲上國禁地 分界江以東爲小邦禁地 竝無人煙黛色參天 自數十年來 大國之民 潛墾禁地 (중략) 今則墾及於分界以東 小邦之民含曰 上國禁地 尙且起耕 小邦禁地 何可空棄 沿江居民 始自岐流之間 終至山止之限 往往起墾播種.” 강석화, 앞의 책, 282쪽 주)91 참조.
- 편자주 395)
- 편자주 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