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영역과 주변국과의 관계
『서경(書經)』에 “[우(禹)임금 시기에 중국의 영역은] 동쪽으로 바다에 닿았고, 서쪽으로 사막에 이르렀다.”주 001
번역주 001)
고 하였다. 그 구복(九服)의 제도주 002 書稱東漸于海, 西被于流沙: 『書經』, 「禹貢」편 말미에 “동쪽은 바다로 흘러들고, 서쪽은 사막에까지 이르렀다. 북쪽과 남쪽에는 사해에 聲敎[성인이 덕으로 시키는 교육]가 미치니, 禹임금이 검은 圭를 올려 그 성공을 아뢰었다(東漸于海, 西被于流沙, 朔南曁聲敎訖于四海. 禹錫玄圭, 告厥成功).”라고 하였다. 여기서 ‘流沙’는 중국 서부의 사막지대를 말한다. 고려시대의 李穡은 〈流沙亭記〉(『牧隱集』)에서 “流沙는 「禹貢」편에 그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니, 성인의 명성과 교화가 미친 지역이라고 하였다”(『書經』; 李穡, 『牧隱集』).
번역주 002)
는 말할 수가 있다. 九服之制: 服은 服屬의 의미이고, 九服이란 중국 고대에 王畿의 外部를 나누어 9개의 지역을 설정한 것을 말한다. 『周禮』의 「夏官」 〈職方氏〉편에 의하면, 王都의 1,000里 西方을 王畿라 하고, 그 주위를 500里씩 구획하여 侯服·甸服·男服·采服·衛服·蠻服·夷服·鎭服·藩服이라고 하였다(辨九服之邦國, 方千里曰王畿, 其外方五百里侯服, 又其外方五百里曰甸服, 又其外方五百里曰男服, 又其外方五百里曰采服, 又其外方五百里曰衛服, 又其外方五百里曰蠻服, 又其外方五百里曰夷服, 又其外方五百里曰鎭服, 又其外方五百里曰藩服). 九服之制는 왕을 중심으로 하여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그 威光도 줄어든다는 이념적 구획이며, 실제로 존재한 제도는 아니다(金庠基, 1973).
그러나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황역(荒域)의 밖은 여러 번의 통역을 거쳐 [중국으로] 오더라도 [한인(漢人)의] 발걸음이나 수레바퀴의 자취가 미치는 곳이 아니면, [한인들은] 그들 나라의 풍속과 특수한 상황을 아는 일이 없었다. 우(虞)로부터 주(周)에 이르기까지 서융주 003은 백옥 고리를 바쳤고주 004
번역주 004)
, 동이에서는 숙신주 005의 조공이 있었으나주 006 西戎有白環之獻: 『穆天子傳』에서는 周나라 穆王이 서쪽으로 외유하면서 崑崙에 갔다고 한다. 이러한 崑崙과 관련된 신들 중 대표적인 신인 西王母는 玉山에 거주했다고 한다. 『列子』, 『穆天子傳』 등의 작품에서 西王母는 半人半獸의 神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한 신성한 존재로서 穆王과 같은 역사적 영웅과 교류하는 모습을 보인다. 穆王과 西王母는 瑤池의 연못가에서 만나 서로가 시를 지어 교류하였다. ‘白環之獻’은 周나라 穆王이 崑崙山의 女神인 西王母로부터 白玉 반지를 받았다는 전설을 가리킨다. 이것은 漢代의 활발한 서역 진출 이후 중국인들 사이에서 행행한 西王母 信仰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김보경, 2006).
번역주 006)
, 모두 오랜 세월이 걸려서 도달하였으니, 그들이 사는 곳이 이와 같이 멀었다. 東夷有肅愼之貢: 肅愼의 조공은 『竹書紀年』의 「武王 名發」편, 『史記』의 「孔子世家」편, 『國語』의 「魯語」편 등에 있는데, 『國語』의 「魯語」편 기록은 다음과 같다.
