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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갑능(甲能; 가후노)

갑능(甲能; 가후노)
 종5위하 어방대야(御方大野; 미카타노오노)의 후손이다. 『속일본기』와 합치된다.
 
【주석】
1. 갑능(甲能)
비중국(備中國) 소전군(小田郡) 갑노(甲努), 갑포내(甲布乃)라는 지명은 존재하지만, 이러한 지명과 갑능이라는 씨명의 관계는 알 수 없다. 이 씨명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갑능은 여기에만 보인다.
2. 어방대야(御方大野)
어방대야 관한 기록은 『육국사』 보다 고문서에서 먼저 확인된다. 「천평 10년(738) 월일이 빠진 「관인력명(官人歷名)」(『대일본고문서』 24-85)에 기재된 동사생(東史生) 무위(無位) 어방대야, 천평 16년(744) 5월 23일 「필묵진송병충용주문(筆墨進送幷充用注文)」에 기재된 춘궁소속 어방대야, 「년이 빠진 7월 19일 다라니집경제서주문(年闕 七月十九日 陀羅尼集京題書注文)」(『대일본고문서』 22-374)에 기재된 춘궁소속(春宮少属) 어방대야가 보인다. 따라서 천평 10년 이후 천평 16년 5월 사이에 춘궁소속(종8위상 상당)에 보임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속일본기』 천평 19년(747) 10월 을사조에 “춘궁소속 종8위상 어방대야(御方大野)에게 원하는 성을 허락해 주고자 했다. 그러나 대야의 아버지가 정어원조정(淨御原朝庭)에서 황자의 반열에 있었는데 사소한 과오로 인해 마침내 폐위당해 물러나게 되었다”라고 적혀 있어, 천평 19년 10월에 어방대야가 사성을 청원했지만 허가받지 못하였음이 확인된다. 천무조에 생존한 황자로는 천지의 황자 2명과 천무의 황자 10명 등인데, 이들 중 황자 자리에서 쫒겨난 인물은 없었다. 다만 영귀(靈龜) 2년 8월 갑인조의 지기친왕(志紀親王) 훙전에 천지의 일곱 번째 황자가 보이므로 계보 등에 나타나지 않은 천지의 황자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 뒤 어방대야는 『속일본기』 천평승보 원년(749) 7월 갑오조에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서된 기록이 보이고, 천평승보 원년 8월 신미조에 종5위하(극위)로 도서두(圖書頭)에 보임되었다. 또 『속일본기』 천평보자 5년(761) 10월 임술조에는 “내사인(內舍人)정8위상 어방광명(御方廣名) 등 3인이 어방숙녜(御方宿禰)라는 성을 받았다.”라고 적혀 있다. 곧 어방대야의 아들로 추측된다. 본조에서 어방대야의 관위를 적고 있는 것은 ‘종5위하’까지 오른 후손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방광명은 『속일본기』 연력 3년(784) 정월 기묘조에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된 기록이 보이고, 동서 연력 3년 경오조에는 축후수(筑後守)에 보임된 기록이 보인다. 이어서 연력 10년(791) 정월 기축조에 우경량(右京亮), 동년 7월에는 상야수(上野守)에 보임된 기록이 보인다.
3. 속일본기합(續日本紀合)
이 부기는 『속일본기』 천평보자 5년(761) 10월 임술조에 “내사인(內舍人) 정8위상 어방광명(御方廣名) 등 3인이 어방숙녜(御方宿禰)라는 성을 받았다.”라고 적혀 있는 사성 기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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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능(甲能; 가후노) 자료번호 : ss.k_0001_0030_0070_0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