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왕웅이 진나라(秦) 이래 한과 흉노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흉노를 복속하기 힘든 예를 설명함

  • 국가
    흉노(匈奴)
[중국은] 진시황(秦始皇) 주 001
각주 001)
秦始皇(전259∼전210) : 이름은 嬴政이다. 秦 莊襄王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秦王으로 즉위하였고, 39세에 稱帝하였으며 37년간 在位하였다. 최초의 統一王朝 황제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황제로 즉위한 후, 蒙恬을 보내 匈奴를 공격하고 河南地를 수복하고 匈奴를 陰山산맥 以北으로 몰아냈다. 그리고 서쪽의 臨洮(현재 감숙성 岷縣)에서 동쪽의 遼東에 이르기까지 만리장성을 연결하였다. 또한 남으로는 百越을 점령하고 桂林, 象郡, 南海郡 등을 세웠다. 처음 秦朝가 天下를 통일하였을 때는 36개 郡이었으나, 始皇帝의 재위 말기에는 40여 개로 늘어났다. 그럼으로써 ‘中國’뿐 아니라 匈奴와 越人 등 ‘四夷’ 지역에도 郡縣을 설치하는 세계[天下] 제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닫기
의 굳셈과 몽염(蒙恬) 주 002
각주 002)
蒙恬(?∼전210) : 秦代의 名將이다. 先代는 齊나라 사람인데, 조부 蒙驁가 秦으로 들어와 昭王을 섬겼고 누차 戰功을 세웠다. 부친 蒙武는 楚를 멸하였다. 이와 같은 장군의 가문 출신으로 몽염은 軍將이 되어 齊國을 대파하였다. 秦始皇의 명을 받아 六國을 통일한 이후, 匈奴를 축출하고 河南地를 수복하였으며 長城 수축을 감독하였다. 上郡에서 10여년 간 주둔하였는데 진시황이 사망한 뒤 趙高 등의 모함을 받아 죽었다.
닫기
의 위세, 그리고 갑옷 입은 병사 40여 만을 가지고도,주 003
각주 003)
기원전 215년 진시황은 蒙恬을 보내 匈奴를 정벌했다. 『史記』 권6(「秦始皇本紀」 : 252)에 따르면, 이때 군사 30만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흉노 정벌의 원인에 대하여 後漢의 유학자 鄭玄은 “秦을 멸망시킬 자는 胡이다(亡秦者胡也)”라는 『錄圖書』의 기록이 二世皇帝 胡亥를 겨냥하는 것인 줄 모르고 북방의 胡(즉 匈奴)를 공격하였다고 한다(『史記』 권6 : 253). 하지만 이는 秦朝가 흉노와 같은 외부 요인보다 내부의 문제로 멸망했음을 강조하는 漢代 儒家들의 의식을 반영한다는 지적도 있다(쓰루마 가즈유키, 2004 : 163∼164).
닫기
서하(西河) 주 004
각주 004)
西河 : 현재의 山西省과 陝西省에서 남북으로 흐르는 黃河를 지칭한다. 이곳은 夏와 商 이래 山東 지역 국가들의 都城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기 때문에, ‘西河’라고 불렸다. 『史記』 권111(「衞靑列傳」 : 2924)에 “車騎將軍 衞靑이 西河를 지나”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西河”에 대하여 『史記正義』는 “雲中郡의 西河”라고 풀이하였다. 한편 일역본(內田吟風, 1971 : 121)에서는 황하의 서쪽 지대인 오르도스 지역을 지칭하였다. 또한 이곳에는 武帝 元朔 4년(전125)에 西河郡이 설치되었는데, 치소는 현재 내몽고 자치구에 있는 平定縣이었다.
닫기
를 감히 엿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장성(長城)을 쌓아주 005
각주 005)
長城 : ‘만리’장성은 당시의 척도로 약 5천km에 달한다. 長城 축조의 기사는 『史記』 권6 「秦始皇本紀」에서 진시황 33년, 즉 秦始皇 사망 4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나온다. 따라서 이 짧은 시기에 秦始皇이 長城을 완성하였을 가능성은 없어 보이고, 대신 戰國秦이 축조한 오르도스 장성과 陰山長城, 그리고 戰國시기 趙, 燕이 축조한 장성을 연결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 밖에 秦始皇시대 長城의 축조가 寧夏 回族自治區 지역에 賀蘭山 長城을 새로 축조한 일을 의미하는 것인지 여부도 논의되고 있다(쓰루마 가즈유키, 2004 : 174).
닫기
[과 흉노 사이의] 경계를 삼았습니다. 이 처음 발흥하였을 때, 고조(高祖) 주 006
각주 006)
漢高祖 劉邦(전256∼전195 ; 재위 전202∼전195) : 前漢의 開國 황제이다.
닫기
의 위엄과 신령, 30만의 [군(軍)]중(衆)을 가지고도주 007
각주 007)
中華書局本에는 “以高祖之威靈 三十萬衆困於平城”으로 끊었다. 하지만 그에 따르지 않고 “以高祖之威靈, 三十萬衆, 困於平城”으로 끊어 해석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앞에 “以 …… 蒙恬之威, 帶甲四十餘萬, 然不敢窺西河”의 문장과 동일한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닫기
평성(平城) 주 008
각주 008)
平城 : 秦代 설치한 縣의 이름으로 漢에서도 따랐다. 현재에도 古城이 남아 있는데, 그 위치는 山西省 大同市의 동북쪽이다.
