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황 17년 돌리가한에게 안의공주(安義公主)를 시집보내 후대하자 옹우려가 조공을 끊고 침입하니 황제가 돌궐을 공격하도록 명령함
[개황] 17년(597) 돌리[가한]이 사신을 보내 공주를 맞이하려고 하니 황제가 [그의 사신을] 태상[시](太常寺)에 머무르게 하고 [그들에게] 육례(六禮)주 001를 가르쳐 종실의 딸 안의공주(安義公主)
주 002를 [돌리가한에게] 시집보냈다. 황제가 돌궐[北夷]을 이간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특별히 그에게 예물로 후하게 대하고 우홍, 소위(蘇威),주 003
[개황] 18년(598)에 [황제가] 촉왕(蜀王) [양]수(楊秀) 주 007에게 영주도(靈州道) 주 008로 나가 [돌궐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듬해(599) 또 한왕(漢王) [양]량(楊諒) 주 009을 원수로 삼고, 좌복야 고경에게 장군 왕찰(王察)과 상주국 조중경(趙仲卿) 주 010을 이끌고 함께 삭주도(朔州道) 주 011에서 나아가고, 우복야 양소(楊素) 주 012
각주 003)
곡률효경(斛律孝卿)
주 004등을 사신으로 삼아 계속 보내니 돌궐 역시 앞뒤로 사신을 보내 370 무리가 조정에 들어왔다. 돌리[가한]은 본래 북방에 살고 있었는데, 공주를 얻게 되었기 때문에 남쪽 [어]도근[산](於都斤山)
주 005의 옛 진(鎭)으로 옮겨오자 [황제가] 아주 후하게 포상을 했다. [그러자 도람가한] 옹우려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대가한(大可汗)주 006인데, 오히려 [어찌] 염간만 못한 [대접을 받는]다는 말이냐!” 이에 [옹우려가] 마침내 조공을 끊고 빈번히 변경을 공격했다.蘇威(540∼621): 北周, 隋代의 관리로 字는 無畏였고, 京兆府 武功縣(지금 陝西省 武功縣) 사람이었다. 蘇綽의 아들로 美陽縣公의 작을 이어받았다. 北周시기에 宇文護에게 우대를 받아 新興公主와 결혼을 했으나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을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車騎大將軍 懷道縣公이 되었다. 武帝시기에 稍伯下大夫가 되었고, 隋 文帝가 그를 太子少保로 발탁했다. 아버지는 邳國公이 되었다. 納言, 民部尙書, 大理卿, 京朝尹, 御史大夫, 刑部尙書, 吏部尙書, 尙書右僕射, 太常卿, 右御衛大將軍 등이 되었다. 煬帝時期에 寧陵侯, 그 다음에 房公으로 봉해졌다. 煬帝 이후에 宇文化及, 李密, 趙王 侗, 王世充 등에게서 봉사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隋書』 권41 「蘇威傳」: 1184).
[개황] 18년(598)에 [황제가] 촉왕(蜀王) [양]수(楊秀) 주 007에게 영주도(靈州道) 주 008로 나가 [돌궐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듬해(599) 또 한왕(漢王) [양]량(楊諒) 주 009을 원수로 삼고, 좌복야 고경에게 장군 왕찰(王察)과 상주국 조중경(趙仲卿) 주 010을 이끌고 함께 삭주도(朔州道) 주 011에서 나아가고, 우복야 양소(楊素) 주 012
각주 012)
에게 주국 이철(李徹)
주 013楊素(?∼606): 隋代의 大臣으로 字는 處道였고, 弘農郡 華陰(지금 陝西省 華陽) 사람이었다. 北周시기에 군공으로 淸河縣子, 成安縣公이 되었다가 아버지의 작을 이어 臨貞縣公가 되었다. 楊堅이 丞相이 되자 徐州總管으로 임명되고 淸河郡公으로 책봉되었다. 開皇 4년(584)에 御史大夫 信州總管이 되었다. 이후 陳나라를 정벌할 때 行軍元帥가 되어 水軍을 대파하고 郢國公으로 봉해졌다가 趙國公으로 다시 봉해졌다. 이후 陳나라를 모두 평정한 이후에는 行軍總管으로 突厥에 대해 598, 600, 601년에 세 차례 걸쳐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尙書右僕射와 左僕射를 역임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이후 太子 楊勇을 폐위시키고 煬帝를 즉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해 尙書令이 되었다. 大業 2년(606)에 司徒가 되어 楚公으로 책봉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隋書』 권48 「楊素傳」: 1281).
