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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仁壽) 연간에 황제의 명으로 양소와 계민가한이 연이은 반란을 격퇴하였고 계민은 이후 조공을 바침

  • 국가
    돌궐(突厥)
인수(仁壽) 원년(601) 대주총관(代州總管) 한홍(韓洪) 주 001
각주 001)
韓洪(549∼611): 北周, 隋代의 장군으로 字는 叔明이었고, 韓擒虎의 季弟였다. 北周시대에 侍伯上士가 되었다가 이후에 군공으로 大都督이 되었다. 尉迟迥을 평정한 공으로 開府 甘棠縣侯가 되었다. 隋 文帝가 즉위한 이후에 爵이 公이 되었고, 얼마 후에 驃騎將軍이 되었다. 開皇 9년(590) 陳을 평정할 때 行軍總管이 되었다. 또한 柱國 蔣州刺史가 되었다가 몇 년 이후에 廉州刺史가 되었다. 代州總管으로 突厥을 공격하나 패배하고 제명되었다. 이후에 隴西太守가 되었고, 金紫光祿大夫가 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隋書』 권52 「韓洪傳」: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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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안[진](恒安鎭) 주 002
각주 002)
恒安鎭: 軍鎭의 명칭으로 隋代에 설치되었다. 치소는 北魏의 수도였던 平城(지금 山西省 大同市 東北 古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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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돌궐에게 패배해 혹은 [면관되어] 서인이 되었다. [황제가 양]소를 운주도행군원수(雲州道行軍元帥)로 삼아 계민[가한]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원정을 하도록 명령했다. 곡설(斛薛) 주 003
각주 003)
斛薛: 종족 명칭으로 투르크계 유목 부족[鐵勒]의 하나였다. 달리 斛薩이라고도 한다. 北朝時代에 지금 몽골공화국 톨 강 유역 북쪽에 위치한 초원 지대에 거주했다. 多藍葛의 北境에 있으며 두 개의 姓이 합쳐 부락을 형성했다고 한다(『通典』 권199 「邊防」 15 〈北狄〉 6 斛薛: 5468). 段連勤은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薛部와 斛部가 합쳐져 斛薛이 된 것으로 보았다(段連勤, 2006: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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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여러 부락들이 이전에 계민[가한]에게 귀순했으나 이렇게 되자 반란을 일으켰다. [양]소하북(河北) 주 004
각주 004)
河北: 黃河 북쪽에 있는 陰山山脈 남부의 內蒙古 草原地域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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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둔해 있을 때 마침 돌궐 아물사력사근(阿勿思力俟斤) 주 005
각주 005)
阿勿思力俟斤: 俟斤(이르킨)이라는 관칭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씨족장 정도의 위상을 갖고 있었던 인물로 추정된다. 仁壽 원년(601)에 隋를 공격했다가 楊素에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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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남쪽으로 건너와 계민[가한]의 [백성] 남녀 6천 명과 가축 20여 만 두를 빼앗아갔다. [양]소가 상대장군(上大將軍)주 006
각주 006)
上大將軍: 관명으로 北周 建德 4년(575)에 설치되었다. 최고급 무관의 명칭으로 隋代에는 품계가 從二品 散實官이었다가 大業 3년(607)에 폐지되었다. 武德 7년(624)에 다시 十轉勳官으로 설치되었는데, 품계가 正三品이었다. 貞觀 11년(637)에 上護軍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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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묵(梁默) 주 007
각주 007)
梁默(?∼609): 北周, 隋代의 장군인데, 梁士彥의 노비로서 무예가 아주 뛰어났다. 梁士彥을 따라 종군했고, 전공으로 開府가 되었다. 開皇 말기에는 行軍總管으로 楊素를 따라 突厥에 대한 원정에 참여해 大將軍이 되었다. 漢王 楊諒이 모반을 일으키자 楊素를 따라 종군해서 柱國이 되었다. 大業 5년(609)에 煬帝가 吐谷渾을 원정할 때 참여해 전투 중에 죽었다. 이후에 光祿大夫로 추증되었다(『隋書』 권40 「梁默傳」: 1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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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경장 기병을 이끌고 추격해 이리저리 싸우기를 60여 리나 [가서 아물사력]사근을 크게 격파하고 사람과 가축을 모두 잡아 계민[가한]에게로 돌아왔다. [양]소가 또한 주국 장정화(張定和) 주 008
각주 008)
張定和: 隋代의 장군으로 字는 處謐이었고, 京兆府 萬年縣(지금 陝西省 西安市) 사람이었다. 陳나라를 평정한 공으로 儀司가 되었고, 이후에도 군공으로 開府 驃騎將軍이 되었다. 일찍이 李充을 따라 突厥을 공격해 上柱國 武安縣侯가 되었다. 煬帝시대에는 宜州刺史와 河內太守가 되었다. 이후에 左屯衛大將軍가 되었고, 大業 5년(609)에 吐谷渾 원정 도중에 화살에 맞아 죽었다. 武安侯로 추증되었다(『隋書』 권64 「張定和傳」: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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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영군대장군(領軍大將軍)주 009
