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개황 17년 돌리가한에게 안의공주(安義公主)를 시집보내 후대하자 옹우려가 조공을 끊고 침입하니 황제가 돌궐을 공격하도록 명령함

  • 국가
    돌궐(突厥)
[개황] 17년(597) 돌리[가한]이 사신을 보내 공주를 맞이하려고 하니 황제가 [그의 사신을] 태상[시](太常寺)에 머무르게 하고 [그들에게] 육례(六禮)주 001
각주 001)
六禮는 혼인 과정의 여섯 가지 禮儀를 말하는데, 納采·問名·納吉·納徵·請期·親迎이 그것이다.
닫기
를 가르쳐 종실의 딸 안의공주(安義公主) 주 002
각주 002)
安義公主: 隋나라 종실의 여자로 開皇 17년(597)에 突利可汗 染干에게 시집을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隋書』 권51 「長孫晟傳」: 1333). 혹 義安公主로 기록되기도 하나 安義公主가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닫기
를 [돌리가한에게] 시집보냈다. 황제가 돌궐[北夷]을 이간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특별히 그에게 예물로 후하게 대하고 우홍, 소위(蘇威),주 003
각주 003)
蘇威(540∼621): 北周, 隋代의 관리로 字는 無畏였고, 京兆府 武功縣(지금 陝西省 武功縣) 사람이었다. 蘇綽의 아들로 美陽縣公의 작을 이어받았다. 北周시기에 宇文護에게 우대를 받아 新興公主와 결혼을 했으나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을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車騎大將軍 懷道縣公이 되었다. 武帝시기에 稍伯下大夫가 되었고, 隋 文帝가 그를 太子少保로 발탁했다. 아버지는 邳國公이 되었다. 納言, 民部尙書, 大理卿, 京朝尹, 御史大夫, 刑部尙書, 吏部尙書, 尙書右僕射, 太常卿, 右御衛大將軍 등이 되었다. 煬帝時期에 寧陵侯, 그 다음에 房公으로 봉해졌다. 煬帝 이후에 宇文化及, 李密, 趙王 侗, 王世充 등에게서 봉사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隋書』 권41 「蘇威傳」: 1184).
닫기
곡률효경(斛律孝卿) 주 004
각주 004)
斛律孝卿: 北齊의 大臣으로 일명 斛斯孝卿이라고도 한다. 太安(치소가 지금 山西省 西寧武) 사람이었다. 武平(570∼576) 말기에 侍中 開府儀同三司 尙書令이 되었고, 義寧王으로 책봉되었다. 군정을 장악하고 後主가 幼主에게 禪讓하는 일을 맡았다. 北周가 北齊를 멸망시킨 다음 武帝에게 투항해 納言上士가 되었다. 隋 開皇시기에 太府卿에 올랐고 民部尙書가 되었다가 죽었다(『北齊書』 권20 「斛律孝卿傳」: 267).
닫기
등을 사신으로 삼아 계속 보내니 돌궐 역시 앞뒤로 사신을 보내 370 무리가 조정에 들어왔다. 돌리[가한]은 본래 북방에 살고 있었는데, 공주를 얻게 되었기 때문에 남쪽 [어]도근[산](於都斤山) 주 005
각주 005)
저본에 “度斤”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於都斤山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於都斤’은 突厥 可汗의 可汗庭이 위치한 ‘외튀켄’의 음사이다.
닫기
의 옛 진(鎭)으로 옮겨오자 [황제가] 아주 후하게 포상을 했다. [그러자 도람가한] 옹우려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대가한(大可汗)주 006
각주 006)
大可汗: 突厥帝國 전체를 통솔하는 可汗을 의미하는 것으로 東, 西, 南, 北의 小可汗과 비교되는 최고의 君主임을 나타냈다. 그리고 突厥이 東西로 분열된 이후에 西突厥에서도 大可汗을 칭하면서 그와 상응하는 존재임을 주장했다.
닫기
인데, 오히려 [어찌] 염간만 못한 [대접을 받는]다는 말이냐!” 이에 [옹우려가] 마침내 조공을 끊고 빈번히 변경을 공격했다.