仲尼가 陳에 있을 때, 송골매가 陳侯 궁정의 뜰에 죽어 있었다.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이 꽂혀 있었는데, 그것은 돌화살촉이었고, 화살길이가 1자 8치에 달했다. 陳 惠公이 사람을 시켜 송골매가 어찌된 것인지, 仲尼가 묵고 있는 숙소로 가서 물어보게 하였다. 仲尼가 말하길, “송골매는 멀리서 왔고, 이 화살은 肅愼의 화살입니다. 옛날 武王이 商을 이기매, 九夷와 百蠻에 길이 통하였는데, 각자로 하여금 그 방물을 조공하게 하였으니, 그들의 직책을 잊지 않게 함이었습니다. 이에 肅愼은 楛矢와 石砮를 바쳤는데, 그 길이가 1자 8치였습니다. 先王은 그의 미덕이 멀리까지 이르렀음을 밝혀, 후인에게 보여 길이 거울삼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화살의 오늬에 새겨 말하기를, ‘肅愼氏之貢矢’라 하고, 그 肅愼의 화살을 大姬에게 주었고, 虞胡公의 배필로 삼아 胡公을 陳나라의 제후로 봉하였습니다. 옛날에 同姓의 제후에게는 진귀한 玉을 나누어주어 친애의 뜻을 보였습니다. 異姓의 제후에게는 멀리서 온 조공품을 나누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복종을 잊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肅愼이 조공한 화살을 陳에게 준 것입니다. 만약 임금께서 有司로 하여금 여러 옛 관청에서 구한다면, 과히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사람을 시켜 구해보니, 과연 황금궤짝에서 얻었으니, 孔子의 말과 같았다(仲尼在陳, 有隼集于陳侯之庭而死, 楉矢貫之, 石砮, 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以隼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遠矣! 此肅愼氏之矢也. 昔武王克商, 通道于九夷·百蠻, 使各以其方賄來貢, 使無忘職業. 於是肅愼氏貢楉矢·石砮, 其長尺有咫. 先王欲昭其令德之致遠也, 以示後人, 使永監焉, 故銘其栝曰, ‘肅愼氏之貢矢’, 以分大姬, 配虞胡公而封諸陳. 古者, 分同姓以珍玉, 展親也, 分異姓以遠方之職貢, 使無忘服也, 故分陳以肅愼氏之貢. 君若使有司求諸故府, 其可得也.” 使求, 得之金櫝, 如之).
〔原註〕 肅愼은 明帝紀 靑龍 4년 注에 상세히 보인다. 『史記』에 의하면, “肅愼氏가 楛矢(楛나무로 만든 화살)와 石砮(돌화살촉)를 조공하니, 길이가 1척 8치였다. 武王은 덕이 멀리까지 미치도록 하기 위해서 그 오늬에 ‘肅愼氏之矢’이라 새겨 후세에 보였다.” 고 하였다.
仲尼가 陳에 있을 때, 송골매가 陳侯 궁정의 뜰에 죽어 있었다.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이 꽂혀 있었는데, 그것은 돌화살촉이었고, 화살길이가 1자 8치에 달했다. 陳 惠公이 사람을 시켜 송골매가 어찌된 것인지, 仲尼가 묵고 있는 숙소로 가서 물어보게 하였다. 仲尼가 말하길, “송골매는 멀리서 왔고, 이 화살은 肅愼의 화살입니다. 옛날 武王이 商을 이기매, 九夷와 百蠻에 길이 통하였는데, 각자로 하여금 그 방물을 조공하게 하였으니, 그들의 직책을 잊지 않게 함이었습니다. 이에 肅愼은 楛矢와 石砮를 바쳤는데, 그 길이가 1자 8치였습니다. 先王은 그의 미덕이 멀리까지 이르렀음을 밝혀, 후인에게 보여 길이 거울삼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화살의 오늬에 새겨 말하기를, ‘肅愼氏之貢矢’라 하고, 그 肅愼의 화살을 大姬에게 주었고, 虞胡公의 배필로 삼아 胡公을 陳나라의 제후로 봉하였습니다. 옛날에 同姓의 제후에게는 진귀한 玉을 나누어주어 친애의 뜻을 보였습니다. 異姓의 제후에게는 멀리서 온 조공품을 나누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복종을 잊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肅愼이 조공한 화살을 陳에게 준 것입니다. 만약 임금께서 有司로 하여금 여러 옛 관청에서 구한다면, 과히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사람을 시켜 구해보니, 과연 황금궤짝에서 얻었으니, 孔子의 말과 같았다(仲尼在陳, 有隼集于陳侯之庭而死, 楉矢貫之, 石砮, 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以隼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遠矣! 此肅愼氏之矢也. 昔武王克商, 通道于九夷·百蠻, 使各以其方賄來貢, 使無忘職業. 於是肅愼氏貢楉矢·石砮, 其長尺有咫. 先王欲昭其令德之致遠也, 以示後人, 使永監焉, 故銘其栝曰, ‘肅愼氏之貢矢’, 以分大姬, 配虞胡公而封諸陳. 古者, 分同姓以珍玉, 展親也, 分異姓以遠方之職貢, 使無忘服也, 故分陳以肅愼氏之貢. 君若使有司求諸故府, 其可得也.” 使求, 得之金櫝, 如之).