닫기
에서 곤궁에 처하였습니다. 병사들 가운데 일부는 7일간이나 먹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꾀 많은 책사와 견고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신하가 매우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간에서 언급을 꺼릴 만한 [추악한] 것이었습니다.주 009
각주 009)
顔師古는 平城 탈출의 계책이 醜惡해서 世間에서 언급을 피했다고 풀이하였다.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기원전 200년 劉邦은 漢軍 32만을 동원하여 匈奴를 공격하였다. 冒頓單于가 지휘하는 匈奴의 騎兵 40만은 平城 부근의 白登에서 7일간 漢軍을 포위하였다. 劉邦은 陳平의 계책에 따라, 匈奴 측에 뇌물과 閼氏를 바치는 조건으로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원전 198년 겨울 漢은 劉敬의 건의에 따라 匈奴와 정식으로 和親의 約을 맺었다. 이 約은 漢이 匈奴에게 公主의 出嫁, 歲幣의 공급을 약속하고 쌍방이 兄弟의 盟約을 맺으며, 匈奴는 한의 변경을 침공하지 말 것 등 4개 항목으로 이루어졌다. 이 내용은 漢측의 열세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간에서 언급을 회피할 만큼 ‘醜惡’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漢文帝 시기 저명한 文學之士 賈誼는 이 점을 비판하여 “天下의 형세는 지금 거꾸로 되어 있다(天下之勢方倒縣)”고 하였다(『漢書』 권48 「賈誼傳」 : 2240). 한편 이러한 約을 통해 형성된 ‘和親’ 관계는 武帝 이전 시기 국제관계의 특징적인 형태로서 南越, 朝鮮 등의 관계에도 적용되었다. 漢 측에서는 이들에게 不可侵을 요구하고, 非漢 측에서는 반대급부로 歲幣를 요구하였다(김한규, 1982 : 197∼201).
닫기
또한 고황후(高皇后) 주 010
각주 010)
高皇后, 즉 呂后(?∼전180) : 劉邦의 부인으로 이름은 呂雉이다. 劉邦이 稱帝한 뒤, 皇后가 되었다. 漢에 위협이 될 만한 韓信과 彭越 등의 異姓諸侯王을 숙청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닫기
는 일찍이 흉노에게 분개하여, 신료들을 조정에 모아 [대책을] 논의하도록 하였습니다.주 011
각주 011)
惠帝와 高皇后 때 冒頓單于는 점차 교만해져 남편을 잃은 高皇后의 처지를 조롱하는 편지를 보내 高皇后를 大怒하게 하였다. 이에 丞相 陳平과 樊噲, 季布 등을 불러 匈奴 使者를 참수하고, 匈奴 정벌이 가능한지 의논하도록 하였다. 惠帝 3년(전192)의 일이다(『漢書』 권94 「匈奴」上 : 2754∼2755).
닫기
[이 자리에서] 번쾌(樊噲) 주 012
각주 012)
樊噲(?∼전189) : 沛縣 사람이다. 어려서 개 잡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秦末 劉邦이 거병하자 舍人으로 그를 따랐으며 누차 戰功을 세워 賢成君이란 작위를 받았다. 鴻門의 宴會 자리에서 范增이 유방을 죽이려 하자 劉邦을 구해냈다. 劉邦이 漢王이 되었을 때, 臨武侯로 책봉되었다. 楚漢 전쟁 때 여러차례 항우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漢 건립 이후 將軍, 相國 등을 역임하면서 陳豨, 韓信 등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舞陽侯로 책봉되었다. 惠帝 6년에 죽었다.
닫기
는 10만의 무리를 가지고 흉노 안을 휘젓고 돌아다니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만, 계포(季布) 주 013
각주 013)
季布 : 彭城 사람이다. 어려서 俠客으로 자임하면서 法度를 지키지 않았다. 項羽가 西楚覇王으로 自立한 뒤, 彭城에 이르렀을 때, 季布를 장수로 임명하였다. 季布는 楚漢 전쟁 동안 여러 차례 劉邦을 곤경에 빠뜨렸다. 漢朝 건립 이후, 劉邦은 특별히 季布를 체포하려 하였으나, 季布는 大俠 朱家의 도움을 받아 사면을 받고 나아가 郞中으로 임명되었다. 惠帝 때에 中郞將이 되었는데, 樊噲의 匈奴 정벌 기도를 막았다. 文帝代에는 河東郡守를 역임했다. 御史大夫로 발령받았으나 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민간에서는 “黃金 1千斤을 얻는 것이 季布로부터 한 차례 인정을 받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말이 돌 정도로 그 이름이 높았다.
닫기
는 “번쾌는 참수(斬首)할 만합니다. 망령되게 [황후의] 뜻에 아첨하여 따르려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대신들은 임시방편으로 [흉노의 비위에 맞는]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런 다음 흉노와 얽힌 일도 풀렸고, 중국의 근심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효문제 주 014
각주 014)
漢文帝 劉恒(전203∼전157 ; 재위 전180∼전157) : 漢高祖 劉邦의 아들이다. 呂后가 사망한 뒤 옹립되어 23년간 在位하였다. 다음 황제 景帝(재위 : 전157∼전141)와 함께 이른바 ‘文景之治’의 치세를 이루었다. 文帝는 南越을 설득하여 歸附시켰고, 匈奴와 和親을 맺는 등 유화적인 세계 정책을 추진했다. 匈奴가 변경을 침공해도 반격하지 않았다.
닫기
때에는 흉노가 북변을 침략하여 해치고, [흉노의] 척후 기병(候騎)이 옹(雍) 주 015
각주 015)
雍 : 『漢書』 권28상 「地理志」(1532)에 따르면 “九州”의 하나인 雍州는 “黑水․西河惟雍州”라고 그 범위가 설명되고 있는데, 대개 현재의 陝西省과 그 서쪽의 일부 지역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西河’는 현재 山西省과 陝西省 사이를 흐르는 黃河를 뜻하며, ‘黑水’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현재 甘肅省의 張掖河, 黨河, 혹은 靑海省의 大通河 등을 말한다.
닫기
감천(甘泉)[산] 주 016
각주 016)
甘泉 : 甘泉山을 말한다. 현재 陝西省 淳化縣 서북에 있다. 漢武帝 때에 이곳에 甘泉宮을 지었다.
