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배구의 계책을 따라 사궤(射匱)가한을 부추겨 처라가한을 치도록 하니 처라가 마지 못해 조정에 들어감
황제가 서쪽으로 순수(巡狩)하면서주 001
황제가 말했다. “공의 말이 옳도다.” [황제가] 이에 배구를 아침과 저녁으로 [빈]관에 보내 조금씩 돌려 말하며 설득했다. 황제가 인풍전(仁風殿) 주 011에서 그 사자를 불러 [이궐]처라[가한]이 [중국에] 따르지 않으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사궤[가한]이 [중국에] 좋은 마음을 갖고 있다는 점을 칭찬하[며 말하]였다. “짐이 장차 [사궤가한을] 대가한으로 세우고 군대를 일으켜 [이궐]처라[가한]을 주살하라고 명령한 다음에야 마땅히 혼인을 맺게 할 것이다.”주 012[그리고] 황제가 도죽백우전(桃竹白羽箭)주 013한 개를 가져오게 해서 사궤[가한의 사자]에게주 014내려주면서 말했다. “이 일은 마땅히 서둘러야 하니 사자는 [이] 화살처럼 빨리 움직여라.”
[사궤가한의] 사자가 돌아가다가 [이궐]처라[가한의 처소]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궐]처라[가한]이 [도죽백우]전을 좋아해 사자를 머무르게 하고자 하니 사자가 [이궐처라가한을] 속여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궤[가한]은 [사자가 전한 황제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해 군대를 일으켜 습격하자 [이궐]처라[가한]이 크게 패해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좌우에 수천 명의 기병만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달아나던] 길에서 또 약탈을 당했고, 고창(高昌)의 동쪽으로 도망가 시라만산(時羅漫山) 주 015에 숨어 있었다. 고창왕 국백아(麴伯雅) 주 016가 장계를 올리자 황제가 배구에게 상씨, 친요(親要),주 017[그리고] 좌우 [측근]을 이끌고 달려가 옥문관(玉門關) 주 018 진창성(晉昌城) 주 019에 가게 했다. [배]구는 상씨의 사자를 보내 [이궐]처라[가한]의 거처를 방문해 조정의 널리 보살피려는 뜻[弘養之義]을 밝히고 간곡히 깨우쳐 알게 하자 [이궐처라가한이] 마침내 [수나라] 조정에 들어왔으나 늘 불만을 품은 모습을 띠고 있었다.
각주 001)
[대업] 6년(610)주 002隋 煬帝는 14년의 재위기간 동안 8차례 巡幸을 했는데, 그 가운데 西巡이 한 번 있었다. 大業 5년(609) 삼월에 河右로 巡幸에 나선 煬帝는 사월에 臨津關을 나가 黃河를 넘고 西平郡에 이르러 군대를 정비하고 講武 즉,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오월 초에는 延拔山(지금 靑海省 化隆縣)에서 대규모 사냥하고, 하순에는 吐谷渾 국경과 가까운 곳까지 갔다. 유월 중순에는 張掖을 거쳐 燕支山에 이르러 高昌과 吐谷渾 등 西域 27개 國의 王과 使者로부터 朝覲을 받고 몇 차례에 걸쳐 연회를 열어주었다. 귀환 길에는 大斗拔谷을 거쳐 돌아왔다. 西巡은 吐谷渾의 정벌 혹은 복속과 비단길의 疏通 및 상업무역의 발달을 촉진시키려는 두 가지 목적 하에 수행되었다(何平立, 2003: 281 및 292∼297). 『通典』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煬帝大業六年, 帝將西討吐谷渾(『通典』 권199 「邊防」 15 〈北狄〉 6 突厥下 西突厥: 5453)”이라 해 단순한 西巡이 아니라 吐谷渾에 대한 親征에 목적이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丁載勳, 2004: 53∼54).
