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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제도와 풍속

[백제는] 도성을 고마주 001
번역주 001)
固麻 : 한자 ‘熊’의 훈인 ‘곰’의 순우리말을 다시 한자어로 표기한 것으로, 웅진 즉 현재의 공주를 지칭하는 말이다. 『주서』 백제전의 ‘固馬城’, 『수서』 백제전의 ‘居拔城’, 『일본서기』 권14, 웅략기 21년조의 ‘久麻那利’가 모두 같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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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부르고, 읍을 담로주 002
번역주 002)
檐魯 : 본서에 의하면 담로는 도성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중국의 군현과 같은 기능을 가진 것으로 기술되었다. 같은 내용이 “所治城曰固麻 謂邑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라 기록한 『양직공도』에 실려져 있다. 『양직공도』가 사신의 전언을 바탕으로 작성된 화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담로는 순백제어로, 도성과는 구별되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기능을 가진 백제의 지방통치 중심지인 읍을 담로라 일컬었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대에는 각 지방에 담로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곳에 왕의 ‘자제종족’을 파견하여 다스렸다고 한다. 담로제는 중국의 군현과 같다고 한 것으로 보아 중국식의 군현을 백제 이름으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담로제는 일정 지역의 거점이 되는 곳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형태인데, 일반적으로 각 지방에 수령을 파견하여 직접 지배하는 단계의 앞선 시기에 나타나는 지방통치방식이다. 무령왕대에는 담로제가 전국에 걸쳐 모두 22개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 통제력을 강화한 것이다. 여기서 담로의 통치 역할을 담당했던 ‘子弟宗族’은 주로 골족과 인족을 포함한 근친왕족 세력들로 보인다. 이는 근친왕족을 중용하여 왕권의 집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담로제는 본서와 『양직공도』에만 보이는 독자적인 기사로 인해 그 실시 시기와 배경, 편제 방식, 그리고 성격 등에 대해 많은 논란이 제기되어 왔다. 먼저 담로의 어원은 백제의 읍성을 의미하는 ‘다라’, ‘드르’를 음차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견해(이병도, 1976)가 있다. 또한 흙이나 돌로 집 안팎을 구분하는 순우리말인 ‘담’에서 비롯되었으며, ‘지방의 치성’인 담로는 백제의 전신인 마한 소국의 토성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유원재, 1997). 담로제의 실시 시기에 대해서는 ① 건국초기설(이병도, 1959), ② 근초고왕대설(노중국, 1985 ; 1991 ; 박현숙, 1990 ; 이도학, 1995), ③ 개로왕대설(차용걸, 1978 ; 김영심, 1990), ④ 무령왕대설(今西龍, 1934 ; 이기백, 1974 ; 정재윤, 1992) 등이 있다. 편제 방식에 대해서는 기존의 5부제에 새로이 복속한 지역에 한하여 담로제를 실시하여 이원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는 견해(이도학, 1990 ; 이용빈, 2002)가 있다. 반면에 동성왕대 직접 지배 지역인 성·촌과 외곽지역에 왕·후를 파견하는 이원적인 지배체제를 유지하다가 무령왕대에 이르러 전국을 대상으로 한 일원적인 통치체제로 전환하였다는 견해(정재윤, 1992)도 있다. 담로의 성격에 대해서는 담로는 지방관이 파견된 성과 그 주변의 몇 개 성·촌으로 구성되어 하나의 지배구역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노중국, 1985). 아울러 22담로에 웅거하였다는 ‘자제종족’을 중국 사서에 보이는 왕·후호와의 관련시켜 실제 혈연관계상 왕족, 귀족뿐만 아니라 재지수장층이나 고위관리들로 보는 견해(김영심, 1990), 왕·후제가 백제의 지방통치제도와 관련성이 없다고 보는 견해(양기석, 1984 ; 노중국, 1988)도 있지만 지방통치와 관련시켜 담로에 앞서 실시된 계기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坂元義種, 1978 ; 정재윤, 1992), 그리고 왕·후제와 담로제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김영심, 1997)도 있다. 어쨌든 담로제는 독자적인 제도인데, 백제 지방통치체제가 방-군-성 체제로 변화·발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적 형태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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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에서 군현이라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개의 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실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차지하고 지키게 하였다.