닫기
에까지 이르러 경사(京師) [사람들이] 크게 놀랐습니다. [이에 은] 세 명의 장군을 일으켜 세류(細柳) 주 017
각주 017)
細柳 : 옛 지명으로 어디를 지칭하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① 현재의 陝西省 咸陽市의 서남쪽으로 渭水의 북쪽 지대를 말한다. ② 현재의 陝西省 長安縣의 서남쪽을 말한다. 『漢書』에서는 “柳市”라고 지칭하는 곳으로 渭水보다 남쪽에 있다. 『漢書』 권4(「文帝紀」 : 131)에 細柳에 대한 주석이 있다. 如淳은 “長安의 細柳倉이 渭水 북쪽에 있다. 石徼에 가깝다”고 했는데 이는 ①의 細柳이다. 반면 張揖은 “昆明池 남쪽에 있다. 지금의 柳市를 말한다”고 했고 顔師古는 “細柳는 渭水 북쪽에 있지 않다. 張揖의 설이 맞다”고 했다. 이는 ②의 細柳, 즉 柳市를 말한다. 『史記索隱』에서도 細柳가 渭水 북쪽에 있다는 설을 비판하고 있다(『史記』 권10 「孝文本紀」 : 432). 하지만 원문에서 周亞夫가 주둔한 곳은 ①의 細柳, 즉 渭河의 북단을 말한다는 지적도 있다.
닫기
, 극문(棘門)주 018
각주 018)
棘門 : 현재의 陝西省 咸陽縣의 동북 지역에 있으며 본래 秦의 宮門이었다. 宮門의 방어를 위해 가시나무를 걸쳐놓았기 때문에 棘門이란 이름이 생겼다. 『括地志』에는 棘門이 渭水의 북쪽 10여 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
닫기
, 패상(覇上)주 019
각주 019)
覇上 : 현재 섬서성 西安市 동쪽의 白鹿原 북쪽 지역으로 고대로부터 咸陽과 長安 부근의 군사요지였다. 應劭는 覇上이 “地名이다. 長安의 동쪽 30里 지점에 있다. 고대에는 滋水라고 하였으나 秦穆公이 覇水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였으며, 顔師古는 “覇水의 위에 있기 때문에 覇上이라고 했다. 지금의 覇頭를 말한다”고 하였다(『漢書』 권1상 「高帝紀」 : 23).
닫기
에서 대비하게 하였습니다만주 020
각주 020)
漢文帝 후원 6년(전158)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漢書』에 따르면 당시 3만의 匈奴 騎兵이 上郡을 공격하였고, 또 다른 3만의 기병은 雲中郡을 공격했다. 이에 漢은 河內太守 周亞夫를 將軍으로 삼아 細柳에 주둔하게 하였으며, 宗正 劉禮는 將軍으로 覇上에, 祝茲侯 徐厲는 將軍으로 棘門에 각각 주둔하게 하였다(『漢書』 권4 「文帝紀」 : 130∼131).
닫기
몇 개월 뒤 철수하고 말았습니다.주 021
각주 021)
일역본에서는 漢軍이 철수한 것으로 해석하였으나(內田吟風, 1971 : 122), 현대 한어본에서는 匈奴 부대가 철수하였다고 해석했다(安平秋, 2004 : 1901). 어느 일방만이 철수했을 리 없겠으나, 『漢書』 권40(「周亞夫傳」 : 2058)의 “月餘, 三軍皆罷”라는 기사에 따라 漢軍이 철수한 것으로 번역하였다. 또한 논지의 전개가 匈奴에 대한 중국의 열세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漢兵의 철수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닫기
효무제(孝武帝)는 즉위한 뒤 마읍(馬邑) 주 022
각주 022)
馬邑 : 『漢書』 권28하 「地理志」에 따르면 馬邑은 鴈門郡 관할이다(1621). 顔師古는 “晉『太康地記』에 의하면, 秦代 이 지역에 城을 쌓았는데 번번이 무너졌다. 그런데 어느 말이 반복해서 [특정지역을] 빙빙 돌며 뛰어다니자, 父老가 특이하게 생각하여 그곳에 築城하였고, 그 이름을 馬邑이라고 했다”고 하였다. 漢初에는 韓王信 封國의 수도였고 匈奴에 속했다가 다시 속하였으며 王莽代에는 章昭라고 불렀다. 현재 山西省 朔縣에 해당된다.
닫기
의 계략을 세워 흉노를 유인하고자 하였습니다. 한안국(韓安國) 주 023
각주 023)
韓安國(?∼전127) : 前漢의 大臣으로 梁國 成安 사람이다. 처음 梁孝王 아래에서 中大夫로 있었다. 吳楚七國의 난 때, 반란군이 梁地를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武帝代 徵召되어 北地都尉, 大司農, 御史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元光 2년(전133) 馬邑에서 匈奴를 습격하였지만, 소득이 없었다. 元朔 2년(전127) 材官將軍으로 임명되어다. 이때 匈奴의 위험이 사라졌다고 軍屯 폐지를 건의하였다가 匈奴가 대거 침입하여 패한 일이 발생하였다. 그 뒤 右北平으로 任地를 옮겼다가 근심 속에 사망하였다.
닫기
으로 하여금 30만의 무리를 이끌고 유리한 지역주 024
각주 024)
“墬”는 “地”의 古字이다.
