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영(按撫營)에서 국경지역 개간문제를 제기한 청국(淸國)의 공문에 회신
□ 안무영(按撫營)주 110이 (청국의) 조회(照會)에 답하여 조복(照覆)주 111하는 일, 접준(接准)주 112
귀하주 113께서 양국 간의 변경(邊境)주 114을 회판(會辦)주 115하는 일이라며 보내신 조회(照會)에 따르면, 양국의 경계 지역이 불분명하여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해당 지역 주민들이 마음대로 곡식을 파종하고 있으며,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와 병사들이 해당 지역에 주둔하여 지키면서 양국의 주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이전에 두만강(豆滿江)주 116과 토문강(土門江) 토문강(土門江)주 117 사이를 조사하여주 118
을유년(1885년, 고종 22) 3월 일
귀하주 113께서 양국 간의 변경(邊境)주 114을 회판(會辦)주 115하는 일이라며 보내신 조회(照會)에 따르면, 양국의 경계 지역이 불분명하여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해당 지역 주민들이 마음대로 곡식을 파종하고 있으며,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와 병사들이 해당 지역에 주둔하여 지키면서 양국의 주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이전에 두만강(豆滿江)주 116과 토문강(土門江) 토문강(土門江)주 117 사이를 조사하여주 118
편자주 118)
황지(荒地)주 119로 삼은 지 이미 몇 백 년이 지났으며, 만근(挽近)주 120 이래로 양쪽 경계의 백성들이 차츰차츰 들어와 농사를 지으면서 옥토(沃土)로 만들었으니주 121 이들은 올 봄에 새롭게 농사를 시작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만약 이곳에 양국 정부에서 병사들을 파견해서 주둔하고 지키게 한다면 몇 년 동안은 양국인의 출입에 대해 안심하고 업무에 종사할 수 있겠지만, 서주(書疇)주 122에 일이 있을 때에는 곤란하고 고통스럽게 달리 속한 바도 잃을까 걱정됩니다.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황제의 은혜를 입어서 내복(內服)주 123과 동일시되었습니다. 귀측의 독(督)·방(幫), 판(辦) 장군(將軍)·부수(副帥)도 천자의 명을 받들어 변방에 와서 양국의 경계를 나누는 일에 공평하도록 힘썼습니다. 우리나라 백성들은 황은(皇恩)에 대한 감동이 골수(骨髓)에 깊이 사무쳐서 마치 부모를 우러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백성들은 곧 천조(天朝)의 적자(赤子)주 124 1712년(숙종 38년) 5월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이 국경 획정(劃定)을 위한 회담을 열면서 백두산 지역을 답사한 후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워서 양국의 강역(疆域)을 조정하였던 일이다. 당시 조선측은 만주지역의 지도와 지리지, 함경도 지방관들이 수집한 자료들을 근거로 해서 압록강과 두만강, 백두산을 경계로 그 남쪽을 조선의 영역으로 주장하고자 하였다. 특히 조선측에서는 청국에서 발간한 『성경지(盛京誌)』에 “백두산 남쪽은 조선의 지경(地境)이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로 만주 지역의 지리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발간한 지리서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백두산을 여진(女眞)에 속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청나라 관원들이 압록강 이남까지 영토로 주장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과 청국의 국경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조선측의 우려와는 달리 목극등은 양국의 국경을 압록강-백두산-두만강으로 이어지는 경계로 보았다. 목극등은 양국을 경계하는 ‘분수령(分水嶺)’을 정한 뒤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정한다. 이때 백두산정계비에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에 이르며(西爲鴨綠 東爲土門)’라고 하여 동서 경계를 압록강과 두만강[토문강]을 기준으로 한다는 하였다. 이러한 목극등의 행동은 후일 양국이 감계회담을 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목극등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양국의 국경을 획정할 때 두만강을 ‘토문강’이라고 표기하면서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을 가리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배경은 목극등의 현지 조사가 미비했다는 점이 주요 원인이었다. 목극등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원이 백두산을 기점으로 시작한다고 보고 그 정상 부근에 수원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으로 조선은 송화강의 원류(源流) 중의 하나인 토문강으로, 청국에서는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보려 했던 것이다.