[개황] 18년(598)에 [황제가] 촉왕(蜀王) [양]수(楊秀) 주 007
각주 007)
楊秀(573∼618): 隋 文帝의 넷째 아들이었다. 開皇 원년(581)에 越王이 되었다가 바로 蜀王이 되었다. 開皇 2년(582)에 上柱國 西南道行臺尙書令이 되었다. 12년(592)에 다시 內史令 右領軍大將軍이 되어 蜀에 머물렀다. 사치를 좋아해 車馬의 복식을 皇帝처럼 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미움을 샀다. 太子 勇이 폐위된 것에 불만을 갖자 煬帝가 그에게 죄를 물어 仁壽 2년(602) 庶人으로 삼았다. 義寧 2년(618)에 宇文化及에게 살해되었다(『隋書』 권45 「文四子 庶人秀傳」: 1241).
닫기
에게 영주도(靈州道) 주 008
각주 008)
靈州: 北魏 孝昌 연간에 설치되었고, 치소는 舊薄骨律鎭에 있었다. 北周 시기에 回樂縣을 설치해 州의 치소로 삼았다. 隋 大業 3년(607)에 靈武郡으로 바뀌었다가 唐 武德 원년(618)에 靈州라고 바뀌었다. 관할 구역은 지금 寧夏回族自治區 中衛, 中寧縣 이북 지역이었다. 開元 이후에 朔方節度使의 관할 하에 있었다. 天寶 원년(742)에 다시 靈武郡이 되었다가 乾元 원년(758)에 다시 靈州로 환원되었다.
닫기
로 나가 [돌궐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듬해(599) 또 한왕(漢王) [양]량(楊諒) 주 009
각주 009)
楊諒: 隋 文帝의 다섯째 아들로 字는 德章이었다. 다른 이름은 杰이었다. 開皇 원년(581)에 漢王이 되었고, 17년에 幷州總管으로 나아갔다. 煬帝가 즉위한 이후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해 庶人이 되었다가 유폐되어 죽었다(『隋書』 권45 「文四子 庶人諒傳」: 1244).
닫기
을 원수로 삼고, 좌복야 고경에게 장군 왕찰(王察)과 상주국 조중경(趙仲卿) 주 010
각주 010)
趙仲卿(542∼605): 隋代 將軍으로 天水郡 隴西(지금 甘肅省 隴西) 사람이었다. 北周時代에 大將軍이 되어 長垣縣公으로 책봉되었다. 이후에 河北郡公으로 작을 받고 朔州總管 司農卿이 되었다. 변경에 屯田을 설치하고 突厥을 여러 차례 정벌해 공을 세웠다(『隋書』 권74 「酷吏 趙仲卿傳」: 1696).
닫기
을 이끌고 함께 삭주도(朔州道) 주 011
각주 011)
朔州: 北齊 天保 6년(555)에 설치되었고, 치소는 新城縣(지금 山西省 朔州市 서남쪽)에 있었다. 天保 8년(557)에 치소를 招遠縣(隋代에 善陽縣으로 개칭되었는데, 지금의 朔州市)으로 옮겼다. 隋 大業 3년(607)에 馬邑郡으로 바뀌었다가 唐 武德 4년(621)에 朔州가 되었다. 天寶 원년(742)에 馬邑郡으로 바꾸었다가 乾元 원년(758)에 朔州로 환원되었다. 관할 구역은 지금 山西省 朔州市와 應縣, 山陽, 神池, 五寨, 偏關, 河曲縣 등지였다.
닫기
에서 나아가고, 우복야 양소(楊素) 주 012
각주 012)
楊素(?∼606): 隋代의 大臣으로 字는 處道였고, 弘農郡 華陰(지금 陝西省 華陽) 사람이었다. 北周시기에 군공으로 淸河縣子, 成安縣公이 되었다가 아버지의 작을 이어 臨貞縣公가 되었다. 楊堅이 丞相이 되자 徐州總管으로 임명되고 淸河郡公으로 책봉되었다. 開皇 4년(584)에 御史大夫 信州總管이 되었다. 이후 陳나라를 정벌할 때 行軍元帥가 되어 水軍을 대파하고 郢國公으로 봉해졌다가 趙國公으로 다시 봉해졌다. 이후 陳나라를 모두 평정한 이후에는 行軍總管으로 突厥에 대해 598, 600, 601년에 세 차례 걸쳐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尙書右僕射와 左僕射를 역임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이후 太子 楊勇을 폐위시키고 煬帝를 즉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해 尙書令이 되었다. 大業 2년(606)에 司徒가 되어 楚公으로 책봉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隋書』 권48 「楊素傳」: 1281).
