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仁壽) 연간에 황제의 명으로 양소와 계민가한이 연이은 반란을 격퇴하였고 계민은 이후 조공을 바침
인수(仁壽) 원년(601) 대주총관(代州總管) 한홍(韓洪)
주 001
각주 001)
이 항안[진](恒安鎭)
주 002에서 돌궐에게 패배해 혹은 [면관되어] 서인이 되었다. [황제가 양]소를 운주도행군원수(雲州道行軍元帥)로 삼아 계민[가한]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원정을 하도록 명령했다. 곡설(斛薛)
주 003등의 여러 부락들이 이전에 계민[가한]에게 귀순했으나 이렇게 되자 반란을 일으켰다. [양]소가 하북(河北)
주 004에 주둔해 있을 때 마침 돌궐
아물사력사근(阿勿思力俟斤)
주 005등이 남쪽으로 건너와 계민[가한]의 [백성] 남녀 6천 명과 가축 20여 만 두를 빼앗아갔다. [양]소가 상대장군(上大將軍)주 006
양묵(梁默)
주 007의 경장 기병을 이끌고 추격해 이리저리 싸우기를 60여 리나 [가서 아물사력]사근을 크게 격파하고 사람과 가축을 모두 잡아 계민[가한]에게로 돌아왔다. [양]소가 또한 주국 장정화(張定和)
주 008와 영군대장군(領軍大將軍)주 009
유승(劉昇)
주 010을 다른 길로 보내 [돌궐을] 요격해 많이 베고 사로잡아서 돌아왔다. [수나라] 군대가 이미 [황]하를 건넌 뒤, 적이 다시 [돌아와] 계민[가한]의 부락을 약탈하자 [양]소가 표기[장군](驃騎將軍)주 011
범귀(范貴)
주 012를 이끌고 굴결곡(窟結谷)
주 013의 동남쪽에서 힘써 싸워 다시 [적을] 격파한 다음 도망가는 것을 80여 리나 쫓아갔다. 이해(603년)에 이리가한과 엽호가 같이 철륵에게 패배했다. 보가[가한의 나라]가 얼마 있지 않아 또 크게 어지럽게 되자 해(奚)
주 014와 습(霫)
주 015의 다섯 부락이 [장성] 안으로 옮겨왔고, 보가[가한]이 토욕혼(吐谷渾)
주 016으로 도망갔다.주 017
계민[가한]이 마침내 그의 백성을 갖게 되어 해마다 [사신을] 보내 조공을 했다.韓洪(549∼611): 北周, 隋代의 장군으로 字는 叔明이었고, 韓擒虎의 季弟였다. 北周시대에 侍伯上士가 되었다가 이후에 군공으로 大都督이 되었다. 尉迟迥을 평정한 공으로 開府 甘棠縣侯가 되었다. 隋 文帝가 즉위한 이후에 爵이 公이 되었고, 얼마 후에 驃騎將軍이 되었다. 開皇 9년(590) 陳을 평정할 때 行軍總管이 되었다. 또한 柱國 蔣州刺史가 되었다가 몇 년 이후에 廉州刺史가 되었다. 代州總管으로 突厥을 공격하나 패배하고 제명되었다. 이후에 隴西太守가 되었고, 金紫光祿大夫가 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隋書』 권52 「韓洪傳」: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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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韓洪(549∼611): 北周, 隋代의 장군으로 字는 叔明이었고, 韓擒虎의 季弟였다. 北周시대에 侍伯上士가 되었다가 이후에 군공으로 大都督이 되었다. 尉迟迥을 평정한 공으로 開府 甘棠縣侯가 되었다. 隋 文帝가 즉위한 이후에 爵이 公이 되었고, 얼마 후에 驃騎將軍이 되었다. 開皇 9년(590) 陳을 평정할 때 行軍總管이 되었다. 또한 柱國 蔣州刺史가 되었다가 몇 년 이후에 廉州刺史가 되었다. 代州總管으로 突厥을 공격하나 패배하고 제명되었다. 이후에 隴西太守가 되었고, 金紫光祿大夫가 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隋書』 권52 「韓洪傳」: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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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 이름
- 한홍(韓洪), 계민[가한], 계민[가한], [양]소, 아물사력사근(阿勿思力俟斤), 계민[가한], [양]소, 양묵(梁默), 사근, 계민[가한], [양]소, 장정화(張定和), 유승(劉昇), 계민[가한], [양]소, 범귀(范貴), 이리가한, 엽호, 보가[가한], 계민[가한]
- 지명
- 항안[진](恒安鎭), 돌궐, 곡설(斛薛), 하북(河北), 돌궐, 굴결곡(窟結谷), 철륵, 보가, 해(奚), 습(霫), 토욕혼(吐谷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