그 나라 사람의 모습은 키가 크며, 의복은 정결하다. 그 나라 가까이에는 왜가 있어서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이 꽤 있다. 지금의 [그] 언어와 옷차림은 대략 고구려와 비슷하다. [다만 백제는]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는 것과 절을 할 때 한쪽 다리를 펴지 않는 것은 [고구려와] 다르다. [백제에서는] 모자를 관이라 하고,주 003
번역주 003)
冠 襦曰 : 관과 관모는 신분을 상징하는 장신구로 지배자들의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금·은 또는 금동으로 만들어졌으며, 나라마다 다양한 형식이 제작·사용되었다. 공주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관장식이 각각 1쌍씩 출토되었다. 왕의 관장식은 금판에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를 맞새김[透彫]하여 제작하였으며, 무늬는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 금관에는 127개의 작은 달개[瓔珞]를 금실로 꼬아 달았다. 왕비의 관장식은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를 맞새김하였으나, 무늬가 좌우대칭이며 달개는 달지 않았다. 왕의 것에 비해 회화성이 강하며 불교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백제의 관모와 관식은 문헌자료 이외에 공주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서산 부장리, 나주 신촌리9호분, 고흥 안동 길두리, 익산의 입점리, 천안 용원리, 공주 수촌리와 화성 요리 등지에서 출토되었다. 나주 신촌리9호분 을관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복잡한 초화무늬 양식이 장식되어 있다. 공주 수촌리Ⅱ-4호 횡혈식석실분에서는 외관과 내관을 갖춘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특히 나팔 모양의 장식이 달린 관모는 공주 수촌리Ⅱ-1호 토광목곽묘, 익산 입점리고분, 합천 반계제석곽묘, 일본 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고분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이들 지역과의 교류를 짐작하게 한다(이상 이남석, 2008 ; 서정석, 2009 ; 이한상, 2009 ; 이훈, 2010 ; 국립공주박물관 편, 2010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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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고리를 복삼이라 하며, 바지를 잠방이라고 부른다.주 004
번역주 004)
呼帽曰冠 襦曰複衫 袴曰褌 : 백제의 옷에 관한 기록은 문헌자료 이외에 『양직공도』, 금동대향로, 무령왕릉 출토 유리동자상, 소조인물상 등에서 나온다. 백제 복식의 기본 구조는 저고리-바지제[襦袴制]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나(서미영, 2004), 시기와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상의는 『양서』와 『남사』 백제전에 복삼이라는 저고리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그 실체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고분벽화에 나타난 것처럼 길이가 엉덩이까지 내려오고, 소매는 좁으며, 곧은 깃에 여밈이 겹쳐지는 ‘直領交衽’식과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바지의 경우 『양서』와 『남사』 백제전에 ‘바지를 잠방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양직공도』에서 백제국사가 입은 바지는 통이 넓고 밑단이 선이 돌려져 있으며 부리는 묶지 않았다. 그리고 무령왕릉 출토 유리동자상에 나타난 바지는 폭이 넓고 부리는 묶여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양직공도』에 나타난 백제 사신의 복식은 고구려고분벽화 속의 복식과 유사하며, 문헌기록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백제복식사 연구에서 고구려와 비슷하다는 구절에 얽매여 상대적으로 자료가 많은 고구려의 것을 중심으로 하여 백제복식사를 이해할 때에는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이상 권영숙·이주영, 2004 ; 채금석, 2014 ; 라선정, 2016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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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의] 말은 중국 말이 섞여 있는데, 이 또한 진(秦)과 한(韓)이 남긴 풍속 때문이라고 한다.