닫기
에게 주국 이철(李徹) 주 013
각주 013)
李徹(?∼599): 北周, 隋代의 將軍으로 字는 廣達이었고, 朔方 巖綠(지금 內蒙古自治區 烏審旗 남쪽) 사람이었다. 李和의 아들로 성격이 강직하고 무예에 뛰어났다. 北周시대에 宇文護와 가까워 殿中司馬가 되었고, 이후 奉車都尉 車騎大將軍 儀同三司가 되었다. 武帝시기에 吐谷渾을 공격한 공으로 同昌縣男의 작을 받았다. 北齊를 여러 번 격파해 蔡陽縣公이 되었다. 隋代에 左武衛將軍이 되어 晉王府軍事를 맡아 齊安郡公이 되었다. 沙鉢略可汗을 격파해 安道郡公 柱國이 되었다. 이후에 揚州總管司馬 德廣郡公이 되었다가 城陽郡公으로 옮겼다. 高潁과 친하다는 이유로 文帝의 미움을 사서 죽임을 당했다(『隋書』 권54 「李徹傳」: 1367).
닫기
한승수(韓僧壽) 주 014
각주 014)
韓僧壽(548∼612): 北周, 隋代의 將軍으로 字는 玄慶이었고, 韓壽라고도 불렸다. 河南 東垣(河南省 新安 동쪽) 사람으로 韓擒虎의 동생이었다. 용맹하기로 유명했다. 北周 武帝시기에 侍伯中旅下大夫이 되었다. 尉迟迥의 반란을 진압하고 大將軍 昌樂公으로 책봉되었다. 開皇 초에 安州, 熊州, 蔚州 등의 刺史를 거쳤고 廣陵郡公의 작을 받았다. 突厥을 격파해 上柱國 江都郡公이 되었다. 煬帝가 즉위한 이후에 新蔡郡公이 되었다가 京師에서 죽었다(『隋書』 권52 「韓僧壽傳」: 1342).
닫기
를 이끌고 [함께] 영주에서 나아가고, 상주국 연영(燕榮) 주 015
각주 015)
燕榮(?∼603): 隋代 將軍으로 字는 貴公이었고, 華陰郡 弘農(지금 河南省 靈寶) 사람이었다. 北周시기에 開府儀同三司가 되었고 高邑縣公으로 책봉되었다. 隋代에는 大將軍 晉州刺史가 되어 落叢郡公으로 책봉되었다. 突厥을 격파한 공으로 上柱國 靑州總管이 되었고, 陳을 정벌한 공으로 右武侯將軍이 되었다가 幽州總管으로 올랐다. 성격이 엄격해 酷吏로 불렸다(『隋書』 권74 「燕榮傳」: 1694).
닫기
에게 유주에서 나아가 [돌궐을] 공격하게 했다. 옹우려가 [서돌궐의] 점궐(玷厥) 주 016
각주 016)
西突厥의 達頭可汗을 지칭한다. 玷厥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한 것은 그를 비하하기 위함이었다.
닫기
과 [같이] 군대를 일으켜 염간을 공격해 그의 형제와 아들, 조카를 모두 죽이고 마침내 황하를 건너 울주(蔚州) 주 017
각주 017)
蔚州: 北魏 永安 연간에 懷荒(지금 河北省 張北縣)과 御夷(지금 赤城縣 북쪽) 두 곳의 鎭에 설치되었다. 그 다음에 치소를 지금 山西省 平遙縣 서북쪽에 옮겼고, 北周시대에 靈丘縣(지금 山西省 靈丘縣)으로 옮겼다가 隋 大業 연간에 폐지되었다. 唐 武德 6년(623)에 다시 설치되어 치소를 陽曲縣(지금 山西省 太原市 북쪽 陽曲鎭)에 두었다가 이듬해 繁畤縣(지금 繁畤縣 서쪽)으로 옮겼다. 武德 8년(625)에 秀容縣 북쪽 恒州城(지금 忻州市 서북쪽)으로 치소를 옮겼다. 貞觀 5년(631)에 치소를 靈丘縣으로 옮겼고 開元 초에 다시 安邊縣(지금 河北省 蔚縣)으로 옮겼다.
