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목이가 홍무제의 성덕의 관대함을 찬탄하여 올린 표(表)에 대한 글
[홍무] 27년(1394) 8월에 첩목아가 말 200마리를 바쳤다.주 001 [이때 올린] 표(表)주 002
각주 002)
에서 아뢰기를, “삼가 생각하옵건대, 대명(大明)의 위대한 황제께서 하늘로부터 성명(聖明)의 천명(天命)을 받아 사해(四海)주 003를 통일하고 인덕(仁德)을 널리 펼쳐 은혜로 만물을 기르시니, 만국(萬國)이 기쁜 마음으로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하늘이 천하를 태평하게 하려고 특별히 황제에게 명하여 나아가 기운(氣運)을 받아 만민의 군주가 되게 하셨음은 모두가 아는 바입니다. 광명(光明)의 광대(廣大)함은 그 밝기가 하늘의 거울과 같아서 원근(遠近)을 막론하고 모두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신(臣) 첩목아는 만 리(萬里) 밖의 벽지(僻地)에 있지만, 삼가 성덕(聖德)의 관대함이 만고(萬古)주 004를 뛰어넘는다고 들었습니다. 옛날부터 [다시] 없던 복을 황제께서 모두 가지고 계십니다. 아직 복속하지 않은 나라를 황제께서 모두 복속시키셨습니다. 매우 먼 지방의 어두컴컴한 땅도 모두 청명(淸明)하게 하셨습니다. 나이 많은 자들은 편안하고 즐겁지 않음이 없고, 나이 적은 자들은 생장하고 육성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선한 자들은 복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고, 악한 자들은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다시 특별히 원국(遠國)에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중국에 온 모든 상인들로 하여금 도읍(都邑)과 성지(城池)가 부귀하고 웅장함을 보게 하여, 마치 어리석고 암담한 가운데에서 홀연히 하늘의 태양을 목도한 듯하니, 어떠한 행운이 이와 같겠습니까! 또 받은 칙서(勅書)에서 은혜로 어루만져주시고 위로해주시면서 역참(驛站)주 005을 서로 통하게 하여 도로가 막히지 않게 함으로써 원국(遠國)의 사람들이 모두 혜택을 입었습니다. 삼가 성심(聖心)을 우러러보니 마치 세상을 비추는 잔과 같아서 신(臣)의 마음이 활짝 뚫린 듯 밝아집니다. 신의 나라 안의 부락이 이러한 덕음(德音)주 006을 듣고서 기쁜 마음으로 춤을 추고 감격하며 경애(敬愛)하고 있습니다. 신은 은혜에 보답할 방법이 없어, 다만 하늘을 우러러보며 성상(聖上)의 만수(萬壽)와 복록(福祿)이 마치 천지(天地)가 영원히 끝이 없는 듯하기만을 축원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세상을 비추는 잔주 007이란 것은, 그 나라의 구전(舊傳)에 밝은 빛을 내어 [사물을] 꿰뚫는 잔이 있어, 이를 비추면 세상의 일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일컫는 것이다.주 008
홍무제가 이 표(表)를 보고는 문장이 뛰어남을 가상히 여겼다. 이듬해(1395)에 급사중(給事中)주 009
부안(傅安)
주 010表: 謝恩, 축하, 청원 등의 목적으로 황제에게 올리는 외교문서의 일종으로서 表文이라고도 한다. 明 초기에 表文 등이 실제로 朝鮮과 明朝 사이에 외교적인 알력을 야기한 실상에 대해서는 朴元熇, 2002: 6~30 참조. 한편 明朝 내부에서 황제에게 바치는 문서도 表文이라 하였다. 洪武 14년(1381)에 進賀表箋禮儀를 정하였는데, 황제의 생일인 天壽聖節·正旦·冬至에 在外 각 아문은 미리 상주문, 즉 表文을 바치고 賀禮하였고, 天壽聖節인 경우에는 在外 5品 이상의 衙門은 단지 表文 1통을 바치며, 正旦과 冬至에는 中宮과 皇太子에게 箋文 각 1통을 더 바쳤다.
