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거란(契丹)의 선조는 고막해와 다른 부족이나 같은 종족이며 무례하고 어리석음은 오랑캐들 중 가장 심함

  • 국가
    거란(契丹)
거란(契丹) 주 001
각주 001)
契丹: 지금의 遼河 상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목축활동을 하며 북위시기 자칭 거란이라 하였다. 4∼10세기 이 지역에서 庫莫奚와 함께 양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풍속은 대부분 突厥과 비슷했고, 唐代에는 8部로 나뉘어 있었는데, 唐末 迭剌部의 수령 阿保機가 부락을 통일하고 916년 遼를 건국했으며, 北宋 宣和 7년(1125) 여진의 금나라에 멸망당했다.
닫기
의 선조는 고막해와 다른 부족이나 같은 종족주 002
각주 002)
契丹人의 종족계통에 관한 기록은 ① 匈奴種 혹은 그 遺種: 『舊五代史』·『冊府元龜』·『宋會要輯稿』 ② 東胡種: 『新唐書』·『玉海』·『文獻通考』 ③ 鮮卑의 遺種: 『新五代史』 의 3종류로 구분된다. 契丹人과 庫莫奚인의 種族系統에 대한 기록이 사서마다 다르고, 심지어 동일한 시기에 편찬된 사서에서 조차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요인은 크게 3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後漢 和帝 永元 年間(89∼104) 北匈奴가 後漢軍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달아난 뒤, 鮮卑가 匈奴의 옛땅을 점령하자 거기에 머물러 있던 匈奴餘種 十餘萬落 모두 스스로 鮮卑라 칭했다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유목민들은 그 스스로도 종족의식이 분명하지 않았거니와 동시에 종족 융합이 많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둘째, 奚를 일반적으로 突厥族과 그 종족계통이 다르다고 보는 東胡種 또는 匈奴種의 계통이라고 기록한 중국사서에서 이들이 水草를 따라 항상 이동하면서 유목하는 모습을 보고 奚가 突厥과 풍속이 같다고 기록한 것이라든가, 종족은 물론 풍속·관습·사회조직 등이 다른 契丹과 靺鞨의 풍속이 같다고 기록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인의 눈에는 중국 북방의 제 종족의 생활풍습이 비슷해 보였을 뿐만이 아니라 외모에서도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이들의 종족계통을 구분한다는 것은 그대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 위의 원인으로 인하여 修史者들이 근거한 前代 기록에 대해 명확한 고증 없이 이전의 기록을 그대로 轉寫하거나 史書를 편찬할 당시의 庫莫奚와 契丹의 부락위치만을 보고 추단했기 때문일 것이다(李在成, 1996: 60∼61). 따라서 이들의 종족계통에 대해서는 대체로 庫莫奚와 契丹 모두를 東胡의 후예로서 鮮卑種 또는 鮮卑 宇文部의 일파라고 주장하거나(白鳥庫吉, 1912: 1113), 일부학자들은 頭髮 형태와 葬禮 풍속의 고찰을 통해 契丹人을 匈奴와 鮮卑의 混血種으로 간주하기도 한다(李涵·沈學明, 1985).
닫기
이며,주 003
각주 003)
『魏書』와 『遼史』의 기록을 기초로 고막해와 거란이 북위시기부터 언어가 동일하여 300∼400년 후에도 여전히 언어가 상통하였다는 점에서 異種=異部, 同類=同一한 種族을 가리키며, 이에 따라 고막해인과 거란인은 동일한 種族(species)이지만 部族(tribes)을 달리하는 관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고막해와 거란이 정치적인 면에서는 다른 세력이지만 종족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계통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王民信, 1971: 26)
닫기
모두 모용씨 주 004
각주 004)
앞서 奚에 관한 기록과 마찬가지로 前燕(337∼370)의 太祖 慕容皝을 가리킨다.
닫기
에게 격파당하여 송막(松漠)의 사이로 모두 달아났다. 그 후 점차 [세력이] 강대해졌으며 황룡(黃龍) 주 005
각주 005)
黃龍: 和龍을 가리킨다. 즉 龍城. 지금의 遼寧省 朝陽縣에 있다. 東晉 咸康 7년(341) 慕容皝이 龍城을 축조하고 이곳으로 천도하고, 新宮을 和龍宮이라 이름 붙였다. 義熙 5년(409) 馮跋이 이곳에 北燕을 세웠다. 北魏 太延 2년(436) 城을 공격하고 和龍鎭을 세웠다. 太平眞君 5년(444) 營州로 바꾸어 설치하였다.
닫기
의 북쪽 수백리에서 살았다. 그 풍속은 자못 말갈(靺鞨)과 같다. 도둑질하기를 좋아한다. 부모가 죽어서 슬프게 우는 것을 씩씩하지 않다고 여기지만, 그러나 그 시신을 산의 나무 위에 두었다가 3년이 지난 후, 이에 그 뼈를 거두어 불태운다.주 006
각주 006)
이러한 장례 방법을 天葬, 風葬 또는 鳥葬이라고 하며 7세기 초까지 행해졌다. 근래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遼代의 황실 및 귀족을 비롯한 지배층은 土葬 즉 埋葬의 형태로 바뀌었고, 초기에는 棺槨이 없는 것도 있지만, 후기로 가면서 磚墓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닫기
술을 따르고 빌며 말하기를 “겨울철에는 태양을 향해 [따뜻한 곳에서] 먹[을 것을 구하]게 하소서.주 007
각주 007)
『北史』의 내용과는 동일하나, 『通典』 권200 「邊防」 16 〈契丹〉: 5485에는 “夏月時, 向陰食”이 더 있다.
닫기
만약 제가 사냥을 할 때면 저로 하여금 돼지와 사슴을 많이 얻게 하소서.”라 하였다. 그 무례함과 둔하고 어리석음은 여러 오랑캐들 중에서 가장 심하다.