[양] 중대통 6년(534)과 대동 7년(541)에 [백제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아울러 『열반경』주 005
번역주 005)
涅盤經 :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4 성왕 19년조에도 동일한 기록이 보인다. 『열반경(涅槃經)』에는 小乘과 大乘의 『열반경』이 있다. 소승의 『열반경』은 불타가 만년에 王舍城을 출발하여 최후를 맞게 된 쿠시나가라에 이르기까지의 여정과 그 사적·설법의 모양과 입멸 후의 화장·유골의 분배 등을 기술하고 있다. 대승의 『열반경』은 석가모니불이 입멸하기 전 1주야에 설법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그 사상은 佛身常住·悉有佛性·闡提成佛로 요약된다. 후에 이 열반경은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 佛性思想의 보편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사비 천도 이후 성왕의 개혁 추진과정에서 『열반경』이 중시되었다. 백제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계율뿐만 아니라 불성도 함께 강조되었다. 『열반경』은 석가불신앙과 연결되어 발달하였다. 『열반경』에서 강조하는 전륜사상의 모습이 당시 성행하고 있는 석가불 조성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석가불신앙은 불교를 통한 왕권의 신성성에 연결된다. 이러한 신성성은 다른 귀족세력과의 차별성으로 나타나 무령왕 소가계 집단의 배타적인 우월성을 과시하는 데 활용되었다(조경철, 2005 ; 길기태,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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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관한 불교 경전 및 해설서와 모시박사,주 006
번역주 006)
毛詩博士 : 『모시(毛詩)』는 중국 최고의 시집으로 『시경』[詩傳]을 말한다. 이 『시경』은 중국 한나라 때의 毛亨·毛長이 箋하였기 때문에 『모시』라고도 한다. 모시박사는 『시경』에 정통한 전문 학자를 말한다. 당시 백제에 초빙된 모시박사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이 시기에 백제는 양나라로부터 모시박사를 초빙한 것 외에 陳나라로부터 講禮博士 陸詡를 초빙하였고(『진서』 권33, 儒林 鄭灼傳附 陸詡傳), 무령왕은 五經博士 段楊爾와 高安茂를 왜에 파견하였다(『일본서기』 권17, 계체기 7년·10년). 이러한 사실은 백제의 유학에 대한 이해가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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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장인과 화가주 007
번역주 007)
幷工匠畫師等 敕並給之 : 백제가 양나라로부터 공장을 초빙하여 기술을 배운 것은 공주 지역에서 출토된 “梁官瓦爲師”라는 명문이 있는 벽돌로 입증된다. 성왕이 장인과 畵師 등을 양나라에서 초빙한 것은 사찰의 건립 및 불상의 장엄화를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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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요청하자 [양 고조는] 조칙을 내려 모두 보내주었다.주 008
번역주 008)
幷請涅盤等經義 … 敕並給之 : 『남사』 양무제본기, 대동 7년 是歲 및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19년조에도 이러한 기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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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태청 3년(549)에 [백제는] [양의] 수도가 도적에게 침범당한 것을 모르고 여전히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바쳤다.주 009
번역주 009)
太淸三年 … 猶遣使貢獻 : 『양서』 간문제 제기, 태청 3년 12월조 및 『책부원구』 권968 조공부와 『남사』 양무제 본기에서는 태청 3년 10월조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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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수도에] 이르러 도성과 궁궐이 황폐하고 훼손된 것을 보고 함께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에] 후경주 010
번역주 010)