닫기
에 숨어 공격하고자 하였습니다만, 흉노는 그 음모를 깨닫고 도주하여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고 군사를 고생시켰습니다. 한 명의 오랑캐도 발견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선우의 얼굴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주 025
각주 025)
馬邑 사건의 줄거리와 의의는 다음과 같다. 漢武帝는 즉위한 이후에도 祖母 竇太后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였으나, 建元 6년(전135) 竇太后가 사망하자 독자적인 행동을 개시하였고 그 최초의 일이 匈奴 문제였다. 이해 무제는 匈奴 정벌 문제를 朝議에 붙였으나 御史大夫 韓安國 등의 반대에 부딪혀 開戰論은 부결되었다. 그 이듬해 元光 1년(전134) 馬邑 사람 聶壹이 開戰의 계책을 올렸고 그 다음 해 元光 2년(전133) 武帝는 다시 朝議를 소집하여 30만 대군의 출병 계획을 확정지었다. 흉노의 軍臣單于는 聶壹의 말에 속아 10여만 기를 이끌고 馬邑으로 향했으나 도중에 漢의 계획을 눈치채고 철수하였다. 이 일로 聶壹의 계책을 중앙에 보고했던 主戰論者 王恢는 문책을 받고 獄死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漢初 이래 유지되었던 한과 匈奴 사이의 화친관계는 결정적으로 파탄났고 그 뒤 쌍방은 본격적인 전쟁관계로 접어들었다(西嶋定生, 2002 : 153∼154). 이처럼 漢․匈奴 관계의 악화에는 漢武帝 개인의 의도가 크게 작용하였지만, 匈奴 單于의 정치적 지도력은 중국의 皇帝만큼 공고하지 못했고, 따라서 화친관계는 匈奴의 귀족 구성원들의 자의적 약탈에 의하여 늘 파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컸던 점(디코스모, 2005 : 297∼298)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닫기
그 뒤 [무제께서는] 사직(社稷)을 위한 계책을 신중히 생각하시고 크게 만년을 이어갈 대책을 꾀하셨습니다. 이에 수십만의 군사를 크게 일으키고 위청(衞靑) 주 026
각주 026)
衞靑(?∼전105) : 漢武帝 시기 對匈奴의 전쟁을 지휘한 名將이다. 字는 仲卿이며 河東 平陽 사람이다. 그의 부친이 縣吏로 平陽公主의 집안에 給事하다가 婢女와 私通하여 衞靑을 낳았다. 衞靑은 同母 異父姊인 衞子夫가 武帝에게 得幸하자 그 역시 武帝의 부름을 받아 建章監, 侍中, 太中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元光 6년(전129) 車騎將軍으로 임명된 뒤, 7차에 걸쳐 匈奴 원정에 나섰다. 그 결과 河南地를 수복하여 朔方郡을 설치하였고, 秦代의 邊塞를 수선하여 長安 防備를 충실히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長平侯에 임명되고 食邑 3천 8백호를 받았다. 元狩 4년(전119)에는 定襄塞 밖 천여 리까지 원정하여 匈奴 伊穉斜單于를 포위 공격하였다. 이후 한동안 한과 匈奴 사이에는 더 이상의 전쟁이 없었다. 武帝는 衞靑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특별히 大司馬를 신설하여 그를 大司馬 大將軍으로 임명하였다. 衞靑은 비록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朝政에 간여하지 않고, 겸손한 처신으로 인심을 얻었다. 元封 6년(전105)에 사망했다.
닫기
곽거병(霍去病) 주 027
각주 027)
霍去病(?∼전117) : 漢武帝 시기 對匈奴 전쟁을 이끈 名將이다. 大將軍 衞靑의 생질로 그와 명성을 나란히 했다. 모친은 衞子夫의 손위 누이였다. 18세에 霍去病은 皇后의 인척으로 侍中이 되었다. 元朔 6년(전123) 大將軍 衞靑을 따라 匈奴 전쟁에 참가했다. 元狩 2년(전121) 驃騎將軍이 되었다. 그 뒤 전후 6차에 걸쳐 匈奴를 공격하였다. 특히 元狩 2년(121)의 匈奴 공격 결과 匈奴의 渾邪王이 4만을 이끌고 來降하였다. 이때 5개의 屬國을 세워 그 무리를 안치하였다. 그리고 河西 지역에 武威, 張掖, 酒泉, 敦煌 등 4郡을 세웠다. 元狩 4년(전119)의 전투 때에는 몽골의 울란바토르와 바이칼호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돌아와서 大司馬 驃騎將軍으로 추대되었다. 武帝代 발생한 戾太子 사건으로 衞氏는 몰락하지만, 霍去病의 동생 霍光은 武帝 사후 정권을 장악한다. 霍氏 일족의 권력 장악은 宣帝代까지 지속되었다.
닫기
으로 하여금 군대를 지휘하도록 하여 10년 전후의 시간이주 028
각주 028)
원문 “前後十餘年”은 대략 본격적인 對匈奴 전쟁이 시작된 元光 6년(전129)부터 일단락되는 元狩 4년(전119)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닫기
[지났습니다.] 이에 [한군은] 서하(西河)를 넘어 대사막(大沙漠)주 029
각주 029)
원문은 “絶大幕”이다. 『史記』 권111(「衛將軍驃騎列傳」 : 2934)의 「索隱」에 따르면 “幕卽沙漠”이라고 하였다. 그에 따라 “大幕”을 大沙漠이라고 번역하였다.
닫기
을 종단하였으며, 치안(寘顔)[산] 주 030
각주 030)
寘顔山 : 대략 몽골 항가이(Khangai)산맥 南面 일대이다. 前漢 元狩 4년(전119) 衞靑이 匈奴 單于의 군대를 격파하고 북쪽으로 寘顔山 趙信城까지 갔다가 귀환하였다. 『史記』 권111(「衞靑傳」 : 2935), 『漢書』 권 94상(「匈奴傳」 : 3770)에 “窴顔山”으로 나온다.
닫기
을 공파하고, [선우의] 왕정(王庭)을 습격하고,주 031
각주 031)
일역본에서는 “王庭”을 右賢王의 幕營地로 보았고(內田吟風, 1971 : 122), 현대 한어본에서는 單于의 王庭이라고 하였다(安平秋, 2004 : 1902). 『史記』 권111(「衞靑傳」 : 2935)에 따르면, 漢軍은 單于 군대와 전투를 거쳐 ‘寘顔山’에 이르렀다. 그 점에서 單于의 王庭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았다.
닫기
[흉노] 땅 구석구석까지 도망자들을 쫓아 북으로 진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낭거서산(狼居胥山) 주 032
각주 032)
狼居胥山 : 현재 몽골공화국 경내의 부르칸 칼둔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르칸은 투르크어와 몽골어로 ‘佛陀’ 혹은 ‘神性’을 의미한다. 몽골족의 聖山이다. 武帝 元狩 4년(전119) 霍去病이 代郡의 邊塞를 나와 匈奴를 공격하고 이곳 狼居胥山에서 封祭을 올렸다. 일설에는 이곳이 현재 內蒙古 克什克騰旗 서북 阿巴嘎旗 일대라고도 하고 또 다른 설로는 현재 河套 서북의 狼山을 말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史記』, 『漢書』의 전투 기록과 부합하지 않는다.
닫기
에서 봉(封)[의 의식을 거행]하고 고연(姑衍)[산] 주 033
각주 033)
姑衍山 : 현재 몽골 울란바토르의 동남지역으로 狼居胥山 부근에 있다.