각주 002)
에 시어사(侍御史)주 003
위절(韋節)
주 004을 보내 [이궐]처라[가한]을 불러 황제[車駕]와 대두발곡(大斗拔谷)
주 005에서 만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그 국인들이 [이런 명령에] 따르려고 하지 않자 [이궐]처라[가한]이 사자에게 사죄하며 다른 이유를 들어 변명했다. 황제가 크게 화를 냈지만 어떻게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 마침 그의 추장 사궤[가한](射匱可汗)
주 006저본의 “六年”은 “五年” 혹은 “六月”의 잘못된 기록인 듯하다. 저본의 「煬帝紀」와 「食貨志」에 따르면 煬帝의 西巡은 大業 5년(609)의 일이었다. 특히, 大斗拔谷에 간 것은 大業 5년 6월이었다(『隋書』 권3 「煬帝紀」 상 〈大業五年六月條〉: 73, “癸卯, 經大斗拔谷, 山路隘險, 魚貫而出. 風霰晦冥, 與從官相失, 士卒凍死者太半.”; 『隋書』 권24 「食貨志」: 687, “五年, 西巡河右. 西域諸胡, 佩金玉, 被錦罽, 焚香奏樂, 迎候道左. 帝乃令武威·張掖士女, 盛飾縱觀. 衣服車馬不鮮者, 州縣督課, 以誇示之. 其年, 帝親征吐谷渾, 破之於赤水. 慕容佛允, 委其家屬, 西奔靑海. 帝駐兵不出, 遇天霖雨, 經大斗拔谷, 士卒死者十二三焉, 馬驢十八九. 於是置河源郡·積石鎭. 又於西域之地, 置西海·鄯善·且末等郡.”).
각주 006)
이 사신을 보내 청혼했다. 배구가 이에 [대책을] 상주했다. “[이궐]처라[가한]이 조공을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강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소신이 청하는 계책으로 그를 약화시키고 그 나라를 분열시킨다면 바로 쉽게 제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궤[가한]이라는 자는 도륙(都六)
주 007의 아들로 달두[가한]의 손자인데,주 008대대로 가한이 되어 서면(西面)
주 009에서 군림했습니다. 지금 듣자하니 그가 [가한의] 자리를 잃고 [이궐]처라[가한]에게 복속되어 있기 때문에 사자를 보내 [우리와] 도움을 받는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원컨대 그 사신을 후히 예우하시고 [사궤가한을] 대가한(大可汗)주 010으로 임명하신다면 돌궐 세력이 쪼개져 두 세력이 우리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射匱可汗(?∼615 혹은 618): 고대 투르크어로 ‘야브구 카간(Yabghu qaghan)’의 음사로 추정된다. 西突厥의 可汗이며 達頭可汗의 孫子였다. 처음에 泥撅處羅可汗과 서로 다퉈 사신을 隋나라에 보내 請婚했다. 隋나라는 裴矩의 계책을 써서 射匱를 可汗으로 봉하고 泥撅處羅可汗을 공격하게 해 隋나라에 항복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 大業 7년(611)에 자립해 射匱可汗이 되었고 龜玆 북쪽의 三彌山(지금 新疆維吾爾自治區 庫車 일대)에 牙帳을 세웠다. 薛延陀와 契苾 두 부락을 정복해 영역이 동쪽으로 알타이 산맥[金山]으부터 西海(지금 카스피 해, 일설에는 아랄 해)에 이르렀다. 大業 11년(615)에 조카를 파견해 隋나라에 조공했다.
황제가 말했다. “공의 말이 옳도다.” [황제가] 이에 배구를 아침과 저녁으로 [빈]관에 보내 조금씩 돌려 말하며 설득했다. 황제가 인풍전(仁風殿) 주 011에서 그 사자를 불러 [이궐]처라[가한]이 [중국에] 따르지 않으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사궤[가한]이 [중국에] 좋은 마음을 갖고 있다는 점을 칭찬하[며 말하]였다. “짐이 장차 [사궤가한을] 대가한으로 세우고 군대를 일으켜 [이궐]처라[가한]을 주살하라고 명령한 다음에야 마땅히 혼인을 맺게 할 것이다.”주 012[그리고] 황제가 도죽백우전(桃竹白羽箭)주 013한 개를 가져오게 해서 사궤[가한의 사자]에게주 014내려주면서 말했다. “이 일은 마땅히 서둘러야 하니 사자는 [이] 화살처럼 빨리 움직여라.”