닫기
까지 들어왔다. 염간은 밤중에 다섯 명의 기병과 수나라 사신 장손성(長孫晟)과 함께 조정에 귀순했다. 황제가 염간에게 옹우려의 사자 인두특근(因頭特勤) 주 018
각주 018)
因頭特勤: 고대 투르크어로 ‘이둑 테긴(Ïduq tegin)’의 음사로 추정된다. 都藍可汗이 파견한 사신인데, 特勤의 지위에 있었다는 점에서 宗室의 일원으로 보이나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닫기
과 서로 변론을 하도록 시켰는데, 염간의 말이 맞자 황제가 바로 [그를] 후하게 대우했다. 옹우려의 동생 도속륙(都速六) 주 019
각주 019)
都速六: 다른 기록에는 ‘郁達六’이라고 되어 있는데, 고대 투르크어로는 ‘튀쉬룩(Tüshluk)’의 음사로 추정된다. 都藍可汗의 동생인데,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종실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 隋朝에 내부했다고 한다.
닫기
도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버리고 돌리[가한] 주 020
각주 020)
染干 즉, 啓民可汗을 지칭한다.
닫기
과 함께 조정에 귀순하니 황제가 기뻐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염간도속륙과 함께 도박놀이[摴蒲]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차차 [그들에게] 보물을 주어 그 마음을 위로하는데 쓰도록 했다.

  • 각주 001)
    六禮는 혼인 과정의 여섯 가지 禮儀를 말하는데, 納采·問名·納吉·納徵·請期·親迎이 그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安義公主: 隋나라 종실의 여자로 開皇 17년(597)에 突利可汗 染干에게 시집을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隋書』 권51 「長孫晟傳」: 1333). 혹 義安公主로 기록되기도 하나 安義公主가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3)
    蘇威(540∼621): 北周, 隋代의 관리로 字는 無畏였고, 京兆府 武功縣(지금 陝西省 武功縣) 사람이었다. 蘇綽의 아들로 美陽縣公의 작을 이어받았다. 北周시기에 宇文護에게 우대를 받아 新興公主와 결혼을 했으나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을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車騎大將軍 懷道縣公이 되었다. 武帝시기에 稍伯下大夫가 되었고, 隋 文帝가 그를 太子少保로 발탁했다. 아버지는 邳國公이 되었다. 納言, 民部尙書, 大理卿, 京朝尹, 御史大夫, 刑部尙書, 吏部尙書, 尙書右僕射, 太常卿, 右御衛大將軍 등이 되었다. 煬帝時期에 寧陵侯, 그 다음에 房公으로 봉해졌다. 煬帝 이후에 宇文化及, 李密, 趙王 侗, 王世充 등에게서 봉사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隋書』 권41 「蘇威傳」: 1184).
     바로가기
  • 각주 004)
    斛律孝卿: 北齊의 大臣으로 일명 斛斯孝卿이라고도 한다. 太安(치소가 지금 山西省 西寧武) 사람이었다. 武平(570∼576) 말기에 侍中 開府儀同三司 尙書令이 되었고, 義寧王으로 책봉되었다. 군정을 장악하고 後主가 幼主에게 禪讓하는 일을 맡았다. 北周가 北齊를 멸망시킨 다음 武帝에게 투항해 納言上士가 되었다. 隋 開皇시기에 太府卿에 올랐고 民部尙書가 되었다가 죽었다(『北齊書』 권20 「斛律孝卿傳」: 267).
     바로가기
  • 각주 005)
    저본에 “度斤”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於都斤山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於都斤’은 突厥 可汗의 可汗庭이 위치한 ‘외튀켄’의 음사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大可汗: 突厥帝國 전체를 통솔하는 可汗을 의미하는 것으로 東, 西, 南, 北의 小可汗과 비교되는 최고의 君主임을 나타냈다. 그리고 突厥이 東西로 분열된 이후에 西突厥에서도 大可汗을 칭하면서 그와 상응하는 존재임을 주장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楊秀(573∼618): 隋 文帝의 넷째 아들이었다. 開皇 원년(581)에 越王이 되었다가 바로 蜀王이 되었다. 開皇 2년(582)에 上柱國 西南道行臺尙書令이 되었다. 12년(592)에 다시 內史令 右領軍大將軍이 되어 蜀에 머물렀다. 사치를 좋아해 車馬의 복식을 皇帝처럼 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미움을 샀다. 太子 勇이 폐위된 것에 불만을 갖자 煬帝가 그에게 죄를 물어 仁壽 2년(602) 庶人으로 삼았다. 義寧 2년(618)에 宇文化及에게 살해되었다(『隋書』 권45 「文四子 庶人秀傳」: 1241).