닫기
에서는 선(禪)[의 의식을 거행]하였으며주 034
각주 034)
山上에 흙을 쌓아 제단을 만든 뒤,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封”이고, 땅에 제사지내는 것이 “禪”이다.
닫기
[나아가] 한해(翰海) 주 035
각주 035)
翰海 : ‘瀚海’라고도 하는데 지칭하는 대상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唐代 이전 사람들이 『史記』, 『漢書』를 주석할 때는 이것을 큰 海의 이름으로 보았다. 현재 몽골 고원 북쪽의 呼倫(Hulun)湖나 바이칼호를 지칭했던 것으로 보인다. 唐代에는 그 뜻이 몽골고원 大沙漠의 이북과 서쪽 준가르 분지 일대를 가리키는 범칭이었다. 西夏 시기에는 靈州 일대의 소택지를 瀚海라 불렀다. 元代에는 현재 新疆 위구르自治區의 古爾班通古特 사막을 瀚海라고 하였다. 혹은 현재의 알타이산을 瀚海라고 하기도 했다. 明代 이후 ‘翰海’는 고비사막을 지칭하였다. 현대 학자 岑仲勉은 漢代 霍去病이 이곳에 ‘登臨’하였다고 한 이상, 翰海는 海가 아니라 山이며 현재 몽골 항가이산을 가리킨다고 주장하였다.
닫기
에 다다랐습니다. [귀환할 때 흉노의] 명왕(名王)과 귀인(貴人) 수백 명을 포로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후 흉노는 [을] 두려워하고 더욱 화친을 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신하라고 칭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 각주 001)
    秦始皇(전259∼전210) : 이름은 嬴政이다. 秦 莊襄王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秦王으로 즉위하였고, 39세에 稱帝하였으며 37년간 在位하였다. 최초의 統一王朝 황제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황제로 즉위한 후, 蒙恬을 보내 匈奴를 공격하고 河南地를 수복하고 匈奴를 陰山산맥 以北으로 몰아냈다. 그리고 서쪽의 臨洮(현재 감숙성 岷縣)에서 동쪽의 遼東에 이르기까지 만리장성을 연결하였다. 또한 남으로는 百越을 점령하고 桂林, 象郡, 南海郡 등을 세웠다. 처음 秦朝가 天下를 통일하였을 때는 36개 郡이었으나, 始皇帝의 재위 말기에는 40여 개로 늘어났다. 그럼으로써 ‘中國’뿐 아니라 匈奴와 越人 등 ‘四夷’ 지역에도 郡縣을 설치하는 세계[天下] 제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2)
    蒙恬(?∼전210) : 秦代의 名將이다. 先代는 齊나라 사람인데, 조부 蒙驁가 秦으로 들어와 昭王을 섬겼고 누차 戰功을 세웠다. 부친 蒙武는 楚를 멸하였다. 이와 같은 장군의 가문 출신으로 몽염은 軍將이 되어 齊國을 대파하였다. 秦始皇의 명을 받아 六國을 통일한 이후, 匈奴를 축출하고 河南地를 수복하였으며 長城 수축을 감독하였다. 上郡에서 10여년 간 주둔하였는데 진시황이 사망한 뒤 趙高 등의 모함을 받아 죽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기원전 215년 진시황은 蒙恬을 보내 匈奴를 정벌했다. 『史記』 권6(「秦始皇本紀」 : 252)에 따르면, 이때 군사 30만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흉노 정벌의 원인에 대하여 後漢의 유학자 鄭玄은 “秦을 멸망시킬 자는 胡이다(亡秦者胡也)”라는 『錄圖書』의 기록이 二世皇帝 胡亥를 겨냥하는 것인 줄 모르고 북방의 胡(즉 匈奴)를 공격하였다고 한다(『史記』 권6 : 253). 하지만 이는 秦朝가 흉노와 같은 외부 요인보다 내부의 문제로 멸망했음을 강조하는 漢代 儒家들의 의식을 반영한다는 지적도 있다(쓰루마 가즈유키, 2004 : 163∼164).
     바로가기
  • 각주 004)
    西河 : 현재의 山西省과 陝西省에서 남북으로 흐르는 黃河를 지칭한다. 이곳은 夏와 商 이래 山東 지역 국가들의 都城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기 때문에, ‘西河’라고 불렸다. 『史記』 권111(「衞靑列傳」 : 2924)에 “車騎將軍 衞靑이 西河를 지나”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西河”에 대하여 『史記正義』는 “雲中郡의 西河”라고 풀이하였다. 한편 일역본(內田吟風, 1971 : 121)에서는 황하의 서쪽 지대인 오르도스 지역을 지칭하였다. 또한 이곳에는 武帝 元朔 4년(전125)에 西河郡이 설치되었는데, 치소는 현재 내몽고 자치구에 있는 平定縣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長城 : ‘만리’장성은 당시의 척도로 약 5천km에 달한다. 長城 축조의 기사는 『史記』 권6 「秦始皇本紀」에서 진시황 33년, 즉 秦始皇 사망 4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나온다. 따라서 이 짧은 시기에 秦始皇이 長城을 완성하였을 가능성은 없어 보이고, 대신 戰國秦이 축조한 오르도스 장성과 陰山長城, 그리고 戰國시기 趙, 燕이 축조한 장성을 연결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 밖에 秦始皇시대 長城의 축조가 寧夏 回族自治區 지역에 賀蘭山 長城을 새로 축조한 일을 의미하는 것인지 여부도 논의되고 있다(쓰루마 가즈유키, 2004 : 174).
