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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배구의 계책을 따라 사궤(射匱)가한을 부추겨 처라가한을 치도록 하니 처라가 마지 못해 조정에 들어감

  • 국가
    서돌궐(西突厥)
황제가 서쪽으로 순수(巡狩)하면서주 001
각주 001)
隋 煬帝는 14년의 재위기간 동안 8차례 巡幸을 했는데, 그 가운데 西巡이 한 번 있었다. 大業 5년(609) 삼월에 河右로 巡幸에 나선 煬帝는 사월에 臨津關을 나가 黃河를 넘고 西平郡에 이르러 군대를 정비하고 講武 즉,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오월 초에는 延拔山(지금 靑海省 化隆縣)에서 대규모 사냥하고, 하순에는 吐谷渾 국경과 가까운 곳까지 갔다. 유월 중순에는 張掖을 거쳐 燕支山에 이르러 高昌과 吐谷渾 등 西域 27개 國의 王과 使者로부터 朝覲을 받고 몇 차례에 걸쳐 연회를 열어주었다. 귀환 길에는 大斗拔谷을 거쳐 돌아왔다. 西巡은 吐谷渾의 정벌 혹은 복속과 비단길의 疏通 및 상업무역의 발달을 촉진시키려는 두 가지 목적 하에 수행되었다(何平立, 2003: 281 및 292∼297). 『通典』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煬帝大業六年, 帝將西討吐谷渾(『通典』 권199 「邊防」 15 〈北狄〉 6 突厥下 西突厥: 5453)”이라 해 단순한 西巡이 아니라 吐谷渾에 대한 親征에 목적이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丁載勳, 2004: 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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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업] 6년(610)주 002
각주 002)
저본의 “六年”은 “五年” 혹은 “六月”의 잘못된 기록인 듯하다. 저본의 「煬帝紀」와 「食貨志」에 따르면 煬帝의 西巡은 大業 5년(609)의 일이었다. 특히, 大斗拔谷에 간 것은 大業 5년 6월이었다(『隋書』 권3 「煬帝紀」 상 〈大業五年六月條〉: 73, “癸卯, 經大斗拔谷, 山路隘險, 魚貫而出. 風霰晦冥, 與從官相失, 士卒凍死者太半.”; 『隋書』 권24 「食貨志」: 687, “五年, 西巡河右. 西域諸胡, 佩金玉, 被錦罽, 焚香奏樂, 迎候道左. 帝乃令武威·張掖士女, 盛飾縱觀. 衣服車馬不鮮者, 州縣督課, 以誇示之. 其年, 帝親征吐谷渾, 破之於赤水. 慕容佛允, 委其家屬, 西奔靑海. 帝駐兵不出, 遇天霖雨, 經大斗拔谷, 士卒死者十二三焉, 馬驢十八九. 於是置河源郡·積石鎭. 又於西域之地, 置西海·鄯善·且末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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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시어사(侍御史)주 003
각주 003)
侍御史: 周代에는 柱下史라 칭했는데, 秦代에 侍御史라 改稱되었다. 秦漢時代에 三公의 하나인 御史大夫의 屬官이며 감찰업무를 담당했다. 曹魏시대에 持書侍御史가 설치되었는데, 北齊時代에 治書侍御史로 改稱되었다. 隋代에는 治書侍御史가 御史大夫의 次官이 되어 中丞의 역할을 담당했고, 그 아래에 侍御史와 監察御史, 御史 등의 관직이 있었다. 唐代에 治書侍御史를 御史中丞으로 고쳤다. 御史臺를 臺院, 殿院, 察院으로 분류할 때 侍御史는 臺院에 예속되었고 御史大夫의 통솔 아래 직무를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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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절(韋節) 주 004
각주 004)
韋節: 隋代의 관리로 煬帝시기에 侍御史가 되어 詔書를 받들고 오아시스지역에 있는 국가에 出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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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 [이궐]처라[가한]을 불러 황제[車駕]와 대두발곡(大斗拔谷) 주 005
각주 005)
大斗拔谷: 산골짜기의 이름으로 달리 達斗拔谷 혹은 大斗谷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甘肅省 民樂縣 동남쪽과 甘肅省, 그리고 靑海省의 交界地域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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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만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그 국인들이 [이런 명령에] 따르려고 하지 않자 [이궐]처라[가한]이 사자에게 사죄하며 다른 이유를 들어 변명했다. 황제가 크게 화를 냈지만 어떻게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 마침 그의 추장 사궤[가한](射匱可汗) 주 006
