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한야선우가 한나라에 입조하고 칭신하기로 결정한 뒤 아들 수루거당(銖婁渠堂)을 보내자 질지선우 또한 아들을 보내 입조함
호한야가 패하자 좌이질자왕(左伊秩訾王)주 001은 호한야를 위해 계책을 세웠는데, 신하를 칭하고 입조(入朝)하여 한(漢)을 섬기고 따르며 도움을 구하라고 권하였다. 이와 같이 하면 흉노가 안정될 것이라 하였다. 호한야는 여러 대신들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모두가 말했다. “안 됩니다. 흉노의 습속은 본래 기백과 힘을 우러러보고, 복종하며 부림받는 것을 멸시합니다. 말 위에서 전투하면서 나라를 세웠고 그래서 뭇 오랑캐주 002들에게 위명(威名)을 떨쳤습니다. 전장에서의 죽음은 장사(壯士)에게 모두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주 003지금 [질지와 호한야] 형제가 나라를 다투고 있는데 [승리의 운이] 형에게 있지 않다면 동생에게 있을 것입니다.주 004비록 죽는다 해도 여전히 위명은 남을 것이며 자손들은 변함없이 여러 나라들(諸國)을 이끌 것입니다. 한은 비록 강해졌어도 여전히 흉노를 겸병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선고(先古)의 제도를 무너뜨리고 한에 신사(臣事)하여 선대의 선우들을 천시하고 욕보이며주 005여러 나라들의 웃음거리가 되려 합니까. 설령 이와 같이 하여 안정되어도 어떻게 다시 뭇 오랑캐들을 이끌 수 있겠습니까?”
좌이질자(左伊秩訾)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강함과 약함에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한조는 바야흐로 강성하며 오손주 006
여러 대인(大人)주 012들은 서로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호한야는 그 계책에 따르기로 하여 무리를 이끌고 [한조의] 변새 부근으로 남하하였다. 아들 우현왕 수루거당(銖婁渠堂)을 보내 입조하고 시봉하게 하였다. 질지선우 또한 아들 우대장(右大將) 구우리수(駒于利受)를 보내 입조하고 시봉하게 하였다. 이해는 감로(甘露) 원년(전53)이다.주 013
모두가 말했다. “안 됩니다. 흉노의 습속은 본래 기백과 힘을 우러러보고, 복종하며 부림받는 것을 멸시합니다. 말 위에서 전투하면서 나라를 세웠고 그래서 뭇 오랑캐주 002들에게 위명(威名)을 떨쳤습니다. 전장에서의 죽음은 장사(壯士)에게 모두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주 003지금 [질지와 호한야] 형제가 나라를 다투고 있는데 [승리의 운이] 형에게 있지 않다면 동생에게 있을 것입니다.주 004비록 죽는다 해도 여전히 위명은 남을 것이며 자손들은 변함없이 여러 나라들(諸國)을 이끌 것입니다. 한은 비록 강해졌어도 여전히 흉노를 겸병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선고(先古)의 제도를 무너뜨리고 한에 신사(臣事)하여 선대의 선우들을 천시하고 욕보이며주 005여러 나라들의 웃음거리가 되려 합니까. 설령 이와 같이 하여 안정되어도 어떻게 다시 뭇 오랑캐들을 이끌 수 있겠습니까?”
좌이질자(左伊秩訾)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강함과 약함에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한조는 바야흐로 강성하며 오손주 006
각주 006)
과 성곽 제국(諸國)주 007들은 모두 [한의] 신첩(臣妾)주 008이 되었습니다. 저제후선우(且鞮侯單于)
주 009이래 흉노는 날로 줄어들었고주 010[잃은 것을] 되찾아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여기에서 굳센 척해도주 011하루의 편안도 맛볼 수 없습니다. 지금 한을 섬기면 편안하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섬기지 않으면 위험하거나 멸망할 것입니다. 무엇이 이 계책보다 나을 수 있겠습니까!”烏孫 :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 무렵까지 天山산맥의 북쪽 일리강 유역과 이식쿨의 호반 등지에 분포했던 투르크계 유목 부족이다. 원주지는 천산의 북쪽 산록인 준가르 지방이며, 처음에는 匈奴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기원전 2세기 후반 月氏를 쫓아내고 일리 지방으로 이동하였다고 본다. 부족의 都城은 赤谷城이며 그 위치는 이식쿨호수의 남안으로 추정된다. 漢代 중국과 烏孫의 관계가 친밀해지자 匈奴는 車師와 결탁하여 烏孫을 공격했다. 이때 漢이 匈奴와 車師를 격파하였고 이후 烏孫은 한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기원후 2세기 후반 鮮卑의 압박을 받았고 5세기 후반에는 柔然의 침략을 받아 서방의 파미르 고원지대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점차 그 이름이 잊혀졌다. 烏孫은 漢과 匈奴의 항쟁 과정과 東西交通史上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평가된다.
여러 대인(大人)주 012들은 서로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호한야는 그 계책에 따르기로 하여 무리를 이끌고 [한조의] 변새 부근으로 남하하였다. 아들 우현왕 수루거당(銖婁渠堂)을 보내 입조하고 시봉하게 하였다. 질지선우 또한 아들 우대장(右大將) 구우리수(駒于利受)를 보내 입조하고 시봉하게 하였다. 이해는 감로(甘露) 원년(전53)이다.주 013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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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烏孫 :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 무렵까지 天山산맥의 북쪽 일리강 유역과 이식쿨의 호반 등지에 분포했던 투르크계 유목 부족이다. 원주지는 천산의 북쪽 산록인 준가르 지방이며, 처음에는 匈奴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기원전 2세기 후반 月氏를 쫓아내고 일리 지방으로 이동하였다고 본다. 부족의 都城은 赤谷城이며 그 위치는 이식쿨호수의 남안으로 추정된다. 漢代 중국과 烏孫의 관계가 친밀해지자 匈奴는 車師와 결탁하여 烏孫을 공격했다. 이때 漢이 匈奴와 車師를 격파하였고 이후 烏孫은 한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기원후 2세기 후반 鮮卑의 압박을 받았고 5세기 후반에는 柔然의 침략을 받아 서방의 파미르 고원지대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점차 그 이름이 잊혀졌다. 烏孫은 漢과 匈奴의 항쟁 과정과 東西交通史上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평가된다.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색인어
- 이름
- 호한야, 호한야, 호한야, 질지, 호한야, 저제후선우(且鞮侯單于), 호한야, 수루거당(銖婁渠堂), 질지선우, 구우리수(駒于利受)
- 지명
- 한(漢), 한, 한, 한,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