侯景 : 후경의 자는 萬景이고 朔方人[雁門人이라는 설도 있다]이다. 힘이 세고 騎射를 잘하였다. 동위의 高歡 휘하에서 대장이 되었다가 고환이 죽자 소관 州軍을 이끌고 양 무제에게 투항하였다. 이에 양 무제는 그를 河南王으로 삼아 우대하였다. 뒤에 양과 동위의 국교가 호전되자 양나라를 배반, 강제 모병과 해방노예를 끌어모아 10만 군사를 만들어 반란을 일으켜 建康[현재의 중국 남경 동남쪽의 江寧]을 포위하고 臺城을 함락시키니 양 무제는 울분하여 죽었다. 후경은 簡文帝를 옹립하였다가 곧 폐하고 자립하여 漢帝라 칭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陳覇先·王僧辨에게 토평되고 말았다. 양나라는 이 난으로 사실상 멸망하고 강남지역은 궤멸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으며, 589년 수나라 문제에 의한 강남 정복의 원인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양서』 권56, 侯景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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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하여 그들을 잡아 가두었는데, 후경의 난이 평정되고 나서야 비로소 [백제에] 귀국할 수 있었다.주 011
번역주 011)
及景平 方得還國 : 양 무제가 죽은 후 후경은 簡文帝를 옹립하였으나, 551년 그를 죽이고 豫章王 蕭棟에게 선양을 받아 즉위하였다. 그러나 곧 형주자사 蕭繹이 후경을 토벌하고 552년 元帝로 즉위하였다. 이후 양나라는 급격하게 쇠퇴하여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후경의 난과 백제 사신의 태도를 보면 당시 백제와 양이 특별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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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주 001)
    固麻 : 한자 ‘熊’의 훈인 ‘곰’의 순우리말을 다시 한자어로 표기한 것으로, 웅진 즉 현재의 공주를 지칭하는 말이다. 『주서』 백제전의 ‘固馬城’, 『수서』 백제전의 ‘居拔城’, 『일본서기』 권14, 웅략기 21년조의 ‘久麻那利’가 모두 같은 말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檐魯 : 본서에 의하면 담로는 도성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중국의 군현과 같은 기능을 가진 것으로 기술되었다. 같은 내용이 “所治城曰固麻 謂邑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라 기록한 『양직공도』에 실려져 있다. 『양직공도』가 사신의 전언을 바탕으로 작성된 화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담로는 순백제어로, 도성과는 구별되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기능을 가진 백제의 지방통치 중심지인 읍을 담로라 일컬었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대에는 각 지방에 담로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곳에 왕의 ‘자제종족’을 파견하여 다스렸다고 한다. 담로제는 중국의 군현과 같다고 한 것으로 보아 중국식의 군현을 백제 이름으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담로제는 일정 지역의 거점이 되는 곳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형태인데, 일반적으로 각 지방에 수령을 파견하여 직접 지배하는 단계의 앞선 시기에 나타나는 지방통치방식이다. 무령왕대에는 담로제가 전국에 걸쳐 모두 22개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 통제력을 강화한 것이다. 여기서 담로의 통치 역할을 담당했던 ‘子弟宗族’은 주로 골족과 인족을 포함한 근친왕족 세력들로 보인다. 이는 근친왕족을 중용하여 왕권의 집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담로제는 본서와 『양직공도』에만 보이는 독자적인 기사로 인해 그 실시 시기와 배경, 편제 방식, 그리고 성격 등에 대해 많은 논란이 제기되어 왔다. 먼저 담로의 어원은 백제의 읍성을 의미하는 ‘다라’, ‘드르’를 음차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견해(이병도, 1976)가 있다. 또한 흙이나 돌로 집 안팎을 구분하는 순우리말인 ‘담’에서 비롯되었으며, ‘지방의 치성’인 담로는 백제의 전신인 마한 소국의 토성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유원재, 1997). 담로제의 실시 시기에 대해서는 ① 건국초기설(이병도, 1959), ② 근초고왕대설(노중국, 1985 ; 1991 ; 박현숙, 1990 ; 이도학, 1995), ③ 개로왕대설(차용걸, 1978 ; 김영심, 1990), ④ 무령왕대설(今西龍, 1934 ; 이기백, 1974 ; 정재윤, 1992) 등이 있다. 편제 방식에 대해서는 기존의 5부제에 새로이 복속한 지역에 한하여 담로제를 실시하여 이원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는 견해(이도학, 1990 ; 이용빈, 2002)가 있다. 