각주 006)
射匱可汗(?∼615 혹은 618): 고대 투르크어로 ‘야브구 카간(Yabghu qaghan)’의 음사로 추정된다. 西突厥의 可汗이며 達頭可汗의 孫子였다. 처음에 泥撅處羅可汗과 서로 다퉈 사신을 隋나라에 보내 請婚했다. 隋나라는 裴矩의 계책을 써서 射匱를 可汗으로 봉하고 泥撅處羅可汗을 공격하게 해 隋나라에 항복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 大業 7년(611)에 자립해 射匱可汗이 되었고 龜玆 북쪽의 三彌山(지금 新疆維吾爾自治區 庫車 일대)에 牙帳을 세웠다. 薛延陀와 契苾 두 부락을 정복해 영역이 동쪽으로 알타이 산맥[金山]으부터 西海(지금 카스피 해, 일설에는 아랄 해)에 이르렀다. 大業 11년(615)에 조카를 파견해 隋나라에 조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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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신을 보내 청혼했다. 배구가 이에 [대책을] 상주했다. “[이궐]처라[가한]이 조공을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강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소신이 청하는 계책으로 그를 약화시키고 그 나라를 분열시킨다면 바로 쉽게 제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궤[가한]이라는 자는 도륙(都六) 주 007
각주 007)
都六: 고대 투르크어로 ‘퇴뤼(Törü)’의 음사로 추정되는데, 西突厥의 酋長으로 達頭可汗의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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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아들로 달두[가한]의 손자인데,주 008
각주 008)
『通典』의 기록에는 射匱가 可汗이 되지 못한 이유를 “達頭가 예전에 西面可汗이 되었는데, 처음에 沙鉢略可汗과 사이가 좋지 않아 드디어 나뉘어 다른 부락이 되었다. 東突厥의 可汗 雍虞閭가 죽은 후에 자립해 步迦可汗이 되었다. 達頭가 죽은 후에 達頭의 손자인 射匱가 미약해 可汗이 되지 못했다.”라고 설명했다(『通典』 권199 「邊防」 15 〈北狄〉 6 突厥下 西突厥: 5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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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로 가한이 되어 서면(西面) 주 009
각주 009)
西面: 고대 투르크어 ‘타르두쉬(tardush)’의 번역으로 추정된다. 射匱可汗의 祖父 達頭可汗과 曾祖 室點密이 西突厥의 可汗이었으므로 西面, 즉 西突厥을 지배했다고 묘사한 것이다. 西面은 일반적으로 突厥이 분열되기 이전 알타이산맥[金山] 이서 지역의 突厥 영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가 그 이후 東, 西突厥이 분열하고 大可汗을 칭하게 되면서 그 이후에 西突厥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실제 분열 이전에는 大可汗 이외에 突厥 내부에 각 방향에 따라 東, 西, 南, 北面에 각각 小可汗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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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군림했습니다. 지금 듣자하니 그가 [가한의] 자리를 잃고 [이궐]처라[가한]에게 복속되어 있기 때문에 사자를 보내 [우리와] 도움을 받는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원컨대 그 사신을 후히 예우하시고 [사궤가한을] 대가한(大可汗)주 010
각주 010)
大可汗은 突厥 전체를 통솔하는 君主를 의미하는데, 隋나라에서 突厥의 大可汗인 東突厥에 대응하는 지위를 西突厥의 可汗에 줌으로써 突厥을 둘로 분열시키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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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임명하신다면 돌궐 세력이 쪼개져 두 세력이 우리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공의 말이 옳도다.” [황제가] 이에 배구를 아침과 저녁으로 [빈]관에 보내 조금씩 돌려 말하며 설득했다. 황제가 인풍전(仁風殿) 주 011
각주 011)