각주 010)
등에게 명하여 새서(璽書)주 011·폐백(幣帛)주 012을 가지고 가서 보답토록 했다. 그들이 공물로 바치는 말이 1년에 두 번 이르렀는데, 매번 천(千)을 헤아렸고, 아울러 보초(寶鈔)주 013傅安(?~1429): 河南 太康人으로, 字는 志道이다. 四夷館 通事舍人, 鴻臚寺 序班을 거쳐 洪武 27년(1394)에 兵科給事中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禮科給事中에 개임되었다. 이후 조정의 명을 받고 撤馬兒罕에 출사하였으나 明朝로의 出征을 준비 중이던 티무르칸에게 구류되어 10여 년간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撤馬兒罕의 티무르가 죽고 그의 손자 哈里가 繼位하자 돌아올 수 있었는데, 永樂 5년(1407) 여름에 京師에 이르렀다. 이후로도 別失八里 등으로 사행을 다녀왔는데, 宣德 4년(1429)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給事中으로 재임하던 32년 동안 21년을 중앙아시아에서 지낸 셈인데, 明 조정에서도 그의 공로를 表彰하기 위하여 仁宗이 특별히 파격적으로 勅命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각주 013)
를 내려주어 보상해주었다.寶鈔: 明代의 법정 통용지폐인 大明通行寶鈔를 가리킨다. 明朝는 洪武 7년(1374)에 寶鈔提擧司를 설치하고, 이듬해(1375)에 大明寶鈔를 만들어 민간에 통행시켰다. 桑穰, 즉 뽕나무 가지껍질로 만든 섬유를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모양은 네모였고, 높이는 1척, 폭은 6촌이었으며, 바탕은 청색이고, 바깥은 용의 문양과 꽃무늬였다. 횡으로 그 額面에 ‘大明通行寶鈔’라 쓰고, 그 안의 상변 양쪽에 篆文으로 ‘大明寶鈔天下通行’이라 썼다. 가운데에는 동전꾸러미를 그려 넣었는데, 10串을 1貫으로 삼았다. 등급은 모두 여섯으로 1관, 500문, 400문, 300문, 200문, 100문이었다. 처음에는 中書省으로 하여금 주조를 전담케 했으나, 中書省이 철폐된 뒤에는 戶部에서 만들도록 하였다. 보초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朴元熇 등 역, 『명사식화지 역주』(2008: 314~319) 참조.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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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表: 謝恩, 축하, 청원 등의 목적으로 황제에게 올리는 외교문서의 일종으로서 表文이라고도 한다. 明 초기에 表文 등이 실제로 朝鮮과 明朝 사이에 외교적인 알력을 야기한 실상에 대해서는 朴元熇, 2002: 6~30 참조. 한편 明朝 내부에서 황제에게 바치는 문서도 表文이라 하였다. 洪武 14년(1381)에 進賀表箋禮儀를 정하였는데, 황제의 생일인 天壽聖節·正旦·冬至에 在外 각 아문은 미리 상주문, 즉 表文을 바치고 賀禮하였고, 天壽聖節인 경우에는 在外 5品 이상의 衙門은 단지 表文 1통을 바치며, 正旦과 冬至에는 中宮과 皇太子에게 箋文 각 1통을 더 바쳤다.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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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0)
傅安(?~1429): 河南 太康人으로, 字는 志道이다. 四夷館 通事舍人, 鴻臚寺 序班을 거쳐 洪武 27년(1394)에 兵科給事中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禮科給事中에 개임되었다. 이후 조정의 명을 받고 撤馬兒罕에 출사하였으나 明朝로의 出征을 준비 중이던 티무르칸에게 구류되어 10여 년간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撤馬兒罕의 티무르가 죽고 그의 손자 哈里가 繼位하자 돌아올 수 있었는데, 永樂 5년(1407) 여름에 京師에 이르렀다. 이후로도 別失八里 등으로 사행을 다녀왔는데, 宣德 4년(1429)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給事中으로 재임하던 32년 동안 21년을 중앙아시아에서 지낸 셈인데, 明 조정에서도 그의 공로를 表彰하기 위하여 仁宗이 특별히 파격적으로 勅命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 각주 011)
- 각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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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3)
寶鈔: 明代의 법정 통용지폐인 大明通行寶鈔를 가리킨다. 明朝는 洪武 7년(1374)에 寶鈔提擧司를 설치하고, 이듬해(1375)에 大明寶鈔를 만들어 민간에 통행시켰다. 桑穰, 즉 뽕나무 가지껍질로 만든 섬유를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모양은 네모였고, 높이는 1척, 폭은 6촌이었으며, 바탕은 청색이고, 바깥은 용의 문양과 꽃무늬였다. 횡으로 그 額面에 ‘大明通行寶鈔’라 쓰고, 그 안의 상변 양쪽에 篆文으로 ‘大明寶鈔天下通行’이라 썼다. 가운데에는 동전꾸러미를 그려 넣었는데, 10串을 1貫으로 삼았다. 등급은 모두 여섯으로 1관, 500문, 400문, 300문, 200문, 100문이었다. 처음에는 中書省으로 하여금 주조를 전담케 했으나, 中書省이 철폐된 뒤에는 戶部에서 만들도록 하였다. 보초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朴元熇 등 역, 『명사식화지 역주』(2008: 314~319) 참조.
색인어
- 이름
- 첩목아, 첩목아, 홍무제, 부안(傅安)
- 지명
-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