반면에 동성왕대 직접 지배 지역인 성·촌과 외곽지역에 왕·후를 파견하는 이원적인 지배체제를 유지하다가 무령왕대에 이르러 전국을 대상으로 한 일원적인 통치체제로 전환하였다는 견해(정재윤, 1992)도 있다. 담로의 성격에 대해서는 담로는 지방관이 파견된 성과 그 주변의 몇 개 성·촌으로 구성되어 하나의 지배구역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노중국, 1985). 아울러 22담로에 웅거하였다는 ‘자제종족’을 중국 사서에 보이는 왕·후호와의 관련시켜 실제 혈연관계상 왕족, 귀족뿐만 아니라 재지수장층이나 고위관리들로 보는 견해(김영심, 1990), 왕·후제가 백제의 지방통치제도와 관련성이 없다고 보는 견해(양기석, 1984 ; 노중국, 1988)도 있지만 지방통치와 관련시켜 담로에 앞서 실시된 계기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坂元義種, 1978 ; 정재윤, 1992), 그리고 왕·후제와 담로제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김영심, 1997)도 있다. 어쨌든 담로제는 독자적인 제도인데, 백제 지방통치체제가 방-군-성 체제로 변화·발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적 형태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冠 襦曰 : 관과 관모는 신분을 상징하는 장신구로 지배자들의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금·은 또는 금동으로 만들어졌으며, 나라마다 다양한 형식이 제작·사용되었다. 공주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관장식이 각각 1쌍씩 출토되었다. 왕의 관장식은 금판에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를 맞새김[透彫]하여 제작하였으며, 무늬는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 금관에는 127개의 작은 달개[瓔珞]를 금실로 꼬아 달았다. 왕비의 관장식은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를 맞새김하였으나, 무늬가 좌우대칭이며 달개는 달지 않았다. 왕의 것에 비해 회화성이 강하며 불교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백제의 관모와 관식은 문헌자료 이외에 공주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서산 부장리, 나주 신촌리9호분, 고흥 안동 길두리, 익산의 입점리, 천안 용원리, 공주 수촌리와 화성 요리 등지에서 출토되었다. 나주 신촌리9호분 을관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복잡한 초화무늬 양식이 장식되어 있다. 공주 수촌리Ⅱ-4호 횡혈식석실분에서는 외관과 내관을 갖춘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특히 나팔 모양의 장식이 달린 관모는 공주 수촌리Ⅱ-1호 토광목곽묘, 익산 입점리고분, 합천 반계제석곽묘, 일본 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고분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이들 지역과의 교류를 짐작하게 한다(이상 이남석, 2008 ; 서정석, 2009 ; 이한상, 2009 ; 이훈, 2010 ; 국립공주박물관 편, 2010 등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04)
    呼帽曰冠 襦曰複衫 袴曰褌 : 백제의 옷에 관한 기록은 문헌자료 이외에 『양직공도』, 금동대향로, 무령왕릉 출토 유리동자상, 소조인물상 등에서 나온다. 백제 복식의 기본 구조는 저고리-바지제[襦袴制]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나(서미영, 2004), 시기와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상의는 『양서』와 『남사』 백제전에 복삼이라는 저고리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그 실체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고분벽화에 나타난 것처럼 길이가 엉덩이까지 내려오고, 소매는 좁으며, 곧은 깃에 여밈이 겹쳐지는 ‘直領交衽’식과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바지의 경우 『양서』와 『남사』 백제전에 ‘바지를 잠방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양직공도』에서 백제국사가 입은 바지는 통이 넓고 밑단이 선이 돌려져 있으며 부리는 묶지 않았다. 그리고 무령왕릉 출토 유리동자상에 나타난 바지는 폭이 넓고 부리는 묶여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양직공도』에 나타난 백제 사신의 복식은 고구려고분벽화 속의 복식과 유사하며, 문헌기록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백제복식사 연구에서 고구려와 비슷하다는 구절에 얽매여 상대적으로 자료가 많은 고구려의 것을 중심으로 하여 백제복식사를 이해할 때에는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이상 권영숙·이주영, 2004 ; 채금석, 2014 ; 라선정, 2016 등 참조). 바로가기