仁風殿: 大興城 皇城 내에 있었던 殿閣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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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그 사자를 불러 [이궐]처라[가한]이 [중국에] 따르지 않으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사궤[가한]이 [중국에] 좋은 마음을 갖고 있다는 점을 칭찬하[며 말하]였다. “짐이 장차 [사궤가한을] 대가한으로 세우고 군대를 일으켜 [이궐]처라[가한]을 주살하라고 명령한 다음에야 마땅히 혼인을 맺게 할 것이다.”주 012
각주 012)
저본에는 이 구절 앞뒤에 인용문 부호가 없으나 “吾將立爲大可汗, 令發兵誅處羅, 然後當爲婚也.”에 ‘吾’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직접 인용문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기 때문에 번역문에서는 이를 감안해 직접 인용문으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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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황제가 도죽백우전(桃竹白羽箭)주 013
각주 013)
桃竹白羽箭: 桃竹에 白色의 새 깃털을 장식해 만든 화살이다. 桃竹은 대나무의 일종이며, 質地에서 堅實해 화살을 만들거나 手杖, 編石을 만드는 좋은 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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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를 가져오게 해서 사궤[가한의 사자]에게주 014
각주 014)
저본은 “帝取桃竹白羽箭一枝以賜射匱”인데, 射匱可汗이 煬帝를 직접 만난 것이 아니므로 射匱可汗이 아니라 射匱可汗이 보낸 사자가 桃竹白羽箭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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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주면서 말했다. “이 일은 마땅히 서둘러야 하니 사자는 [이] 화살처럼 빨리 움직여라.”
[사궤가한의] 사자가 돌아가다가 [이궐]처라[가한의 처소]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궐]처라[가한]이 [도죽백우]전을 좋아해 사자를 머무르게 하고자 하니 사자가 [이궐처라가한을] 속여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궤[가한]은 [사자가 전한 황제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해 군대를 일으켜 습격하자 [이궐]처라[가한]이 크게 패해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좌우에 수천 명의 기병만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달아나던] 길에서 또 약탈을 당했고, 고창(高昌)의 동쪽으로 도망가 시라만산(時羅漫山) 주 015
각주 015)
時羅漫山: 산 이름으로 折羅漫山이라고도 한다. 지금 新疆維吾爾自治區 境內에 위치한 天山山脈의 한 봉우리를 지칭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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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숨어 있었다. 고창왕 국백아(麴伯雅) 주 016
각주 016)
麴伯雅: 金城郡 楡中縣(지금 甘肅省 楡中縣 서북쪽) 사람이며, 麴嘉의 손자였다. 麴堅을 계승해 高昌王으로 즉위했다. 먼저 突厥에 臣屬했다가 후에 隋나라에 투항해 弁國公에 봉해지고 光祿大夫를 제수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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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장계를 올리자 황제가 배구에게 상씨, 친요(親要),주 017
각주 017)
親要는 親信과 顯要의 약칭이다. 親信은 가까이 모셔 신임하는 부하 혹은 신하이고, 顯要는 顯官과 要職의 약칭으로 지위가 높고 신임이 각별한 측근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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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좌우 [측근]을 이끌고 달려가 옥문관(玉門關) 주 018
각주 018)