     바로가기
  • 각주 006)
    漢高祖 劉邦(전256∼전195 ; 재위 전202∼전195) : 前漢의 開國 황제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7)
    中華書局本에는 “以高祖之威靈 三十萬衆困於平城”으로 끊었다. 하지만 그에 따르지 않고 “以高祖之威靈, 三十萬衆, 困於平城”으로 끊어 해석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앞에 “以 …… 蒙恬之威, 帶甲四十餘萬, 然不敢窺西河”의 문장과 동일한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8)
    平城 : 秦代 설치한 縣의 이름으로 漢에서도 따랐다. 현재에도 古城이 남아 있는데, 그 위치는 山西省 大同市의 동북쪽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9)
    顔師古는 平城 탈출의 계책이 醜惡해서 世間에서 언급을 피했다고 풀이하였다.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기원전 200년 劉邦은 漢軍 32만을 동원하여 匈奴를 공격하였다. 冒頓單于가 지휘하는 匈奴의 騎兵 40만은 平城 부근의 白登에서 7일간 漢軍을 포위하였다. 劉邦은 陳平의 계책에 따라, 匈奴 측에 뇌물과 閼氏를 바치는 조건으로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원전 198년 겨울 漢은 劉敬의 건의에 따라 匈奴와 정식으로 和親의 約을 맺었다. 이 約은 漢이 匈奴에게 公主의 出嫁, 歲幣의 공급을 약속하고 쌍방이 兄弟의 盟約을 맺으며, 匈奴는 한의 변경을 침공하지 말 것 등 4개 항목으로 이루어졌다. 이 내용은 漢측의 열세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간에서 언급을 회피할 만큼 ‘醜惡’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漢文帝 시기 저명한 文學之士 賈誼는 이 점을 비판하여 “天下의 형세는 지금 거꾸로 되어 있다(天下之勢方倒縣)”고 하였다(『漢書』 권48 「賈誼傳」 : 2240). 한편 이러한 約을 통해 형성된 ‘和親’ 관계는 武帝 이전 시기 국제관계의 특징적인 형태로서 南越, 朝鮮 등의 관계에도 적용되었다. 漢 측에서는 이들에게 不可侵을 요구하고, 非漢 측에서는 반대급부로 歲幣를 요구하였다(김한규, 1982 : 197∼201).
     바로가기
  • 각주 010)
    高皇后, 즉 呂后(?∼전180) : 劉邦의 부인으로 이름은 呂雉이다. 劉邦이 稱帝한 뒤, 皇后가 되었다. 漢에 위협이 될 만한 韓信과 彭越 등의 異姓諸侯王을 숙청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1)
    惠帝와 高皇后 때 冒頓單于는 점차 교만해져 남편을 잃은 高皇后의 처지를 조롱하는 편지를 보내 高皇后를 大怒하게 하였다. 이에 丞相 陳平과 樊噲, 季布 등을 불러 匈奴 使者를 참수하고, 匈奴 정벌이 가능한지 의논하도록 하였다. 惠帝 3년(전192)의 일이다(『漢書』 권94 「匈奴」上 : 2754∼2755).
     바로가기
  • 각주 012)
    樊噲(?∼전189) : 沛縣 사람이다. 어려서 개 잡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秦末 劉邦이 거병하자 舍人으로 그를 따랐으며 누차 戰功을 세워 賢成君이란 작위를 받았다. 鴻門의 宴會 자리에서 范增이 유방을 죽이려 하자 劉邦을 구해냈다. 劉邦이 漢王이 되었을 때, 臨武侯로 책봉되었다. 楚漢 전쟁 때 여러차례 항우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漢 건립 이후 將軍, 相國 등을 역임하면서 陳豨, 韓信 등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舞陽侯로 책봉되었다. 惠帝 6년에 죽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3)
    季布 : 彭城 사람이다. 어려서 俠客으로 자임하면서 法度를 지키지 않았다. 項羽가 西楚覇王으로 自立한 뒤, 彭城에 이르렀을 때, 季布를 장수로 임명하였다. 季布는 楚漢 전쟁 동안 여러 차례 劉邦을 곤경에 빠뜨렸다. 漢朝 건립 이후, 劉邦은 특별히 季布를 체포하려 하였으나, 季布는 大俠 朱家의 도움을 받아 사면을 받고 나아가 郞中으로 임명되었다. 惠帝 때에 中郞將이 되었는데, 樊噲의 匈奴 정벌 기도를 막았다. 文帝代에는 河東郡守를 역임했다. 御史大夫로 발령받았으나 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민간에서는 “黃金 1千斤을 얻는 것이 季布로부터 한 차례 인정을 받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말이 돌 정도로 그 이름이 높았다.
     바로가기
  • 각주 014)
    漢文帝 劉恒(전203∼전157 ; 재위 전180∼전157) : 漢高祖 劉邦의 아들이다. 呂后가 사망한 뒤 옹립되어 23년간 在位하였다. 다음 황제 景帝(재위 : 전157∼전141)와 함께 이른바 ‘文景之治’의 치세를 이루었다. 文帝는 南越을 설득하여 歸附시켰고, 匈奴와 和親을 맺는 등 유화적인 세계 정책을 추진했다. 匈奴가 변경을 침공해도 반격하지 않았다.
     바로가기
  • 각주 015)
    雍 : 『漢書』 권28상 「地理志」(1532)에 따르면 “九州”의 하나인 雍州는 “黑水․西河惟雍州”라고 그 범위가 설명되고 있는데, 대개 현재의 陝西省과 그 서쪽의 일부 지역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西河’는 현재 山西省과 陝西省 사이를 흐르는 黃河를 뜻하며, ‘黑水’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현재 甘肅省의 張掖河, 黨河, 혹은 靑海省의 大通河 등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6)
    甘泉 : 甘泉山을 말한다. 현재 陝西省 淳化縣 서북에 있다. 漢武帝 때에 이곳에 甘泉宮을 지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7)
    細柳 : 옛 지명으로 어디를 지칭하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① 현재의 陝西省 咸陽市의 서남쪽으로 渭水의 북쪽 지대를 말한다. ② 현재의 陝西省 長安縣의 서남쪽을 말한다. 『漢書』에서는 “柳市”라고 지칭하는 곳으로 渭水보다 남쪽에 있다. 『漢書』 권4(「文帝紀」 : 131)에 細柳에 대한 주석이 있다. 如淳은 “長安의 細柳倉이 渭水 북쪽에 있다. 石徼에 가깝다”고 했는데 이는 ①의 細柳이다. 반면 張揖은 “昆明池 남쪽에 있다. 지금의 柳市를 말한다”고 했고 顔師古는 “細柳는 渭水 북쪽에 있지 않다. 張揖의 설이 맞다”고 했다. 이는 ②의 細柳, 즉 柳市를 말한다. 『史記索隱』에서도 細柳가 渭水 북쪽에 있다는 설을 비판하고 있다(『史記』 권10 「孝文本紀」 : 432). 하지만 원문에서 周亞夫가 주둔한 곳은 ①의 細柳, 즉 渭河의 북단을 말한다는 지적도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8)
    棘門 : 현재의 陝西省 咸陽縣의 동북 지역에 있으며 본래 秦의 宮門이었다. 宮門의 방어를 위해 가시나무를 걸쳐놓았기 때문에 棘門이란 이름이 생겼다. 『括地志』에는 棘門이 渭水의 북쪽 10여 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9)
    覇上 : 현재 섬서성 西安市 동쪽의 白鹿原 북쪽 지역으로 고대로부터 咸陽과 長安 부근의 군사요지였다. 應劭는 覇上이 “地名이다. 長安의 동쪽 30里 지점에 있다. 고대에는 滋水라고 하였으나 秦穆公이 覇水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였으며, 顔師古는 “覇水의 위에 있기 때문에 覇上이라고 했다. 지금의 覇頭를 말한다”고 하였다(『漢書』 권1상 「高帝紀」 : 23).