〔原註〕 肅愼은 明帝紀 靑龍 4년 注에 상세히 보인다. 『史記』에 의하면, “肅愼氏가 楛矢(楛나무로 만든 화살)와 石砮(돌화살촉)를 조공하니, 길이가 1척 8치였다. 武王은 덕이 멀리까지 미치도록 하기 위해서 그 오늬에 ‘肅愼氏之矢’이라 새겨 후세에 보였다.” 고 하였다.
한(漢)나라 때에 장건을 서역주 007
번역주 007)
에 사절로 파견하여주 008 西域: 『漢書』, 「西域傳」에 의하면, 西域은 중국에서 孝武(기원전 141~기원전 87) 때에 처음으로 소통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래 36국이었으나, 그 뒤에 차츰 나뉘어져 50여 개가 되었으며, 모두 匈奴의 서쪽과 烏孫의 남쪽에 있다고 한다. 「西域傳」에는 婼羌國, 鄯善國, 樓蘭國, 且末國, 小宛國, 精絶國, 戎盧國, 扜彌國, 渠勒國, 于闐國, 皮山國, 烏秅國, 西夜國, 浦犁國, 依耐國, 無雷國, 難兜國, 罽賓國, 烏弋山離國, 安息國, 大月氏國, 康居國, 奄蔡國, 大宛國, 桃槐國, 休循國, 捐毒國, 沙車國, 蔬勒國, 尉頭國, 烏孫國, 姑墨國, 溫宿國, 龜玆國, 尉犁國, 危須國, 焉耆國, 烏貪訾離國, 卑陸國, 卑陸後國, 郁立師國, 單桓國, 蒲類國, 蒲類後國, 西且彌國, 東且彌國, 劫國, 狐胡國, 山國, 車師前國, 車師後國, 車師都尉國, 車師後城長國 등의 이름이 보인다.
西域의 여러 나라는 대부분 정착생활을 하고, 성곽·밭·가축을 갖추고 있다. 匈奴 및 烏孫과는 풍속이 다르고, 匈奴에 복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이 西域으로 가는 길을 개통한 것은 張騫에 의해서였다. 그 후 霍去病이 匈奴의 서쪽 지역을 공격하여 몰아내면서 처음으로 酒泉郡을 설치하고, 차츰 백성들을 이민시켰다. 이후에 武威·張掖·敦煌 지역도 郡을 설치하였고, 貳師將軍이 大宛을 정벌하였다.
西域의 여러 나라는 대부분 정착생활을 하고, 성곽·밭·가축을 갖추고 있다. 匈奴 및 烏孫과는 풍속이 다르고, 匈奴에 복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이 西域으로 가는 길을 개통한 것은 張騫에 의해서였다. 그 후 霍去病이 匈奴의 서쪽 지역을 공격하여 몰아내면서 처음으로 酒泉郡을 설치하고, 차츰 백성들을 이민시켰다. 이후에 武威·張掖·敦煌 지역도 郡을 설치하였고, 貳師將軍이 大宛을 정벌하였다.
번역주 008)
황하의 근원에 도달하고주 009 여러 나라를 두루 거쳐, 드디어 도호부를 설치하여주 010 漢氏遣張騫使西域: 前漢代에 漢나라는 匈奴와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匈奴는 西域에까지 세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당시 西域의 여러 나라들은 匈奴의 압제에 크게 시달렸다. 그들 중에서도 大月氏라는 나라는 匈奴와의 전투에서 왕을 잃는 등 큰 수난을 당하며 匈奴에 복수하고자 하였다. 漢나라 武帝는 이 소식을 듣고 匈奴를 저지하기 위하여 月氏國과 동맹하여 동서로 匈奴를 협공하는 계획을 세운다. 이때 張騫이 月氏國에 파견되었다. 그는 도중에 匈奴에게 사로잡혀 약 10년간 구류되었으나, 도망하여 기원전 129년에 大月氏國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당시 月氏國은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하여 더 이상 匈奴와 전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漢나라와 月氏國의 동맹은 성립되지 않았다. 두 차례에 걸친 장건은 漢나라와 西域 여러 나라 사이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번역주 010)
그들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뒤에 서역의 사정이 빠짐없이 남게 되어 사관(史官)도 [서역의 일을] 상세히 기재할 수 있게 되었다. 위(魏)나라가 일어서서는 비록 서역의 모든 나라가 다 올 수는 없었으나, 그 중의 대국(大國)인 구자·우전·강거·오손·소륵·월지·선선·차사 등의 나라들은주 011 西域都護府: 西域都護府는 중국 漢代에 西域을 통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관이다. 기원전 60년에 匈奴에서 내분이 일어나 車師 서쪽의 匈奴 세력이 쇠퇴하자, 漢나라는 鄯善 以西의 西域 諸國을 감독하고 있던 騎都尉 鄭吉을 都護에 임명하여 西域都護府를 설치하였다. 이 都護府는 屯田의 경영, 교통·무역의 보호, 西域 諸國의 감찰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王莽 집권 시에 대외정책이 실패하자, 이 都護府는 붕괴되었고 西域 諸國은 다시 匈奴의 세력하에 들어갔다. 後漢代에 明帝 17년(74)과 和帝 3년(91) 2회에 걸쳐 西域都護府를 부활시켰지만, 모두 십수 년 만에 폐지되어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伊瀬仙太, 1955).
