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뢰왕 유뢰(類牢)가 반란을 일으키자 숙종이 월수(越嶲), 익주(益州) 등의 이인과 한인을 모병하여 토벌함
이전에 서부도위 광한인(廣漢人) 정순(鄭純)이 정치를 행함이 깨끗하였다. 오랑캐[夷貊]에게 교화를 행하니, 군장들이 감동하며 숭모하여 모두 진귀한 토산품을 헌상하고 그 덕을 칭송하였다. 천자가 가상히 여겨 그를 영창태수로 삼았다. 정순은 애뢰인과 약조하였는데, 읍호(邑豪)는 매년 포관두의(布貫頭衣)주 0012령(領),주 002소금 1곡(斛)을 내도록 하였다. 이를 상설적인 부(賦)로 하니, 이인(夷人)들의 사회가 안심하였다. 정순은 도위와 태수로 10년을 지내고 관에서 물러났다. 건초(建初) 원년(76, 章帝) 애뢰왕 유뢰(類牢)가 수령(守令)과 분쟁이 벌어져 마침내 수령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수당성(雟唐城)을 공격하니, 태수 왕심(王尋)이 엽유(楪楡)로 도망하였다. 애뢰인 3,000여 명이 박남(博南)을 공격하여 민가를 불질렀다. 숙종(肅宗)이 월수(越雟)와 익주, 영창의 이인(夷人)과 한인(漢人) 9천 명을 모병하고 징발하여 토벌하였다. 이듬해 봄 사룡현(邪龍縣)
주 003곤명이(昆明夷), 노승(鹵承) 등이 모병에 응하여 종족 사람들을 이끌고 군병(郡兵)과 함께 박남에 있는 유뢰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그를 참수하였다. (유뢰의) 머리가 낙양으로 전해지자, 노승에게 비단 1만 필을 하사하고 파로방읍후(破虜傍邑侯)로 봉하였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색인어
- 이름
- 정순(鄭純), 정순, 정순, 유뢰(類牢), 왕심(王尋), 숙종(肅宗), 노승(鹵承), 유뢰, 유뢰, 노승, 파로방읍후(破虜傍邑侯)
- 지명
- 광한, 수당성(雟唐城), 엽유(楪楡), 박남(博南), 월수(越雟), 익주, 영창, 사룡현(邪龍縣), 박남, 낙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