玉門關: 玉關이라고도 하는데, 前漢 武帝시기에 설치되었다. 지금 甘肅省 敦煌市 서북쪽 150리 떨어진 小方盤城에 해당한다. 玉門關은 西域의 玉을 수입할 때 이곳을 지났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그 남쪽에 있는 陽關과 함께 漢代 西域을 오가는 중요한 문호였으며 玉門關을 나서는 것을 北都, 陽關을 나서는 것을 南都라고 불렀다. 魏晉南北朝時代에는 關이 동쪽으로 옮겨졌는데, 지금 甘肅省 安西縣 東雙塔堡 부근에 해당했다. 따라서 漢代의 玉門關을 故玉門關이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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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창성(晉昌城) 주 019
각주 019)
晉昌城: 西晉時代에 설치한 옛 晉昌郡의 治所가 있던 城이었다. 晉昌郡은 西晉 元康 5년(295)에 설치되었고 涼州에 속했다. 治所는 冥安縣(지금 甘肅省 安西縣 동남 鎖陽城에 해당)이었다. 관할구역은 지금 甘肅省 安西縣과 甘肅省 북쪽의 蒙古族自治縣 북부, 玉門市 서부의 땅에 해당한다. 北周는 永興郡이라 改稱했고, 隋 開皇 初 廢置되었다. 唐 天寶 원년(742)에 瓜州를 晉昌郡으로 바뀌었다가 乾元 원년(758)에 다시 瓜州로 환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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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가게 했다. [배]구상씨의 사자를 보내 [이궐]처라[가한]의 거처를 방문해 조정의 널리 보살피려는 뜻[弘養之義]을 밝히고 간곡히 깨우쳐 알게 하자 [이궐처라가한이] 마침내 [수나라] 조정에 들어왔으나 늘 불만을 품은 모습을 띠고 있었다.

  • 각주 001)
    隋 煬帝는 14년의 재위기간 동안 8차례 巡幸을 했는데, 그 가운데 西巡이 한 번 있었다. 大業 5년(609) 삼월에 河右로 巡幸에 나선 煬帝는 사월에 臨津關을 나가 黃河를 넘고 西平郡에 이르러 군대를 정비하고 講武 즉,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오월 초에는 延拔山(지금 靑海省 化隆縣)에서 대규모 사냥하고, 하순에는 吐谷渾 국경과 가까운 곳까지 갔다. 유월 중순에는 張掖을 거쳐 燕支山에 이르러 高昌과 吐谷渾 등 西域 27개 國의 王과 使者로부터 朝覲을 받고 몇 차례에 걸쳐 연회를 열어주었다. 귀환 길에는 大斗拔谷을 거쳐 돌아왔다. 西巡은 吐谷渾의 정벌 혹은 복속과 비단길의 疏通 및 상업무역의 발달을 촉진시키려는 두 가지 목적 하에 수행되었다(何平立, 2003: 281 및 292∼297). 『通典』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煬帝大業六年, 帝將西討吐谷渾(『通典』 권199 「邊防」 15 〈北狄〉 6 突厥下 西突厥: 5453)”이라 해 단순한 西巡이 아니라 吐谷渾에 대한 親征에 목적이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丁載勳, 2004: 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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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저본의 “六年”은 “五年” 혹은 “六月”의 잘못된 기록인 듯하다. 저본의 「煬帝紀」와 「食貨志」에 따르면 煬帝의 西巡은 大業 5년(609)의 일이었다. 특히, 大斗拔谷에 간 것은 大業 5년 6월이었다(『隋書』 권3 「煬帝紀」 상 〈大業五年六月條〉: 73, “癸卯, 經大斗拔谷, 山路隘險, 魚貫而出. 風霰晦冥, 與從官相失, 士卒凍死者太半.”; 『隋書』 권24 「食貨志」: 687, “五年, 西巡河右. 西域諸胡, 佩金玉, 被錦罽, 焚香奏樂, 迎候道左. 帝乃令武威·張掖士女, 盛飾縱觀. 衣服車馬不鮮者, 州縣督課, 以誇示之. 其年, 帝親征吐谷渾, 破之於赤水. 慕容佛允, 委其家屬, 西奔靑海. 帝駐兵不出, 遇天霖雨, 經大斗拔谷, 士卒死者十二三焉, 馬驢十八九. 於是置河源郡·積石鎭. 又於西域之地, 置西海·鄯善·且末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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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侍御史: 周代에는 柱下史라 칭했는데, 秦代에 侍御史라 改稱되었다. 秦漢時代에 三公의 하나인 御史大夫의 屬官이며 감찰업무를 담당했다. 曹魏시대에 持書侍御史가 설치되었는데, 北齊時代에 治書侍御史로 改稱되었다. 隋代에는 治書侍御史가 御史大夫의 次官이 되어 中丞의 역할을 담당했고, 그 아래에 侍御史와 監察御史, 御史 등의 관직이 있었다. 唐代에 治書侍御史를 御史中丞으로 고쳤다. 