     바로가기
  • 각주 008)
    靈州: 北魏 孝昌 연간에 설치되었고, 치소는 舊薄骨律鎭에 있었다. 北周 시기에 回樂縣을 설치해 州의 치소로 삼았다. 隋 大業 3년(607)에 靈武郡으로 바뀌었다가 唐 武德 원년(618)에 靈州라고 바뀌었다. 관할 구역은 지금 寧夏回族自治區 中衛, 中寧縣 이북 지역이었다. 開元 이후에 朔方節度使의 관할 하에 있었다. 天寶 원년(742)에 다시 靈武郡이 되었다가 乾元 원년(758)에 다시 靈州로 환원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9)
    楊諒: 隋 文帝의 다섯째 아들로 字는 德章이었다. 다른 이름은 杰이었다. 開皇 원년(581)에 漢王이 되었고, 17년에 幷州總管으로 나아갔다. 煬帝가 즉위한 이후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해 庶人이 되었다가 유폐되어 죽었다(『隋書』 권45 「文四子 庶人諒傳」: 1244).
     바로가기
  • 각주 010)
    趙仲卿(542∼605): 隋代 將軍으로 天水郡 隴西(지금 甘肅省 隴西) 사람이었다. 北周時代에 大將軍이 되어 長垣縣公으로 책봉되었다. 이후에 河北郡公으로 작을 받고 朔州總管 司農卿이 되었다. 변경에 屯田을 설치하고 突厥을 여러 차례 정벌해 공을 세웠다(『隋書』 권74 「酷吏 趙仲卿傳」: 1696).
     바로가기
  • 각주 011)
    朔州: 北齊 天保 6년(555)에 설치되었고, 치소는 新城縣(지금 山西省 朔州市 서남쪽)에 있었다. 天保 8년(557)에 치소를 招遠縣(隋代에 善陽縣으로 개칭되었는데, 지금의 朔州市)으로 옮겼다. 隋 大業 3년(607)에 馬邑郡으로 바뀌었다가 唐 武德 4년(621)에 朔州가 되었다. 天寶 원년(742)에 馬邑郡으로 바꾸었다가 乾元 원년(758)에 朔州로 환원되었다. 관할 구역은 지금 山西省 朔州市와 應縣, 山陽, 神池, 五寨, 偏關, 河曲縣 등지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2)
    楊素(?∼606): 隋代의 大臣으로 字는 處道였고, 弘農郡 華陰(지금 陝西省 華陽) 사람이었다. 北周시기에 군공으로 淸河縣子, 成安縣公이 되었다가 아버지의 작을 이어 臨貞縣公가 되었다. 楊堅이 丞相이 되자 徐州總管으로 임명되고 淸河郡公으로 책봉되었다. 開皇 4년(584)에 御史大夫 信州總管이 되었다. 이후 陳나라를 정벌할 때 行軍元帥가 되어 水軍을 대파하고 郢國公으로 봉해졌다가 趙國公으로 다시 봉해졌다. 이후 陳나라를 모두 평정한 이후에는 行軍總管으로 突厥에 대해 598, 600, 601년에 세 차례 걸쳐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尙書右僕射와 左僕射를 역임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이후 太子 楊勇을 폐위시키고 煬帝를 즉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해 尙書令이 되었다. 大業 2년(606)에 司徒가 되어 楚公으로 책봉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隋書』 권48 「楊素傳」: 1281).
     바로가기
  • 각주 013)
    李徹(?∼599): 北周, 隋代의 將軍으로 字는 廣達이었고, 朔方 巖綠(지금 內蒙古自治區 烏審旗 남쪽) 사람이었다. 李和의 아들로 성격이 강직하고 무예에 뛰어났다. 北周시대에 宇文護와 가까워 殿中司馬가 되었고, 이후 奉車都尉 車騎大將軍 儀同三司가 되었다. 武帝시기에 吐谷渾을 공격한 공으로 同昌縣男의 작을 받았다. 北齊를 여러 번 격파해 蔡陽縣公이 되었다. 隋代에 左武衛將軍이 되어 晉王府軍事를 맡아 齊安郡公이 되었다. 沙鉢略可汗을 격파해 安道郡公 柱國이 되었다. 이후에 揚州總管司馬 德廣郡公이 되었다가 城陽郡公으로 옮겼다. 高潁과 친하다는 이유로 文帝의 미움을 사서 죽임을 당했다(『隋書』 권54 「李徹傳」: 1367).