     바로가기
  • 각주 020)
    漢文帝 후원 6년(전158)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漢書』에 따르면 당시 3만의 匈奴 騎兵이 上郡을 공격하였고, 또 다른 3만의 기병은 雲中郡을 공격했다. 이에 漢은 河內太守 周亞夫를 將軍으로 삼아 細柳에 주둔하게 하였으며, 宗正 劉禮는 將軍으로 覇上에, 祝茲侯 徐厲는 將軍으로 棘門에 각각 주둔하게 하였다(『漢書』 권4 「文帝紀」 : 130∼131).
     바로가기
  • 각주 021)
    일역본에서는 漢軍이 철수한 것으로 해석하였으나(內田吟風, 1971 : 122), 현대 한어본에서는 匈奴 부대가 철수하였다고 해석했다(安平秋, 2004 : 1901). 어느 일방만이 철수했을 리 없겠으나, 『漢書』 권40(「周亞夫傳」 : 2058)의 “月餘, 三軍皆罷”라는 기사에 따라 漢軍이 철수한 것으로 번역하였다. 또한 논지의 전개가 匈奴에 대한 중국의 열세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漢兵의 철수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바로가기
  • 각주 022)
    馬邑 : 『漢書』 권28하 「地理志」에 따르면 馬邑은 鴈門郡 관할이다(1621). 顔師古는 “晉『太康地記』에 의하면, 秦代 이 지역에 城을 쌓았는데 번번이 무너졌다. 그런데 어느 말이 반복해서 [특정지역을] 빙빙 돌며 뛰어다니자, 父老가 특이하게 생각하여 그곳에 築城하였고, 그 이름을 馬邑이라고 했다”고 하였다. 漢初에는 韓王信 封國의 수도였고 匈奴에 속했다가 다시 속하였으며 王莽代에는 章昭라고 불렀다. 현재 山西省 朔縣에 해당된다.
     바로가기
  • 각주 023)
    韓安國(?∼전127) : 前漢의 大臣으로 梁國 成安 사람이다. 처음 梁孝王 아래에서 中大夫로 있었다. 吳楚七國의 난 때, 반란군이 梁地를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武帝代 徵召되어 北地都尉, 大司農, 御史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元光 2년(전133) 馬邑에서 匈奴를 습격하였지만, 소득이 없었다. 元朔 2년(전127) 材官將軍으로 임명되어다. 이때 匈奴의 위험이 사라졌다고 軍屯 폐지를 건의하였다가 匈奴가 대거 침입하여 패한 일이 발생하였다. 그 뒤 右北平으로 任地를 옮겼다가 근심 속에 사망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24)
    “墬”는 “地”의 古字이다.
     바로가기
  • 각주 025)
    馬邑 사건의 줄거리와 의의는 다음과 같다. 漢武帝는 즉위한 이후에도 祖母 竇太后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였으나, 建元 6년(전135) 竇太后가 사망하자 독자적인 행동을 개시하였고 그 최초의 일이 匈奴 문제였다. 이해 무제는 匈奴 정벌 문제를 朝議에 붙였으나 御史大夫 韓安國 등의 반대에 부딪혀 開戰論은 부결되었다. 그 이듬해 元光 1년(전134) 馬邑 사람 聶壹이 開戰의 계책을 올렸고 그 다음 해 元光 2년(전133) 武帝는 다시 朝議를 소집하여 30만 대군의 출병 계획을 확정지었다. 흉노의 軍臣單于는 聶壹의 말에 속아 10여만 기를 이끌고 馬邑으로 향했으나 도중에 漢의 계획을 눈치채고 철수하였다. 이 일로 聶壹의 계책을 중앙에 보고했던 主戰論者 王恢는 문책을 받고 獄死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漢初 이래 유지되었던 한과 匈奴 사이의 화친관계는 결정적으로 파탄났고 그 뒤 쌍방은 본격적인 전쟁관계로 접어들었다(西嶋定生, 2002 : 153∼154). 이처럼 漢․匈奴 관계의 악화에는 漢武帝 개인의 의도가 크게 작용하였지만, 匈奴 單于의 정치적 지도력은 중국의 皇帝만큼 공고하지 못했고, 따라서 화친관계는 匈奴의 귀족 구성원들의 자의적 약탈에 의하여 늘 파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컸던 점(디코스모, 2005 : 297∼298)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26)
    衞靑(?∼전105) : 漢武帝 시기 對匈奴의 전쟁을 지휘한 名將이다. 字는 仲卿이며 河東 平陽 사람이다. 그의 부친이 縣吏로 平陽公主의 집안에 給事하다가 婢女와 私通하여 衞靑을 낳았다. 衞靑은 同母 異父姊인 衞子夫가 武帝에게 得幸하자 그 역시 武帝의 부름을 받아 建章監, 侍中, 太中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元光 6년(전129) 車騎將軍으로 임명된 뒤, 7차에 걸쳐 匈奴 원정에 나섰다. 그 결과 河南地를 수복하여 朔方郡을 설치하였고, 秦代의 邊塞를 수선하여 長安 防備를 충실히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長平侯에 임명되고 食邑 3천 8백호를 받았다. 元狩 4년(전119)에는 定襄塞 밖 천여 리까지 원정하여 匈奴 伊穉斜單于를 포위 공격하였다. 이후 한동안 한과 匈奴 사이에는 더 이상의 전쟁이 없었다. 武帝는 衞靑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특별히 大司馬를 신설하여 그를 大司馬 大將軍으로 임명하였다. 衞靑은 비록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朝政에 간여하지 않고, 겸손한 처신으로 인심을 얻었다. 元封 6년(전105)에 사망했다.