御史臺를 臺院, 殿院, 察院으로 분류할 때 侍御史는 臺院에 예속되었고 御史大夫의 통솔 아래 직무를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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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韋節: 隋代의 관리로 煬帝시기에 侍御史가 되어 詔書를 받들고 오아시스지역에 있는 국가에 出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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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大斗拔谷: 산골짜기의 이름으로 달리 達斗拔谷 혹은 大斗谷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甘肅省 民樂縣 동남쪽과 甘肅省, 그리고 靑海省의 交界地域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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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射匱可汗(?∼615 혹은 618): 고대 투르크어로 ‘야브구 카간(Yabghu qaghan)’의 음사로 추정된다. 西突厥의 可汗이며 達頭可汗의 孫子였다. 처음에 泥撅處羅可汗과 서로 다퉈 사신을 隋나라에 보내 請婚했다. 隋나라는 裴矩의 계책을 써서 射匱를 可汗으로 봉하고 泥撅處羅可汗을 공격하게 해 隋나라에 항복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 大業 7년(611)에 자립해 射匱可汗이 되었고 龜玆 북쪽의 三彌山(지금 新疆維吾爾自治區 庫車 일대)에 牙帳을 세웠다. 薛延陀와 契苾 두 부락을 정복해 영역이 동쪽으로 알타이 산맥[金山]으부터 西海(지금 카스피 해, 일설에는 아랄 해)에 이르렀다. 大業 11년(615)에 조카를 파견해 隋나라에 조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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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都六: 고대 투르크어로 ‘퇴뤼(Törü)’의 음사로 추정되는데, 西突厥의 酋長으로 達頭可汗의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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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通典』의 기록에는 射匱가 可汗이 되지 못한 이유를 “達頭가 예전에 西面可汗이 되었는데, 처음에 沙鉢略可汗과 사이가 좋지 않아 드디어 나뉘어 다른 부락이 되었다. 東突厥의 可汗 雍虞閭가 죽은 후에 자립해 步迦可汗이 되었다. 達頭가 죽은 후에 達頭의 손자인 射匱가 미약해 可汗이 되지 못했다.”라고 설명했다(『通典』 권199 「邊防」 15 〈北狄〉 6 突厥下 西突厥: 5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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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西面: 고대 투르크어 ‘타르두쉬(tardush)’의 번역으로 추정된다. 射匱可汗의 祖父 達頭可汗과 曾祖 室點密이 西突厥의 可汗이었으므로 西面, 즉 西突厥을 지배했다고 묘사한 것이다. 西面은 일반적으로 突厥이 분열되기 이전 알타이산맥[金山] 이서 지역의 突厥 영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가 그 이후 東, 西突厥이 분열하고 大可汗을 칭하게 되면서 그 이후에 西突厥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실제 분열 이전에는 大可汗 이외에 突厥 내부에 각 방향에 따라 東, 西, 南, 北面에 각각 小可汗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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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大可汗은 突厥 전체를 통솔하는 君主를 의미하는데, 隋나라에서 突厥의 大可汗인 東突厥에 대응하는 지위를 西突厥의 可汗에 줌으로써 突厥을 둘로 분열시키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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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仁風殿: 大興城 皇城 내에 있었던 殿閣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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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저본에는 이 구절 앞뒤에 인용문 부호가 없으나 “吾將立爲大可汗, 令發兵誅處羅, 然後當爲婚也.”에 ‘吾’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직접 인용문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기 때문에 번역문에서는 이를 감안해 직접 인용문으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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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桃竹白羽箭: 桃竹에 白色의 새 깃털을 장식해 만든 화살이다. 