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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흉노가 중원지역으로 귀화한 뒤 우환이 되기도 했으나 이후에도 황제가 받아들이며 위무함

  • 국가
    흉노(匈奴)
[] 무제(武帝)가 즉위한 뒤 새외의 흉노[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새니(塞泥), 흑난(黑難) 등 2만여 낙(落)이 귀화하였다. 황제가 다시 이들을 받아들여 하서(河西)의양성(宜陽城) 아래에서 살게 하였다. 그 후 이들이 또다시 인(晉人)들과 섞여 살게 되었기 때문에 평양(平陽), 서하(西河), 태원(太原), 신흥(新興), 상당(上黨), 악평(樂平) 등 여러 군에 이들이 없는 곳이 없었다. 태시(泰始) 7년(271)에 선우 맹(猛)이 반란을 일으키고 공야성(孔邪城)에 진을 쳤다. 무제(武帝)누후(婁侯) 하정(何楨)을 보내 토벌케 하였다. 하정이 본래 지략이 뛰어나 의 무리가 흉포하고 사나워 적은 군사로는 제압할 수 없다 생각하고 비밀리 의 좌부독(左部督)인 이각(李恪)을 꾀어 을 죽이도록 하였다. 그러자 흉노가 놀라 모두 항복하였고 수년이 지나도록 감히 다시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품지 못했다. 그 뒤 흉노는 차츰차츰 원망과 분노가 극에 달하여 장사(長史)주 001
각주 001)
長史:丞相의 屬官으로 文帝 2년에 일시적으로 두 명의 長史를 두었다. 長史는 相府의 일을 總管하였고 秩은 1千石이었다. 三公은 모두 長史를 두어 그의 보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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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살해하였고 점차 변방의 우환이 되어갔다. 시어사(侍御史) 서하(西河)곽흠(郭欽)이 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융적은 굳센데다 사나워 예부터 근심거리였습니다. 위(魏) 초에 사람들이 적어 서북 지방의 여러 군에는 모두 오랑캐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복종한다고 하지만 먼 훗날에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오랑캐가 말을 타고 평양(平陽), 상당(上黨)에서 3일도 안 되서 맹진(孟津)에 당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북지(北地), 서하(西河), 태원(太原), 풍익(馮翊), 안정(安定), 상군(上郡)은 모두 오랑캐의 뜰이 될 것입니다. 오(吳)를 평정한 위세로, 또 모신과 맹장의 지략으로 북지(北地)서하(西河), 안정(安定)에서 군사를 내어 상군(上郡)을 회복시키고 풍익(馮翊)에 사람을 채워야 합니다. 이것은 평양(平陽) 이북의 여러 현에서 사죄 이상의 죄인들을 모집하고 삼하(三河)와 삼위(三魏)의 현사(見士)주 002
각주 002)
見士:사전에 보이지 않지만 이와 비슷한 용례로 見卒이 있다. 見卒이란 현재 남아 있는 병졸을 말한다. 『戰國策』 「韓策一」, “爲除守徼亭鄣塞, 見卒不過二十萬而已矣”와 『資治通鑒』 「唐懿宗鹹通元年」, “時二浙久安, 人不習戰, 甲兵朽鈍, 見卒不滿三百”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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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 가로 충당하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변방의 후예가 화하(華夏)를 어지럽히지 않으며 차츰차츰 평양(平陽), 홍농(弘農), 위군(魏郡), 경조(京兆), 상당(上黨) 주 003
각주 003)
上黨:郡名. 戰國時代 韓에서 처음 설치하였다. 그 치소는 壺關縣(지금의 山西省 동남부의 長治市 북방)이었다. 전한시대에는 치소를 長子縣(지금의 山西省 長治市 서쪽에 있는 長子縣 서남부)으로 옮겼다. 후한 말기에는 치소를 다시 壺關縣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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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는 여러 오랑캐를 천사하고 사이의 출입을 엄격히 하여 대비하고 선왕이 황복 제도를 두신 뜻을 분명히 한다면, 만세를 위한 대책이 될 것입니다.”
황제는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강(太康) 5년(284)에 또다시 흉노호(匈奴胡) 태아후(太阿厚)가 그 부락 9, 300명을 이끌고 귀화하였다. 7년에는 흉노호 도대박(都大博)과 위사호(萎莎胡) 등이 자기 부족의 대소 10만여 구를 이끌고 옹주자사(雍州刺史) 부풍(扶風) 왕준(王駿)에게 투항하였다. 다음 해 흉노 도독인 대두득일육국(大豆得一育鞠) 등이 또다시 자기 부족 부락의 대소 11, 500구와 소 2, 200두, 양 15, 000마리, 이동마차와 집기는 셀 수 없을 만큼 가지고 투항하였다. 투항하면서 그 지방의 산물을 아울러 함께 바치니 황제가 이 모두를 위무하며 받아들였다.

  • 각주 001)
    長史:丞相의 屬官으로 文帝 2년에 일시적으로 두 명의 長史를 두었다. 長史는 相府의 일을 總管하였고 秩은 1千石이었다. 三公은 모두 長史를 두어 그의 보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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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見士:사전에 보이지 않지만 이와 비슷한 용례로 見卒이 있다. 見卒이란 현재 남아 있는 병졸을 말한다. 『戰國策』 「韓策一」, “爲除守徼亭鄣塞, 見卒不過二十萬而已矣”와 『資治通鑒』 「唐懿宗鹹通元年」, “時二浙久安, 人不習戰, 甲兵朽鈍, 見卒不滿三百”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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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上黨:郡名. 戰國時代 韓에서 처음 설치하였다. 그 치소는 壺關縣(지금의 山西省 동남부의 長治市 북방)이었다. 전한시대에는 치소를 長子縣(지금의 山西省 長治市 서쪽에 있는 長子縣 서남부)으로 옮겼다. 후한 말기에는 치소를 다시 壺關縣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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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무제(武帝), 맹(猛), 무제(武帝), 누후(婁侯), 하정(何楨), 하정, , , 이각(李恪), , 곽흠(郭欽), 왕준(王駿), 대두득일육국(大豆得一育鞠)
지명
, 하서(河西), 의양성(宜陽城), , 평양(平陽), 서하(西河), 태원(太原), 신흥(新興), 상당(上黨), 악평(樂平), 공야성(孔邪城), 서하(西河), 위(魏), 평양(平陽), 상당(上黨), 맹진(孟津), 북지(北地), 서하(西河), 태원(太原), 풍익(馮翊), 안정(安定), 상군(上郡), 오(吳), 북지(北地), 서하(西河), 안정(安定), 상군(上郡), 풍익(馮翊), 평양(平陽), 평양(平陽), 홍농(弘農), 위군(魏郡), 경조(京兆), 상당(上黨), 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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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가 중원지역으로 귀화한 뒤 우환이 되기도 했으나 이후에도 황제가 받아들이며 위무함 자료번호 : jo.k_0005_0097_01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