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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헤이안경 고로칸

平安京 鴻臚館
  • 저필자
    정동준(충남대학교)
  • 시대
    발해
  • 원소장처
    京都府 京都市 下京区 西新屋敷揚屋町 (東鴻臚館)/ 京都府 京都市 下京区 朱雀堂ノ口町 (西鴻臚館)
  • 시대
    발해
  • 유형
    생활
유적개관
평안경(平安京) 천도(遷都)가 연력13년(延暦13年, 794年)에 있었고, 평안경(平安京)의 홍려관(鴻臚館)은 3번째로 설립된 가장 늦은 객관이다. 당초에는 주작대로(朱雀大路) 남단(南端)의 나성문(羅城門) 양쪽 사이에 설치되었었다. 동사(東寺)·서사(西寺)의 건립(建立)을 위해 홍인연간(弘仁年間, 810年-824年)에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지나 칠조(七条)에 동홍려관(東鴻臚館)·서홍려관(西鴻臚館)으로 이치되었다. 현재(現在) 경도부(京都府) 경도시(京都市) 하경구(下京区), JR 단파구역(丹波口駅)의 남동부근(南東附近)에 위치한다. 천장10년(天長10年, 833年)의 『영의해(令義解)』에 나오는 홍려관(鴻臚館)은 평안경(平安京)의 홍려관(鴻臚館)을 가리킨다. 평안경(平安京) 홍려관(鴻臚館)은 발해사(渤海使)를 영빈(迎賓)하였다. 「북로(北路)」로 내방(来訪)하던 발해사(渤海使)는 능등객원(能登客院)(石川県羽咋郡志賀町)이나 송원객원(松原客院)(福井県敦賀市)을 경유(経由)하여 왔다.
해설
현재 교토[京都]부(府) 교토시 시모교[下京]구 JR 단바구치[丹波口] 역의 남동쪽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연력(延曆) 13년(794)에 헤이안교[平安京](현재의 교토[京都])로 천도한 후 건립되었다. 헤이안교의 홍려관(鴻臚館)은 역대 일본의 객관(客館) 중 츠쿠시[筑紫](현재의 후쿠오카[福岡])·나니와[難波](현재의 오사카[大阪])에 이어 3번째로 설립되었다. 당초에는 주작대로(朱雀大路) 남단의 나성문(羅城門) 양쪽 사이에 설치되었으나, 동사(東寺)·서사(西寺)의 건립을 위해 홍인(弘仁) 연간(810∼824)에 주작대로를 지나 7조(條)에 동홍려관(東鴻臚館)·서홍려관(西鴻臚館)으로 옮겨졌다.
천장(天長)10년(833)의 『영의해(令義解: 일본 율령의 공식 주석서)』에 나오는 홍려관은 헤이안교의 홍려관을 가리킨다. 헤이안교의 홍려관은 주로 발해의 사신을 맞이하는 객관으로 사용되었다. 북쪽 길로 방문하던 발해의 사신은 주로 노토[能登](현재의 이시카와[石川]현)객원(客院)이나 마츠바라[松原](현재의 후쿠이[福井]현) 객원을 경유하여 헤이안교로 왔다. 헤이안교에 도착한 후에는 홍려관에서 입조(入朝)하는 의례를 행하고 나서, 내장료(內藏寮: 왕실 재정 담당), 도성 내의 사람, 도성 밖의 사람 순서로 교역을 행하였다. 그 후 발해 선왕(宣王)대(818∼830)에 양국 관계에 변화가 생겨 교역이 줄어들자, 동홍려관은 승화(承和) 6년(839)에 전약료(典藥寮: 의약 담당) 소관의 어약원(御藥園: 약초 등의 재배지)으로 바뀌었다. 이후 926년에 발해가 멸망하자, 시설의 필요성이 줄어들어 가마쿠라[鎌倉] 시대(1185∼1333) 즈음에 사라졌다. 일설에는 연희(延喜) 20년(920) 즈음에 폐지되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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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안경 고로칸 자료번호 : isea.d_0003_0020_0030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