桃竹은 대나무의 일종이며, 質地에서 堅實해 화살을 만들거나 手杖, 編石을 만드는 좋은 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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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저본은 “帝取桃竹白羽箭一枝以賜射匱”인데, 射匱可汗이 煬帝를 직접 만난 것이 아니므로 射匱可汗이 아니라 射匱可汗이 보낸 사자가 桃竹白羽箭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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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時羅漫山: 산 이름으로 折羅漫山이라고도 한다. 지금 新疆維吾爾自治區 境內에 위치한 天山山脈의 한 봉우리를 지칭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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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麴伯雅: 金城郡 楡中縣(지금 甘肅省 楡中縣 서북쪽) 사람이며, 麴嘉의 손자였다. 麴堅을 계승해 高昌王으로 즉위했다. 먼저 突厥에 臣屬했다가 후에 隋나라에 투항해 弁國公에 봉해지고 光祿大夫를 제수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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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親要는 親信과 顯要의 약칭이다. 親信은 가까이 모셔 신임하는 부하 혹은 신하이고, 顯要는 顯官과 要職의 약칭으로 지위가 높고 신임이 각별한 측근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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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玉門關: 玉關이라고도 하는데, 前漢 武帝시기에 설치되었다. 지금 甘肅省 敦煌市 서북쪽 150리 떨어진 小方盤城에 해당한다. 玉門關은 西域의 玉을 수입할 때 이곳을 지났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그 남쪽에 있는 陽關과 함께 漢代 西域을 오가는 중요한 문호였으며 玉門關을 나서는 것을 北都, 陽關을 나서는 것을 南都라고 불렀다. 魏晉南北朝時代에는 關이 동쪽으로 옮겨졌는데, 지금 甘肅省 安西縣 東雙塔堡 부근에 해당했다. 따라서 漢代의 玉門關을 故玉門關이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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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晉昌城: 西晉時代에 설치한 옛 晉昌郡의 治所가 있던 城이었다. 晉昌郡은 西晉 元康 5년(295)에 설치되었고 涼州에 속했다. 治所는 冥安縣(지금 甘肅省 安西縣 동남 鎖陽城에 해당)이었다. 관할구역은 지금 甘肅省 安西縣과 甘肅省 북쪽의 蒙古族自治縣 북부, 玉門市 서부의 땅에 해당한다. 北周는 永興郡이라 改稱했고, 隋 開皇 初 廢置되었다. 唐 天寶 원년(742)에 瓜州를 晉昌郡으로 바뀌었다가 乾元 원년(758)에 다시 瓜州로 환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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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위절(韋節), [이궐]처라[가한], [이궐]처라[가한], 사궤[가한](射匱可汗), 배구, [이궐]처라[가한], 사궤[가한], 도륙(都六), 달두[가한], [이궐]처라[가한], 배구, [이궐]처라[가한], 사궤[가한], [이궐]처라[가한], 사궤, [이궐]처라, [이궐]처라[가한], 사궤[가한], [이궐]처라[가한], 고창왕 국백아(麴伯雅), 배구, 상씨, 친요(親要), [배]구, 상씨, [이궐]처라[가한]
지명
대두발곡(大斗拔谷), 서면(西面), 돌궐, 인풍전(仁風殿), 고창(高昌), 시라만산(時羅漫山), 옥문관(玉門關), 진창성(晉昌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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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배구의 계책을 따라 사궤(射匱)가한을 부추겨 처라가한을 치도록 하니 처라가 마지 못해 조정에 들어감 자료번호 : jo.k_0013_0084_00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