번역주 011)
조공을 바쳐오지 않은 해가 없었으니, 대략 한나라 때의 전례와 같았다. 其大國龜玆·于寘·康居·烏孫·疎勒·月氏·鄯善·車師之屬: 龜玆는 중앙아시아의 Tārim 분지에서 번영했던 나라로, 중국의 문헌에는 龜玆 이외에 屈支·屈茨·邱玆 등으로도 기록되었고, 元代에는 曲先·若又 등으로도 불렸다. 于寘은 崑崙山에서 북류하는 Yurung Kash川과 Kara Kash川에 걸친 大오아시스국으로 西域南道의 대표국에 있는 나라로, 漢·唐의 사서에는 于闐國으로 기록되고 烏纏·于遁·于殿·屈丹·喚那·壑旦 등의 異稱이 있으며, 元代에는 崲峹·斡端·五端·忽炭 등으로도 쓰여졌다. 康居는 서아시아에 있는 Syrdarya河 하류와 Kirghiz 광야 지역에 거주하는 유목민의 나라이다. 烏孫은 중국 漢代로부터 南北朝時代 초기까지 사서에 보이는데, 중국과 정식으로 교섭을 갖게 된 것은 張騫의 서역 파견 시기부터이다. 疎勒은 기원전 2세기에 처음으로 漢나라와 교섭을 갖게 되면서 이후 천 년간에 걸쳐 사서에 나타나고 있다. 月氏는 秦·漢代 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한 민족으로 중국 사서에 禺氏, 和氏 등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鄯善은 원래 명칭이 樓蘭이다. 車師는 漢代부터 北魏代에 이르기까지 天山山脈 동부에 존재했는데, 위치상 匈奴가 서역으로 남하하는 문호에 해당하여 漢나라의 서역 경영과 관련하여 두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한서』, 「서역전」에는 이들 나라의 도읍, 위치, 인구·군사수 및 기타 특이사항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표로 간략히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서영수 주편, 1987).
나라 | 도읍 | 위치(長安으로부터 거리) | 인구 | 군사 | 이웃 국가 | 중국과의 관계 | 기타 |
龜玆 | 延城 | 7,480리 | 81,317 | 21,076 | 精絶 且末 杅彌 烏孫 姑墨 | 安西都護府 설치(658) | 주조와 야금에 능함. 西域北道의 요충지. 동서 무역의 중심지. 아리아족. 불교 |
于寘 | 西城 | 9,670리 | 19,300 | 2,400 | 婼羌 姑墨 | 沙毗都護俯(安西四鎭) 설치(7세기) | 과수 재배. 특산품(軟玉). 鹽澤(黃河의 근원). 동서 무역 중계 시장. 조로아스터교 |
康居 | 樂越匿 | 12,300리 | 60만 | 12만 | 烏孫 奄蔡 大月氏 | 西晋代 이후 기록에서 사라짐 | 상업의 교차점 |
烏孫 | 赤谷城 | 8,900리 | 63만 | 18만 8,800 | 匈奴 康居 大宛 | 漢-烏孫 연합(흉노 견제). 鮮卑에게 침략받고 명칭이 사라짐(5세기) | 목축 생활. 동서 교섭 사상에서 큰 역할을 함 |
疎勒 | 疎勒城 | 9,350리 | 18,647 | 2,000 | 疎勒鎭 설치(安西四鎭) | 중요 시장으로 번영(天山山脈 횡단 지역) | |
月氏 | 監氏城 | 11,600리 | 40만 | 10만 | 月氏都督府 설치. 漢나라 張騫이 동맹을 맺고자 함 | 유목 생활 | |
鄯善 | 扜泥城 | 6,100리 | 14,100 | 2,912 | 山國 車師 | 漢나라의 병참기지 | 玉 생산. 유목 생활 |
車師前國 | 交河城 | 8,150리 | 6,050 | 1,865 | 西域都護府 설치. 班勇이 車師前部(前王)의 柳中에 진출 | 車師前王ㆍ後王. 2국과 山北의 6국 분리 | |
車師後國 | 務塗谷 | 8,950리 | 4,774 | 1,890 |
[중국의 동쪽에서는] 공손연이 부친과 조부에 이어 3대주 012에 걸쳐 요동을 차지하고 있어주 013, 천자는 그 지방을 절역(絶域: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여겨 [공손씨에게] 해외의 일을 맡겼다. 결국 [공손씨가] 동이와의 관계를 막고 끊어놓아 [동이가] 중국과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주 014. 경초(景初) 연간(237~239, 魏 明帝; 高句麗 東川王 11~13)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 공손연을 죽이고주 015, 또 몰래 바다로 군사를 보내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접수하니주 016, 그 후로 해외가 안정되고 동이들도 굴복하였다.