각주 009)
領軍大將軍: 관명으로 北齊 天保年間에 설치되었다. 領軍府의 장군으로 禁衛의 諸軍를 관장했다. 領軍將軍 위에 위치해 권력이 아주 강했으며 품계가 二品에 해당했다. 尙書令 다음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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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劉昇) 주 010
각주 010)
劉昇: 北周, 隋代의 장군으로 臨洮 子城(지금 甘肅省 蘭州市) 사람이었다. 北周 趙郡公 劉雄의 아들로 아버지의 작을 이었고, 儀同大將軍에 올랐다. 隋代에 左武衛將軍과 領軍大將軍이 되었다. 仁壽 원년(601)에 楊素를 따라 突厥 阿勿思力俟斤을 공격했다(『周書』 권29 「劉雄傳」: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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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다른 길로 보내 [돌궐을] 요격해 많이 베고 사로잡아서 돌아왔다. [수나라] 군대가 이미 [황]하를 건넌 뒤, 적이 다시 [돌아와] 계민[가한]의 부락을 약탈하자 [양]소가 표기[장군](驃騎將軍)주 011
각주 011)
驃騎將軍: 관칭으로 前漢시대 武帝시대에 설치된 重號將軍이었다. 大將軍 다음에 위치해 秩이 만석으로 지위가 아주 높았는데,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北魏시대에 一品下로 되었다가 다시 二品으로 바뀌었다. 이후 北齊時代에도 그대로 이어졌고, 隋代에는 北周의 제도를 이어 開府를 驃騎府로 바꾸고 長官을 설치해 府兵을 통솔하게 했다. 正四品下로 품계를 정해 十二府大將軍에게 속하게 했다. 大業 3년(607)에 鷹揚郎將으로 바뀌었다. 唐代에 다시 설치되나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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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귀(范貴) 주 012
각주 012)
范貴: 隋代 장군으로 驃騎將軍이었다. 馮孝慈와 같은 將帥들과 여러 차례 원정을 참가해 이름을 떨쳤다(『隋書』 권4 「煬帝紀」: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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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이끌고 굴결곡(窟結谷) 주 013
각주 013)
窟結谷: 고비 남부 陰山山脈에 있는 계곡의 하나로 추정되나 위치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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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동남쪽에서 힘써 싸워 다시 [적을] 격파한 다음 도망가는 것을 80여 리나 쫓아갔다. 이해(603년)에 이리가한엽호가 같이 철륵에게 패배했다. 보가[가한의 나라]가 얼마 있지 않아 또 크게 어지럽게 되자 해(奚) 주 014
각주 014)
奚: 몽골 동부 지역에 살던 종족의 하나로 南北朝時代에는 庫莫奚, 隋代에는 奚라고 불렸다. 주로 潢水(지금 시라 무렌) 유역에 거주했고, 동쪽으로는 契丹과 서쪽으로는 突厥, 남쪽으로는 白狼河, 북쪽으로는 霫과 접해 있었다. 突厥에 속해 있다가 이후에 점차 세력이 강해져 5부의 연맹체를 형성했다(李在成, 1996). 고대 투르크 비문에 동몽골 지역에 거주하는 부락으로 “키탄(Qïtaň)”과 “타타비(Tatabï)”가 늘 같이 연칭이 되는데, 이런 점에서 奚와 타타비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禹悳燦,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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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霫) 주 015
각주 015)
霫: 몽골 동부 북부지역에 살던 종족의 하나였다. 隋代에 潢水(지금의 시라 무렌) 유역의 북부에 거주했다. 동쪽으로 靺鞨, 서쪽으로 突厥, 남쪽으로 契丹, 북쪽으로 烏洛候와 접해 있었다. 사면으로 산으로 둘러싸인 大興安嶺 산맥지역에 살았다. 삼림지역에서 狩獵에 종사했는데, 이후에 남하해 시라 무렌을 건너와서 奚에게 복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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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다섯 부락이 [장성] 안으로 옮겨왔고, 보가[가한]토욕혼(吐谷渾) 주 016
각주 016)
吐谷渾: 고대 종족 명칭으로 음은 ‘토욕혼’이다. 달리 吐渾, 退渾이라고 전사를 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周書』의 자세한 설명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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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도망갔다.주 017
각주 017)
步迦可汗(達頭可汗)이 패배해 吐谷渾을 도망간 사건은 603년의 일이었다. 그 이후 그의 종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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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민[가한]이 마침내 그의 백성을 갖게 되어 해마다 [사신을] 보내 조공을 했다.

