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契丹)의 선조는 고막해와 다른 부족이나 같은 종족이며 무례하고 어리석음은 오랑캐들 중 가장 심함
거란(契丹)
주 001의 선조는 고막해와 다른 부족이나 같은 종족주 002
각주 002)
이며,주 003모두 모용씨
주 004에게 격파당하여 송막(松漠)의 사이로 모두 달아났다. 그 후 점차 [세력이] 강대해졌으며 황룡(黃龍)
주 005의 북쪽 수백리에서 살았다. 그 풍속은 자못 말갈(靺鞨)과 같다. 도둑질하기를 좋아한다. 부모가 죽어서 슬프게 우는 것을 씩씩하지 않다고 여기지만, 그러나 그 시신을 산의 나무 위에 두었다가 3년이 지난 후, 이에 그 뼈를 거두어 불태운다.주 006술을 따르고 빌며 말하기를 “겨울철에는 태양을 향해 [따뜻한 곳에서] 먹[을 것을 구하]게 하소서.주 007만약 제가 사냥을 할 때면 저로 하여금 돼지와 사슴을 많이 얻게 하소서.”라 하였다. 그 무례함과 둔하고 어리석음은 여러 오랑캐들 중에서 가장 심하다.契丹人의 종족계통에 관한 기록은 ① 匈奴種 혹은 그 遺種: 『舊五代史』·『冊府元龜』·『宋會要輯稿』 ② 東胡種: 『新唐書』·『玉海』·『文獻通考』 ③ 鮮卑의 遺種: 『新五代史』 의 3종류로 구분된다. 契丹人과 庫莫奚인의 種族系統에 대한 기록이 사서마다 다르고, 심지어 동일한 시기에 편찬된 사서에서 조차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요인은 크게 3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後漢 和帝 永元 年間(89∼104) 北匈奴가 後漢軍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달아난 뒤, 鮮卑가 匈奴의 옛땅을 점령하자 거기에 머물러 있던 匈奴餘種 十餘萬落 모두 스스로 鮮卑라 칭했다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유목민들은 그 스스로도 종족의식이 분명하지 않았거니와 동시에 종족 융합이 많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둘째, 奚를 일반적으로 突厥族과 그 종족계통이 다르다고 보는 東胡種 또는 匈奴種의 계통이라고 기록한 중국사서에서 이들이 水草를 따라 항상 이동하면서 유목하는 모습을 보고 奚가 突厥과 풍속이 같다고 기록한 것이라든가, 종족은 물론 풍속·관습·사회조직 등이 다른 契丹과 靺鞨의 풍속이 같다고 기록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인의 눈에는 중국 북방의 제 종족의 생활풍습이 비슷해 보였을 뿐만이 아니라 외모에서도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이들의 종족계통을 구분한다는 것은 그대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 위의 원인으로 인하여 修史者들이 근거한 前代 기록에 대해 명확한 고증 없이 이전의 기록을 그대로 轉寫하거나 史書를 편찬할 당시의 庫莫奚와 契丹의 부락위치만을 보고 추단했기 때문일 것이다(李在成, 1996: 60∼61). 따라서 이들의 종족계통에 대해서는 대체로 庫莫奚와 契丹 모두를 東胡의 후예로서 鮮卑種 또는 鮮卑 宇文部의 일파라고 주장하거나(白鳥庫吉, 1912: 1113), 일부학자들은 頭髮 형태와 葬禮 풍속의 고찰을 통해 契丹人을 匈奴와 鮮卑의 混血種으로 간주하기도 한다(李涵·沈學明, 1985).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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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契丹人의 종족계통에 관한 기록은 ① 匈奴種 혹은 그 遺種: 『舊五代史』·『冊府元龜』·『宋會要輯稿』 ② 東胡種: 『新唐書』·『玉海』·『文獻通考』 ③ 鮮卑의 遺種: 『新五代史』 의 3종류로 구분된다. 契丹人과 庫莫奚인의 種族系統에 대한 기록이 사서마다 다르고, 심지어 동일한 시기에 편찬된 사서에서 조차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요인은 크게 3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後漢 和帝 永元 年間(89∼104) 北匈奴가 後漢軍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달아난 뒤, 鮮卑가 匈奴의 옛땅을 점령하자 거기에 머물러 있던 匈奴餘種 十餘萬落 모두 스스로 鮮卑라 칭했다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유목민들은 그 스스로도 종족의식이 분명하지 않았거니와 동시에 종족 융합이 많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둘째, 奚를 일반적으로 突厥族과 그 종족계통이 다르다고 보는 東胡種 또는 匈奴種의 계통이라고 기록한 중국사서에서 이들이 水草를 따라 항상 이동하면서 유목하는 모습을 보고 奚가 突厥과 풍속이 같다고 기록한 것이라든가, 종족은 물론 풍속·관습·사회조직 등이 다른 契丹과 靺鞨의 풍속이 같다고 기록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인의 눈에는 중국 북방의 제 종족의 생활풍습이 비슷해 보였을 뿐만이 아니라 외모에서도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이들의 종족계통을 구분한다는 것은 그대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 위의 원인으로 인하여 修史者들이 근거한 前代 기록에 대해 명확한 고증 없이 이전의 기록을 그대로 轉寫하거나 史書를 편찬할 당시의 庫莫奚와 契丹의 부락위치만을 보고 추단했기 때문일 것이다(李在成, 1996: 60∼61). 따라서 이들의 종족계통에 대해서는 대체로 庫莫奚와 契丹 모두를 東胡의 후예로서 鮮卑種 또는 鮮卑 宇文部의 일파라고 주장하거나(白鳥庫吉, 1912: 1113), 일부학자들은 頭髮 형태와 葬禮 풍속의 고찰을 통해 契丹人을 匈奴와 鮮卑의 混血種으로 간주하기도 한다(李涵·沈學明, 1985).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색인어
- 지명
- 거란(契丹), 고막해, 모용씨, 송막(松漠), 황룡(黃龍), 말갈(靺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