그 뒤 고구려가 배반하였기에 [위나라는] 또 소수의 군사를 파견하여 [그들을] 토벌하고주 017 지극히 먼 곳까지 추격하여, 오환주 018
번역주 018)
과 골도주 019를 넘어 옥저를 지나 숙신의 왕정(王庭)을 밟고주 020 烏丸: 고대 蒙古에서 번영했던 유목민족으로 烏桓이라고도 한다. 기원전 206년경 匈奴의 冒頓單于에 의해 멸망된 東胡의 잔여세력 중 남방 老哈河畔에 거주한 민족이 烏丸이라고 알려져 있다. 前漢代에는 수천 개로 나뉘어서 匈奴에 服屬되어 매년 牛馬와 皮革을 貢納하였다. 後漢代에 漢나라에 招誘된 烏丸은 財物을 공급받아 後漢을 위하여 匈奴·鮮卑를 방어하였다. 그러나 120년경부터는 鮮卑 및 南匈奴와 연합하여 後漢의 북변을 자주 침략하였다. 207년 河北을 평정한 曹操가 마침내 烏丸을 평정하자, 그 대부분은 鮮卑의 諸部에 예속되었다. 北魏의 통일 이후에는 점차 漢族에 융합되어 다시는 동양사에서 그 활동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서영수 주편, 1987).
번역주 020)
, 동쪽으로 대해에까지 이르렀다. [그곳의] 장로(長老)가 말하기를 “얼굴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서] 해가 뜨는 곳 근처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주 021. 〔原註〕 丁謙이 말하길, “『삼국지』, 「毌丘儉傳」에 의하면, ‘毌丘儉이 고구려를 쳐서 束馬縣車(말발굽을 싸매 미끄러지지 않게 하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게 함.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산길을 행군하는 것을 묘사)하여 丸都에 올라 句麗의 도읍을 도륙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살펴보건대, 丸都는 산의 이름이고 고구려의 도읍은 夫餘城 북쪽에 있었는데, 이제 陳壽가 이곳 「東夷傳」에서는 丸都를 말하면서 ‘烏丸과 骨都’를 쓰고 있으니, 그릇됨이 매우 심하다. 대저 烏丸은 北狄의 부족 이름이고, 骨都는 匈奴의 관직명이니, 고구려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또한 「毌丘儉傳」에 이르길, ‘毌丘儉이 王頎를 보내 추격하게 하니, 沃沮를 지나 천여 리를 가서 肅愼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고 했으니, 즉 肅愼의 국경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肅愼)의 王庭을 짓밟았다고 말하니, 이 또한 사실과 맞지 않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나라를 두루 관찰하고, 그들 나라의 법령과 습속에는 여러 가지 구별이 있고 각각에는 명칭이 있음을 채록하여 상세하게 기록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들 나라들은] 비록 이적의 나라이기는 하지만, 조두주 022를 사용하는 법도가 남아 있다. [따라서] “중국이 예법을 잃으면, 사이(四夷)주 023에게서 [그것을] 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여러] 나라[의 일들]을 순서대로 서술하고, 그 같고 다른 점을 열거하여 전사의 미비한 점을 보완한다.