  • 각주 001)
    韓洪(549∼611): 北周, 隋代의 장군으로 字는 叔明이었고, 韓擒虎의 季弟였다. 北周시대에 侍伯上士가 되었다가 이후에 군공으로 大都督이 되었다. 尉迟迥을 평정한 공으로 開府 甘棠縣侯가 되었다. 隋 文帝가 즉위한 이후에 爵이 公이 되었고, 얼마 후에 驃騎將軍이 되었다. 開皇 9년(590) 陳을 평정할 때 行軍總管이 되었다. 또한 柱國 蔣州刺史가 되었다가 몇 년 이후에 廉州刺史가 되었다. 代州總管으로 突厥을 공격하나 패배하고 제명되었다. 이후에 隴西太守가 되었고, 金紫光祿大夫가 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隋書』 권52 「韓洪傳」: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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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恒安鎭: 軍鎭의 명칭으로 隋代에 설치되었다. 치소는 北魏의 수도였던 平城(지금 山西省 大同市 東北 古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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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斛薛: 종족 명칭으로 투르크계 유목 부족[鐵勒]의 하나였다. 달리 斛薩이라고도 한다. 北朝時代에 지금 몽골공화국 톨 강 유역 북쪽에 위치한 초원 지대에 거주했다. 多藍葛의 北境에 있으며 두 개의 姓이 합쳐 부락을 형성했다고 한다(『通典』 권199 「邊防」 15 〈北狄〉 6 斛薛: 5468). 段連勤은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薛部와 斛部가 합쳐져 斛薛이 된 것으로 보았다(段連勤, 2006: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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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河北: 黃河 북쪽에 있는 陰山山脈 남부의 內蒙古 草原地域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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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阿勿思力俟斤: 俟斤(이르킨)이라는 관칭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씨족장 정도의 위상을 갖고 있었던 인물로 추정된다. 仁壽 원년(601)에 隋를 공격했다가 楊素에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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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上大將軍: 관명으로 北周 建德 4년(575)에 설치되었다. 최고급 무관의 명칭으로 隋代에는 품계가 從二品 散實官이었다가 大業 3년(607)에 폐지되었다. 武德 7년(624)에 다시 十轉勳官으로 설치되었는데, 품계가 正三品이었다. 貞觀 11년(637)에 上護軍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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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梁默(?∼609): 北周, 隋代의 장군인데, 梁士彥의 노비로서 무예가 아주 뛰어났다. 梁士彥을 따라 종군했고, 전공으로 開府가 되었다. 開皇 말기에는 行軍總管으로 楊素를 따라 突厥에 대한 원정에 참여해 大將軍이 되었다. 漢王 楊諒이 모반을 일으키자 楊素를 따라 종군해서 柱國이 되었다. 大業 5년(609)에 煬帝가 吐谷渾을 원정할 때 참여해 전투 중에 죽었다. 이후에 光祿大夫로 추증되었다(『隋書』 권40 「梁默傳」: 1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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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張定和: 隋代의 장군으로 字는 處謐이었고, 京兆府 萬年縣(지금 陝西省 西安市) 사람이었다. 陳나라를 평정한 공으로 儀司가 되었고, 이후에도 군공으로 開府 驃騎將軍이 되었다. 일찍이 李充을 따라 突厥을 공격해 上柱國 武安縣侯가 되었다. 煬帝시대에는 宜州刺史와 河內太守가 되었다. 이후에 左屯衛大將軍가 되었고, 大業 5년(609)에 吐谷渾 원정 도중에 화살에 맞아 죽었다. 武安侯로 추증되었다(『隋書』 권64 「張定和傳」: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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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領軍大將軍: 관명으로 北齊 天保年間에 설치되었다. 領軍府의 장군으로 禁衛의 諸軍를 관장했다. 領軍將軍 위에 위치해 권력이 아주 강했으며 품계가 二品에 해당했다. 尙書令 다음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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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劉昇: 北周, 隋代의 장군으로 臨洮 子城(지금 甘肅省 蘭州市) 사람이었다. 