[사궤가한의] 사자가 돌아가다가 [이궐]처라[가한의 처소]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궐]처라[가한]이 [도죽백우]전을 좋아해 사자를 머무르게 하고자 하니 사자가 [이궐처라가한을] 속여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궤[가한]은 [사자가 전한 황제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해 군대를 일으켜 습격하자 [이궐]처라[가한]이 크게 패해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좌우에 수천 명의 기병만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달아나던] 길에서 또 약탈을 당했고, 고창(高昌)의 동쪽으로 도망가 시라만산(時羅漫山) 주 015에 숨어 있었다. 고창왕 국백아(麴伯雅) 주 016가 장계를 올리자 황제가 배구에게 상씨, 친요(親要),주 017[그리고] 좌우 [측근]을 이끌고 달려가 옥문관(玉門關) 주 018 진창성(晉昌城) 주 019에 가게 했다. [배]구는 상씨의 사자를 보내 [이궐]처라[가한]의 거처를 방문해 조정의 널리 보살피려는 뜻[弘養之義]을 밝히고 간곡히 깨우쳐 알게 하자 [이궐처라가한이] 마침내 [수나라] 조정에 들어왔으나 늘 불만을 품은 모습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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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隋 煬帝는 14년의 재위기간 동안 8차례 巡幸을 했는데, 그 가운데 西巡이 한 번 있었다. 大業 5년(609) 삼월에 河右로 巡幸에 나선 煬帝는 사월에 臨津關을 나가 黃河를 넘고 西平郡에 이르러 군대를 정비하고 講武 즉,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오월 초에는 延拔山(지금 靑海省 化隆縣)에서 대규모 사냥하고, 하순에는 吐谷渾 국경과 가까운 곳까지 갔다. 유월 중순에는 張掖을 거쳐 燕支山에 이르러 高昌과 吐谷渾 등 西域 27개 國의 王과 使者로부터 朝覲을 받고 몇 차례에 걸쳐 연회를 열어주었다. 귀환 길에는 大斗拔谷을 거쳐 돌아왔다. 西巡은 吐谷渾의 정벌 혹은 복속과 비단길의 疏通 및 상업무역의 발달을 촉진시키려는 두 가지 목적 하에 수행되었다(何平立, 2003: 281 및 292∼297). 『通典』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煬帝大業六年, 帝將西討吐谷渾(『通典』 권199 「邊防」 15 〈北狄〉 6 突厥下 西突厥: 5453)”이라 해 단순한 西巡이 아니라 吐谷渾에 대한 親征에 목적이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丁載勳, 2004: 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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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저본의 “六年”은 “五年” 혹은 “六月”의 잘못된 기록인 듯하다. 저본의 「煬帝紀」와 「食貨志」에 따르면 煬帝의 西巡은 大業 5년(609)의 일이었다. 특히, 大斗拔谷에 간 것은 大業 5년 6월이었다(『隋書』 권3 「煬帝紀」 상 〈大業五年六月條〉: 73, “癸卯, 經大斗拔谷, 山路隘險, 魚貫而出. 風霰晦冥, 與從官相失, 士卒凍死者太半.”; 『隋書』 권24 「食貨志」: 687, “五年, 西巡河右. 西域諸胡, 佩金玉, 被錦罽, 焚香奏樂, 迎候道左. 帝乃令武威·張掖士女, 盛飾縱觀. 衣服車馬不鮮者, 州縣督課, 以誇示之. 其年, 帝親征吐谷渾, 破之於赤水. 慕容佛允, 委其家屬, 西奔靑海. 帝駐兵不出, 遇天霖雨, 經大斗拔谷, 士卒死者十二三焉, 馬驢十八九. 於是置河源郡·積石鎭. 又於西域之地, 置西海·鄯善·且末等郡.”).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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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射匱可汗(?∼615 혹은 618): 고대 투르크어로 ‘야브구 카간(Yabghu qaghan)’의 음사로 추정된다. 西突厥의 可汗이며 達頭可汗의 孫子였다. 처음에 泥撅處羅可汗과 서로 다퉈 사신을 隋나라에 보내 請婚했다. 隋나라는 裴矩의 계책을 써서 射匱를 可汗으로 봉하고 泥撅處羅可汗을 공격하게 해 隋나라에 항복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 大業 7년(611)에 자립해 射匱可汗이 되었고 龜玆 북쪽의 三彌山(지금 新疆維吾爾自治區 庫車 일대)에 牙帳을 세웠다. 薛延陀와 契苾 두 부락을 정복해 영역이 동쪽으로 알타이 산맥[金山]으부터 西海(지금 카스피 해, 일설에는 아랄 해)에 이르렀다. 大業 11년(615)에 조카를 파견해 隋나라에 조공했다.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 각주 018)
- 각주 019)
색인어
- 이름
- 위절(韋節), [이궐]처라[가한], [이궐]처라[가한], 사궤[가한](射匱可汗), 배구, [이궐]처라[가한], 사궤[가한], 도륙(都六), 달두[가한], [이궐]처라[가한], 배구, [이궐]처라[가한], 사궤[가한], [이궐]처라[가한], 사궤, [이궐]처라, [이궐]처라[가한], 사궤[가한], [이궐]처라[가한], 고창왕 국백아(麴伯雅), 배구, 상씨, 친요(親要), [배]구, 상씨, [이궐]처라[가한]
- 지명
- 대두발곡(大斗拔谷), 서면(西面), 돌궐, 인풍전(仁風殿), 고창(高昌), 시라만산(時羅漫山), 옥문관(玉門關), 진창성(晉昌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