- 번역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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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2)
九服之制: 服은 服屬의 의미이고, 九服이란 중국 고대에 王畿의 外部를 나누어 9개의 지역을 설정한 것을 말한다. 『周禮』의 「夏官」 〈職方氏〉편에 의하면, 王都의 1,000里 西方을 王畿라 하고, 그 주위를 500里씩 구획하여 侯服·甸服·男服·采服·衛服·蠻服·夷服·鎭服·藩服이라고 하였다(辨九服之邦國, 方千里曰王畿, 其外方五百里侯服, 又其外方五百里曰甸服, 又其外方五百里曰男服, 又其外方五百里曰采服, 又其外方五百里曰衛服, 又其外方五百里曰蠻服, 又其外方五百里曰夷服, 又其外方五百里曰鎭服, 又其外方五百里曰藩服). 九服之制는 왕을 중심으로 하여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그 威光도 줄어든다는 이념적 구획이며, 실제로 존재한 제도는 아니다(金庠基,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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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4)
西戎有白環之獻: 『穆天子傳』에서는 周나라 穆王이 서쪽으로 외유하면서 崑崙에 갔다고 한다. 이러한 崑崙과 관련된 신들 중 대표적인 신인 西王母는 玉山에 거주했다고 한다. 『列子』, 『穆天子傳』 등의 작품에서 西王母는 半人半獸의 神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한 신성한 존재로서 穆王과 같은 역사적 영웅과 교류하는 모습을 보인다. 穆王과 西王母는 瑤池의 연못가에서 만나 서로가 시를 지어 교류하였다. ‘白環之獻’은 周나라 穆王이 崑崙山의 女神인 西王母로부터 白玉 반지를 받았다는 전설을 가리킨다. 이것은 漢代의 활발한 서역 진출 이후 중국인들 사이에서 행행한 西王母 信仰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김보경, 2006).
- 번역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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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6)
東夷有肅愼之貢: 肅愼의 조공은 『竹書紀年』의 「武王 名發」편, 『史記』의 「孔子世家」편, 『國語』의 「魯語」편 등에 있는데, 『國語』의 「魯語」편 기록은 다음과 같다.
仲尼가 陳에 있을 때, 송골매가 陳侯 궁정의 뜰에 죽어 있었다.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이 꽂혀 있었는데, 그것은 돌화살촉이었고, 화살길이가 1자 8치에 달했다. 陳 惠公이 사람을 시켜 송골매가 어찌된 것인지, 仲尼가 묵고 있는 숙소로 가서 물어보게 하였다. 仲尼가 말하길, “송골매는 멀리서 왔고, 이 화살은 肅愼의 화살입니다. 옛날 武王이 商을 이기매, 九夷와 百蠻에 길이 통하였는데, 각자로 하여금 그 방물을 조공하게 하였으니, 그들의 직책을 잊지 않게 함이었습니다. 이에 肅愼은 楛矢와 石砮를 바쳤는데, 그 길이가 1자 8치였습니다. 先王은 그의 미덕이 멀리까지 이르렀음을 밝혀, 후인에게 보여 길이 거울삼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화살의 오늬에 새겨 말하기를, ‘肅愼氏之貢矢’라 하고, 그 肅愼의 화살을 大姬에게 주었고, 虞胡公의 배필로 삼아 胡公을 陳나라의 제후로 봉하였습니다. 옛날에 同姓의 제후에게는 진귀한 玉을 나누어주어 친애의 뜻을 보였습니다. 異姓의 제후에게는 멀리서 온 조공품을 나누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복종을 잊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肅愼이 조공한 화살을 陳에게 준 것입니다. 만약 임금께서 有司로 하여금 여러 옛 관청에서 구한다면, 과히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사람을 시켜 구해보니, 과연 황금궤짝에서 얻었으니, 孔子의 말과 같았다(仲尼在陳, 有隼集于陳侯之庭而死, 楉矢貫之, 石砮, 其長尺有咫. 陳惠公使人以隼如仲尼之館問之. 仲尼曰, “隼之來也遠矣! 此肅愼氏之矢也. 昔武王克商, 通道于九夷·百蠻, 使各以其方賄來貢, 使無忘職業. 於是肅愼氏貢楉矢·石砮, 其長尺有咫. 先王欲昭其令德之致遠也, 以示後人, 使永監焉, 故銘其栝曰, ‘肅愼氏之貢矢’, 以分大姬, 配虞胡公而封諸陳. 古者, 分同姓以珍玉, 展親也, 分異姓以遠方之職貢, 使無忘服也, 故分陳以肅愼氏之貢. 君若使有司求諸故府, 其可得也.” 使求, 得之金櫝, 如之).