     바로가기
  • 각주 027)
    霍去病(?∼전117) : 漢武帝 시기 對匈奴 전쟁을 이끈 名將이다. 大將軍 衞靑의 생질로 그와 명성을 나란히 했다. 모친은 衞子夫의 손위 누이였다. 18세에 霍去病은 皇后의 인척으로 侍中이 되었다. 元朔 6년(전123) 大將軍 衞靑을 따라 匈奴 전쟁에 참가했다. 元狩 2년(전121) 驃騎將軍이 되었다. 그 뒤 전후 6차에 걸쳐 匈奴를 공격하였다. 특히 元狩 2년(121)의 匈奴 공격 결과 匈奴의 渾邪王이 4만을 이끌고 來降하였다. 이때 5개의 屬國을 세워 그 무리를 안치하였다. 그리고 河西 지역에 武威, 張掖, 酒泉, 敦煌 등 4郡을 세웠다. 元狩 4년(전119)의 전투 때에는 몽골의 울란바토르와 바이칼호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돌아와서 大司馬 驃騎將軍으로 추대되었다. 武帝代 발생한 戾太子 사건으로 衞氏는 몰락하지만, 霍去病의 동생 霍光은 武帝 사후 정권을 장악한다. 霍氏 일족의 권력 장악은 宣帝代까지 지속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28)
    원문 “前後十餘年”은 대략 본격적인 對匈奴 전쟁이 시작된 元光 6년(전129)부터 일단락되는 元狩 4년(전119)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29)
    원문은 “絶大幕”이다. 『史記』 권111(「衛將軍驃騎列傳」 : 2934)의 「索隱」에 따르면 “幕卽沙漠”이라고 하였다. 그에 따라 “大幕”을 大沙漠이라고 번역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30)
    寘顔山 : 대략 몽골 항가이(Khangai)산맥 南面 일대이다. 前漢 元狩 4년(전119) 衞靑이 匈奴 單于의 군대를 격파하고 북쪽으로 寘顔山 趙信城까지 갔다가 귀환하였다. 『史記』 권111(「衞靑傳」 : 2935), 『漢書』 권 94상(「匈奴傳」 : 3770)에 “窴顔山”으로 나온다.
     바로가기
  • 각주 031)
    일역본에서는 “王庭”을 右賢王의 幕營地로 보았고(內田吟風, 1971 : 122), 현대 한어본에서는 單于의 王庭이라고 하였다(安平秋, 2004 : 1902). 『史記』 권111(「衞靑傳」 : 2935)에 따르면, 漢軍은 單于 군대와 전투를 거쳐 ‘寘顔山’에 이르렀다. 그 점에서 單于의 王庭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았다.
     바로가기
  • 각주 032)
    狼居胥山 : 현재 몽골공화국 경내의 부르칸 칼둔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르칸은 투르크어와 몽골어로 ‘佛陀’ 혹은 ‘神性’을 의미한다. 몽골족의 聖山이다. 武帝 元狩 4년(전119) 霍去病이 代郡의 邊塞를 나와 匈奴를 공격하고 이곳 狼居胥山에서 封祭을 올렸다. 일설에는 이곳이 현재 內蒙古 克什克騰旗 서북 阿巴嘎旗 일대라고도 하고 또 다른 설로는 현재 河套 서북의 狼山을 말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史記』, 『漢書』의 전투 기록과 부합하지 않는다.
     바로가기
  • 각주 033)
    姑衍山 : 현재 몽골 울란바토르의 동남지역으로 狼居胥山 부근에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34)
    山上에 흙을 쌓아 제단을 만든 뒤,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封”이고, 땅에 제사지내는 것이 “禪”이다.
     바로가기
  • 각주 035)
    翰海 : ‘瀚海’라고도 하는데 지칭하는 대상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唐代 이전 사람들이 『史記』, 『漢書』를 주석할 때는 이것을 큰 海의 이름으로 보았다. 현재 몽골 고원 북쪽의 呼倫(Hulun)湖나 바이칼호를 지칭했던 것으로 보인다. 唐代에는 그 뜻이 몽골고원 大沙漠의 이북과 서쪽 준가르 분지 일대를 가리키는 범칭이었다. 西夏 시기에는 靈州 일대의 소택지를 瀚海라 불렀다. 元代에는 현재 新疆 위구르自治區의 古爾班通古特 사막을 瀚海라고 하였다. 혹은 현재의 알타이산을 瀚海라고 하기도 했다. 明代 이후 ‘翰海’는 고비사막을 지칭하였다. 현대 학자 岑仲勉은 漢代 霍去病이 이곳에 ‘登臨’하였다고 한 이상, 翰海는 海가 아니라 山이며 현재 몽골 항가이산을 가리킨다고 주장하였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진시황(秦始皇), 몽염(蒙恬), 고조(高祖), 고황후(高皇后), 번쾌(樊噲), 계포(季布), 번쾌, 효문제, 효무제(孝武帝), 한안국(韓安國), 무제, 위청(衞靑), 곽거병(霍去病)
지명
서하(西河), , , 평성(平城), 옹(雍), 감천(甘泉)[산], , 세류(細柳), 마읍(馬邑), 서하(西河), 치안(寘顔)[산], 낭거서산(狼居胥山), 고연(姑衍)[산], 한해(翰海),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왕웅이 진나라(秦) 이래 한과 흉노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흉노를 복속하기 힘든 예를 설명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4_1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