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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물부(物部; 모노노베)

물부(物部; 모노노베)
 석상(石上; 이소노카미)과 같은 조상이다.
 
【주석】
1. 물부(物部)
물부라는 씨명은 물부씨의 부민(部民)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물부씨가 사서에 처음 보이는 것은 『일본서기』 용명천황 2년 하4월 병오조이다. 당시 대련(大連; 오무라지)이었던 물부련수옥(物部連守屋; 모노노베노무라지모리야)의 부하로 물부팔판(物部八坂; 모노노베노야사카)이 보인다. 이후 『속일본기』 화동(和銅) 6년(713) 5월 갑술조의 물부난(物部亂; 모노노베노오사무)이 보인다. 찬기국(讚岐國; 사누기노쿠니)의 국수(國守) 정5위하 대반숙녜도족(大伴宿禰道足; 오토모노스쿠네미치타리) 등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자신의 부하 한천군(寒川郡; 사무카하군) 사람 물부난(物部亂) 등 26인은 경오년(670)이후 양인(良人) 호적에 들어 있었다. 그런데 경인년(690) 호적을 만들 때에 잘못하여 사정(飼丁; 우마카히노요보로)으로 분류되었다. 자신이 조사하여 그들의 주장이 맞다고 판단하였음에도, 아직 이들이 양인 호적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양인 호적에 넣어 달라고 조정에 요청하여 허가받았다.
『속일본기』 화동 7년(714) 5월 계축조에서는 토좌국(土佐國; 도사노쿠니) 사람 물부모충미(物部毛虫咩; 모노노베노케무시메)가 한번에 세쌍둥이를 낳자 조정에서 곡식 40곡(斛)과 유모를 보내 주었다고 한다.
『속일본기』 양로(養老) 7년(723) 3월 무자조에서는 상륙국(常陸國; 히타치노쿠니) 신태군(信太郡; 시다군) 사람 물부국의(物部國依; 모노노베노쿠니요리)에게 신태련(信太連; 시다노무라지)이라는 씨성을 내렸다고 한다.
『속일본기』 천평승보 6년(754) 춘정월 임자조에서는 물부산배(物部山背; 모노노베노 야마시로)가 정6위상에서 외종5위하로 승서되고 있다. 천평보자 8년(764) 9월 임자조에서는 등원중마려(藤原仲麻呂; 후지하라노나카마로)의 난이 일어났을 때 효겸상황 측에서 활약한 무장국(武藏國; 무사시노쿠니) 입간군(入間郡; 이리마군) 출신의 수도(授刀) 물부광성(物部廣成; 모노노베노히로나리)이 보인다. 또한 신호경운 원년(767) 7월 정사조에서는 근위(近衛) 종8위하 물부기랑(物部磯浪; 모노노베노이소나미)이 일약 외종5위하로 승서되었다. 764년 9월에 등원중마려의 난이 일어났을 때 효겸상황(칭덕천황) 측에 재빨리 알린 공로로 이날 외종5위하로 승서된 것이다. 신호경운 2년(768) 윤6월 경술조에서는 외정8위하 물부손족(物部孫足; 모노노베노히코타리)이 조정에 공헌하여 외종5위하로 승서되었다. 신호경운 3년(769) 6월 임술조에서는 비전국(備前國; 기비노미치노쿠니)의 어야군(御野郡; 미노군) 사람 물부마(物部麿; 모노노베노마로) 등 64인이 석생별공(石生別公; 이케나스노와케키미)을 사성받았다. 보귀 8년 11월 병진조에서는 미농국(美濃國; 미노노쿠니) 사람 물부판마려(物部坂麻呂; 모노노베노사카마로) 등 9인에게 물부다예련(物部多藝連; 모노노베노타기무라지)을 사성하였다. 보귀 9년(788) 춘정월 임신조에서는 여유(女孺) 무위(無位) 물부득마려(物部得麻呂; 모노노베노토쿠마로)가 외종5위하를 사여받았다. 이 밖에도 『일본기략』 연력 22년(803) 4월 무신조의 물부건마(物部建麿)와 『일본후기』홍인 2년(811) 윤12월 을묘조의 물부전계(物部田繼) 등이 있다.
목간이나 고문서에는 각 지역의 물부씨 일족이 수십 명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물부씨가 전국적으로 분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석상동조(石上同祖)
『신찬성씨록』 완본에는 ‘석상’ 다음에 ‘조신’이라는 글자가 있었을 것이다. 석상조신에 관해서는 좌경 신별(상) 「석상조신」 조(34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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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부(物部; 모노노베) 자료번호 : ss.k_0001_0040_0010_0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