〔原註〕 肅愼은 明帝紀 靑龍 4년 注에 상세히 보인다. 『史記』에 의하면, “肅愼氏가 楛矢(楛나무로 만든 화살)와 石砮(돌화살촉)를 조공하니, 길이가 1척 8치였다. 武王은 덕이 멀리까지 미치도록 하기 위해서 그 오늬에 ‘肅愼氏之矢’이라 새겨 후세에 보였다.” 고 하였다. -
번역주 007)
西域: 『漢書』, 「西域傳」에 의하면, 西域은 중국에서 孝武(기원전 141~기원전 87) 때에 처음으로 소통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래 36국이었으나, 그 뒤에 차츰 나뉘어져 50여 개가 되었으며, 모두 匈奴의 서쪽과 烏孫의 남쪽에 있다고 한다. 「西域傳」에는 婼羌國, 鄯善國, 樓蘭國, 且末國, 小宛國, 精絶國, 戎盧國, 扜彌國, 渠勒國, 于闐國, 皮山國, 烏秅國, 西夜國, 浦犁國, 依耐國, 無雷國, 難兜國, 罽賓國, 烏弋山離國, 安息國, 大月氏國, 康居國, 奄蔡國, 大宛國, 桃槐國, 休循國, 捐毒國, 沙車國, 蔬勒國, 尉頭國, 烏孫國, 姑墨國, 溫宿國, 龜玆國, 尉犁國, 危須國, 焉耆國, 烏貪訾離國, 卑陸國, 卑陸後國, 郁立師國, 單桓國, 蒲類國, 蒲類後國, 西且彌國, 東且彌國, 劫國, 狐胡國, 山國, 車師前國, 車師後國, 車師都尉國, 車師後城長國 등의 이름이 보인다.
西域의 여러 나라는 대부분 정착생활을 하고, 성곽·밭·가축을 갖추고 있다. 匈奴 및 烏孫과는 풍속이 다르고, 匈奴에 복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이 西域으로 가는 길을 개통한 것은 張騫에 의해서였다. 그 후 霍去病이 匈奴의 서쪽 지역을 공격하여 몰아내면서 처음으로 酒泉郡을 설치하고, 차츰 백성들을 이민시켰다. 이후에 武威·張掖·敦煌 지역도 郡을 설치하였고, 貳師將軍이 大宛을 정벌하였다. -
번역주 008)
漢氏遣張騫使西域: 前漢代에 漢나라는 匈奴와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匈奴는 西域에까지 세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당시 西域의 여러 나라들은 匈奴의 압제에 크게 시달렸다. 그들 중에서도 大月氏라는 나라는 匈奴와의 전투에서 왕을 잃는 등 큰 수난을 당하며 匈奴에 복수하고자 하였다. 漢나라 武帝는 이 소식을 듣고 匈奴를 저지하기 위하여 月氏國과 동맹하여 동서로 匈奴를 협공하는 계획을 세운다. 이때 張騫이 月氏國에 파견되었다. 그는 도중에 匈奴에게 사로잡혀 약 10년간 구류되었으나, 도망하여 기원전 129년에 大月氏國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당시 月氏國은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하여 더 이상 匈奴와 전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漢나라와 月氏國의 동맹은 성립되지 않았다. 두 차례에 걸친 장건은 漢나라와 西域 여러 나라 사이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 번역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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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10)
西域都護府: 西域都護府는 중국 漢代에 西域을 통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관이다. 기원전 60년에 匈奴에서 내분이 일어나 車師 서쪽의 匈奴 세력이 쇠퇴하자, 漢나라는 鄯善 以西의 西域 諸國을 감독하고 있던 騎都尉 鄭吉을 都護에 임명하여 西域都護府를 설치하였다. 이 都護府는 屯田의 경영, 교통·무역의 보호, 西域 諸國의 감찰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王莽 집권 시에 대외정책이 실패하자, 이 都護府는 붕괴되었고 西域 諸國은 다시 匈奴의 세력하에 들어갔다. 後漢代에 明帝 17년(74)과 和帝 3년(91) 2회에 걸쳐 西域都護府를 부활시켰지만, 모두 십수 년 만에 폐지되어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伊瀬仙太,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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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11)
其大國龜玆·于寘·康居·烏孫·疎勒·月氏·鄯善·車師之屬: 龜玆는 중앙아시아의 Tārim 분지에서 번영했던 나라로, 중국의 문헌에는 龜玆 이외에 屈支·屈茨·邱玆 등으로도 기록되었고, 元代에는 曲先·若又 등으로도 불렸다. 于寘은 崑崙山에서 북류하는 Yurung Kash川과 Kara Kash川에 걸친 大오아시스국으로 西域南道의 대표국에 있는 나라로, 漢·唐의 사서에는 于闐國으로 기록되고 烏纏·于遁·于殿·屈丹·喚那·壑旦 등의 異稱이 있으며, 元代에는 崲峹·斡端·五端·忽炭 등으로도 쓰여졌다. 康居는 서아시아에 있는 Syrdarya河 하류와 Kirghiz 광야 지역에 거주하는 유목민의 나라이다. 烏孫은 중국 漢代로부터 南北朝時代 초기까지 사서에 보이는데, 중국과 정식으로 교섭을 갖게 된 것은 張騫의 서역 파견 시기부터이다. 疎勒은 기원전 2세기에 처음으로 漢나라와 교섭을 갖게 되면서 이후 천 년간에 걸쳐 사서에 나타나고 있다. 月氏는 秦·漢代 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한 민족으로 중국 사서에 禺氏, 和氏 등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鄯善은 원래 명칭이 樓蘭이다. 車師는 漢代부터 北魏代에 이르기까지 天山山脈 동부에 존재했는데, 위치상 匈奴가 서역으로 남하하는 문호에 해당하여 漢나라의 서역 경영과 관련하여 두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한서』, 「서역전」에는 이들 나라의 도읍, 위치, 인구·군사수 및 기타 특이사항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표로 간략히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서영수 주편, 1987).