     바로가기
  • 각주 014)
    韓僧壽(548∼612): 北周, 隋代의 將軍으로 字는 玄慶이었고, 韓壽라고도 불렸다. 河南 東垣(河南省 新安 동쪽) 사람으로 韓擒虎의 동생이었다. 용맹하기로 유명했다. 北周 武帝시기에 侍伯中旅下大夫이 되었다. 尉迟迥의 반란을 진압하고 大將軍 昌樂公으로 책봉되었다. 開皇 초에 安州, 熊州, 蔚州 등의 刺史를 거쳤고 廣陵郡公의 작을 받았다. 突厥을 격파해 上柱國 江都郡公이 되었다. 煬帝가 즉위한 이후에 新蔡郡公이 되었다가 京師에서 죽었다(『隋書』 권52 「韓僧壽傳」: 1342).
     바로가기
  • 각주 015)
    燕榮(?∼603): 隋代 將軍으로 字는 貴公이었고, 華陰郡 弘農(지금 河南省 靈寶) 사람이었다. 北周시기에 開府儀同三司가 되었고 高邑縣公으로 책봉되었다. 隋代에는 大將軍 晉州刺史가 되어 落叢郡公으로 책봉되었다. 突厥을 격파한 공으로 上柱國 靑州總管이 되었고, 陳을 정벌한 공으로 右武侯將軍이 되었다가 幽州總管으로 올랐다. 성격이 엄격해 酷吏로 불렸다(『隋書』 권74 「燕榮傳」: 1694).
     바로가기
  • 각주 016)
    西突厥의 達頭可汗을 지칭한다. 玷厥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한 것은 그를 비하하기 위함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7)
    蔚州: 北魏 永安 연간에 懷荒(지금 河北省 張北縣)과 御夷(지금 赤城縣 북쪽) 두 곳의 鎭에 설치되었다. 그 다음에 치소를 지금 山西省 平遙縣 서북쪽에 옮겼고, 北周시대에 靈丘縣(지금 山西省 靈丘縣)으로 옮겼다가 隋 大業 연간에 폐지되었다. 唐 武德 6년(623)에 다시 설치되어 치소를 陽曲縣(지금 山西省 太原市 북쪽 陽曲鎭)에 두었다가 이듬해 繁畤縣(지금 繁畤縣 서쪽)으로 옮겼다. 武德 8년(625)에 秀容縣 북쪽 恒州城(지금 忻州市 서북쪽)으로 치소를 옮겼다. 貞觀 5년(631)에 치소를 靈丘縣으로 옮겼고 開元 초에 다시 安邊縣(지금 河北省 蔚縣)으로 옮겼다.
     바로가기
  • 각주 018)
    因頭特勤: 고대 투르크어로 ‘이둑 테긴(Ïduq tegin)’의 음사로 추정된다. 都藍可汗이 파견한 사신인데, 特勤의 지위에 있었다는 점에서 宗室의 일원으로 보이나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바로가기
  • 각주 019)
    都速六: 다른 기록에는 ‘郁達六’이라고 되어 있는데, 고대 투르크어로는 ‘튀쉬룩(Tüshluk)’의 음사로 추정된다. 都藍可汗의 동생인데,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종실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 隋朝에 내부했다고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20)
    染干 즉, 啓民可汗을 지칭한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돌리[가한], 안의공주(安義公主), 우홍, 소위(蘇威), 곡률효경(斛律孝卿), 돌리[가한], 옹우려, 염간, 촉왕(蜀王) [양]수(楊秀), 한왕(漢王) [양]량(楊諒), 고경, 왕찰(王察), 조중경(趙仲卿), 양소(楊素), 이철(李徹), 한승수(韓僧壽), 연영(燕榮), 옹우려, 점궐(玷厥), 염간, 황하, 염간, 장손성(長孫晟), 염간, 옹우려, 인두특근(因頭特勤), 염간, 옹우려, 도속륙(都速六), 돌리[가한], 염간, 도속륙
지명
돌궐[北夷], 돌궐, [어]도근[산](於都斤山), 영주도(靈州道), 삭주도(朔州道), 영주, 유주, 울주(蔚州), 수나라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개황 17년 돌리가한에게 안의공주(安義公主)를 시집보내 후대하자 옹우려가 조공을 끊고 침입하니 황제가 돌궐을 공격하도록 명령함 자료번호 : jo.k_0013_0084_0010_0220