北周 趙郡公 劉雄의 아들로 아버지의 작을 이었고, 儀同大將軍에 올랐다. 隋代에 左武衛將軍과 領軍大將軍이 되었다. 仁壽 원년(601)에 楊素를 따라 突厥 阿勿思力俟斤을 공격했다(『周書』 권29 「劉雄傳」: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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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驃騎將軍: 관칭으로 前漢시대 武帝시대에 설치된 重號將軍이었다. 大將軍 다음에 위치해 秩이 만석으로 지위가 아주 높았는데,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北魏시대에 一品下로 되었다가 다시 二品으로 바뀌었다. 이후 北齊時代에도 그대로 이어졌고, 隋代에는 北周의 제도를 이어 開府를 驃騎府로 바꾸고 長官을 설치해 府兵을 통솔하게 했다. 正四品下로 품계를 정해 十二府大將軍에게 속하게 했다. 大業 3년(607)에 鷹揚郎將으로 바뀌었다. 唐代에 다시 설치되나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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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范貴: 隋代 장군으로 驃騎將軍이었다. 馮孝慈와 같은 將帥들과 여러 차례 원정을 참가해 이름을 떨쳤다(『隋書』 권4 「煬帝紀」: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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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窟結谷: 고비 남부 陰山山脈에 있는 계곡의 하나로 추정되나 위치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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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奚: 몽골 동부 지역에 살던 종족의 하나로 南北朝時代에는 庫莫奚, 隋代에는 奚라고 불렸다. 주로 潢水(지금 시라 무렌) 유역에 거주했고, 동쪽으로는 契丹과 서쪽으로는 突厥, 남쪽으로는 白狼河, 북쪽으로는 霫과 접해 있었다. 突厥에 속해 있다가 이후에 점차 세력이 강해져 5부의 연맹체를 형성했다(李在成, 1996). 고대 투르크 비문에 동몽골 지역에 거주하는 부락으로 “키탄(Qïtaň)”과 “타타비(Tatabï)”가 늘 같이 연칭이 되는데, 이런 점에서 奚와 타타비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禹悳燦,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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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霫: 몽골 동부 북부지역에 살던 종족의 하나였다. 隋代에 潢水(지금의 시라 무렌) 유역의 북부에 거주했다. 동쪽으로 靺鞨, 서쪽으로 突厥, 남쪽으로 契丹, 북쪽으로 烏洛候와 접해 있었다. 사면으로 산으로 둘러싸인 大興安嶺 산맥지역에 살았다. 삼림지역에서 狩獵에 종사했는데, 이후에 남하해 시라 무렌을 건너와서 奚에게 복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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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吐谷渾: 고대 종족 명칭으로 음은 ‘토욕혼’이다. 달리 吐渾, 退渾이라고 전사를 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周書』의 자세한 설명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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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步迦可汗(達頭可汗)이 패배해 吐谷渾을 도망간 사건은 603년의 일이었다. 그 이후 그의 종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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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한홍(韓洪), 계민[가한], 계민[가한], [양]소, 아물사력사근(阿勿思力俟斤), 계민[가한], [양]소, 양묵(梁默), 사근, 계민[가한], [양]소, 장정화(張定和), 유승(劉昇), 계민[가한], [양]소, 범귀(范貴), 이리가한, 엽호, 보가[가한], 계민[가한]
지명
항안[진](恒安鎭), 돌궐, 곡설(斛薛), 하북(河北), 돌궐, 굴결곡(窟結谷), 철륵, 보가, 해(奚), 습(霫), 토욕혼(吐谷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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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仁壽) 연간에 황제의 명으로 양소와 계민가한이 연이은 반란을 격퇴하였고 계민은 이후 조공을 바침 자료번호 : jo.k_0013_0084_0010_0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