각주 013)
과 한승수(韓僧壽)
주 014를 이끌고 [함께] 영주에서 나아가고, 상주국 연영(燕榮)
주 015에게 유주에서 나아가 [돌궐을] 공격하게 했다. 옹우려가 [서돌궐의] 점궐(玷厥)
주 016과 [같이] 군대를 일으켜 염간을 공격해 그의 형제와 아들, 조카를 모두 죽이고 마침내 황하를 건너 울주(蔚州)
주 017李徹(?∼599): 北周, 隋代의 將軍으로 字는 廣達이었고, 朔方 巖綠(지금 內蒙古自治區 烏審旗 남쪽) 사람이었다. 李和의 아들로 성격이 강직하고 무예에 뛰어났다. 北周시대에 宇文護와 가까워 殿中司馬가 되었고, 이후 奉車都尉 車騎大將軍 儀同三司가 되었다. 武帝시기에 吐谷渾을 공격한 공으로 同昌縣男의 작을 받았다. 北齊를 여러 번 격파해 蔡陽縣公이 되었다. 隋代에 左武衛將軍이 되어 晉王府軍事를 맡아 齊安郡公이 되었다. 沙鉢略可汗을 격파해 安道郡公 柱國이 되었다. 이후에 揚州總管司馬 德廣郡公이 되었다가 城陽郡公으로 옮겼다. 高潁과 친하다는 이유로 文帝의 미움을 사서 죽임을 당했다(『隋書』 권54 「李徹傳」: 1367).
각주 017)
까지 들어왔다. 염간은 밤중에 다섯 명의 기병과 수나라 사신 장손성(長孫晟)과 함께 조정에 귀순했다. 황제가 염간에게 옹우려의 사자 인두특근(因頭特勤)
주 018과 서로 변론을 하도록 시켰는데, 염간의 말이 맞자 황제가 바로 [그를] 후하게 대우했다. 옹우려의 동생 도속륙(都速六)
주 019도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버리고 돌리[가한]
주 020과 함께 조정에 귀순하니 황제가 기뻐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염간이 도속륙과 함께 도박놀이[摴蒲]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차차 [그들에게] 보물을 주어 그 마음을 위로하는데 쓰도록 했다.蔚州: 北魏 永安 연간에 懷荒(지금 河北省 張北縣)과 御夷(지금 赤城縣 북쪽) 두 곳의 鎭에 설치되었다. 그 다음에 치소를 지금 山西省 平遙縣 서북쪽에 옮겼고, 北周시대에 靈丘縣(지금 山西省 靈丘縣)으로 옮겼다가 隋 大業 연간에 폐지되었다. 唐 武德 6년(623)에 다시 설치되어 치소를 陽曲縣(지금 山西省 太原市 북쪽 陽曲鎭)에 두었다가 이듬해 繁畤縣(지금 繁畤縣 서쪽)으로 옮겼다. 武德 8년(625)에 秀容縣 북쪽 恒州城(지금 忻州市 서북쪽)으로 치소를 옮겼다. 貞觀 5년(631)에 치소를 靈丘縣으로 옮겼고 開元 초에 다시 安邊縣(지금 河北省 蔚縣)으로 옮겼다.