편자주 124)
로서, 그 동일시하는 은혜가 마땅히 한결같으니, 어찌 이들 적자(赤子)로 하여금 농사짓는 일을 잃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이 일을 조사하여 살피고 보고드리니 그 답장을 기다리는 바입니다. 양국간의 경계에 대한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파견 관리들이 모여 조사해서 양국의 경계가 결정되게 된다면, 양쪽 경계의 백성들이 스스로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어기게 되거나 감히 엿보지 않을 것이니 번거롭게 병사를 파견하여 주둔시켜 지킬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귀 승판장문(承辦將文) 내에서 주장하신 내용에 대해 회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귀 독(督), 방(幫), 판(辦) 장군(將軍), 부수(副帥)가 양쪽 경계의 백성들에게 칙유(勅諭)주 125하여 백성들이 각각 그 본업을 편안히 하고, 쉽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조용히 결정을 기다리게 한다면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문장을 갖추어 조회에 답해드리니, 번거로움을 끼쳐 드립니다. 갓난아기란 말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주로 백성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맹자(孟子)』이루장구(離婁章句) 하에는 “대인이란 그의 어린 아이 때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라고 하여 적자가 어린아이를 비유하는 말이었다. 반면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傳에 이르기를 인군(人君)은 부모이고, 백성은 적자이고, 군수(郡守)는 유보(乳保)라고 하였습니다. 부모가 그 자식을 기르지 못하므로, 이를 기르는 자는 유보(乳保)이고, 임금이 그 백성을 스스로 어루만지지 못하므로, 이를 어루만지는 자는 군수입니다”(『태종실록』태종 3년, 6월 17일(계해))라고 하여 적자를 백성으로 비유하였다.
을유년(1885년, 고종 22) 3월 일
- 편자주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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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자주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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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자주 118)
1712년(숙종 38년) 5월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이 국경 획정(劃定)을 위한 회담을 열면서 백두산 지역을 답사한 후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워서 양국의 강역(疆域)을 조정하였던 일이다. 당시 조선측은 만주지역의 지도와 지리지, 함경도 지방관들이 수집한 자료들을 근거로 해서 압록강과 두만강, 백두산을 경계로 그 남쪽을 조선의 영역으로 주장하고자 하였다. 특히 조선측에서는 청국에서 발간한 『성경지(盛京誌)』에 “백두산 남쪽은 조선의 지경(地境)이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로 만주 지역의 지리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발간한 지리서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백두산을 여진(女眞)에 속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청나라 관원들이 압록강 이남까지 영토로 주장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과 청국의 국경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조선측의 우려와는 달리 목극등은 양국의 국경을 압록강-백두산-두만강으로 이어지는 경계로 보았다. 목극등은 양국을 경계하는 ‘분수령(分水嶺)’을 정한 뒤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정한다. 이때 백두산정계비에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에 이르며(西爲鴨綠 東爲土門)’라고 하여 동서 경계를 압록강과 두만강[토문강]을 기준으로 한다는 하였다. 이러한 목극등의 행동은 후일 양국이 감계회담을 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목극등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양국의 국경을 획정할 때 두만강을 ‘토문강’이라고 표기하면서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을 가리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배경은 목극등의 현지 조사가 미비했다는 점이 주요 원인이었다. 목극등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원이 백두산을 기점으로 시작한다고 보고 그 정상 부근에 수원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으로 조선은 송화강의 원류(源流) 중의 하나인 토문강으로, 청국에서는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보려 했던 것이다.
- 편자주 119)
- 편자주 120)
- 편자주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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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자주 124)
갓난아기란 말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주로 백성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맹자(孟子)』이루장구(離婁章句) 하에는 “대인이란 그의 어린 아이 때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라고 하여 적자가 어린아이를 비유하는 말이었다. 반면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傳에 이르기를 인군(人君)은 부모이고, 백성은 적자이고, 군수(郡守)는 유보(乳保)라고 하였습니다. 부모가 그 자식을 기르지 못하므로, 이를 기르는 자는 유보(乳保)이고, 임금이 그 백성을 스스로 어루만지지 못하므로, 이를 어루만지는 자는 군수입니다”(『태종실록』태종 3년, 6월 17일(계해))라고 하여 적자를 백성으로 비유하였다.
- 편자주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