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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대반련(大伴連; 오토모노무라지)

대반련(大伴連; 오토모노무라지)
 도신명(道臣命)의 10세손 좌저언(佐▼{弖-丿+丨}彦; 사테히코)의 후손이다.
 
【주석】
1. 대반련(大伴連)
대반련(大伴連)은 대반부의 반조씨족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대반련은 천무 13년(684)에 숙녜를 사성받아 대반숙녜가 되었다. 따라서 『신찬성씨록』 의 이 조문에 보이는 대반련은 숙녜를 사성받지 못한 대반련씨다. 『속일본기』 이후의 육국사에는 대반련씨로서 활약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823년에 대반친왕(大伴親王, 淳和天皇)이 즉위한 후 대반(大伴)을 씨명으로 하는 씨들에게 기휘(忌諱)하여 모두 반(伴)으로 씨명을 고치도록 한 후에는 『일본삼대실록』에 모두 3명의 반련씨(伴連氏)가 보인다. 반련정종(伴連貞宗)과 그의 아버지 반련익계(伴連益繼), 그리고 절부(節婦) 반련택자(伴連宅子)가 보인다. 청화천황 대인 정관 3년(861) 10월 28일 무진조에 반련정종은 종7위상이며 감해유사(勘解由使)의 주전(主典)으로서 살인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정6위상 치부성 소승(少丞) 안배조신흥씨(安倍朝臣興氏)와 함께 상야국(上野國)에 파견되었다. 그 후 정관 14년(872)8월 13일 신해조에서는 청화천황이 기이국 나하군 출신의 정6위상 좌소사(左少史) 반련정종과 그의 아버지 정6위상 반련익계 등의 본거지를 우경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후 반련정종은 양성천황(陽成天皇)과 광효천황(光孝天皇) 대에 걸쳐 담로국수(淡路國守), 우경량(右京亮), 백기수(伯耆守) 등을 역임하고 종5위하까지 승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반련택자는 기이국(紀伊國) 명초군(名草郡) 사람이었는데, 정관 6년(864) 8월에 그녀를 절부로 인정하여 관위를 두 단계 승서하고 그 집의 전조(田租)를 면제하고 그 집의 문에 절부의 집이라는 표시를 하도록 하였다. 이상 사서에 보이는 반련씨는 모두 기이국의 사람이었다.
한편 목간에서도 대반련이 보이는데, 『등원궁목간(藤原宮木簡)』(2-73)에 대반련(大伴連)이 보이고, 『평성궁발굴조사출토목간개보』(4-16, 1967)에 대반련숙(大伴連宿)이 보인다.
고문서에서는 천평 20년(740) 4월 25일자 「사서소해(寫書所解)」(『대일본고문서』 3-78)에 기이국(紀伊國) 나하군(那賀郡) 나하향(那賀鄕)의 대반련사만려(大伴連蓑万呂)와 대반련백만려(大伴連伯万呂)가 보인다. 정력(正曆) 2년(991) 11월 28일자 「태정관부안(太政官符案)」(『平安遺文』2-493)에서 영연(永延) 2년(988) 10월 20일자 「분하사해(粉河寺解)」 를 소개하면서 여기에서 「구기(舊記)」 를 인용하여 대반련공공자고(大伴連公孔子古)가 공가(公家)를 받들기 위해 보귀 연간에 분하사(粉河寺)를 지었음을 밝히고 있다고 적고 있다. 분하사는 기이국 나하국의 불교 사원으로, 여기에 살던 대반련공공자고가 광인천황 대에 분하사를 조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자고의 후손에 관해서도 고문서에 보인다. 즉 만수 3년 12월 23일자 「기이국분하사수조해(紀伊國粉河寺壽肇解)」(『平安遺文』 2-687)에서는 당시 분하사의 별당 수조(壽肇)가 조상 대반공자고(大伴孔子古)로부터 선주(船主), 대하(大河) 등 대대로 분하사의 별당 직책을 이어 왔음을 주장하고 있다. 고문서에 보이는 대반련씨는 모두 기이국 나하군의 사람이다. 앞의 『일본삼대실록』에 보이는 대반련씨인 반련정종과 그의 아버지 익계도 기이국 나하군의 사람이었다. 따라서 상기 고문서에 보이는 대반련씨 인물들은 『일본삼대실록』에 보이는 반련익계, 반련정종과 동족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도신명(道臣命)
앞의 좌경 신별 「좌백숙녜」 조(375) 도신명 참조.
3. 좌테언(佐▼{弖-丿+丨}彦)
『일본서기』에서는 협수언(狹手彦; 사테히코)으로 표기하고 있다. 선화천황 2년(537) 10월임진삭조에서 신라가 임나를 침략하자 선화천황이 대반금촌대련에게 명하여 그의 아들 반과 협수언을 파견하여 임나를 돕도록 하였는데, 반은 축자에 남아 국정을 담당하여 삼한에 대비하였고, 협수언은 임나에 가서 백제를 구하였다고 한다. 그 후 흠명천황 23년(562) 8월조에서 흠명천황이 대장군 대반련협수언을 파견하여 병사 수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는데, 협수언이 백제의 계책으로 고구려를 타파하였다고 적고 있다. 협수언에 대해서는 『비전국풍토기(肥前國風土記)』 송포군(松浦郡) 경도(鏡渡)조에서 선화천황 대에 대반협수언련이 임나를 진압하고 백제를 도우라는 명을 받들어 이 마을에 왔다가 소원촌(篠原村)의 제일희자(弟日姬子)와 결혼하였다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 같은 책 송포군 습진(褶振)조에서는 협수언이 배를 타고 임나로 간 후 제일희자에 관한 후일담을 전하고 있다. 『만엽집』에 수록된 산상억량(山上憶良)의 노래(『만엽집』 권5 871~875번가)의 단서(端書)에서는 대반좌제비고랑자(大伴佐提比古郞子; 오토모노사데히코노이라츠코)라고 표기하였다. 여기에서는 그가 번국(藩國)에 사신으로 갈 때에 송포(松浦; 마츠라)의 좌용비매(佐用比賣; 사요히메)가 높은 산에 올라 떠나가는 배를 향해 영건(領巾)을 흔들었다는 영건휘령(領巾麾嶺) 전설을 적고 있다.
『일본삼대실록』 정관 3년(861) 8월 19일 경신조에서는 좌경인 산위 외종5위하 반대전숙녜상웅(伴大田宿禰常雄)에게 반숙녜를 사성하였다고 적고, 이와 관련하여 상웅이 제출한 관(款)에서 반대전숙녜는 금촌대련공의 제3남 협수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대반씨의 계보인 『고옥가가보』에서는 금촌대련공의 아들로 반련공(磐連公), 협수언련공(狹手彦連公), 강수고련공(糠手古連公), 아피포자련공(阿被布子連公), 우지고련공(宇遲古連公)을 적고 협수언련공에 대해서 대반련(大伴連), 대전부련(大田部連), 하본련(榎本連) 등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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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련(大伴連; 오토모노무라지) 자료번호 : ss.k_0001_0040_00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