  • 번역주 005)
    涅盤經 :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4 성왕 19년조에도 동일한 기록이 보인다. 『열반경(涅槃經)』에는 小乘과 大乘의 『열반경』이 있다. 소승의 『열반경』은 불타가 만년에 王舍城을 출발하여 최후를 맞게 된 쿠시나가라에 이르기까지의 여정과 그 사적·설법의 모양과 입멸 후의 화장·유골의 분배 등을 기술하고 있다. 대승의 『열반경』은 석가모니불이 입멸하기 전 1주야에 설법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그 사상은 佛身常住·悉有佛性·闡提成佛로 요약된다. 후에 이 열반경은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 佛性思想의 보편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사비 천도 이후 성왕의 개혁 추진과정에서 『열반경』이 중시되었다. 백제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계율뿐만 아니라 불성도 함께 강조되었다. 『열반경』은 석가불신앙과 연결되어 발달하였다. 『열반경』에서 강조하는 전륜사상의 모습이 당시 성행하고 있는 석가불 조성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석가불신앙은 불교를 통한 왕권의 신성성에 연결된다. 이러한 신성성은 다른 귀족세력과의 차별성으로 나타나 무령왕 소가계 집단의 배타적인 우월성을 과시하는 데 활용되었다(조경철, 2005 ; 길기태, 2006). 바로가기
  • 번역주 006)
    毛詩博士 : 『모시(毛詩)』는 중국 최고의 시집으로 『시경』[詩傳]을 말한다. 이 『시경』은 중국 한나라 때의 毛亨·毛長이 箋하였기 때문에 『모시』라고도 한다. 모시박사는 『시경』에 정통한 전문 학자를 말한다. 당시 백제에 초빙된 모시박사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이 시기에 백제는 양나라로부터 모시박사를 초빙한 것 외에 陳나라로부터 講禮博士 陸詡를 초빙하였고(『진서』 권33, 儒林 鄭灼傳附 陸詡傳), 무령왕은 五經博士 段楊爾와 高安茂를 왜에 파견하였다(『일본서기』 권17, 계체기 7년·10년). 이러한 사실은 백제의 유학에 대한 이해가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7)
    幷工匠畫師等 敕並給之 : 백제가 양나라로부터 공장을 초빙하여 기술을 배운 것은 공주 지역에서 출토된 “梁官瓦爲師”라는 명문이 있는 벽돌로 입증된다. 성왕이 장인과 畵師 등을 양나라에서 초빙한 것은 사찰의 건립 및 불상의 장엄화를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8)
    幷請涅盤等經義 … 敕並給之 : 『남사』 양무제본기, 대동 7년 是歲 및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19년조에도 이러한 기사가 나온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太淸三年 … 猶遣使貢獻 : 『양서』 간문제 제기, 태청 3년 12월조 및 『책부원구』 권968 조공부와 『남사』 양무제 본기에서는 태청 3년 10월조에 나온다. 바로가기
  • 번역주 010)
    侯景 : 후경의 자는 萬景이고 朔方人[雁門人이라는 설도 있다]이다. 힘이 세고 騎射를 잘하였다. 동위의 高歡 휘하에서 대장이 되었다가 고환이 죽자 소관 州軍을 이끌고 양 무제에게 투항하였다. 이에 양 무제는 그를 河南王으로 삼아 우대하였다. 뒤에 양과 동위의 국교가 호전되자 양나라를 배반, 강제 모병과 해방노예를 끌어모아 10만 군사를 만들어 반란을 일으켜 建康[현재의 중국 남경 동남쪽의 江寧]을 포위하고 臺城을 함락시키니 양 무제는 울분하여 죽었다. 후경은 簡文帝를 옹립하였다가 곧 폐하고 자립하여 漢帝라 칭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陳覇先·王僧辨에게 토평되고 말았다. 양나라는 이 난으로 사실상 멸망하고 강남지역은 궤멸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으며, 589년 수나라 문제에 의한 강남 정복의 원인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양서』 권56, 侯景傳 참조. 바로가기
  • 번역주 011)
    及景平 方得還國 : 양 무제가 죽은 후 후경은 簡文帝를 옹립하였으나, 551년 그를 죽이고 豫章王 蕭棟에게 선양을 받아 즉위하였다. 그러나 곧 형주자사 蕭繹이 후경을 토벌하고 552년 元帝로 즉위하였다. 이후 양나라는 급격하게 쇠퇴하여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후경의 난과 백제 사신의 태도를 보면 당시 백제와 양이 특별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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