  • 각주 001)
    契丹: 지금의 遼河 상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목축활동을 하며 북위시기 자칭 거란이라 하였다. 4∼10세기 이 지역에서 庫莫奚와 함께 양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풍속은 대부분 突厥과 비슷했고, 唐代에는 8部로 나뉘어 있었는데, 唐末 迭剌部의 수령 阿保機가 부락을 통일하고 916년 遼를 건국했으며, 北宋 宣和 7년(1125) 여진의 금나라에 멸망당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契丹人의 종족계통에 관한 기록은 ① 匈奴種 혹은 그 遺種: 『舊五代史』·『冊府元龜』·『宋會要輯稿』 ② 東胡種: 『新唐書』·『玉海』·『文獻通考』 ③ 鮮卑의 遺種: 『新五代史』 의 3종류로 구분된다. 契丹人과 庫莫奚인의 種族系統에 대한 기록이 사서마다 다르고, 심지어 동일한 시기에 편찬된 사서에서 조차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요인은 크게 3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後漢 和帝 永元 年間(89∼104) 北匈奴가 後漢軍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달아난 뒤, 鮮卑가 匈奴의 옛땅을 점령하자 거기에 머물러 있던 匈奴餘種 十餘萬落 모두 스스로 鮮卑라 칭했다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유목민들은 그 스스로도 종족의식이 분명하지 않았거니와 동시에 종족 융합이 많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둘째, 奚를 일반적으로 突厥族과 그 종족계통이 다르다고 보는 東胡種 또는 匈奴種의 계통이라고 기록한 중국사서에서 이들이 水草를 따라 항상 이동하면서 유목하는 모습을 보고 奚가 突厥과 풍속이 같다고 기록한 것이라든가, 종족은 물론 풍속·관습·사회조직 등이 다른 契丹과 靺鞨의 풍속이 같다고 기록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인의 눈에는 중국 북방의 제 종족의 생활풍습이 비슷해 보였을 뿐만이 아니라 외모에서도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이들의 종족계통을 구분한다는 것은 그대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 위의 원인으로 인하여 修史者들이 근거한 前代 기록에 대해 명확한 고증 없이 이전의 기록을 그대로 轉寫하거나 史書를 편찬할 당시의 庫莫奚와 契丹의 부락위치만을 보고 추단했기 때문일 것이다(李在成, 1996: 60∼61). 따라서 이들의 종족계통에 대해서는 대체로 庫莫奚와 契丹 모두를 東胡의 후예로서 鮮卑種 또는 鮮卑 宇文部의 일파라고 주장하거나(白鳥庫吉, 1912: 1113), 일부학자들은 頭髮 형태와 葬禮 풍속의 고찰을 통해 契丹人을 匈奴와 鮮卑의 混血種으로 간주하기도 한다(李涵·沈學明, 1985).
     바로가기
  • 각주 003)
    『魏書』와 『遼史』의 기록을 기초로 고막해와 거란이 북위시기부터 언어가 동일하여 300∼400년 후에도 여전히 언어가 상통하였다는 점에서 異種=異部, 同類=同一한 種族을 가리키며, 이에 따라 고막해인과 거란인은 동일한 種族(species)이지만 部族(tribes)을 달리하는 관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고막해와 거란이 정치적인 면에서는 다른 세력이지만 종족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계통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王民信, 1971: 26)
     바로가기
  • 각주 004)
    앞서 奚에 관한 기록과 마찬가지로 前燕(337∼370)의 太祖 慕容皝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5)
    黃龍: 和龍을 가리킨다. 즉 龍城. 지금의 遼寧省 朝陽縣에 있다. 東晉 咸康 7년(341) 慕容皝이 龍城을 축조하고 이곳으로 천도하고, 新宮을 和龍宮이라 이름 붙였다. 義熙 5년(409) 馮跋이 이곳에 北燕을 세웠다. 北魏 太延 2년(436) 城을 공격하고 和龍鎭을 세웠다. 太平眞君 5년(444) 營州로 바꾸어 설치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6)
    이러한 장례 방법을 天葬, 風葬 또는 鳥葬이라고 하며 7세기 초까지 행해졌다. 근래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遼代의 황실 및 귀족을 비롯한 지배층은 土葬 즉 埋葬의 형태로 바뀌었고, 초기에는 棺槨이 없는 것도 있지만, 후기로 가면서 磚墓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北史』의 내용과는 동일하나, 『通典』 권200 「邊防」 16 〈契丹〉: 5485에는 “夏月時, 向陰食”이 더 있다.
     바로가기

색인어
지명
거란(契丹), 고막해, 모용씨, 송막(松漠), 황룡(黃龍), 말갈(靺鞨)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거란(契丹)의 선조는 고막해와 다른 부족이나 같은 종족이며 무례하고 어리석음은 오랑캐들 중 가장 심함 자료번호 : jo.k_0013_0084_005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