- 각주 001)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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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蘇威(540∼621): 北周, 隋代의 관리로 字는 無畏였고, 京兆府 武功縣(지금 陝西省 武功縣) 사람이었다. 蘇綽의 아들로 美陽縣公의 작을 이어받았다. 北周시기에 宇文護에게 우대를 받아 新興公主와 결혼을 했으나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을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車騎大將軍 懷道縣公이 되었다. 武帝시기에 稍伯下大夫가 되었고, 隋 文帝가 그를 太子少保로 발탁했다. 아버지는 邳國公이 되었다. 納言, 民部尙書, 大理卿, 京朝尹, 御史大夫, 刑部尙書, 吏部尙書, 尙書右僕射, 太常卿, 右御衛大將軍 등이 되었다. 煬帝時期에 寧陵侯, 그 다음에 房公으로 봉해졌다. 煬帝 이후에 宇文化及, 李密, 趙王 侗, 王世充 등에게서 봉사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隋書』 권41 「蘇威傳」: 1184).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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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2)
楊素(?∼606): 隋代의 大臣으로 字는 處道였고, 弘農郡 華陰(지금 陝西省 華陽) 사람이었다. 北周시기에 군공으로 淸河縣子, 成安縣公이 되었다가 아버지의 작을 이어 臨貞縣公가 되었다. 楊堅이 丞相이 되자 徐州總管으로 임명되고 淸河郡公으로 책봉되었다. 開皇 4년(584)에 御史大夫 信州總管이 되었다. 이후 陳나라를 정벌할 때 行軍元帥가 되어 水軍을 대파하고 郢國公으로 봉해졌다가 趙國公으로 다시 봉해졌다. 이후 陳나라를 모두 평정한 이후에는 行軍總管으로 突厥에 대해 598, 600, 601년에 세 차례 걸쳐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尙書右僕射와 左僕射를 역임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이후 太子 楊勇을 폐위시키고 煬帝를 즉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해 尙書令이 되었다. 大業 2년(606)에 司徒가 되어 楚公으로 책봉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隋書』 권48 「楊素傳」: 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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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3)
李徹(?∼599): 北周, 隋代의 將軍으로 字는 廣達이었고, 朔方 巖綠(지금 內蒙古自治區 烏審旗 남쪽) 사람이었다. 李和의 아들로 성격이 강직하고 무예에 뛰어났다. 北周시대에 宇文護와 가까워 殿中司馬가 되었고, 이후 奉車都尉 車騎大將軍 儀同三司가 되었다. 武帝시기에 吐谷渾을 공격한 공으로 同昌縣男의 작을 받았다. 北齊를 여러 번 격파해 蔡陽縣公이 되었다. 隋代에 左武衛將軍이 되어 晉王府軍事를 맡아 齊安郡公이 되었다. 沙鉢略可汗을 격파해 安道郡公 柱國이 되었다. 이후에 揚州總管司馬 德廣郡公이 되었다가 城陽郡公으로 옮겼다. 高潁과 친하다는 이유로 文帝의 미움을 사서 죽임을 당했다(『隋書』 권54 「李徹傳」: 1367).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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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7)
蔚州: 北魏 永安 연간에 懷荒(지금 河北省 張北縣)과 御夷(지금 赤城縣 북쪽) 두 곳의 鎭에 설치되었다. 그 다음에 치소를 지금 山西省 平遙縣 서북쪽에 옮겼고, 北周시대에 靈丘縣(지금 山西省 靈丘縣)으로 옮겼다가 隋 大業 연간에 폐지되었다. 唐 武德 6년(623)에 다시 설치되어 치소를 陽曲縣(지금 山西省 太原市 북쪽 陽曲鎭)에 두었다가 이듬해 繁畤縣(지금 繁畤縣 서쪽)으로 옮겼다. 武德 8년(625)에 秀容縣 북쪽 恒州城(지금 忻州市 서북쪽)으로 치소를 옮겼다. 貞觀 5년(631)에 치소를 靈丘縣으로 옮겼고 開元 초에 다시 安邊縣(지금 河北省 蔚縣)으로 옮겼다.
- 각주 018)
- 각주 019)
- 각주 020)
색인어
- 이름
- 돌리[가한], 안의공주(安義公主), 우홍, 소위(蘇威), 곡률효경(斛律孝卿), 돌리[가한], 옹우려, 염간, 촉왕(蜀王) [양]수(楊秀), 한왕(漢王) [양]량(楊諒), 고경, 왕찰(王察), 조중경(趙仲卿), 양소(楊素), 이철(李徹), 한승수(韓僧壽), 연영(燕榮), 옹우려, 점궐(玷厥), 염간, 황하, 염간, 장손성(長孫晟), 염간, 옹우려, 인두특근(因頭特勤), 염간, 옹우려, 도속륙(都速六), 돌리[가한], 염간, 도속륙
- 지명
- 돌궐[北夷], 돌궐, [어]도근[산](於都斤山), 영주도(靈州道), 삭주도(朔州道), 영주, 유주, 울주(蔚州), 수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