나라 도읍 위치(長安으로부터 거리) 인구 군사 이웃 국가 중국과의 관계 기타 龜玆 延城 7,480리 81,317 21,076 精絶
且末
杅彌
烏孫
姑墨安西都護府 설치(658) 주조와 야금에 능함. 西域北道의 요충지. 동서 무역의 중심지. 아리아족. 불교 于寘 西城 9,670리 19,300 2,400 婼羌
姑墨沙毗都護俯(安西四鎭) 설치(7세기) 과수 재배. 특산품(軟玉). 鹽澤(黃河의 근원). 동서 무역 중계 시장. 조로아스터교 康居 樂越匿 12,300리 60만 12만 烏孫
奄蔡
大月氏西晋代 이후 기록에서 사라짐 상업의 교차점 烏孫 赤谷城 8,900리 63만 18만 8,800 匈奴
康居
大宛漢-烏孫 연합(흉노 견제). 鮮卑에게 침략받고 명칭이 사라짐(5세기) 목축 생활. 동서 교섭 사상에서 큰 역할을 함 疎勒 疎勒城 9,350리 18,647 2,000 疎勒鎭 설치(安西四鎭) 중요 시장으로 번영(天山山脈 횡단 지역) 月氏 監氏城 11,600리 40만 10만 月氏都督府 설치. 漢나라 張騫이 동맹을 맺고자 함 유목 생활 鄯善 扜泥城 6,100리 14,100 2,912 山國
車師漢나라의 병참기지 玉 생산. 유목 생활 車師前國 交河城 8,150리 6,050 1,865 西域都護府 설치.
班勇이 車師前部(前王)의 柳中에 진출車師前王ㆍ後王.
2국과 山北의 6국 분리車師後國 務塗谷 8,950리 4,774 1,890 - 번역주 012)
- 번역주 013)
- 번역주 014)
- 번역주 015)
- 번역주 016)
- 번역주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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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18)
烏丸: 고대 蒙古에서 번영했던 유목민족으로 烏桓이라고도 한다. 기원전 206년경 匈奴의 冒頓單于에 의해 멸망된 東胡의 잔여세력 중 남방 老哈河畔에 거주한 민족이 烏丸이라고 알려져 있다. 前漢代에는 수천 개로 나뉘어서 匈奴에 服屬되어 매년 牛馬와 皮革을 貢納하였다. 後漢代에 漢나라에 招誘된 烏丸은 財物을 공급받아 後漢을 위하여 匈奴·鮮卑를 방어하였다. 그러나 120년경부터는 鮮卑 및 南匈奴와 연합하여 後漢의 북변을 자주 침략하였다. 207년 河北을 평정한 曹操가 마침내 烏丸을 평정하자, 그 대부분은 鮮卑의 諸部에 예속되었다. 北魏의 통일 이후에는 점차 漢族에 융합되어 다시는 동양사에서 그 활동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서영수 주편,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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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20)
〔原註〕 丁謙이 말하길, “『삼국지』, 「毌丘儉傳」에 의하면, ‘毌丘儉이 고구려를 쳐서 束馬縣車(말발굽을 싸매 미끄러지지 않게 하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게 함.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산길을 행군하는 것을 묘사)하여 丸都에 올라 句麗의 도읍을 도륙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살펴보건대, 丸都는 산의 이름이고 고구려의 도읍은 夫餘城 북쪽에 있었는데, 이제 陳壽가 이곳 「東夷傳」에서는 丸都를 말하면서 ‘烏丸과 骨都’를 쓰고 있으니, 그릇됨이 매우 심하다. 대저 烏丸은 北狄의 부족 이름이고, 骨都는 匈奴의 관직명이니, 고구려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또한 「毌丘儉傳」에 이르길, ‘毌丘儉이 王頎를 보내 추격하게 하니, 沃沮를 지나 천여 리를 가서 肅愼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고 했으니, 즉 肅愼의 국경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肅愼)의 王庭을 짓밟았다고 말하니, 이 또한 사실과 맞지 않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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